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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하는 사람(디모데후서 1:15-18)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두 친구가 함께 길을 가다가 깊은 산 속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나운 큰 곰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위험에 빠지자 둘 중의 하나는 잽싸게 혼자서 나무 위에 올라가 버렸습니다. 다른 한 친구는 몸이 좀 둔해서 나무를 탈 줄 몰랐습니다. 도망을 쳐보려고 했지만 곰하고는 도저히 경주 상대가 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꼼짝없이 잡혀 먹힐 신세입니다. 그는 할 수 없이 땅에 넙죽 엎드려 죽은 척하였습니다. 곰이 다가와 이리저리 집적거리는데도 그저 죽은 척하고 제대로 숨도 쉬지 않았습니다. 혓바닥으로 얼굴을 핥아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곰은 아무리 집적거려 보아도 사람이 꼼짝도 안 하니까 정말 죽은 줄로 알았나봅니다. 그러다가 '시체는 먹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내버려두고 가버렸습니다 나무 위에서 곰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친구가 다시 내려와서 죽은 척하였던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아까 곰이 자네한테 귓속말로 뭐라고 하는 것 같던데 대체 무슨 말을 하던가?" 친구는 그 친구를 한번 힐끗 보더니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위험한 때에 저 혼자 의리 없이 도망가는 친구와는 절대로 사귀지 말라고 하였다네."
인간관계라는 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다른 이들을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는 것 자체가 아주 곤혹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나면 그저 반갑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생동안 다시는 안 보았으면'하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안보면 못 견딜 정도로 다시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은 그러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대해주었으면 저렇게 대해주었으면 하고 바라거나 좀더 친절하고 유쾌하게 나를 대해주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린아이에게도 똑같은 바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정작 나는 남에게 유쾌한 사람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기분 나쁜 사람이 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반가운 사람인지 아니면 영 불쾌한 사람인지, 내가 남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인지 아니면 남을 낙심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에는 아예 무관심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월리엄 제이 레일리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에 「성공적인 인간관계(Successful Relationship)」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인간관계를 네 가지의 의식적 차원에서 구분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closed mind level'--폐쇄적인 사람입니다. 간혹 보면, 마음을 꽉 닫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말을 듣든지 가리지 않고 '쳇' '흥'하면서 도대체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한마디 듣고 나서는 '웃기고 있네' 합니다. 도무지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closed mind, 마음이 완전히 닫힌, 이 같은 폐쇄적 심리상태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듭니다.
두 번째는 'open mind level'입니다. 'show me level'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유형의 사람은 마음이 열려 있기는 합니다.
남의 말을 들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하며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듣기는 듣는데 물어보는 것이 많습니다. 묻는 것이 지나치다못해 무슨 취조 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또 그렇게 묻는 것이 마치 사랑인 양 착각합니다. 이 역시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외출을 하거나 어디를 갈 때에 우연히 아는 사람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냥 "안녕하십니까?"라고 인사만 하면 좋은데 꼭 "어디 가십니까?"하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답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자네, 그것을 꼭 알아야 되겠나?"하고 반문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언뜻 보면 open mind요, 열린 것 같지만 그실 'show me'입니다. 자꾸 증거를 보여달라, 말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도 그리 바람직한 형은 못됩니다.
세 번째는 'confidence level'---이른바 '신뢰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협조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타당성 있기를 요구합니다. '왜 그럴 수 있느냐'하고 이유를 늘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 역시 그리 편안한 상대는 못됩니다.
