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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어린양과 비둘기 비유(요한복음 1 : 29 - 3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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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과 비둘기 비유(요한복음 1 : 29 - 34)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그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 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꼭 한가지 기억할 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서적, 다시 말하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지식 전달 위주의 책들을 대하듯 이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 아닌 상징적이요 실제적인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이런 저런 면으로 자꾸만 분석과 비판하려 드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언제나 성경은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는 중에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성경 자체가 내가 말씀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어나가면서 이해가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이 말씀이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이구나 할 것이며 이해가 안되면 안 되는대로 이 말씀은 오늘 내게 필요한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에는 확신이나 깨달아진바가 없지만 신앙적인 나이가 들고 세월이 좀더 흘러 필요한때가 되면 그 말씀을 내게 필요한 말씀으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급하게 알겠다고 덤벼든다거나 자신이 결론을 내리겠다며 서두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 성경을 대하다가는 신앙적인 많은 손해를 봄은 물론 자칫 잘못 다치기가 쉽습니다. 극단적인 한 예로서 예수님께서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오실 것인가를 알아보겠다며 이리저리 찾아다니다가 저에게까지 전화를 걸어오는 답답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께서 이것을 모르시면 됩니까?"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러고도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해오면 제가 있다가 "잘했던 못했던 제 학위 논문이 종말론입니다"하고서는 그만 두자며 끝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겸손한 자세로 그 자체가 말씀해주도록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상징적이며 또한 종교적인 철학적이 아닌, 언어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이원론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닌 상징적이고 실제적이며 그리고 사건 자체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크라프트(C.H.Kraft)라는 학자는 성경을 두고 영감된 사례의 책(The insprired case book)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영감된 사례! 그러니까 성경 속의 그 많은 사건, 즉 민족의 이야기, 사람들의 이야기, 전쟁 이야기 등등, 그 여러 가지 다양한 사건들 모두가 다 영감된 사건으로 그 어떤 사건이라고 하는 언어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우리가 소위 학문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헬라적 방법과히브리적 방법에는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헬라적 방법이 아닌 히브리적 방법으로 이해되어져야 하는 지극히 종교적인 책이며 그 언어는 항상 사건적이요, 그 사건을 통한 상징적인 언어로 꾸며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알고 성경을 읽어나가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내용이 있고 논제가 있다하더라도 그 방법론 자체가 잘못되면 논리도 잘못되고 결론도 잘못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지극히 경건한 자세로, 그리고 이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자세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매우 귀중한 두 가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가지 동물, 곧 어린양과 비둘기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는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이 두 동물이 상징하는 바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기독교를 이해한 것이며 성경의 골수를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어린양과 비둘기의 뜻을 모른다면 성경 66권을 다 외운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제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의 모든 진리가 어린양과 비둘기라는 이 두 동물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적인 언어가 아닌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동물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우리의 신앙 고백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계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무엇 무엇과 같다'라는 말밖에 더 다른 용어가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항상 언어의 부족을 느끼면서 생각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귀여운 어린아이를 안고 교회에 나오던가 하면 사람들이 아이의 예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하는 말이 "그것 인형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려면 산 아이를 인형 같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기껏 예쁘다는 것이 인형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예쁜 인형을 보고는 "그것 진짜 어린애 같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는 그 이상의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 이상의 말을 찾는다면 기껏 '천사 같다'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 것도 아니니 그 소리도 못하겠고 해서 하는 최상의 말이 예쁜 아이를 보고는 인형 같다고 하고, 예쁜 인형을 보고는 진짜 어린애 같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이란 완전한 표현을 하기에는 항상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을 두고 생각할 때 예수님의 일생을 포함한 뜻, 곧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 하셨으며,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구주가 되시는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단숨에 무엇이라고 해야 그나마 만족한 표현이 되겠습니까? 