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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의 운명(사도행전 1:12~20)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어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한테 분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귀한 분부가 바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앞에 하시고 간단히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이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본 사도행전에서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까지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하심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자면,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시어 감동을 줄 때까지,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흩어지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십니다. 먼저 약속의 성령을 받고, 그 다음에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흩어지라 하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전도가 먼저가 아님을, 선행이 먼저가 아님을, 행동이 먼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여서 기다리라-이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성령이 임할 때까지는 절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성령을 받으면 너희가 권능을 얻게 될 것이요, 권능을 얻으면 너희가 땅 끝까지 나아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순종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순종에는 가감(加減)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순종을 두고 왜냐고 물어서는 안됩니다. 언제까지냐고 물어서도 안됩니다.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것이 순종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순종한다 하면서도 말이 너무 많아요. 물음도 많고 의심도 많고 걱정도 많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순종(順從)입니다. 문자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오고 기다리라 하시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영국에 건망증이 심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볼일이 있어서 먼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녀석이 마차 타는 재미에 저도 가겠다며 따라나섭니다. 아이를 데리고 한나절을 가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마침 그 근처에 들를 곳이 있어서 아이 보고 "너 여기서 좀 기다려라. 금방 돌아오마"하고 볼일을 보러 갑니다. 그런데 재상은 그만 아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을 마치자 혼자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아들을 찾습니다. "이 녀석 어디 갔어? 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인사도 안하고……" 부인이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아니, 아이는 어떻게 하고 혼자 오셔서 애를 찾아요?" 그제야 아이를 길에 세워놓고 볼 일 보러 간 것에 생각이 미칩니다. 아이를 찾으려고 밤새 다시 그곳으로 헐레벌떡 달려갑니다. 다음날 아침에야 그 자리에 도착합니다. 아이가 없으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 졸이며 가보니 어김없는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들이 그대로 서 있습니다. 밤새 혼자서 있는 아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얘야, 우리 집에 가자. 아버지 오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쉬자"하고 권해도 아이는 "아니예요.
아버지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린 것입니다. 마침내 아들을 찾은 재상은 안도의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아이 보세요. 순종이란 이런 것입니다. 서 있으라면 서 있는 것입니다. 1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리도 말이 많습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면 아주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직행해서 돌아온 것입니다. '집에 갔다오겠습니다, 고향에 갔다 오겠습니다'하고 어디 들렀다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감람원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곁눈팔지 않고 내려와 모인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니 갈릴리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마는, 저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저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분부 하셨으니까요. 여기 있으라 하셨으니 당연히 여기 있어야지요. 감람원에서 마가의 다락방으로 장소를 옮겨서, 곧 예루살렘의 한가운데서 주님의 약속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하셨지 언제까지라고 기간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저들이 기다린 기간은 열흘입니다마는, 성경에는 이 기다림의 시간에 대하여 며칠이다, 몇 개월이다, 몇 년이다 하는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기다려라-그것뿐입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만을 믿고 기다린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기약도 없이 우두커니 기다린다는 게 쉬운 일입니까? 그리고 사실 이 열흘이라는 기간은 상당히 긴 시간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오늘일지 내일일지, 아침일지 저녁일지 감감 모르니 한시인들 자리를 뜰 수가 없습니다. 잠시잠깐 자리를 떴을 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면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영광스러운 순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20명의 문도가 그대로 앉아서 기다린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을 상상해보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바른 응답이요 바른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내려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12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걷지도 말아야지요. 하지만 안걸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숨도 쉬어야 하겠고, 먹기도 해야 하겠고, 참으로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큼 숨을 쉬고, 얼마큼 음식을 먹으라고 자세히 일러주셨으면 좋았겠습니다만, 성경에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안식일에는 얼마나 걷는 것이 좋겠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침내 저들은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뜰을 밖으로 멀리 한바퀴 빙 도는 거리-이것이 안식일에 알맞은 거리라고, 그 거리는 당시의 척도로 이천 큐빗입니다. 큐빗은 손끝에서 팔목까지의 길이입니다. 이천 큐빗을 지금의 척도로 환산해보면 약 반 마일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얼마 안되는 거리입니다.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한바퀴 도는 것은 죄가 안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안식일에 알맞은 거리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을 엄숙하게 지키려고 애쓰는 저들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무리의 수가 일백이십 명이라고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여기서 일백이십 명이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새 이스라엘의 상징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들이 있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여성들이 따랐고, 그리고 형제들이 있고, 그밖에도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뒤에 남은 정수(精粹)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굳게 뭉친 참제자들인 것입니다. 그실 이 일백이십 문도(門徒)로 해서 오늘의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본문말씀대로 결코 흩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예루살렘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의 일을 했습니다. 첫째, 기도를 했습니다. 둘째, 열두 사도의 반열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가 빠진 그 사도의 무리에 한 명을 보선(補選)하여 채우려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째,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눈앞에 있는 사건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그것을 상고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하나하나에 해석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건 자체를 내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 말씀의 맥락에서 해석하게 됩니다. 요샛말로 성경연구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적 해석을 한 다음에야 행동에 옮깁니다. 이렇듯 귀중한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저들은 모여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14절)." 