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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마가복음 2장 23절~28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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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마가복음 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 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 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 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오늘 나타난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한마디로 파헤친 참으로 귀중한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신선한 말씀이요 복음적인 말씀입니다. 사람마다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냐 하고 정곡을 찌르신 것이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무릇 사람들은 고래로 '종교'의 규례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규례에 얽매인 노예생활을 해왔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종교라는 것이 그실 얼마나 사람을 괴롭힙니까? 이를테면 우리네 고래의 샤머니즘, 토테미즘 같은 신앙은 사람을 얼마나 불쌍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사상의 노예, 풍속의 노예, 의식(儀式)의 노예, 규례의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잔재가 구석구석에 질기도록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移徙)를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소위 '손 없는 날'이라야 이사를 합니다. 동쪽이 좋으냐 서쪽이 좋으냐를 따집니다.

남녀의 결합에 궁합(宮合)이라는 것을 봅니다. 안성맞춤의 배필이 될 것 같은데도 궁합에 매여서 되느니 안 되느니 합니다. 소위 궁합이 맞아 결혼식은 올리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이 역시 길일(吉日)이라는 것을 가립니다. 그 바람에 가령 어느 주 토요일에는 세 쌍 네 쌍이나 몰려 식을 올리는가 하면 다음 주 토요일에는 아예 한 쌍도 식을 올리지 않습니다. 그 날은 '나쁜 날'인가 봅니다. 도대체 언제가야 이런 미개(未開)의 노예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는지, 실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속절없이 매여 있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매여 있습니다. 소위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도 다를 바 없는 것을 숱하게 봅니다. 평소에는 똑똑한 소리 큰소리 잘 치는 사람인데, 그리고 남이 그런 미신에 얽매여 있는 것을 보면 도통한 사람인 양 초연한 사람인 양 껄껄 웃어넘기는데, 정작 스스로가 당하고보면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진배없이 불쌍해지고 맙니다. 불쌍하게도 궁합에 매이고 허무맹랑한 길흉(吉凶)의 미신에 얽매이고 맙니다.

오늘의 잠언말씀은 심각하고도 통쾌한 말씀입니다. 자유의 복음입니다. 그 뜻을 알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참 자유로운 생활, 멋진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사람은 예수 믿어도 자유가 없습니다. 잘 믿어보려고 하면 그럴수록 더 자유가 없어집니다.

진실하게 살려고 하면 그렇게 살려고 하는 만큼 더 고통스럽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면 그럴수록 더욱 괴롭기만 해집니다. 예수님 당시의 교회 규례는 지엄했습니다. 이것 하라 저것 하라,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그 규례를 다 찾아 챙기다보면 일할 시간이나마 있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안식년이다 희년(禧年)이다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매 안식일 지키고 절기들 지키고, 뭐 지키고 뭐 하고…… 그런 것 다 하고 언제 일했을까 싶어요.

그 엄격한 종교상의 규례를 억지로 억지로 지켜나가다가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있음으로 해서 절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도저히 못 지키겠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처음부터 쳐다보지를 말자, 지킨다고 기를 써보았자 어느 때 엔가는 틀림없이 못 지키고 말 것이니 그럴 바에는 진작'에 그만두자, 지옥에는 어차피 가게 될 것이고, 갈 바에는 처음부터 갈 줄 알고 마음이나마 풀어놓고 살자, 안 가려고 버둥거리다가 가게 되는 것보다야 낫겠지 --이렇게 체념하고 절망해버린 이른바 민중 층이 있었습니다. 일반 서민층이라고나 할까요. 되는대로 사는 그런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차피 틀린 인생이다, 파손된 인격이다, 하고 자신의 생을 아무렇게나 방임해버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바리새인, 사두개인, 레위인, 서기관, 제사장 --이렇게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종교 의식을 따릅니다. 엄격하게 지킵니다.