이런 저런 언어로 다 맞춰 보아도 말은 부족할 뿐입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어린 양'이라는 말속에 그 모든 의미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린 양'이라고 하는 이 말의 뜻 하나를 가르치기 위해 구약 성경이 기록된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서에 기록된 그 많은 제사와 피 흘리는 이야기는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말대로 도살장과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제사와 피흘림은 오직 하나 예수를 증거하자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어린양이다'라고 하는 그 말을 가르치기 위해 수 천년 동안 성전 안에서 피를 흘린 것입니다. 이처럼 그 뜻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부모 된 도리에서 자식에게 계속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면 마침내는 "너도 이제 부모가 되어 보아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공부에 대한 충고도 그렇습니다. 젊은 자식을 앞에 놓고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이니? 이제와 생각하니 공부 안한 것밖에 후회되는 것이 없더라. 그러니 너는 그런 일이 없도록 열심히 해라"며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결국은 또 그 나이가 되어야 압니다. 물론 그러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치적으로야 모를 사람이 있겠습니까마는 그 뜻이 전달되기란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은 철학가의 말도 아닌 아무나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기가 쉽더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돈은 많이 벌었는데 부인은 지금 병원에 누워있는가 하면 남편 되는 자신도 진찰 결과가 못 고칠 병인가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을 많이 벌었으니 어쩌란 말입니까? 그렇게 많이 벌어 놓고 먹기는 보리 죽만 먹고 앉았으니 답답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일을 안하고 논다고 해서 건강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까지 해쳐 가면서까지 그렇게 해야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인데 이것 하나를 깨닫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아무튼 예수는 어린 양이다라는 이것 하나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많은 제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요한 복음 3:16에 기록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요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독생자, 즉 외아들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함인지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하나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고생시킨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외아들, 그것도 백세에 주시고는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주십니다.

다름 아닌 독생자인 예수를 주었다고 하는 이 한마디를 설명하기 위해 그 많은 사건이 이루어지고 그 많은 역사가 기록됩니다. 어쩌면 여러분과 저에게도 이를 가르치기 위한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징적 사건에 부딪힐 때만이 이 상징적 언어가 통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증거 합니다. 이 증거라는 말은 설명한다는 것과는 다른 말입니다. 설명이란 없는 것을 가상으로 만들어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분명치 않은 원리를 설명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란 이미 변경될 수 없는 사건이 있고, 그 사건 그대로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증거를 받는 사람에게 이 사건이 사건화 됩니다. 사건과 사건화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저 건너편에 불이 났다고 할 때에그 쪽에서는 아무리 "불이야"를 외치고 사람이 타서 죽는 상황이 벌어졌다 할지라도 이 쪽에서 믿지 않으면 그 불은 이쪽 사람에게는 불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쪽에서도 불이 났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이 사건화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주위에 의식화라는 말을 자주 쓰고 있습니다마는 그것이 다름 아닌 사건이 사건화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사건이었다 할지라도 내게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모르고 지내는 편이 좋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 전 미국을 다녀오면서 저 스스로 내 마음을 이렇게 가져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지금 미국의 큰 걱정거리인 소위 에이즈(AIDS)라는 병 때문에 갖게된 불결한 생각들입니다. 현재 3만여명이 이 병에 걸려서 시달리고 있으며 날로 증가 추세에 있는데 이 병은 일단 걸렸다고 하면 죽게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텔레비전에서는 살이 마구 썩어 문드러지는 이 에이즈(AIDS)의 증상을 그대로 들어 내보이면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빨리 보고하라는 광고를 매시간 마다 보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증상을 모르는지라 누가 걸린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속수무책의 그야말로 천벌이라고 하는 무서운 병이만 연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90년대에 가서는 자그마치 60만이 될 것이라 하니 큰 걱정입니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는 밝혀진 것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하니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저로서 나쁘다는 것은 길거리를 다닐 때 이 사람은 그것이 아닐까? 혹은 저 사람은 그것이 아닐까하고 생각을 하게 되니 미국 땅이 아주 더러워서 못 견디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심히 그것에 관한 글들을 읽는 중에 다행히 음식점에서는 옮지 않는다기에 마음을 놓고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음식점에서도 옮길 수가 있다고 하면 그 길로 빨리 떠나와야지 계속 미국 땅을 밟을 수도 없겠다는 기분이었습니다. 