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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의 비유(마태복음25 : 31 - 46)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 마른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이 비유 역시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는 비유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며칠 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매우 심각하고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다는 전제하에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이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비유를 설명하고 있는 영역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이스라엘 목자들의 생활을 소재로 한 생생한 비유의 말씀이라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소재를 취하실 때 특별히 도시 중심적인 것에서 취하시지 않고 산과 들, 바닷가등 가장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많이 취하시던 중 이 목자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 소재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양과 염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풍속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마는 유목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친밀한 생활 풍속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키우는 것은 양입니다. 그러나 이 양을 키우기 위하여 몇 가지 같이 키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개입니다. 우리가 소위 세퍼드(Shepherd) 라고 하여 부르는 개가 있는데 사실 그 세퍼드라는 말은 목자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을 지키는 개에게 별명처럼 붙여진 이름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개를 한 마리 키워 놓으면 위험한 일을 당할 때 짓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여 양을 지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간혹 큰 목장에서는 나귀나 말을 같이 키우기도 합니다. 그것은 넓은 곳에서 많은 양을 돌보아야하는 경우에는 필요한 장비와 함께 빨리 움직여야하는 필요성이 있고 그런 때에는 기동성이 있는 나귀나 말을 타고 달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또 한가지 같이 키우는 것은 염소입니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양을 키우는 것인데 그 양들 곁에 염소 몇 마리를 반드시 곁들여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함께 키우다가도 어느 때에 가서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다룹니다. 아시다시피 양은 온순하기로 대표적인 동물입니다. 그리고 단순하며 기억력이 좋지 못하여 제집 하나도 제대로 찾아오지 못하는 동물입니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못살게 장난을 치더라도 물든가 떠받으며 덤벼드는 법이 없습니다. 비록 다른 짐승이 쳐들어온다 할찌라도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양입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말은 뒷발굽으로 찹니다. 그리고 소는 뿔로 떠받으며 개는 입으로 물어 찢습니다. 이렇게 모두들 자신을 방어도 하고 적을 공격도 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마는 양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참으로 온순한 동물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인내하고 순종을 잘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양이라 하더라도 목자가 앞에서 몇 마리만 인도를 하면 그대로 줄줄 목자를 따라서 다니는 것이 양의 특징인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염소는 거칠고 이기적입니다. 염소에게는 뿔이 있어 떠받는가 하면 나누어 먹지도 않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며 질투심이 강합니다. 이렇게 염소는 양에 비해 정반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른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이스라엘 목자들이 양을 치는 풍속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은 아가서 1 : 8에 기록된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는 말씀에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할 때 우선 먹이를 주었을 때의 문제입니다. 들에서 그냥 풀을 뜯어 먹을 때에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이 되던가하여 먹이를 나누어 주어야하는 경우 이 양들이 미련하여 한꺼번에 와하고 몰려드는 바람에 잘못하면 앞에 있는 몇 마리가 치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염소가 한 마리 있으면 그렇게 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있지 못하여 떠받아 이리 저리 흩으러 놓음으로 치어 죽는 일을 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날씨가 추울 때에는 양들이 한데 모여 서로 몸을 비비며 조여들게 되는데 이런 경우 역시 약한 것은 밟혀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염소 몇 마리를 같이 키우면 이 염소는 질투가 심한 것이어서 양들이 같이 모여있는 것을 보지 못하여 돌아다니며 들이받아 전부 흩으러 놓음으로 양들이 치어 죽는 것을 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들은 조그마한 저항도 못하는 완전 무방비 상태인 것에 비해 염소는 이리나 맹수 같은 것이 나타나면 죽을 때에는 죽더라도 일단한번 반항을 하기 때문에 다소간 방어도 된다는 것인데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염소를 양과 함께 키운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언제나 양과 염소가 같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들에서 풀을 뜯으며 목자의 뒤를 따라 다닐 때에는 같이 지내지만 대체로 우리에 들어갈 때에는 나누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구별이 되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들이 의인과 악인,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백성으로 엄연히 구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염소는 끝까지 염소입니다. 개꼬리 3년을 묻어 두어도 황모가 못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염소는 백년을 가도 염소일뿐 양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현재 양의 무리에 있을 뿐 본질적으로도 염소요 마지막에도 염소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가라지와 알곡이 밭에서 같이 자라고 있으나 알곡은 알곡이요 가라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지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롯 유다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가롯 유다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들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나 양과 염소가 따로 있어서 마지막 심판 날에는 분명하게 구분 되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강하게 말씀하시는 바는 예수님 자신이 심판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예수님이 친히 심판날에 그렇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호칭을 두고 생각해 보면 예수를 비롯하여 말씀, 메시야, 주, 그리스도 등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부른 호칭은 인자라는 말입니다. 