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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의롭게 되는 길(롬3:19~26)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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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되는 길(롬3:19~26)

 

 

로마서의 주제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본문에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리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마는 그러나 이것은 기초적인 교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꼭 알아야 하는 교리인 것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시험, 아주 결정적인 시험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흔히 잘 믿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못된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하는 길로 출발해놓고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행위로 구원 얻는다는 길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처럼 믿음으로 시작을 해놓고 그대로, 주 앞에 갈 때까지 평생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가지를 못하고 그만 오히려 잘 믿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더 잘 빠져들어가요. 그래서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자기 의에 도취하게 되고, 자기 의를 의지하게 되고, 심지어는 다소라도 자기 의가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사이에 그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소중한 믿음에서부터 멀어집니다. 그 결과로 공포와 두려움과 자기 실망과 심지어는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리는 데에까지 빠지게 됩니다.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교리를 우리는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시작에서만이 아니라 끝까지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저 가톨릭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리 가운데는 아주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은 의가 있어서 구원을 받는다, 믿음이 없이는 의를 이루지 못한다-그러니까 의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의를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 결국은 어떤 것에 빠지게 되는고 하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출발일 뿐이요, 일단 시작해놓고는 자기 의가 있어야 구원받게 된다 하는 이것이 그 다음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이 가르쳐주는 교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 그 믿음을 확실하게 견지해나가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가운데 ''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할 때에는 의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의를 때때로 우리는 공로로 생각할 때가 있어요. 의는 공로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가끔 이런 경우가 있지요. 한 택시 기사가 손님이 두고 내린 돈 가방을 발견하고 열어본즉 많은 돈이 들어 있어서 이걸 고스란히 파출소에 갖다주었더니 이게 신문에 납니다. 아주 착하고 훌륭한 분이라고 기사화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칭찬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남의 돈 자기가 안 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많거나 적거나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아유, 몇천만 원이라며?" "그 사람 참 착하네"하고 사람들이 화제로 삼습니다. 이런 현상,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두가 다 도둑놈의 마음보를 가졌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이게 몇천만 원이면 어떻고, 몇억이면 어때요? 내 돈 아닌 건 내 돈 아닌 거예요. 내 돈 아닌 것을 파출소에 갖다줬으니 그것은 공로도 아니고 선행도 아닌 것입니다. 기본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될 것이 아닙니까? 별나게 칭찬할 것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사가 신문에 날 때마다 세상이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평균수준이에요. 칭찬할 것 없어요. 그건 공로가 될 수 없어요.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함이요, 마땅한 길을 말하는 것이에요. 사람들이 가끔 마땅한 일 하면서 칭찬 받으려 할 때가 많아요. 아내로서 마땅한 일, 남편으로서 마땅한 일, 또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것, 그런 마땅한 일을 놓고서 무슨 큰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예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의는 기본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의를 이루겠느냐 할 때에 그것을 진단하는 기준은 이렇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의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어야 돼요. 우리가 나 스스로 의롭다 한대서 의가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조금 더 소극적으로 생각한다면 오늘 이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어야 돼요. 두려움이 없는 그런 관계가 의입니다.