기도가 우선적입니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마음과 정성을 다 모아서 오로지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칼뱅은 이를 가리켜 '대표적인 기도시간'이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도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기도는 저들 일백이십 명이 모여서 드린 그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요즘도 가끔 보면 '마가의 다락방이 되게 해주시고' '마가의 다락방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고'라고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가의 다락방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기다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오로지 겸손하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칼뱅은 이러한 저들의 기도를 '아주 끈질긴 기도'라고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도는 진실한 기도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또한 합심기도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내 진심을 다하여, 다같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가장 힘있는 기도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우리는 아주 전심으로 기도하는 여인 한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서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는 않지만, 입은 열심히 들먹들먹합니다.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아주 집중해서 기도합니다. 제사장 엘리는 그러한 한나의 모습을 보자 술에 취하여 중얼거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녀를 나무랍니다.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이에 한나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하고 대답합니다. 엘리가 그녀의 마음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같이 경배를 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녀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마침내 응답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이 집중적 기도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대로 엎드려 기도합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진정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좀 실례되는 말씀입니다마는, 가끔 산에 가보면 금식기도 한답시고 틀어박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나흘 남았다 사흘 남았다 하며 그 날짜를 꼽고 앉아 있습니다. 날짜 채우기에만 급급합니다. 배고픈 것 참고, 추운 것 참으며 날짜를 채우느라 퍽도 애를 씁니다. 꼭 이래야 되는 것입니까? 심지어 어떤 사람은 링게르(Ringer) 주사를 맞아가면서 금식기도를 합디다. 뭣 좀 먹어야 한다는 주위사람들의 권유에, 아니라고, 40일을 채워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영양 주사를 놓아주었습니다. 먹지만 않았지 주사를 맞았으니 그게 그거지요. 들것에 실려 내려오는 판국에 날짜만 채우는 금식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은 진정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언제 그렇게도 시간이 갔나 싶게 하루가 다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철야기도입니다.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틀 밤이 지나가고 사흘 밤이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금식기도입니다. 나 금식한다 하고 먼저 선언부터 해놓고 시작하는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느라고 식사시간 마저 절로 잊어버리는 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이지, 금식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순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이 목적인지를 확실히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기도에 몰입하다보니 배고픈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식사시간을 잊어버렸습니다. 어느 사이에 사흘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금식기도요 철야기도입니다. 가만히 보면 철야기도도 두들겨 깨워야 간신히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디다. 너무나 의식적이요 인위적입니다.
인본적입니다. 전혀 집중적인 것이 없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쓰는 바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좀더 깊이 몰입하는 기도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합심기도가 중요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함께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 19, 20)."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고, 열 명, 백 명, 천 명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할 때에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많은 이적을 보이기로 이름난 미국의 캐서린 쿨만(Catherine Cullmann)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 다르고,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은 마치 불과 같습니다. 장작불을 피울 때에도 보면 나뭇가지를 하나 피울 때와 둘 피울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장작을 많이 가져다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여러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데에 더 큰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그들의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운집한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 일렬로 환자들을 죽 앉혀놓고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저는 여기서 기도할 터이니 여러분은 마음 속으로 기도하시고 '아멘'하십시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아주 짧습니다. 불과 몇 초 동안 머리에다 손을 얹고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기도를 마치자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함께 '아멘'을 합니다. 뒤이어 그는 환자들보고 일어서라고 소리칩니다. 그러자 환자들이 벌떡 일어섭니다. 물론 일어서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면 낫는 것이요 안 고쳐주시면 할 수 없는 일이지"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다 싶더군요. "환자가 나았다면 그것은 내가 고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했으므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와 합심기도의 능력에는 이렇듯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하여 합심기도를 합니다. 한마음으로 하는 기도, 참으로 위대한 기도입니다. 여러분, 전심으로 기도하고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함께, 친지가 함께, 구역 식구들이 다함께 하나의 사건을 위하여 한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아와 함께 기도합니다. 짧은 시간의 기도이지만, 함께하는 기도이기에 그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일백이십 명이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이 기도는 약속을 받고 기다리는 마음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저들이 스스로의 소원을 빌었습니까? 스스로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습니까? 돈을 벌게 해달라고 했습니까? 자녀의 입학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 자기의 소원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기다리는 마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저들의 기도는 기다림의 자세를 바로 하면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는 그런 의미의 기도였습니다. 내 소원을 성취하고자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 약속하신 것을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주시옵소서'하는 마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립니다. 마음을 다 비웠습니다. 어떤 일에든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을 이제 나타내주시옵소서--성령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기다림의 자세를 바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큰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가들이나 신학자들은 초대교회 당시 복음을 전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두 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는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복음을 전할 때면 어김없이 '어떻게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죽느냐,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는 부정적인 반응이 따랐습니다. 때문에 전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 :16)"라고도 말씀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 복음은 곧 십자가요,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함입니다. 바울은 결코 십자가가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 없다고, 자신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어쨌든 이 십자가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어떻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가룟 유다의 일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어떻게 이같은 한낱 제자의 손으로 팔릴 수 있느냐고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가룟 유다는 골치 아픈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옥의 티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오다니, 말이 됩니까?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듯 가룟 유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꺼림칙한 존재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이야기할 때면 오물처럼 따라붙는 존재였습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일백이십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베드로가 일어서서 입을 엽니다.