이 인자라는 말은 성경에 무려 90여회나 나타나는 말로서 복음서에만 80여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딱 한번 스데반이 순교하는 순간 하늘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고 하신 것 외에 복음서에 기록된 전부가 예수님이 친히 자신을 가리켜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제자도 예수님을 향하여 "인자여!"하고 불러드린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결국은 3년을 가르쳐도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재판을 받으시는 가야바의 관정이나 빌라도의 법정에 선 마지막날까지 자신이 인자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인자에 대한 설명을 "전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역사의 끝에 구름을 타고 오셔서 온 인류를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말구유에 오신 예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오신 분, 그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나약한 예수, 희생적인 예수로만 생각하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결코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 친히 심판주로서 장차 역사를 심판하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이 비유를 통하여 엄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이십니다. 그는 선한 목자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장차 재림의 주로 오시는 그 날에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명확하게 구분하시는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염소를 구분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기 위하여 염소와도 같은 악인들을 구분하여 처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심판 받을 때의 그 기준이 마치 선행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가 싶다는 점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다선행인 바 이와 같은 일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선행들입니다. 저들은 본래 교육, 다시 말하면 우매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큰 선행으로 생각하며, 그 다음으로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아보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등을 생각하게 됩니다.
본문에 나열된 이와 같은 선행들이 자칫 하늘 나라에서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으며 "내가"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으며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하였습니까라고 물을 때에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 그 전체의 뜻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선행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중생한 심령들이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그러한 선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인간 스스로의 선행도 아니요 나를 위한 선행도, 저를 위한 선행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 행위의 문제입니다. 본문이 밝히는 바는 성경을 많이 안 다거나 신앙 문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많다거나 혹은 믿음의 연륜 같은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특별하다고 생각되었던 어떠한 직분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위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종교예식도 아니요, 종교적인 감정도 아니며, 종교적인 특별한 체험을 기준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행동적 신앙, 실천하는 신앙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4:2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는 것은 다시 말하여 사랑의 능력, 온유의 능력, 인내의 능력,헌신의 능력, 순교의 능력을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하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동기가 되고 활력소가 되어 봉사하는 그러한 선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베푼 선행 곧 행동적인 신앙을 기준으로 삼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어느 때에"라고 하는 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내가 목마를 때에""나그네 되었을 때에"하시면서 이 어느 "때에"를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의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그런 일들을 하였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난 일이 없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실천하기에 앞서 몇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먼저가 선행의 때입니다. 어느 때에 하여야 하나하고 그 시기를 너무 재다가 아무 것도 못하고 마는 것을 봅니다. 겨울에는 여름에 하겠다 하고, 여름에는 크리스마스 때에 하리라하고, 다시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 그리고 또한 돈 벌어 가지고 하겠다며 이럭저럭 생각하다가 모두 때를 넘기고 맙니다. 바로 그 때문에 때를 생각함이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다음 또 한 가지는 조건을 가려서 어떠한 조건이 되면 그 이후에 선행을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런가하면 대상을 가리는 일입니다. 물론 지금 여기에 주님이 계시면서 헐벗고 굶주리신다면야 당장에 드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풀고자 하는 대상을 너무 가리고는 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이 사람에게 주어야 될까? 