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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소에서 깨달았습니다(시편 73편 1절~17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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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성소에서 깨달았습니다(시편 73117)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사십니까? 아름답다고 보십니까, 추하다고 보십니까 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세상의 소리를 어떻게 듣는가 -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역시 보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듣는 대로 끌려가게 됩니다.

신라의 자비왕(慈悲王) 때에 거문고의 명인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예술에 전부를 바친 사람입니다. 하도 가난하여 옷을 누덕누덕 기워 입고 살았으므로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불리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워낙이 청렴해서 그런지, 오늘날에 이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보고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의 집이 초라하고 낡아 여기저기 금이 가고 거의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그 집에 놀러가서 보니 집안 꼴도 누추했습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혹이 '이 사람은 청렴한 사람이구나' 하고, 혹은 '작자가 게을러서 손질 한번 안하고 사니까 그 꼴이지' 라고 합니다. 여기서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한번 봅시다.흥부전(興夫傳)을 보면 흥부네의 청승맞은 모습이 여러 가지로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흥부라는 사람, 줄줄이 자식은 많이 낳아놓았는데다 끼니거리도 없이 철저하게 가난한 터이라, 한번은 궁여지책으로 관가에 가 남이 맞을 매를 대신 맞아주고 돌아옵니다. 댓가로 약간의 곡식을 얻자고 죽신하게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흥부 이 사람이 진실한 사람입니까 무능한 사람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미련한 사람입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중국의 장자(莊子)가 어느 날 남루한 베옷에 다 떨어진 짚신짝을 신고 위()나라의 혜왕을 배알(拜謁)했습니다. 왕은 장자를 보자마자, "선생은 어찌 그리 피폐하십니까?"하고 측은해합니다.

이 말은 들은 장자가 "선비로서 도덕적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 피폐한 것입니다. 옷이 해어지고 신이 떨어진 것은 가난한 것일 뿐 피폐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놓고도 한 사람은 어리석게 보고, 한 사람은 청렴하게 봅니다. 또 지체 있게 보는가 하면 가련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성공한 삶으로 보기도 하고 실패한 삶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예를 더 들어봅시다. 교회의 감독이었던 순교자 폴리캅에 얽힌 일화입니다. 그는 86세의 고령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화형(火形)에 처해야 되는데, 집행관이 참으로 난처합니다. 덕망 높은 어른이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어른을, 게다가 86세의 고령자를 화형에 처하기엔 왠지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처형하게 되어 있어 안 죽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다못해 집행관이 큰마음을 먹고 그를 찾아가 설득하려 합니다. "노인이시여, 비참하게 죽을 게 뭐 있습니까? 예수 안 믿겠다고 거짓말 한마디만 하십시오" - 딱 한마디 거짓말만 하면 내가 놓아주겠다, 일단 이자리만 모면하면 외딴 섬이든 다른 나라든 아무 데나 가서 마음대로 예수 믿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설득하려듭니다. 폴리캅은 그를 보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86년 동안 나에게 한번도 거짓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내 어찌 구차한 생을 살겠다고 거짓을 말하겠느냐. 어서 나를 죽이라." 그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장작더미에 올라 장렬하게 순교합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을 보게 되면 어떻게 판단해야 옳을까요? 충성되고 진실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보스럽고 미련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요즘사람들은 '그렇게 살 것 없다' 하며 미련한 사람으로 몰아붙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점(觀點)의 차이입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 스스로 깊이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인간에게는 질문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문제 의식입니다. 간혹 의심이나 문제라고는 도대체 없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물음이 없는 자에게는 해답도 없습니다. 또 문제 의식은 있지만 해답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요, 저것이 문제요 -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민감합니다. 아는 것도 많고 세상 걱정도 혼자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해답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면 '생각해본 일이 없다' 합니다. 그저 문제만이 걱정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 겁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얼마만큼의 문제가 있고, 또 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사십니까? 어느 정도 해답을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 해답 뒤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음을 봅니다. 문제에 눌려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문제 의식도 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실 해답 없는 문제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괴롭힐 뿐입니다.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으로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문제시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제가 개인적으로 지니고 사는 철학입니다. 내가 문제에 초연하면 그만입니다. 지나치게 민감하고 문제 의식이 너무 강하여 자기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다할 해결도 없습니다. 이는 불 신앙일 뿐입니다. 본디 의심이란 있게 마련입니다. 의심이 사물을 부정적인 측면으로 보게 하는 반면, 믿음은 사물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게 합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바로 보게 하는 기초요, ()이 됩니다. 때로 사람은 회의(懷疑)하게 되어 있습니다. 회의는 생각의 시작일 뿐 종말은 아닙니다. 늘 꿋꿋할 수만은 없습니다. 의심이 없으면 해답도 없습니다. 깊이 의심하고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합당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어떤 문제든지 바른 해답을 얻은 연후에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해답이 없는 문제 의식은 절망일 뿐입니다. 해답도 없는 문제 의식과 비판은 나도 남도 절망의 함정에 빠뜨리고 맙니다.