마땅하다는 게 뭡니까? 윤리적으로, 가령 부모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부모와의 바른 관계-부모와 화목하고, 부모를 만날 때마다 기뻐요. 반가워요. 그래야 합니다. 얼굴을 똑똑히 봐야 돼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본다면 뭐가 잘못된 것이지요. 만날 때마다 어딘지 두려움이 있다거나 웬지 껄끄럽다 한다면 무언가 어두운 것이 감추어져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의를 이루지 못한 거예요. 의라고 하는 것은 바른 관계입니다. 화평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런 관계라야 그것이 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어떻게 맺어지느냐 할 때에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느니라,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해야 된다 합니다. 거기서 우리가 양심을 말하게 되고, 십계명을 말하게 되고, 도덕법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생각해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그게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가끔 이런 얘기를 합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람인 고로 불가능하다-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합니다마는 일리가 있는 얘기입니다. 그래요.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불가능해요. 또 이미 타락했기 때문에 불가능해요. 이미 타락했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 그로 인해서 타락성이 생겼어요. 타성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게 죄로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든 것과 같아요. 그런고로 때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해요. 의인지 불의인지를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벌써 병들어버렸어요. 좀더 깊이 내려가서는 노예 상태에 빠져버렸어요. 내 육체도, 내 의지도, 내 지식도, 내 생각도 벌써 노예 상태에 빠져버려요. 내 감정도 정상적인 게 아니예요. 이렇듯 완전히 불완전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플러스 알파가 있어요. 또 하나 무서운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가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너무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 고로 어쩌고쉽게도 둘러댑니다마는 '인간인 고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통하지 않아요.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인고로'가지고 되는 게 아니예요. 환경이 어떻다 해서 봐주시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는 그 수준에 있는 게 아니예요. 여러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환경이 그렇고, 남들이 그렇고, 다 그러니까 나도 그랬다 해서, 내가 그렇게 해서 죄에 빠졌다고 해서 내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까? 하나님을 대할 때에 절대로 내 마음이 평안할 수 없어요. 정당화될 수가 없어요. 용서받을 수 없어요. 이것은 자기 자신부터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높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인간적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적인 것이에요. 하나님의 수준에서 온전해야돼요. 왜요?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까요. 수평적 관계의 의를 논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의가 먼저입니다. 근본적인 것입니다. 십계명도 처음의 네 가지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씀함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다,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다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스스로 인정해야 됩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혹이라도 내 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든가, 조금이라도 의를 더 세워야 한다든가 하는 생각을, 그런 망상을 가지지 말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러면 율법은 어떻게 되느냐--오늘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20)"--율법으로써는 우리가 죄를 알게 된다 합니다.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겠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에 율법을 생각하게 되고, 율법이라고 하는 거울을 마주하는 동안에 자기는 점점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울을 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울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이 많아요. 병원에 가면서도 손거울을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 상한 얼굴을 좀 낫게 보이도록 해 보려고 안간힘쓰는 것을 보는데, 부탁입니다. 병원에는 거울 가져가지 마세요. 안보면 되잖아요? 거울 자꾸 들여다보면서 요 모양 요 꼴 어쩌고 하면서 한숨 쉬고 탄식하고 자학하고그러지 말 것입니다. 조금 있으면 다 썩을 것인데요.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썩을 거예요. 아무튼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없으니까 거울에 비추어보게 되거니와, 그와 같이 율법을 봄으로써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분들을 봅니다. 몸이 약해져 보이기에 병원에 가서 종합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하면 안가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요. "왜 안 갑니까?"하고 물으면 "가나마나 뻔하니까요?"합니다. "뭐가 뻔해요?" "죽을 병 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가야지요." "못 고칠 건데요, ." "못고쳐도 알기는 해야지요." 중요한 점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해요. 정 못고칠 것이면 죽을 준비라도 해야지요. 그러니 진찰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도 이런 면에서 중요한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요. 여러분, 이것만은 잊지 마십시오. 율법은 몰라도 죄는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가 내 병이 무엇인지 몰라도 병은 병대로 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른다고 병이 없어진 게 아니예요. 그와 같이,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것이지, 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예요. 없던 죄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예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미 죄는 있어요. 죄의 결과도 있어요. 다만 내가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이제 율법을 통해서 죄가 무엇인지를 내가 밝히 알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성령과 율법을 대조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여러 곳에서 대조합니다. '성령과 율법'하고 말할 때에 성령의 역사는 율법과 다릅니다. 율법은 거울같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성령은 물과 같아서 성령을 가리켜 변호사라고도 해요. 보혜사라고 말씀합니다. 헬라어로 '파라틀레토스'라고 하는 이 말은 변호사라는 뜻입니다. 재판할 때에 보면 한쪽에는 검사가 있고 한쪽에는 변호사가 있어요. 검사는 어떻게든지 죄를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려고 애씁니다. 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변호사는 어떻게든 죄를 작게 설명하려 합니다. 그렇게 됐더라도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고이래서 이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혹은 죄가 적습니다 하고 말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나를 정죄하는 검사적인 것이고, 성령은 내 편에서 나를 변호해주는 변호사적인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그런고로 괴로워도 율법적 관계를 일단 일정을 해야 됩니다.

