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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을 용납하라(요 18:1-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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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을 용납하라(18:1-1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지금까지 공부해 온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그들과 유월절 잔치인 성만찬 예식을 행하셨으며, 그리고는 긴 설교의 말씀(13-17)을 하셨고, 끝으로 기도로써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중요한 제사장의 중보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어 그 곳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미 결론이 났다고 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에서 이미 모든 것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다만 형식적인 절차와 과정으로써 집행되었을 뿐입니다.

여기서 다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요한복음의 기록 방법입니다. 이미 상권 서론에서 누누히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이 복음은 성경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것으로 보충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과의 중복을 피하려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생략되어 있고, 주로 사건이 의미하는 내용과 깊은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간 이야기에 대해서도 마태복음에서는 찬송을 부르며 올라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그저 들어갔다라고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른 복음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셨고, "아버지시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도록 해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내용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도에 대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다른 복음서에 없는 이야기들을 사도 요한은 목격자로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시작은 간단하게 예수께서 동산에 들어가셨다고 만 표현되어 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복음서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문제를 해결하는 깊은 기도를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기도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요 결론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복음사업을 시작하실 때도 광야에 나가 40일간 기도하심으로 시작하셨고, 생을 끝내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로 끝내셨습니다. 이 점을 의미 깊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유의해야 할 점은 이 동산은 예수께서 지금 처음으로 기도하신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잠깐 비추었지만 예수님은 종종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18:1-2) 유다가 안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때쯤이면 동산으로 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기도를 잘하지 않다가 일이 터지면 급해서 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던 분이 갑자기 나타나면, 그 기도 소리를 듣지 않아도 사고가 났음을 짐작케 합니다. 평상시에 편할 때는 마음대로 살다가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기도를 하게 되니, 사고가 나야 합니까? 안 나야 합니까? 매를 맞고 죽을 형편이 되어서 하는 기도는 수준이 낮은 기도입니다. 모든 일이 무사하고 편안할 때 문안드리는 5분의 기도가, 죽게 되어 밤새도록 하는 기도보다 훨씬 나은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께 문안을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편안할 때 문안을 드려야지 죽을 때가 되어서 돈 달라고 찾아오는 것은 불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무슨 소원이나 있어야 얼굴을 내민다면 얄밉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가 앞에 있기 때문에 특별히 이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으례껏 예루살렘에 오시면 저녁 식사 후에 동산으로 기도하시기 위해 가셨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이 때쯤이면 주님이 동산에 계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상 규례를 따라 기도하시고, 시간을 정해 기도하시며, 또한 위대한 일, 아름다운 일을 대하실 때마다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기도하는 장소의 문제입니다. 기도를 할 때 장소를 정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안방에서나 골방에서나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기도를 하여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그러나 특별한 기도는 일정한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속으로는 회당이나 성전에서 기도했습니다. , 회당이나 성전이 멀리 있을 때는 동산을 찾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냇가를 찾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좀 조용하고 한적한 장소를 택해서 구별된 장소에서, 구별된 마음으로 기도하려는 자세입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이지만 기도하기 위해 장소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한 사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음으로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도 요한의 의도는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와 신령한 용기입니다. 용기란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조금 무식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알고 생각이 깊으면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용기가 부족합니다. 다소 우직한 사람이 용기가 있어 보이는데, 사실은 모르는 용기는 만용으로, 진정한 용기가 아닙니다. 백 번, 천 번 잘 알고 그리고 용기를 낼 때, 그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다 아시고 이 동산에 들어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끝나면, 곧 가룟 유다가 올 것을 아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동산으로 가시지 않았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다 아시면서 장소를 바꾸지 않고 용기 있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증거하기를, 다 아시고 나갔으며, 아는 중에 십자가를 담대하게, 또는 용기 있게 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4절 이하 5절에 보면,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고 용감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봅니다. 