네 번째의 유형은 'belief level'입니다. 완전히 '신앙형'입니다. 다시 영어로 말씀드리자면 'Anything you say is OK'--당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좋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고, 당신이 말하는 것은 다 사실이고, 당신이 옳다는 것은 내게도 옳다'고 믿습니다. 무슨 설명을 따로 할 필요도 없고 달리 물을 필요도 없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네 가지 유형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 남을 편안하게 하는 사람입니까? 한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전화 걸어야 할 것을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연락 없이 새벽 2시에 귀가한 남편이 있습니다. 이런 남편에게 위의 네 가지 유형의 아내들은 저마다 어떤 대응을 할 것 같습니까? 첫 번째 유형, 폐쇄적인 사람이라면 왜 늦었는지는 묻지도 않고 욕부터 할 것입니다 "그까짓 거짓말로 하는 변명은 들을 것도 없어요. 아예 말할 것조차 못된다구요. 당신은 아주 나쁜 사람이예요" 여러분, 여기에 대고 뭐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전혀 상대방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폐쇄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이렇게 늦도록 도대체 어디에 갔었어요?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했지요? 무슨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예요?"라고 자꾸만 물어봅니다. 깊은 관심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죄인 취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들을 다 설명해주려면 아주 힘이 듭니다. 혹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다시 상기하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기분 나쁜 노릇입니다. 좋은 얘기도 아닌 나쁜 얘기를 다시 해야 되니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이들을 아주 몹시도 불편하게 만듭니다. 세 번째, 신뢰형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에서 일을 너무 많이 시키는군요. 월급을 더 올려달라고 해야겠어요. 당신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하니까요."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이 경우도 사람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신앙형은 다릅니다. "여보, 피곤하시지요? 주무시기 전에 무엇 좀 잡수시겠어요?"하고 위로합니다. 더는 딴소리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이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주기를 원합니다. 내 인격, 내 마음, 내 말…… 내 모든 것을 무조건 전적으로 믿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남을 불신합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그것도 내 입장에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겠군요"하며 전적으로 상대방이 내 편에서 이해해주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나에 대하여 참아주기를 바랍니다. 모름지기 조급한 마음은 사람을 괴롭힙니다. 조급히 판단을 해서도 안되고 조급히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좀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일단 며칠동안은 지켜보고 그래도 정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혹 이해가 안되어도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겠지 여기며 깊이 인내하고 오래오래 참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참아주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남에게 조급합니다. 여기에도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15절)"---버렸다는 것은 누가 무슨 배신을 하고 어떻게 신앙을 버렸다는 유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누구와 뜻을 달리하였고 일을 달리하였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협력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나와 뜻을 달리하였다는 의미에서 '나를 버렸다'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울의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그들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다'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름을 들면서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16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유쾌하게 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네퓌크센'입니다. 영어로는 refresh---'신선하게 하다, 힘을 내게 하다, 용기를 북돋아주다'라는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기분좋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듯 사도 바울은 '오네시보로는 참으로 나를 유쾌하게 한 사람이었다'라고 그와의 인간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오네시보로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16,17절)" 바울이 감옥에 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자주 방문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갇혔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요, 순교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에는 그렇게 여겨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죄인으로 봅니다. 죄지은 것이 있으니 감옥에 갇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사도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바울 나름대로 무슨 잘못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오네시보로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은 바울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고 바울의 의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무 잘못도 없이 갇혀 있다'하고 진실을 인정해주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큰 강도사건의 주범으로, 이제 교도소에서 사형집행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예수 믿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종교에라도 귀의시켜보려고 노력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목사님도, 스님도, 수녀님들도 그 사형수를 만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만 그는 도무지 아무도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이건 누구건 일절 면회사절입니다. 평소에도 상스러운 욕을 해대고 미친 듯이 발악을 하는 아주 완악한 사형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의 여집사님 한 분이 이상하게도 그 마음에 이 사형수를 전도하고 싶어지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집사님은 매일같이 교도소에 찾아가 그 사람을 만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면회사절을 당할 뿐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여집사님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몇 통을 쓰든 따지지 않고 그저 열심히 써보냈습니다. 마침내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형수가 마음 문을 열고, 이 집사님을 만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나중에는 사형장에서까지 전도하는 철저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어떻게 하였기에 그 사형수가 마음 문을 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한마디의 말 때문입니다. 그 집사님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저는 재판 받는 당신의 모습을 줄곧 지켜보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강도사건의 공범자도 여럿 있었는데 의외로 당신은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죄는 다 내게 있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강제로 시킨 것이오. 내가 죽일 놈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한테 이끌려 할 수 없이 죄를 저지른 것이니 다 놓아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었답니다. 어쩌다 당신이 그런 사건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분명히 당신은 본심이 착한 사람이요,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 이 한마디가 사형수의 완악한 마음을 열게 했던 것입니다. 진실을 알아주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비록 실수는 했었지만 본디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인정해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들에 대하여 함부로 이러쿵저러쿵합니다. "그 사람, 원래가 못돼먹었어. 족보로 따져보아도 형편없지. 아주 피가 더러운 집안이더구만……" 이런 소리가 사람을 얼마나 죽이는 일인지 아십니까? 세상에 원천적으로 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바울을 보고 죄인이라고, 바울은 잘못되어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오네시보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을 자주자주 방문하여 바울을 위로합니다. 오히려 그 고난 당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하였습니다.
