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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랑(요 15:11-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바로 앞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는 반드시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열매를 맺듯이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유기적이고도 생명적인 절대 관계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이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사명이 있음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요절을 찾아본다면, 본문 16절을 들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선택의 교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택을 흔히 예정과 같이 생각하려고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과 선택은 결코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선택의 교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어 주도적으로 제자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제자 삼았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숙명적으로 복을 받게 되었다든지, 운명적으로 하늘 나라에 가도록 예정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사명자로 선택하여 부르신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예정과 선택이 같은 말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선택이란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 축복도 하나님 편에서 주도적으로 역사 하시는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도 부모를 사랑하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주도적인 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물론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것조차도 부모가 가르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 보았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어린 아이가 식사 도중에 포크를 떨어뜨렸습니다. 아이들의 의자는 어른들의 의자보다 높기 때문에 떨어진 것을 줍기가 불편합니다. 이 때 아주머니가 주어서 닦아, 다시 줍니다. 아기가 아무말없이 식사를 계속하자, 어머니는 아이를 불러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Say something)고 나무랍니다. 어린아이는 무슨 뜻인지를 몰라 울먹울먹하자 어머니는 가르쳐 줍니다. "이럴 때에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아이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밥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맙다는 말도 가르쳐야 합니다. 즉, 우리가 하는 효도도 다 배운 것이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부모가 주도적입니다. 대단히 미안한 말씀입니다만 효도 받지 못하는 부모들은 할 말이 없습니다. 잘못 가르친 결과이니까요. 고맙다는 말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저절로 알아서 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부모가 먼저 주도적으로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들도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깨달아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주도권이 주님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일방적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랑은 효과적입니다. 일방적이라고 하여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사명적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라." 여기에 사명이 있습니다. 그냥 공짜로 사랑하거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효과적인 사랑으로서 열매를 맺는 의미있는 사랑이요, 뚜렷한 사명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택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택함을 받아서 지금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내가 사는 주위환경, 내가 당하는 경험, 이 모두가 택함 받은 것입니다. 혹 병들었다 해도 사명적으로 이유가 있습니다. 실패해서 남달리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택하신 사명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본문에서 주께서 우리를 택하신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 : 11) 첫째,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기 위해서 너희를 택했다는 것입니다. 내게 향한 개인적인 목적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한 수고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효도 받겠다는 것이 목적입니까? 효도로 되돌려 받으려는 장사 같은 마음이 아니라 자식들이 잘 되어서 행복하고 명예롭게 살라는 것이 목적입니다. 시집간 딸들이 친정에 들리면 친정 어머니들은 이것저것 자꾸 싸 주십니다. 그저 주고 싶고 딸이 기뻐함을 보고 싶은 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기쁨을 너희에게 주고 너희 안에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너희를 택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정말 기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여기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의롭다 하시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되는 기쁨입니다. 마치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탕감해 주듯이, 노예를 해방해 주듯이, 죄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우리들을 풀어 주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해방의 기쁨입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귀신의 공포로 벌벌 떠는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자유롭게 했습니까? 이 자유의 기쁨, 구원의 기쁨이 바로 예수 믿는 기쁨입니다.
필자는 가끔 100년 전의 우리 입장을 한 번씩 생각해 보곤 합니다. 여자들은 집안에 갇히어 마음대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가리는 것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사하는 날짜, 결혼하는 날짜가 반드시 되는 날이 있고 안 되는 날이 있었습니다. 정말, 복음이 들어오므로 얼마나 자유 해졌는지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비오는 날이 아니면 아무 날이든 좋다고 합니다. 가리는 것이 없으므로 예수를 바로 믿으면 매이는 것이 없이 자유 하여 좋습니다.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이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궁상맞게 울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3에서, "나는 너희를 위하여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다 기쁨으로 간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억울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거두절미하고, 결국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돌아가신 것인데, 우리의 생각은 왜 달라야 합니까? 이것은 의로운 기쁨이요, 진리로 인한 기쁨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허황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거나,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병들었다고 슬퍼하겠습니까? 억울하다고 슬퍼하겠습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내 마음에 있는 충만한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하여 주님은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기쁨은 받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는 기쁨으로 의인을 위한 의인의 고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기쁨, 거룩한 기쁨, 희열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둘째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 : 12)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기쁨과 사랑이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뻐하니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니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을 때만 기쁜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더욱 기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 안에 기쁨이 있고 기뻐한 다음에는 사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사랑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질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사랑을 생산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셋째는 친구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선택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 13-14)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잘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친구라고 부르신 사실입니다. 