하루는 괴테가 사랑하는 친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의심까지 많은 사람이어서 만날 때마다 긴장을 해야 합니다. 그날도 만나자마자 예외 없이 의심으로 가득찬 말들을 시시콜콜이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괴테는 그의 말을 가로막고 예의 그 유명한 말을 합니다.

"당신의 의심을 내게 말하지 마시오. 나는 나 자신의 의심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의심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남의 걱정까지 할 여유가 없다, 어차피 당신에게는 해답조차 없지 않느냐, 그 말입니다. 지성인일수록 문제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성인일수록 그 문제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성의 욕망을 믿음으로 제어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신앙이다"라고 파스칼은 말한 바 있습니다. 이성은 소중합니다만 타락한 이성,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성을 무제한 방임해서는 안됩니다. 잘못하면 걷잡을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추리 비판은 끝내 자멸을 초래하고 맙니다. 모름지기 이성 비판에 제동을 걸 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이 저녁 늦게 귀가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만 믿고 사는 아내들은 그때마다 그 사랑 안에서 걱정을 합니다. '교통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오다가 강도를 만났나'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나' 오만가지 걱정을 다 합니다. 문 밖에 발소리라도 나면 너무 좋아서 맨발로 뛰어나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열렬히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혀 반대인 사람도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어디로 샜구나' '어떤 여자를 만날까' '지금 어디에서 재미를 보고 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합니다. 생각이 복잡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일수록 더 복잡합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라도 들면 꿈도 못된 꿈을 꿉니다. 심지어 서너 번 정도 같은 꿈을 꾸고 나면 꿈과 현실을 혼동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한다는 생각이 '이 꿈은 보통 꿈이 아닐 거야' '계시일지도 몰라'하고 사실화합니다. 그뿐입니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여자의 육감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아?' - 끝내 생사람을 잡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 때에 남편이 들어서면 문간에서부터 일이 대판 벌어지고 맙니다.

'내가 옳다' '내 추측이 맞는다' - 남편의 변명은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하고 살려면 피곤합니다. 참으로 피곤합니다. 사람이 머리가 좋고 추리 능력이 뛰어난 것도 좋지만, 어느 방향으로 발달했느냐가 문제입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차라리 멍청한 것만도 못합니다. 백치미(白痴美)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적당히 바보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본문에 보면 시편 저자는 그의 진실한 신앙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2)" - 참 귀한 고백입니다.

내가 그만 잘못 생각하고, 잘못 보고, 잘못 판단함으로 넘어질 뻔했다고 내 불찰을 진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여 넘어질 뻔했습니까? 잘못 보아서입니다. 하나는 악인의 형통을 보았습니다. 악한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 거짓된 사람들도 잘만 살고 죽을 때조차 편하게 죽더라, 재앙도 없더라, 소원에 지나치도록 소득도 많고, 농사도 잘되고, 돈도 많이 벌더라, 자손도 잘되고 지위도 높아지더라 - 자꾸만 그쪽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넘어지는 것입니다. 실수하게 됩니다. 무서운 함정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을 자꾸 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오리엔테이션이 잘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았다' '예수 잘 믿어서 그 자녀들이 모두 잘되었다' - 좋은 면만 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개 장로를 보니 못 살드만' '잘 믿는다고는 하지만 자식들이 형편없어' '누구는 평생 예수 믿었는데도 그 모양이야' -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여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또 하나 잘못되는 것이 있습니다. 소득과 권세와 평안이 악인에게 있다, 이러한 방향으로 생각하면 쓰러지는 것입니다. 또한 의인의 고통을 보며 결백하게 사는 것이 무효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3)"라고 생각합니다.

