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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진실(마태복음 12장 34절~37절)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맏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오늘의 본문말씀은 마태복음 12장 34절로 37절입니다. 특별히 이 가운데 36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잠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언어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가운데서 가장 간결하고도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언어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으로 또 하나 우리가 늘 가슴속에 새겨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 : 33)"-진실한 신앙적 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예수님을 아노라'하는 간증과 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강해를 통하여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말에 대하여 특별히 많은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말에 대하여는 여러 구절을 통하여 심각하게 자세하게 교훈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에 대하여 그렇게 많은 교훈을 주시지는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있는 이 말씀은 언어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하고 논리적인, 아주 깊은 뜻을 지닌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그 배경을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마태복음 12장 22절로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앞에 나온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보시고, 그 속에 깃든 귀신을 쫓아내시어 깨끗하고 온전한 인격을 만들어주십니다. 이 이적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다리던 그 메시야를 만났다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감사하는 시각, 그 은혜로운 자리에 요샛말로 초를 치는 못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로운 분위기를 망쳐버리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할렐루야"하는 바로 그 시각,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하고 모함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못된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듣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갑자기 굳어집니다. "할렐루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가 이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한순간 '정말 그럴까, 어떻게 이런 이적이 있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품고 당황하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사악한 말, 결정적으로 악한 말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해설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런 것이다'하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엄청나게 악하고 무서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를 평가하고 비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도록 하십시다.
사람에게는 인격이 있습니다. 인격은 자유를 수반합니다. 자유가 없다면 그것은 인격이 아닙니다. 간혹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 그 넓은 에덴동산의 수많은 아름다운 실과나무 가운데 선악과나무를 만들어놓으셨는지, 기왕 선악과나무를 만들어놓으실 양이면 인간이 따먹지 못하도록 철망을 쳐놓으시든지, 인간의 목에 줄을 매어서 거기까지 다가가지 못하도록 하시든지, 아니면 그 나무에 가까이 가면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전기장치라도 해놓으시든지 하실 일이지 왜 따먹도록 그냥 내버려두셨을까'하는 의문을 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그 선택이 자기 의지에 달려 있을 때에 그것을 안 하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 의지가 담겨 있다면 그것을 하는 데에도 의미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유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격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철통같은 경계를 해놓았다면 사람이 사람취급 받는 것이 아니라, 동물취급 받는 것이 됩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고, 인격을 인격으로 대한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닌 자유만큼의 인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 하지만, 그실 지식이 없기에 부자유한 때가 많습니다. 저는 늘 그런 것을 느낍니다. 제가 영어는 좀 하기 때문에 영어권 나라에 가면 행동이 다소 자유롭습니다마는 그 밖의 나라에 가면 부자유스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나 중국에 가면 대화가 도통 통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부자유할 수밖에요. 다음 번에 갈 때에는 중국어를 좀 배워서 "셰셰"라고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는 언어의 장벽이 있기에 부자유함을 느낍니다. 들리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으니 얼마나 부자유합니까?