금식하는 것도 지키고 안식일이며 모든 규례를 꼬박꼬박 지켜냅니다. 그래서 저 우중(愚衆) 앞에 날로 도도해집니다. 너희가 못 지키는 것을 나는 지킨다, 너희들과 달리 나는 깨끗하다, 나는 결()이 없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산다, 하고 날이 갈수록 교만해집니다. 못 지키는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저게 사람이냐'하고, '저게 개돼지 같은 짐승이지 사람일 수 있느냐'하고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생리가 됩니다. 그래가면서 저들의 종교 의식은 위선이 되고 형식이 되고, 교리주의가 되고 문자주의가 됩니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데에는 자칫 빠지기 쉬운 위험이 있습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가 되고 나면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해놓으셨을까? 나는 이렇게 해야 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하지 말라 하실까, 돈 아까운데 십일조는 왜 바치라 하시노, 나는 이렇게 하 고 싶은데 하나님께서는 하라고 하실까 말라고 하실까, 저런 인간은 벼락이라도 맞아 없어져야 하는데 왜 가만 놔두실까…… 이런저런 회의가 간단없이 나를 괴롭힙니다. 그러다 보면 필경에는 '하나님께서 날 괴롭히시려고 작정을 하신 게야'하고 하나님을 심술쟁이쯤으로, 폭군쯤으로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좀 지킨다고 하면 억지로 지켜요. 불평하면서 지켜요. 원망하면서 지킵니다. 벌받을까봐 마지못해 지킵니다.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의 위험은 자기중심적(ego-centric)이 됩니다. 상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섭니다. 헌금을 할 때에도 '이거 바치면 얼마나 받게 될까'부터 생각합니다. 요새 듣자하니 '선금 십일조'라고 하는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내가 백만 원을 십일조로(선금으로) 바치면 구백만 원 주실 것 아니냐'하고 바치는 따위의 십일조를 가리키는 말인가 봅디다.

아무튼 복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보상의 욕구를 가지고 모든 일을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도, 율법 하나 지키고 안식일 한번 지킬 때에도 지극히 공로주의에 치우치고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간다는 말입니다. 엄청난 위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율법을 해석하십니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주 원점으로 돌아가서 풀이하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지엽적이고 변칙적이고 주변적인 것은 다 제하고, 곁가지 다 잘라버리고 뿌리로, 원점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본디 뭐라고 말씀하셨더냐, 말씀하신 본디의 뜻이 무엇이냐 하십니다. 무릇 말이라는 것은 내 편에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자의 편에서 들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말씀하신다면 부모님의 세계에서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저분들은 옛부터 그렇게 저렇게 고생하고 살아오셨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래야만 그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율법사들이 만들어놓은 인간적인 제반 규례들과 전승을 다 떼어버리고 하나님 말씀의 원점으로, original point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새로운 해석을 하십니다. 참뜻을 찾아 말씀하십니다.

본뜻으로 돌아가 신선하게 해석하십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풀이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냐?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누구냐? 지혜가 많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누구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전부가 사랑으로 주시는 말씀이다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못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사랑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이렇게 하라 저렇게 말라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셔서 율법을 해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한 은혜롭고 은총적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같은 해석에서 오늘의 잠언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 말씀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겠습니다. 옛날에는 길이 시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보면 그런 데가 많지 않습니까? 이렇다할 도로가 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밭고랑으로 다니는 데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이 나 있지 않은 곳에서 밀밭 고랑으로 지나시는 길이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23)" -시장하던 참이라 이삭을 뜯어 비벼 가지고 입에 넣었던 모양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지요. 특히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이나 율법에 보면 나그네가 길 가다가 길가에 있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거나 밀밭의 밀 이삭을 잘라 비벼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가지고 가면 도둑질이 되고 죄가 되지만, 입에 넣어 먹는 것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밀 이삭 건드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탈을 잡습니다. '안식일인데' 왜 그런 짓을 하느냐 하고 시비를 벌이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안식일에 이삭을 뜯어먹으면 못쓴다는 저들의 계율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인지, 아무튼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데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같은 전문가들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내는 부류가 아니라 서민적인 부류였던 탓에 이삭 좀 비벼먹는 것이 어떻겠나 하고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되었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책잡고자 호시탐탐하고 있는 데 대한 경계심을 그 순간에 소홀히 했다는 점입니다. 저들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만 인식했더라면 그들의 눈앞에서 그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누를 끼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이 칠칠치 못하니까 예수님도 피곤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안식일에 '못할 짓'은 줄잡아 1천여 가지는 되는 것이고 노동에 관한 것만도 크게 39가지나 됩니다. 그 기준으로 보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사건에서는 39가지 중에서 4가지의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첫째로 거두는 일이 죄가 됩니다. 두 번째는 키질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삭을 땄으니 거둔 것이요 따서 까불었으니 키질한 것이 됩니다.