그에 관하여 차제에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율법의 세 가지 용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Three Uses of the Law'--이것은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을 생각할 때마다 꼭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율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첫 번째로,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규범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죄고, 이것이 죄다, 내가 미처 죄인 줄 몰랐는데 율법을 보면서 비로소 내가 죄인임을 안다, 좀더 나아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다 하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것, 안식일을 지키는 것,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게 다 뭡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종종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지마는 결국은 율법 속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그러면 왜 말씀하시는 것이냐-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부모에게 효도하라 할 때에 부모에게 효도해 가지고 하나님 당신이 이익볼 게 뭡니까? 물론 하나님께 영광되겠지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이 복된 거예요. 효도함으로 복되고, 효자가 효자를 낳으니 복됩니다. 가문에 효라고 하는 덕이 있을 때에 모두가 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효자가 생기기 시작하면 가문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율법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 쉽게 말하면 나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하나 하나가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당신의 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 이렇게 해야 너희가 행복하니라, 하고 말씀해주신 거예요.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로, 성경에는 이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말해요. 율법은 우리를 간접적으로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쓰다가 못 지키거든요. 그러면 '주여 어찌하면 좋으리까'하고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옵니다. 나와 가지고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조건을 거셨어요. 굉장한 심리적 유도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아느뇨, 압니다. 이러이러한 겁니다, 이걸 지켰느뇨,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예수님께서 기대하신 대답이 무엇일까 싶어요. 한 번 상상을 해보세요. 이 사람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할 때에 주님께서 '좋다, 그렇다면 너에게 있는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아주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아마도 이 사람은 돈이 있으니까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 교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네가 물질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구나,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정말로 영생을 원한다면 그 때에 나를 좇으라-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것을 심리적으로 다시 한번 추리해봅시다. 이렇게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율법을 지켰느뇨, 하셨을 때에 이런 대답을 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누가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율법을 어찌 다 지킬 수 있겠습니까, 형식적으로는 지킨 것처럼 될는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누가 율법을 지키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겠습니까? 아무리 해보려고 해도 안되겠습디다, 그걸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이렇게 예수님께 여쭈었더라면, 제 생각 같아서는 예수님께서 당장에 구원이 네게서 멀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그쯤 되면 벌써 절반은 예수 믿는 사람이거든요. 이것이 율법의 제 2용법입니다.

율법이 무섭게 협박을 합니다.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죄 값은 사망이다, 하고 말입니다. 정말로 율법을 지켜보고자 애쓴 사람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잘해야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켰기에 다소라도 지킨 것처럼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 교만을 가질 수 있을 뿐입니다. 정말로 내적으로 깊이 생각하면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몽학선생의 인도를 받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그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루터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참으로 율법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그리스도께 대한 은혜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적 고민과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때에 그 은혜가 정말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율법은 무엇을 하나는 것인지를 높은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구원 얻기 위해서 율법 지키는 게 아니라 구원 얻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율법입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 받고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율법의 제 3용법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십계명을 외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며,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 근거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십계명의 서론입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서론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2)"하고 전제하고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3)"합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이걸 지키면 구원 얻겠다, 이걸 지키면 홍해를 건너서 구원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예요. 구원해놓으시고, 광야에 데려다놓으시고, , 구원했으니,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켜라--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곧 기독교적 의미에서, 신학적인 의미에서, 혹은 성도적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이것이 곧 율법의 제3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율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또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합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완전히, 전적으로 포기한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 진정한 겸손이 있고, 그 때부터 믿음이 있고, 사실은 다른 사람 앞에도 아주 좋은 사람이 됩니다. 보세요. 흔히 우리가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저 잘났다는 사람입니다. 저 잘났다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 사람은 자기 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남을 곧잘 비판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은 남을 볼 때에 오십보백보로 봅니다. 더해야 거기서 거기요, 덜해봐야 거기서 거기예요. 내가 제일 죄인이지, 겉으로는 달라 보일는지 몰라도 속을 보면 나야말로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겸손해요. 누구에 대해서도 비평할 마음이 없어요. 감히 평할 생각이 없어요. 이런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이요,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 앞에도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의롭게 되는 길을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먼저는 법적 관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법정을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법정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율법이 심판을 하고 성령이 우리를 위로하겠습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로마서 8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정죄함이 없으니라--재판정에서는 재판장이 땅땅, 유죄, 하면 유죄이고 무죄, 하면 무죄입니다. 정죄함이 없느니라, 함은 무죄다 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죄 판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느냐--하나님의 법리에 따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는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라고 하게 되면 먼저는 율법 자체가 있고, 두 번째는 율법에 대한 해석이 있습니다. 셋째는 율법에 대해서 의롭다 하고 하나님께서 정당화시켜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인도주의적으로, 때로는 하나님의 높은 사랑에서, 때로는 합리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게 됩니다. 보세요. 안식일을 지켜라, 했습니다. 간단한 말씀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했지요? 전쟁에 나가면 죽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대장을 죽였는데 살인입니까 아닙니까? 이래서 문제가 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율법이 중요하지만 율법에 대한 해석이 또한 중요해요.