또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할 때에도 부 자유를 느낍니다. 돈이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먹고 싶어도 못 먹고, 가지고 싶어도 못 가지고, 주고 싶어도 못 줍니다. 이 역시 막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듯 우리가 자유로운 것같지만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지식의 한계, 세계관의 한계, 자기 철학의 한계-우리는 무수한 제한을 받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제한 받는 가운데서도 얼마간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다고 하지만 조금은 있지 않습니까? 돈이 없다고 하지만 가진 것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가진 것만큼의 자유는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말할 수도 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런 판단만큼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이만큼 우리는 인격자인 것입니다. 인격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행위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 교회에 나올 수도 있었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자유의지대로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이렇게 나오셨습니다. 아주 잘 하신 일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가 지닌 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안나오면 안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나오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에 안나오면 저주받는다고 말씀드린 일도 없습니다. 사실 예배에 한번 빠졌다고 저주받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유로운 가운데서 선택하여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행위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언어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조금 전 우리가 찬송을 부를 때에도 열심히 부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답답해 보일 정도로 찬송을 아예 부르시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은 분들도 있더군요. 부부싸움을 하고 나와 속이 상한지 입을 딱 다물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찬송가 책은 손에 들고도 부르시지를 않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해야 저 사람의 입을 열게 할지 궁리합니다마는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안 따라오는 데야 어떡합니까? 여러분, 말이란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말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중국을 방문했을 때에 수재를 당한 그곳 분들을 위하여 미리 마련해간 얼마간의 수재 의연금을 드렸습니다. 그 돈을 받은 분은 조선족으로 우리말보다는 중국말을 더 잘하시더군요. 그래도 조선족인지라 서툴기는 해도 한국말을 하긴 합디다. 그 때에도 무슨 말을 건네시는데 저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면서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했습니다. 하지만 말이 서툴다보니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냥 "감사합니다"하면 될 것을 조금 유식하게 표현하려고 하다보니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시 "감사하시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잘하려다가 그만 이상하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말이란 잘해야 되겠지마는 이에 앞서 우리에게는 이 말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에게는 생각의 자유가 있습니다. 내 생각은 내 마음대로 입니다. 내 느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반갑게 느끼기도 하고 반갑지 않게도 느낍니다. 그 사람을 만남으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이러한 느낌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습니까? 느낌에 대하여 우리는 무방비상태입니다. 그래서 "내 느낌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합니까?"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까지도 책임져야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느낌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각의 자유, 상상의 자유, 사상의 자유가 있습니다. 생각으로야 무슨 일을 못합니까? 턱을 괴고 앉아서 상상의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합니다. 이 사람과도 살아보고 저 사람과도 살아봅니다. 내 마음대로 별의별 생각을 다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속에 한번 물어보십시오. '아무 생각이나 해도 괜찮은 것인가?'라고. 물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나 해도 괜찮습니까? 아무 생각이나 마구잡이로 한다면 그는 필시 미친 사람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생각할 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모든 언행심사(言行心事)에는 자유가 있으되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행위에 늘 책임이 따르기에 행동을 잘못하면 감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그 결과는 또 얼마나 무섭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책임을 묻기도 하고 책임을 짐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흔히들 말에 대한 책임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언어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인격자입니다. 적어도 인격자라고 한다면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뒤에 해가 올지라도 지켜야만 합니다. 이미 내뱉은 말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못한 말이 많습니다. 취소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가끔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는 약속을 될 수 있는 대로 잘 안 하려고 합니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이요, 더 중요한 일이 생겨서 취소하자고 말을 할 때면 얼마나 미안합니까? 약속은 다 같은 약속인데 더 큰 약속을 위해서 작은 약속은 취소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약속을 안 할 수가 없는 부득이한 형편이 생깁니다.
어쨌든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지려는 사람일수록 인격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간혹 보면 이것은 행동이 아니요 말로 한 것이니 어떠냐 싶어 소홀히 여기는 인격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저속한 사람입니다. 저질 인간입니다. 한마디의 말은 천금과도 같습니다. 반드시 책임을 질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신앙고백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생각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를 책임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생각이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역시 이에 대하여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각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든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든가 하면 즉시 일어나 엎드려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나쁜 생각을 했기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모쪼록 이 생각을 깨끗이 지워버려 주시고 밝은 생각을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자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 자체를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에 대한 것까지는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짐으로 비롯된 생각이 아니라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쁜 생각이 쌓여서 의지가 되고 마지막에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로 화(化)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시당초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생각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감정을 무방비로 둘 때가 있습니다. 