황송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친구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높은 분이 낮추어서 같은 수준으로 들어가면서 친구라고 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신분이 낮은 쪽에서 높은 분을 향하여 친구라고 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로서 지금 형편없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내일 아침이면 모두 도망갈 사람들이므로) 너희는 내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께서 자신을 제자들만큼 낮추었다는 뜻도 되고, 한편으로는 제자들을 예수님만큼 높여서 대했다는 뜻도 됩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할 때, 내려다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지 마십시오. 나와 같은 수준에 놓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부인이 남편으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그 남편을 사랑한다고 말해 참 훌륭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부인이 말하기를,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으므로, 원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자, 이 사랑이 바로 된 것입니까? 원수를 사랑하듯이 남편을 사랑하다니 정말 먼 이야기입니다. 사랑에는 종류가 많습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돈 몇 푼 주면서 사랑을 베풀었다고 대단해 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와 같은 수준에 놓고 "당신과 나는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입은 것뿐입니다"하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인으로만 사랑하셨거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같은 수준으로 내려오시어 너희는 내 친구다라는 의식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언어를 연구한 사람의 말에 의하면, 너는 나의 파트너다, 너는 나의 동역자다, 너는 나를 위하여 장차 수고해 주어야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격적이요, 대화적이요, 수평적인 관계에서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가능하면 상대방을 나보다 더 높이고 존경을 겸한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5)고 일대일의 위치에서 논의하고 서로 비밀 없이 묻는 입장에서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수준에서 사랑해야 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필자가 60년대 미국에 유학할 때에만 해도 그 곳에서는 레이디 퍼스트가 분명했습니다. 자동차를 탈 때면 으례 남자가 문열어 주어야 여자는 타고, 또한 내릴 때도 반 바퀴 돌아와서 열어주어야만 내렸습니다. 저는 레이디 퍼스트에 익숙치 못해 한 번은 문을 열어주고서는 닫는 것을 잊어버려 그냥 출발했더니, 그 여성은 문 열어 놓은 채로 앉아 있어서 무척 속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70년대에 와서 다시 가보았더니 그렇게 철저하게 레이디 퍼스트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애완동물인줄 아느냐? 우리도 문 닫을 수 있다"고 해서 남자들이 일일이 열어주고 닫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일대 일로 보자는 뜻입니다.
조금 잘못 생각하면, 사랑 받는 것과 귀여움 받는 것을 동일시하기 쉬운데,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귀여움을 받을 때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가 어려운 관계입니다. 인격대 인격이 마주쳐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기거나 귀엽게 봐주는 관계가 아니라, 친구의 관계, 대화적 관계에서의 사랑이 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한국 남자들은 이런 사랑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거의가 일방적이요 하향식입니다. 민주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은 아마도 다음 세대에서나 기대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친구 의식으로 서로 믿고 비밀 없이 인격적인 관계로 사랑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사랑 중에 친구 사랑이 가장 어려운 사랑임을 아십니까? 나보다 못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도덕적 사치로 자기 희열을 느낄 수 있어서 보다 쉽게 베풀 수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원수 사랑도 친구 사랑보다는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친구 사랑은 라이벌로서 경쟁 상대이기에 팽팽히 맞서며 한 치의 양보도 어려워서 사랑하기가 정말 힘이 드는 관계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사랑이 없다고 말씀한 것을 이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문둥병자를 위해서 살아야 큰 랑일 것 같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큰 사랑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등한 위치에 있고, 경쟁하는 상대이므로 사랑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할 때의 목숨이란 육체의 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는 목숨이 "푸시케"이며, 영어로는 "소울"(soul)이라고 번역을 합니다. 영어에 "싸이컬러지"(psychology)라는 말이 있는데, 단어의 첫자가 'p'로 시작되어 글자대로 발음하면 프싸이컬러지입니다. 이 단어가 바로 푸시케에서 나온 말로써 마음, 심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정신에다 몸까지 합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연히 돌발적으로 친구를 위해 희생하게 된 것을 큰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친구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희생하고, 친구의 명예를 위해서 내가 굴욕을 당하고, 친구를 의롭게 하기 위해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 친구를 위한 큰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정신과 몸을 합하여 목숨을 버릴 때 이에 더 큰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사람 중에 가장 귀한 사랑이요, 가장 수준 높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서에 보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으므로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로 대했다는 엄청난 사랑을 알고 항상 기도로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런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파트너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명자로 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 : 16) "과실을 맺게 하고 과실을 항상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여기에 우리의 일이 있습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열매 없음을 꾸중하고 계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택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나 하나만 예수 믿고 잘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까? 이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 선교사로 보냄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남편의 사랑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가정을 구원하는 것이 내게 맡겨진 귀한 사명으로 이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큰 사명을 받아 오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맺지 못한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한,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내용은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 전체가 예수님의 마음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가도 끝에 가서 부록처럼 예수의 이름이 곁들여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되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열매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친구라 부르셨고 우리를 택하셨으므로 택함의 이유와 택함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이 부름에 응답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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