세계는 지금 이 에이즈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참전한 바 있는 월남전에서 여러 해 동안 싸우면서 죽은 사람이 5만명인데 이제 다음 해부터는 에이즈로 인해서 자그마치 1년에 5만명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멀쩡한 청년들이 1년에 5만명이나 죽어간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년간 총알이 날아들고 폭탄이 떨어지는 전쟁 속에서도 5만명 밖에 죽지 않았었는데 비하면 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더욱이 그러고도 속수무책이고 보면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증거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연한 사건이 증거를 통해서 사실화 되어나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내 죄를 사해 주셨다고 하는 이 엄연한 사건이 내게 주시는 사건이 되지 않는 한 이 진리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본문에서 증거 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모든 뜻이 다 들어 있는 상징적인 언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어린 양이란 무엇을 뜻함인가 할 때 그것은 성경 전체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에 얼마나 깊고 넓은 심오한 말씀인지 모릅니다마는 그 요점은 속죄물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양으로 표현했다 하여 그저 양은 순진하고 착하니까 그렇게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어린양의 뜻은 죄를 대속하는 속죄물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요한의 기독론이요 성경이 말하는 기독론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는 어린양이다!'라고 할 때 예수님을 보는 우리의 시각이 어때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혁명가로, 혹은 경제가로 또 어떤 이들은 훌륭한 성현으로 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기적을 보이는 마술사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한 말씀은 십자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을 읽어보면 마리아와 요셉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병고친 이야기, 떡을 먹이신 이야기 등 갖가지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으나 그 문맥의 흐름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사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죽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꼭 죽어야 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죽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사로가 다시 사는 사건도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게 되면 한 말씀 한 말씀, 한 사건 한 사건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제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규명하자면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한 인간의 죽음입니까? 아니면 혁명가의 실패입니까? 혹은 하나의 어떤 사건입니까? 그런데 여기 성경이 말하는 어린 양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단에 바쳐진 하나의 소중한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갈보리 언덕이 다름 아닌 하나의 제단이요 그리고 예수님은 그 위에 바쳐진 제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히브리서 9:12 말씀을 보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가 제물이라고 했을 때 이 제물에서 흐르는 피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본래 드리던 양과 소의 피는 모두가 다 상징적이고 그림자적인 것이며 이제 본체이신 예수께서 자기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 가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만민의 죄, 곧 내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제사성과 십자가의 속죄성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 좀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 볼 때 그러면 피라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함인가 할때 피는 곧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명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죽음과 피의 문제가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이렇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에 하나님께서도 절대로 거저 용서하시지는 못하십니다. 누가 죽든 대신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어떤 잘못이 좀 있다하더라도 "미안합니다. 그저 서로 용서 하십시다"하고 악수하면 끝난 줄 알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반드시 그것을 위한 희생을 지불해야합니다. 이는 우리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구를 용서하려들면 용서하는 만큼의 희생을 내가 당해야 합니다. 따라서 물질도 명예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똑똑한 사람은 덕이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그것을 따지다 보니 돈은 손해를 보더라도 명예는 손해를 안 보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서야 어찌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을하다보면 명예도 내 의도 손해를 보게 됩니다. 때에 따라서는 멀쩡한 사람이 죄인의 누명을 써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너무 공짜로 생각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처럼 아이 러브 유(I love you) 아이러브 미(I love me)하고 쉽게 한 마디 하면 통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마는 결코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필요한 것이며 더욱이 죄인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값을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피비린내나 고기 타는 냄새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아주 긴 말씀으로 "너희의 무수한 죄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죄물을 가져오지 말라"(11-13)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귀한 상징적 언어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침으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지불하고 있는 그 엄청난 희생을 그 제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믿어서 용서한 사건이 내게 있어서 구속의 사건으로 나타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17 말씀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오직 믿음이라고 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할 때 이것은 제물이 될 양의 머리에 죄인이 손을 얹고회개의 기도를 함으로 죄를 전가시키는 의식을 취한 후에 이 양을 불사르게 되는데 이때에 죄인은 그 제물이 불타고 있는 동안 그 무릎 앞에 꿇어 엎드려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양이 지글거리며 불에 타 죽을 때에 내가 죽는 마음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속죄라는 것이며 영어로는 어토운먼트(atonement)라고 합니다. 이 속죄라는 어토운먼트는 애트(at) (one) 먼트(ment)가 모인 것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의 말입니다.