세 번째가 도리깨질, 곧 타작을 한 죄입니다. 껍질을 벗겨서 알곡을 만들었으니 타작이 되는 셈입니다. 네 번째는 비벼서 입에 넣었으니 음식을 만든 것이 됩니다. 안식일에는 음식을 못 만들거든요. 이렇게 4가지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탈을 잡는대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인즉 엄격한 의미에서는 대답을 위한 대답인 듯한 느낌도 듭니다. 예를 드시는데, 사무엘상 211절로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다윗이 황급하게 피난을 가는데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히멜렉에게는 사흘이나 굶고 온 다윗에게 줄 떡이 없습니다. 성전에는 지성소 바로 앞에 떡상이 있었습니다. 금으로 된 그 떡상에는 언제나 12개의 떡이 놓여 있습니다. 매일 매일 새 떡으로 바꾸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이 떡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떡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고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한쪽에는 촛대가 있고 한쪽에는 떡 상이 있는데, 여기에 놓는 12개의 떡을 아침마다 새 떡으로 바꾸어놓는 한편 물린 떡은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날 아침에 물린 떡을 제사장 아니고는 아무도 먹을 수가 없는데도 다윗에게 줍니다. 다윗이 이 떡을 얻은 것이 결코 잘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긍휼이 문제입니다. 법에 앞서는 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요, 또 하나는 경건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만일에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이 자리에 왔다가 떡을 보고 '하나 먹어볼까'하고 먹었던 것이라면 죽었을 것입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떡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떡인 줄 알면서도 제사장이 내어줄 때에 죄송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두려운 마음으로 그 떡을 먹었기 때문에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법 위에 법이 있다는 점입니다. 법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모든 법의 동기가 어디에 있는 것이냐 하고 법을 초월한 법이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이 제자들이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서 밀 이삭을 비벼먹은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튼 잘한 일은 못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그것을 먹었다고 해서 벼락이라도 치실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이지요.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문제는 아니라고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은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율법 전반에 대하여 귀중한 진리를 설파하시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히시자고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요, 율법과 규례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하심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라 하심입니다. 모든 율법이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가 이 같은 신학적 문제를 놓고 루터의 해석이 마음에 들어서 종종 말씀을 드립니다. 백 번이라도 생각해 볼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대요리문답(大要理問答)에서 말한 것을 보면 율법에 대하여 대강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으면 서로가 툭하면 마구 죽이고 죽고 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법으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지킨다면 우리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속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우리의 순결을 지켜주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두가 간음하지 않으면 모두의 순결은 지켜지는 것입니다. 순결을 빼앗기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하여 간음하치 말라는 법을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도둑질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의 사유재산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란 변변치 않은 물건 하나라도 도둑을 맞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별로 소중하지 않던 물건일지라도 그것을 잃어버리고 보면 굉장히 기분 나쁩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의 인격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릇 속임을 당한다는 것은 인격을 빼앗기는 것이요 짓밟히는 것입니다.

율법은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주신 법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억지로 지킬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식'이라니 누구의 안식입니까? 안식(安息)이란 쉰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히지키라 하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쉬라 하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그러고도 먹고살게 해주마 하심입니다.

오래 전에 믿기 시작한 교인 한 분은 처음에 남이 권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어째서 나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하는 대답이 참 지혜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어렸을 때에도 같이 자라고 대학도 같이 나오고 사회에 나와서는 장사도 같이 시작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게 못마땅해서 "이 사람아, 바쁜 세상에 일주일 쉬지 않고 열심히 벌어도 모자라는 판인데 그 아까운 시간에 교회에는 뭣하러 나가나? 그래가지고 언제 돈벌고 어떻게 먹고사나?" 하고 핀잔을 주면서 자기는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일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20년을 보내고 어느덧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섰는데, 뒤늦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주일에 하루 쉬고 교회에 나가던 그 친구나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해온 자기나 사는 형편은 마찬가지 더랍니다. 손익관계를 따져보자니 결국은 일주일에 하루씩 쉬면서 살아온 그 친구가 하루씩 쉰 그만큼 득을 본 셈이고 자기는 오히려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똑똑해져야 되겠다'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잘 생각했다고 칭찬을 해주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일주일에 하루씩 쉬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고 말입니다. 하루 더 부지런 피워봤댔자 더 버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못박아놓으셨습니다. 내가 먹여줄 것이 뉘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라 -고맙지 않습니까? 보통 고마운 일입니까? 모름지기 사람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적당한 휴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고무줄로 말하면 잡아당겼다 풀어주었다 해야지 계속 잡아당기기만 하면 끝내는 끊어지고 마는 것과도 같습니다. 세상에는 지쳐서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생활의 리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일하면서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게으름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일을 위해서 오늘 쉬는 것입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쉴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물질과 함께 살고 육체로 살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다보면 영성(靈性)이 희박해집니다. 영혼이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이 영성의 소생을 위해서 주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식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합니다. 그 하루를 비세속화(非世俗化)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면서 속 사람이 윤택해집니다. 매주일 꾸준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라야 영성에 균형을 유지합니다. 여러분도 다 경험해보셨을 줄 압니다. 잘 나오다가 한주일이라도 빠져보십시오. 괴로워집니다. 한 달쯤 빠져보면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어정쩡해집니다.