느낌이야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합니다만 이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루터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머리에 둥지를 트는 새는 막아야 한다.' 여러분, 슬쩍 지나가는 생각이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그것조차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만일 그런 생각이 든다면 곧 털어 버려야 합니다. 곧 잊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길을 걷다가 가게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게 됩니다. 이 때에 '아, 좋구나'하고 그냥 지나가면 좋겠는데 몇 번이고 다시 와서 보게 되면 그 물건에 집착이 생겨서 무리를 해서라도 사게 되거나 아니면 도둑질을 하게까지 됩니다. 이성관계도 그렇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참 예쁘게 생겼다'라고 감상하고 지나친다면야 죄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두고 상상하고 생각하여 급기야는 병까지 걸리게 되니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할까, 왜 이렇게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게 될까'--이것이 기도의 재목이 되어야 합니다. 아직 회개하지 못한 정욕과 아직 바로 중생하지 못한 더러운 인격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정까지 책임을 지는 인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미워하는, 시기하는, 질투하는 기분을 다 지워버려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눈길로 볼 수 있는 평온한 마음을 늘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늘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언어의 기능을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 information function이 있습니다. 정보교환의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소식을 주고받고 정보를 교환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둘째, express function이 있습니다.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기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셋째, directory function이 있습니다. 지시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함으로 그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무릇 언어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의 뜻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하는 독백은 없습니다. 내가 이유 없이 울었다고 합시다. 이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은 나빠지게 됩니다. 슬퍼지게 됩니다. 걱정을 끼치게 됩니다. 어떤 말이든지 이 세 가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결코 혼자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간혹 나 혼자 말하는 것이니 내버려두라고, 나 혼자 걱정하는 것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궁금해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습니까? 아무 말 안 하는 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다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한숨쉴 것이 아닙니다. 걱정스레 물어오는 상대방에게 알 것 없다고 말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언제나 자신이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이 끼치는 파급효과를 생각해보십시오.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마음먹은 것,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을 모두 종합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전부가 하나의 인격으로 뭉쳐질 수 있다-이것이 바로 본문말씀에 나타난 중요한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 한번 분석해봅시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는 이적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아니하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악한 말은 악한 데서 나오는 것이요, 그 사람이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악한 인격을 직시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인격에서 악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말이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마음에 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악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3․1만세운동을 주도하시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에 갇혔을 때에도 쉬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줄기차게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결국은 이상재 선생을 고문하던 일경이 지쳐서 "독립만세를 외치지 말라고 매질을 하는데도 자꾸 독립만세를 부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상재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지금 내 목까지 독립만세가 찼는데 건드리지를 말아야지, 자꾸 건드리니 독립만세밖에 더 나오겠소?" 얼마나 대단한 위트입니까? 고통으로 죽어가면서도 할말은 다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여유입니까? 요즘의 정치가들에게서는 이런 여유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대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건드리기만 하면 욕밖에 안나옵니다. 건드리면 지혜가 나오고 부딪치면 유머가 나오고 여유가 나오고 은혜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한마디도 들을 말이 없고 배울 말이 없습니다. 나오느니 욕지거리요 주먹질입니다. 왜 이 모양입니까? 본래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악한 사람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지당한 일입니다. 지금 악한 말을 단 한마디만 했지만 이는 마음에 가득차 있던 악한 말이 건드림으로 나온 것이다, 그 말씀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말이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는 정도의 말을 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주 지능적이고 고차원적이요, 습관적이고 체질적입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악이기 때문에 이 거룩한 역사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획 돌려서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쌓여 있던 악이기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양하는 그 시각에 유독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렸다고 모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악입니까? 이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악을 쌓은 것입니다. 축적된 것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선한 것이 쌓여 있다면 아무 때에 건드려도 선한 것이 나옵니다. 예전에 제가 신학공부를 할 때에 군목이 모자라서 보조 군목으로 27 육군병원에 있어보았습니다. 그 때 보니까 희한하게도 수술 받은 뒤, 마취에서 깨어날 때에 중얼중얼 거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겠더군요. 