속죄는 하나가 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볼 때 마다 거기에서 내가 죽은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 또한 거기에서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믿음으로 제물을 바쳐야 하고 제물을 보아야 하며 그리고 십사자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죄인과 죄물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죄인이 아닌 자가 죄인인 것처럼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십자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그 언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언어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또한 생각할 것은 오늘의 주제가 되는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비둘기"가 아니라 "비둘기같이"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임했다는 이 사실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현상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세례 요한을 위한 것이냐? 혹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냐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향해 세례를 받으시는 자세로 이렇게 서있고 이제 세례 요한이물로 세례를 주게 되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본 사람이 누구냐 할 때 그것은 분명 세례 요한 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것을 의식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의식은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보여주신 그 이유는 오직 세례 요한을 위해서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세례 요한이 증거하기를 "내가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할때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둘기는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비둘기는 성경에50여번 나타나는 것으로 그 첫 번째 기록이 창세기 8:8의 노아 홍수 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른 날짐승 중에 역사적으로 맨 먼저 기르기 시작한 것이 비둘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비둘기에 대해 평범하게 알고 있는 것들, 다시 말하면 비둘기는 가장 순결하고 깨끗한 날짐승이라고 하는 그런 것을 논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본뜻은 이 비둘기도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속죄제로 드릴 때에 쓰는 제물이 바로 이 비둘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할 때의 어린 양 뿐만 아니라 이 비둘기에도 제물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를 생각하듯이 비둘기를 보면서 성령을 생각하고 그 성령이 또한 우리에게 증거 해 주십니다.

그런데 비둘기 같은 성령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비둘기는 순결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순결하고 사랑하며 유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평합니다. 비둘기는 아무리 많이 있어도 서로 다투지를 않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면 저들의 사랑이 대단합니다. 거칠고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절대로 대항하거나 함께 부정해지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순결하고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비둘기의 성품을 놓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고 선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나아가서 성령이 말하는 골자는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비둘기는 희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할 때 그것은 성령의 함께하심,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것이 곧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잠깐 신학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고 넘어갈까 합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임했다면 그 이전에는 성령을 받지 못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잉태할 때부터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기에 받은 성령은 무엇인가 할때 이것은 기능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미에서의 성령의 역사가 있었지만 이제 세례를 받으신 다음부터는 가정을 떠나 복음을 전하는 공생활에 나서게 되는 사명적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여 모든 사람이 방언을 하며 큰 역사를 이루었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성령을 못 받았었는가 할 때 이미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할 때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성령을 가리켜 하나는 구원의 영이라 말하고 또 하나는 증거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여기에서는 증거의 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신학적으로 정리하여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령의 임하심으로 이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내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 분이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성령이 증거해 주십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의 임하심을 봄으로써 이분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예수를 알아볼 수 있는 길은 성령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대서양을 지나가던 배 한 척이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니 모두가 구명대를 차고 바다에 뛰어 들어야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명대가 모자라서 두 부부와 한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한 개의 구명대가주어지게 됩니다. 이 때에 아이의 아버지 되는 남편이 아내에게 주면서하는 말이 당신이 아이를 안고 이 구명대를 가지고 바다에 뛰어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구명대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가는 아무래도 죽을 터이니 당신이 살아남고 훗날 아들이 자라거든 아버지가 구명대를 너에게 주시고 죽었다는 것을 들려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이 부인은 그 구명대를 보관해 놓았습니다. 아이들이란 자라면서 말썽을 부리기 마련인데 이 아들 역시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이 어머니는 자기 아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그 오래된 구명대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타고 가던 배가 파손되었을 때 너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너의 아버지는 이 구명대를 우리에게 주시고 대신 죽었다! 그 증거가 이것이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믿게 된 그때부터 절대로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위해서 죽은 아버지의 구명대를 봄으로 그 증거를 받아들이며 그리고 믿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순간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영원히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도 어린 양과 비둘기, 그리고 성령이 다 함께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증거를 겸손히 받아 들일 때에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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