공무원직을 전전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어느 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은 다 도둑놈이다."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공무원 월급이 얼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남의 도움 없이 정말로 진실하게 살아왔는데 공무원으로서 나보다 더 잘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도둑이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도 진실하게 살려고 애씁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에 빠집니다. 의인의 결백이 헛된 것만 같습니다. 가난의 시련, 계속되는 징계로 많은 어려움이 따릅니다. 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이 줄곧 따르는가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의인의 고난과 핍박과 소외당함을 생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16)" - 심히 곤란하다고 합니다.

마음의 고통을 깊이 느꼈다는 것입니다. 부지런함은 어리석음 같고, 진실함은 나약함 같고, 선은 비겁함 같습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은 미련한 것이며, 충성됨은 어리석은 것이며, 정당한 생활은 무능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진실과 경건은 소용이 없다 - 이렇게 생각되면 정말 큰일입니다. 이 때에 시험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잘 믿다가 중도에서 나태해졌습니다. 십여년 동안을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인즉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한 장로님 때문입니다. 그 장로님의 사생활에 문제가 있습니다. 소실을 둔 것을 비롯해서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합니다.

그럼에도 명예와 부를 누리며 잘삽니다. 이것을 보고 교회에 안나 간다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을 보니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 년 후에 자진해서 교회에 다시 나왔습니다. 그 장로님의 아들이 강도가 되어서 감옥에 간 것을 보고야 하나님이 계시구나 생각했답니다. 여러분, 이래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고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7)"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합니다. 여기서 다시 눈을 씻습니다. 더러워진 마음을 씻어서 바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안경을 닦듯이 흐려진 마음을 닦아서 새로운 마음,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 예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결국을 알았나이다', 이제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악인이 주관하는 줄 알았는데 성전에서 예배하며 보니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이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요,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심판하시고 공의로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봅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73:23-24)" - 주의 성전에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성도가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답니다. 세상사는 동안에 너무 고생을 많이 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원망조로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님, 저는 세상에서 너무 어렵게 고생하고 살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네가 걸어온 일생의 자취를 한번 보자." 넓은 벌판에 주욱 길이 뻗어 있고 거기에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습니다. "하나는 내 것인데 나머지 하나는 누구의 발자국입니까?" 이상하게 생각되어 예수님께 여쭙니다. "내 발자국이니라, 나는 너와 항상 함께하였느니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어떤 곳에서는 발자국이 한 사람의 것만 있습니다. "왜 여기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네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내가 업고 지나갔느니라." 그제야 그는 깨닫습니다. 내가 혼자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주님은 나와 동행하셨습니다. 은혜로 나를 지켜주시고 은혜의 날개로 나를 감싸주셨습니다. 항상 내 오른손을 잡아 인도하셨다-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내가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서는 세상을 바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물질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결국을 알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37:25)" - 의인의 자손은 빌어먹는 법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 이렇게 보고 사는 사람은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악인의 종말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악인은 반드시 망하고 또 영원히 망하는 것을 환하게 봅니다. 오늘도 악인의 고통을 봅니다. 돈은 있으나 화목이 없습니다. 건강은 있으나 평안이 없습니다. 모든 악인이 당하는 내적인 고난과 그 썩어드는 고통을 제대로 보게 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연민이 생길 것입니다.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깨달았나이다 - 성전은 영원으로 향한 창문입니다. 깊은 세계를 보게 하는 지혜의 원천입니다.

패니 크로즈비(Fanny Jane Crosby)는 복음성가를 8천 곡이나 지은 유명한 작곡가인데 장님입니다. 한번은 목사님이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말하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그렇게 훌륭한 재능을 주시면서 왜 시력은 안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장님으로 살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장님으로 태어나기를 구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천국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눈을 들어 뵙게 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험한 세상은 하나도 보지 않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뵙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이대로 만족합니다."

여러분, 때때로 원치 않는 어려움을 겪습니까? 그것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은혜가 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과 고난을 통해서, 실패와 질병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엄청난 은혜를 바로 깨닫는 사람은 세상을 맑은 눈으로 봅니다. 긍정적으로 봅니다.

결코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둡게 보지 않습니다. 밝게 보고 하나님 중심으로 봅니다. 인간 중심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면서 삽니다. 사람의 욕심과 정욕을 보지 않습니다.

오늘도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바른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인됨을 깨닫고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연히 깨달을 때에 할 말이 없어집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과 자비와 능력으로 충만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시각, 이러한 지혜와 능력,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그의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큰복이 늘 함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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