점잖게 생긴 사람인데도 무의식중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형편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원치 않게 생긴 사람인데도 아주 좋고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차사고로 병원에 있다기에 찾아가 보았더니 전혀 의식이 없더군요. 며칠 내내 의식도 없이 누워 있기에 이제는 글렀구나 싶어서 임종기도까지 다 하고 돌아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지금도 그분을 만나면 내가 기도를 잘못해서 당신이 살아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합니다마는 무척 감사했습니다. 그 목사님도 의식 없이 누워 있을 때에 앓는 소리를 하시더군요. "하나님 할렐루야"하며 무의식 가운데 중얼거리는 그 몇 마디가 얼마나 고맙던지. 만일 그 때에 딴소리를 했더라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그 한마디가 얼마나 값비싼 것입니까? 그 목사님의 마음속에는 늘 하나님께 향한 찬양이 가득 쌓여 있었기에 그것이 무의식중에도 입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말한 것은 절대로 우연한 말이 아니요, 어쩌다 나온 말도 아니요, 실수로 나온 말도 아닙니다. 분명코 쌓여 있던 악에서 나온 것이요 본질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에 대한 예수님의 비평입니다. 우리는 말로써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서 인격이 우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시니"-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익한 말'이란 헬라어로 '아르고스'라고 하는데,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정의 의미를 지닌 '아'와 행동을 뜻하는 '에르곤'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아르고스'란 행동이 아닌 말, 곧 행동으로 나타나지 아니하는 말, 행동과는 관계없는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행동을 수반하지 아니하는 말뿐인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도 심판을 받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깊은 생각 없이 우연히 하는 말이나 아무 생각 없이 똑 내뱉는 말일지라도 그것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속에 쌓여 있던 악이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마음속에 가득했던 것이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도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말이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말이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 보일 뿐이지 말이기 때문에 지니는 돌이킬 수 없는 중요한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본인은 생각 없이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가고 말았지만 들은 사람의 마음은 평탄치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 같은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티토'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 신부님의 옆에서 시중드는 일을 맡아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미사를 드릴 때에 티토 소년은 그만 포도주 잔을 엎어버리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본 신부님은 잔뜩 화가 난 나머지 소년을 보고 당장 물러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뒷날 그 소년은 신부님의 말대로 성당에 다니지 않았음은 물론 공산주의자가 되어 결국은 유고슬라비아를 다스리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역시 어떤 소년이 미사를 드릴 때에 그만 실수를 해서 포도주 잔을 엎질러버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신부님은 동정 어린 따스한 눈길로 그 소년을 위로하면서 "앞으로 커서 너는 신부가 되겠구나"하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소년은 신부님의 말대로, 커서 정말 신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가 있었기에 그 소년은「The Life of Christ」라고 예수님의 생애를 쓴, 풀턴 쉰이라는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말 한마디가 이렇듯 중요합니다. 우리가 언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세 황금 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세 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이것을 무사통과 하면 황금 문에 이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는 이 말이 참말인가를 묻는 문입니다. 여러분, 자신 없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이것이 필요한 말인가를 묻는 문입니다. 이 말이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말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것이 친절한 말인가, 사랑을 담은 말인가를 묻는 문입니다. 가장 쉬운 이야기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대화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상대방의 장점을 보면서, 곧 상대방을 존경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존경이 없는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무시하는,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거든 말하지 말 것입니다. 내 마음에 상대방에 대한 존경이 생길 때까지는 입을 열지 말 것입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멸시하면서 하는 말은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필경은 안 해야 할 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기 전에는 말하지 마십시오. 둘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말하는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는 자세가 먼저입니다. 셋째는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한 두 마디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들면 안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급하게 생각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한 나머지 당장 "예스" "노우"로 대답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면 마지못해 "예스"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은 대답이 아닙니다. 먼저 상대방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뒤에 이야기할 것입니다. 대화에는 반드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긴 시간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너무 급하게 결론을 내리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넷째는 절대로 비난을 해서는 안됩니다. 비난하는 자가 되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내뱉는 악한 말을 단순한 한 사건으로, 실수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연한 일로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 악한 말은 '바리새인 바로 너희 자신이요, 너희가 쌓은 악이다. 너희 자신 속에 가득 쌓였던 악이 이 자리에 나온 것'이라고 보고 계십니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앞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에도 무슨 무익한 말을 했든지 이것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하기에 앞서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또한 내 마음에 악이 쌓이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항상 평안하고, 항상 사랑하고, 항상 존경하는 마음가짐과 인격이 되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선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말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악한 인격에서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은 인격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합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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