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指路)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6절)" 가룟 유다는 제 갈 곳으로 갔다고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베드로는 유다 사건을 인간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정치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 안에서 풀이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 사건은 이미 예언된 것이 성취된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본래부터 예언되었던 일이다, 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해답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섭섭한 일이 있습니까, 마음 아픈 일이 있습니까? 괴로운 일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죽 읽어가면서 성경 안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서른이 넘었을 무렵에 병으로 단산(斷産)을 맞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낳아야 하겠는데 단산을 했으니 큰 걱정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으시다가 사무엘상 1장에서 기도로 아들을 낳은 한나의 이야기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10년을 꼬박 하루에 두 번씩 새벽과 저녁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낳으신 뒤에도 그 습관은 그대로 이어져 어머니는 저녁에도 혼자 교회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고향에 가고 싶어하는 이유의 하나가 그 교회까지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저희 고향을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우리 집은 물론, 교회까지도 불타서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수풀만 우거져 있어요. 그렇더라도 저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어머니가 10년을 하루같이 다니시던 그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을 성경에서 얻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그 사례(case)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성경 몇 장 몇 절에 의해서 그것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성경에 해답이 없거든 움직이지 말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입니다. 가룟 유다의 그 모순된 사건도 성경 안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결국 베드로는 성경에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언대로 성취된 것뿐이라고 담대히 말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베드로는 다윗의 말씀, 곧 시편 41편 9절에서 그 사례를 찾아냈습니다. "나의 신뢰하는 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베드로는 이 말씀이 응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성경에서 사례를 찾는 저러한 접근방법을 취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반드시 그 사례를 찾을 것이요, 성경의 예언이 오늘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크신 경륜 속에 있는 필연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연한 일은 없습니다. 감기에 한번 걸린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쩌다 차 사고를 당하지만 그 또한 우연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경륜 속에서 있어진 사건이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을 성경 안에서 얻어내야 합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줍니다. 보십시오. 그리함으로써 저들의 마음속에 있던 가룟 유다의 문제도 깨끗이 잊어버리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또한 베드로는 유다 사건을 놓고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25절)." 유다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옥의 심판은 물론, 땅에서도 심판을 받았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이러한 유다의 비참한 최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유다의 비참한 최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18절)." 예루살렘사람들은 다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은 죄인은 편안하게 죽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유다는 창자가 흘러나온 채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교훈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 진리를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중요한 신학적 문제가 있습니다. 예언이 있고, 그 예언이 응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간이 혼란을 일으킵니다. 칼뱅은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그의 죽음이 예언되었다고 해서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예언을 이루고자 그 짓을 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사악한 마음 때문에 그 짓을 했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팔아 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공로자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하지는 못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만들고 만백성을 구원할 구주로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가룟 유다의 마음이 어디까지나 사악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과 하나님의 구속적인 역사를 알고 자기가 대신 희생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이었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방법적으로 잘못된 것은 그대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는 절대로 공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가룟 유다는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세상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비교하여 유다의 죽음에 대하여 한번 살펴봅시다. 마태복음은 유다의 죽음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27: 5)."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18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두 기록을 합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으려고 하다가 그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배가 터져서 죽은 것입니다. 너무나도 끔찍한 죽음인지라 자세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하나씩 하나씩 기록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곤두박질해서 배가 터져죽었다고 기술하고, 한 사람은 목매달아 죽었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말씀은 모두 그 죽음이 자살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유다는 자기 생을 더 지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댓가로 받은 돈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감당하기 힘겨운 고통이었기에 더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았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늘 생각합니다만,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갈 것은 가룟 유다는 갈릴리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만 갈릴리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외로운 사람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특별히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와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열심(熱心)이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위기가 닥친 것을 알았을 때, 제사장 편에 붙음으로 당면한 위기에서 자신의 안위를 챙기고자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같은 정치적 계산으로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돈 욕심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룟 유다의 똑똑한 머리에 속아넘어가는데, 예수님만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그는 평상시에도 그런 예수님을 증오했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그 즈음의 배경으로 보아서 그는 아주 강한 민족주의적 혁명가들의 모임의 일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정치적 혁명을 기다리다가 도무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까 예수님을 팔아 넘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결코 애초부터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가면 예수님께서는 큰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요, 예수님의 그 능력 덕에 자신은 출세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만일에 능력을 나타내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주님을 버리고 제사장 편에 붙으면 된다고 하는 잔꾀를 부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십자가에 비참히 죽으십니다. 유다는 깜짝 놀랐습니다. 결국 그는 부득불 이 가책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죽음이라고 하는 사건이 초대교회의 첫 번째 이슈로 떠오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대로 된 것입니다. 예외나 우연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나아가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있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 문제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오늘 당하는 모든 문제를 믿음 안에서 이해해야 하고, 성경 안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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