아비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에서 수련 수녀들을 선발할 때에 이러한 선발기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보지만 합격의 기준은 간단합니다. 그저 잘 웃고, 잘먹고, 잘 자는 사람을 선발하였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잘 웃는 사람이 어려운 시험도 이길 수 있고 잘 웃는 사람이 남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웃음은 우리에게 건강한 태도를 지니게 하고, 'a sense of belonging(소속감)'을 가지게 합니다. 공감대를 형성하고 의심과 불신을 제거합니다. 연대감을 가지게 합니다. 또한 사랑을 시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적어도 웃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됩니다. 이렇듯 웃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큰 구제가 됩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위로할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 해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유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을 유쾌하게 할 수 있고 남을 선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웃는 사람입니다. 또한 잘먹는 사람은 건강합니다. 내가 건강해야 남에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잘 자는 사람은 심각한 죄를 가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심각한 죄를 지어 항상 찌푸리고 사는 사람은 남을 위로할 자격이 없습니다. 데레사 수녀가 잘 웃고, 잘먹고, 잘 자는 사람을 선발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잘 웃고, 잘먹고, 잘 자는, 그런 사람이 잘믿는 사람입니다.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17절)"라고, 오네시보로는 행동적으로 위로했다는 것을 본문은 말씀합니다. 말로만 위로한 것이 아닙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을 합니다. 자주자주 찾아뵈어 바울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결코 무슨 타산적인 생각에서가 아닙니다. 무엇을 얻자고 하는 일도 아니고 인간적으로 무슨 기대를 두고 하는 일도 아닙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진실과 그 거룩한 희생에 동참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18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직접 '오네시보로가 얼마만큼 나를 섬겼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아코니아'를 의미합니다. '섬기다, 봉사하다'라는 뜻입니다. 보십시오. 봉사가 기쁨과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상대방을 유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섬기기는 하는데 억지로 하는 것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혹 여러분이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너희들이 내 속을 얼마나 썩였던지 이 머리 희어진 것 좀 보아라. 얼굴에 쪼글쪼글 주름살까지 잡혔구나." 여러분, 무심코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그 말을 어떻게 듣는지나 아십니까? '때가 되었으니까 머리가 희어지고 늙었으니까 당연히 주름이 생긴 것이지 우리가 무슨 상관이람'---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여기에 증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내가 너를 위해서 수고하는 것은 바로 나의 기쁨이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할 때에야 비로소 그 수고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낳았으니까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너를 위해 살았지" 따위의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 많은 수고가 말짱 헛것이 됩니다. 듣는 사람은 전혀 유쾌하지 못합니다. 반갑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보고 수고하라고 했나? 공치사는 왜 해?'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수고한다는 물리적 현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수고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기쁨을 가지고 자원적으로 자발적으로 섬길 때에, 그렇게 봉사할 때에 상대방을 유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득이하게, 의무적으로, 할 수 없어서 수고한 줄 알게 되면 그 인간관계는 헛것이 됩니다. 천만금이 오간다 하여도 유쾌하지 못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위로가 필요합니다, 내 진실을 인정받고 삼고 나와 같은 협력자가 있기를,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로가 있기를 바라기 이전에 내가 먼저 남을 유쾌하게 할 수 있고, 남을 기쁘게 할 수 있고, 남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러한 존재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떠합니까? 남에게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까, 해를 끼치고 있습니까? 남을 유쾌하게 하고 있습니까, 피곤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삶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습니까, 오히려 남을 실망케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물질의 문제도 아니고 무슨 재주의 있고 없음의 문제도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마땅한 것입니까?
여러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큰 일은 못한다 하더라도 늘 감사하며 살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큰 봉사는 못해도 내가 항상 즐겁게 살아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비록 내가 위대한 일은 못한다 하더라도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을 유쾌하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더욱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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