자꾸만 멀어집니다. 몇 달을 빠지고 보면 필경은 안 믿는 사람이 되고, 이상해집니다. 세속화하고 맙니다. 자동차 타고 가다가 주유소 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제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 해도 주유소에 가서 연료를 넣어야 합니다. 넣지 않으면 자동차는 달려가지 못합니다. 늘 점검하고 적당한 때에 연료를 넣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안식일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치와도 같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정욕으로부터 자유키 위하여, 윤택해지기 위하여, 충만 충실한 생을 위하여, 'wholeness of Christian life'를 위하여 안식일을 지켜라 하십니다. 얼마나 고마운 복음입니까?

무릇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데는 언제나 자원성(自願性)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억지로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마다 지킬 때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벌받을까봐 저주받을까봐 지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해주시겠습니까 -이렇듯 하나님과 흥정을 벌여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 말씀은 나에게 유리한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심으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시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자녀를 위함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보고 하는 말은 자녀에게 반드시 듣기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납득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말입니다. 그래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베드로가 말씀드립니다. "밤새껏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물을 던져봐야 고기가 잡히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지만, 말씀하시니 그물을 던져는 보지요." 말씀하시는 분의 체면을 봐서 따르리다 -이런 말입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말씀대로 순종했고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믿고, 나에게 유익하라고 주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신 것이므로 나 또한 사랑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그 법을 지킬 것입니다. 이에서 떠나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형식주의자가 됩니다.

어떤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새벽기도에 많은 사람이 나오지요? 꼭 나가야 되나요?" "안나와도 되지요?" "꼭 나가야 된다고들 하던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꼭 나와야 천당 간다는 법 없습니다.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말고 싶으면 마는 거지요." "그런데, 나가자니 힘들고 안나가자니 꺼림칙하네요. "한가지는 분명히 아세요.

억지로 나올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억지를 부려야 되겠지만 하루 이틀 나오다보면 마침내는 기꺼이 나오게 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를테면 누구나 준수해야 하는 교통규칙 같은 것도 그것을 마지못해 지킬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녹색으로 황색으로 적색으로 번갈아 바뀌는 신호등을 보면서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 하는데, 적색등이 켜질 때마다 '에잇, 저놈의 신호등!'하고 짜증을 내는 사람이라면 자유를 잃고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 우리는 식민지 문화 속에서 살았습니다.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고 있던 그 식민지 시대에는 법을 안 지키는 것이 애국이었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 애국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법이니까 안 지키는 것이 애국이었습니다. 그 법은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을 위해 있는 것이므로 지키지 않는 자가 애국자로, 영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라를 되찾아 우리네 법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식민지 문화 속에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법망을 빠져나가는 것만이 능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식민지에 살았던 사람들, 노예 문화 속에 살았던 사람들은 준법정신이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법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없기 때문입니다.

DTXT÷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침략을 당하기만 했지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은 없다고 자랑하듯 말하기 좋아합디다마는 준법정신 면에서 볼 때에는 그것이 오히려 불행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갔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준법정신이 있는 편입니다. 자기네가 만들어놓은 법, 자기네를 위한 법이 있고, 그에 대한 준법정신이 상대적으로 강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우리의 법이 엄연히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법입니다. 이를 기쁜 마음으로 준수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법을 위하여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하여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법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억압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하게 하기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대한 이 같은 오리엔테이션이 잘되어 있어야 우리는 행복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하나님의 법이 우리를 억압하기 위하여 불편하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 하게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감사함으로 지치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법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주신 질서에 만족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갈 때에야 참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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