누가복음 9:51에 보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했으니, 그 때부터 십자가에 대해 각오하셨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 동산에 들어오실 때도 이제는 마지막인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다음은 영적인 권위에 무서워하는 체포자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윗사람들의 명령에 따라 부득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으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 능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므로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더우기 예수께서 "누구를 찾느냐, 그가 내로라"고 담대하게 말씀하시는 그 권위 앞에서 그대로 땅에 엎드리고 맙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18:6) 비록 십자가는 지지만 비굴한 모습은 전혀 없이 당당하게 권세 있게 그들 앞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7-18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는 빌라도요, 가야바지만 그러나 내용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하셨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힘이 없어서나, 무능해서나, 불가피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원적으로 스스로 원해서 받은 것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십자가의 길을 갔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적인 권세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신앙으로 인해 가난해질 수도 있고 비난받을 수도 있으며 순교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더라도 영적인 권위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비굴해져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혹 약할 수는 있지만 비굴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담대하게 영적인 용기와 권세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피할 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스스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피하여 갈릴리로만 가셨어도 체포되지 않았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면 그들이 온다는 것을 다 아시면서 도전적으로 왜 가셨습니까? 오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 사랑으로 이 길을 택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 절박한 순간에 제자들을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여 함이러라."(18:8-9) 제자들의 길을 염려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당장은 비겁하게 도망가겠지만, 장차 앞으로는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며 순교할 제자들이었기에 무사히 가도록 부탁하신 것은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가장 절박한 순간에서도 자신의 고통은 제쳐 두고 제자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에도 제자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지만 나보다 먼저 상대방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죽어서라도 상대방에게 이롭게만 된다면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겁한 모습을 책망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를 체포했으면 제자들은 편안히 가도록 용납하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안전하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구심점을 자기에게서 옮겨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참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은 베드로가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내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18:10) 다른 복음서에서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갈 때에 예수께서 "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이제 곧 급박한 사정이 올 것이니 마음을 무장하라는 뜻인데,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여기 칼이 있다고 엉뚱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저들이 체포하러 오니,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이 때로구나" 하고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내려친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물론 목을 치려고 한 것이 그만 실수해서 귀가 떨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이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베드로야 이것까지 참으라"(22:51),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교훈을 하십니다.

끝까지 참으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제사장의 종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말고라고 이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은 목격자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는 시간에는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고서는 불평이나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성미급한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 : 11)고 자신의 결심을 내보이십니다. 필자는 자주 이 말씀을 되뇌이곤 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잔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싶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은 고통의 잔입니까? 내게 주신 그 고통이 어떤 것이든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라면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껏 기도하시고 얻은 응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민망하여 죽게 되었다고 고민한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수락하기로 한 결심, 즉 하나님께 대한 충성에는 변함이 없는데 구체적인 사건이 문제인 것입니다. 내일 아침 이렇게 죽어가는 이 사건이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알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흔히 추상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랑이요, 희생이요, 정의요, 자유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오늘 내가 이 길을 가야 하느냐 아니냐에 대해 결정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 닥쳐온 바로 이 구체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전적으로 위탁하시며 내일 아침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물으시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임을 응답 받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십자가를 자신에게 요구하고 계심을 확신하셨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것이라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순된 것이든, 부조리하든 간에 질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것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부조리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치 그 순간에는 진리와 정의가 다 무너지는 듯한 그러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받아들이시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흔히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입으로는 쉽게 말하지만 구체적인 사건에서는 내 뜻과 비슷할 때만 "아멘" 하고, 틀리면 변명이나 억지 해석을 해서 주님의 뜻을 내 뜻으로 돌리고 맙니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이 말씀은, 이제부터 내게 전개되는 모든 일에 대해 감사와 아멘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 돌리는 마음으로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께 완전히 위탁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죽기로 결심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면 비겁한 자가 되고 불안하지만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내 뜻을 포기하고 나면,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이 헌신이 있고서야 위대한 용기도 생기며 위대한 권세도 행사할 수 있고 엄청난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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