그 다음에는 정당화라는 게 있어요. 분명히 골리앗 대장을 죽였어요. 살인이에요.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예요. 그 사람이 미워서 죽인게 아니예요.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한 것일 뿐이지요.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이것을 행동으로 이룬 것일 뿐이에요. 내가 살인한 게 아니지요.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것을 내가 집행한 것이에요. 의미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행동은 꼭 같은 것처럼 보이는데 내용은 달라요. 여기서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디카이오오'라고 하는 동사입니다. 의를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로 취급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조심해야 됩니다. 죄인이 의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예요. 죄인은 어디까지나 죄인이에요. 그러나 그것을 죄 아닌 것으로 취급하고, 죄 아닌 것으로 인정하고, 죄 아닌 것으로 account,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간주-그렇게 계산한다제가 이걸 어떻게 우리말로 설명해야 되나 하고, 어려운 철학적 용어, 신학적 용어 쓰지 않고 좀 쉬운 말없나 하고 열심히 연구해봤는데 좋은 게 하나 있어요. '봐준다'입니다. 그렇잖아요? 나쁜 짓이지만 좋은 것으로 봐주셔요. 그 내심을 봐서, 그 중심을 봐서 봐주시는 거예요. 이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말씀의 뜻입니다.

보세요. 여기에는 조건이 몇 가지 있어요. 첫째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워낙 사랑하다보니 잘못하는 것도 예뻐요. 우는 것도 예뻐요. 뭘 깨뜨려도 예뻐요. 깨뜨리면 손해지만 용기 있다, 커서 장군 되겠다이러지 않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사실은 잘못된 것인데도 좋게 보여요.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오는데 여학생들이 시험을 보고 나오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채점하실 때에 잘된 것은 잘된 대로 채점하시고 못된 것은 애교로 봐주세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못 봐준다"했더니 "제가 이렇게 예쁜데도 안돼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넌 참 시집가면 잘살겠다"하고 말았어요. 아주 애교가 만점이에요.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예쁜데도 안돼요?"하는 거예요.

예쁘게 보면 실수도 다 예쁘게 보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아름다워요. 그러나 잊지 마세요. 잘못은 잘못입니다. 잘한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잘한 것으로 보아줄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중요합니다.