저 사람에게 주어야 될까 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아무에게도 베풀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은 그러한 것들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어떤 여건,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구원이 되고 동기가 된 순수한 신앙적 차원에서 행하는 일이면 그 모두가 다 주님께 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면야"하고 직접 주님을 만난다면 다투어 도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의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니요 예수님을 꼭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문제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 그것이 다 예수님께 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형편에 있는 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울 때에 그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 목적이 주님께 있고, 마음이 주님께 있으며, 그 결과도 주님께 영광으로 돌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어린이를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다 심각한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6)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식을 키우는 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키우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 자식이니 나중에 늙어서 덕 좀 봐야지하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엄연히 내가 낳은내 자식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봉사하게 되면 어린이 곧 주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게 될 때 곧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 중 특별히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은 중요한 요절이 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내 형제 중에라는 것도 예수님과 이름이 같다는 뜻의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예수의 이름이 있는 자를 그 이름을 소중히 여겨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고, 예수의 이름이 있는 자를 내가 존경하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저를 영접하면 그가 누구이든 곧 주님을 영접한 것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당동 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무렵 한번은 어느 주일 오후에저희 집으로 국민학생들이 놀러왔습니다. 이것 저것을 하며 한참 놀더니 이제는 우리 담임 선생님 집에 가보자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그저 그런가보다 했더니 담임 선생님 댁에 가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느냐며 저희들끼리 돈 100원씩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제가 그것을 거두어서 무엇에 쓸 것이냐고 하였더니 저들의 대답인 즉 선생님 집에꼬마 아들이 있어서 그 아이 먹을 것을 사다주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다가 "이녀석들 교제할 줄 아는군"하고 한 마디 덧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선생님 것으로 직접 드리지 않더라도 선생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탕 한 알을 사다주면 그것이 바로 선생님을 대접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이 아이들이 벌써 알고 있더란 말입니다. 이는 실로 정치적이요 상당한 수준의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의 형제 중 하나, 바로 예수의 이름이 있는 그 분을 그 이름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것은 보답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얼마를 주면 저쪽에서 또 무엇으로라도 보답할 수 있는 대상이 못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베풀 때에도 바로 이러한 대상, 곧 갚을 것이 없는 자들을 청함으로 복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베푼 선행을 저쪽에서 갚아버리면 내가한 선행은 무효가 될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극히 작은 자란 내가 무엇이고 봉사할 때 감히 고맙다는 인사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행에 앞서 이것을 베풀어서 효력이 있을까? 없을까? 혹은 베푼 만큼 제 구실을 할까하는 등등의 생각은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무런 기대나 바램도 없이 오직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도우면 그것이 곧 주님을 향한 선행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 유명한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그는 귀족이요, 부자였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말을 타고 가던 프랜시스가 불쌍한 거지를 만나게 되어 무엇을 좀 도와 주려고 말에서 내려 거지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문둥병 환자인 것입니다.
이 프랜시스는 추위에 떨고 있는 그 문둥병 환자인 거지에게 자기의 외투를 벗어 입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고맙습니다하고 그것으로 가만히 있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입어도 추우니 자기를 좀 꼭 껴안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기왕에 내렸고 옷까지 주었는데 그것 한번 못 안아주랴 하고서는 꼭 끌어안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좀더 세게 안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세게 꼭 껴안자 그 문둥병 환자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더니 훌쩍 사라지고 말더랍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프랜시스는 귀족의 위치를 버리고 수도사의 길을 감으로 마침내 성 프랜시스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 마틴이라고 하는 로마 군인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마틴이라는 군인은 예수를 믿는 로마 군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말을타고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를 만나게 되어 옷을 주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 사람의 옷은 필로 감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마틴은 그것을 반만 찢어서 주고는 나머지는 그냥 자기가 입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입으신 옷을 보니 자기가 찢어준 그 반쪽을 입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길래하도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예수님 옆에 있던 천사가 "예수님 어떻게 옷을 반쪽만 입고 계십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낮에 저 사람이 반쪽만 주지 않았더냐"고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틴이라는 군인이 그 앞에서 회개를 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에게 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어느 때 누구에게 하든 주의 이름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할 때 곧 주님께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준이 되어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으로부터 말미암은 선행에 기준하여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진정 사랑으로 행위가 동반되는 믿음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날 주님 우편에 있는 양의 무리에 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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