또하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참 중요해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누구를 믿어요. 그가 지금은 실수했어요. 잘못했어요 그러나 그의 본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 그의 장래를 믿어요. 오늘 한번 실수했지만 앞으로는 안 그럴 것이다, 합니다. 자식 향한 부모의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녀들을 키우지요. 오늘 잘못한다고 해서 이건 싹이 노랗다, 이건 끝났다, 하고 보는 게 아니거든요.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중요한 얘기가 있지요?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있어 3년 동안 열매가 없으므로 주인이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3년 동안 기다렸으면 됐지 더 뭘 봐주느냐, 찍어라, 합니다. 그 때에 과수원지기가 믿음을 가지고 나옵니다. 1년만 더 봐주세요, 내가 이렇게 수고하겠습니다--이것이 믿음이에요. 이 과수원지기는 1년만 더 수고하면 꼭 열매가 맺히리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그 신념이 있어요.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요. , 받는 사람이 믿음으로 받아요. 믿는 것이 너무 귀해요. 분명히 잘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을 믿어요. 용서해줄 줄 믿고 있어요. 이거 어떡하면 좋아요? 전적으로 믿고 있는 거예요. 분명히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분은 나를 이해해주실 거다, 내 중심을 이해해주실 거다, 내가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주실 거다, 저 분의 날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을 거다-철석같이 믿고 들어가는데는 도리가 없어요. 이게 믿음이에요. 이 객관적인 믿음이 주관화되어 가지고 받아들여지는 순간에 그것을 보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또 한가지는 다른 사람의 간청이 있을 수 있어요. 당자는 내가 보기에 틀렸는데, 그 옆에 내가 좋아하는 분이 있어요. 그 분이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거든요.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롯은 죄를 지었어요. 잘못된 것 같아요. 타락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거든요. 아브라함을 보아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하나님께서 롯을 봐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롯이 구원받지 않습니까? 아무리 봐도 롯은 구원받을만한 사람이 못돼요. 그러나 아브라함을 보시고 구원하십니다. 그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고, 또 많은 성도들의 희생이 있고, 많은 의로운 자의 기도가 있어요. 그럴 때에 주께서 저들을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이럴 때에 여기에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오직 믿음에 근거하는 것이에요. 단적으로 말하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믿고--요한복음 316절이 이래서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어요.

사랑하시고, 우리는 그를 믿어요. 믿음으로 받아들여요. 이런 관계가 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분명히 죄인인데도 의롭다 하십니다.

귀엽게 봐 주시고, 긍휼히 여기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의 눈으로 봐주십니다. 믿음으로 봐주십니다. 이것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이 있어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의인이 되는 것도 아니예요. 죄는 죄 그대로 있어요. 다만 그가 나를 의롭다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칭의라고도 하고 득의라고도 합니다.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지마는 결국은 의로 인정해주신다 하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은 어떻겠습니까? 추호라도 교만할 수가 없어요. 죄인이니까, 죄인으로 사랑을 받은 것이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래서 항상 감사하고, 항상 망극한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항상 겸손할 것입니다. 조금도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의롭게 되는 길에는 법정과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제사적 의미가 또 있습니다. 화목 제물을 드렸어요.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죽 내려오는 제사법에 기인합니다. 양이 대신 죽었어요. 그를 믿을 때에 의롭다 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것으로, 이미 벌받은 것으로 간주해요. 양이 대신 벌받았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대속의 역사가 있어요. 그래서 화목제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여기에 십자가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대속적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노예에 대해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노예를 사람들이 팔고 사고하는데 분명히 노예가 죄를 지었어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에요. 당장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죽일 것 뭐 있습니까? 내가 이 노예를 사지요'합니다. 그래서 돈을 내고, 30을 주고 이 노예를 사게 되면 그 순간에 이 사람은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주께서 값을 치르셨어요. 그래서 대속의 역사를 이루셨어요. 주께서 화목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옛날에 있던 노예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또 유대사람들의 제사를 배경으로 하는 속죄적 관계를 우리에게 말씀함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아주 귀한 말씀이 26절에 있습니다. 소리내어 읽어보세요.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이렇게 해서 자기 의를 이루십니다.

동시에 우리 또한 의롭다 하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 받게 된다 함입니다. 이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교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다소간에 조그만 의를 행했다고 해서 공로가 되고, 조금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이 때문에 내가 용서받는 것처럼 '보상하는 마음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그런 쓸데없는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우리의 선행이 공로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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