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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제물(롬15:14~33)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불러서 거룩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나는 그 일을 감당한 제사장이라'---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리는 거룩한 제물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기록을 볼 때마다 바울은 참 위대한 사도인 동시에 아주 높은 덕을 가진 분이요, 겸손한 분이었다, 그야말로 철저한 하나님의 영광만을 꾀하는 마음의 사람이었다---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큰일은 하면서도 자기 일은 한 부분에 불과한 작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지마는 항상 자기를 작게 여기면서, 자기는 오직 순종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사도 바울은 참으로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에는 깊이 생각해야만 이해가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15절)"----나는 너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는 그 정도의 협력자요, 그 정도의 일을 하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본문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보세요. 그가 얼마나 로마교회를 높이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본 일이 없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저들의 신앙이 높은 수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바울 정도라면 D똃똕TXT?너희들끼리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 것이 오죽하겠느냐? 내가 가서 다시 가르쳐야 될 것이다. 내가 가서 똑바른 교리를 가르쳐야 그 때부터 온전한 교회가 될 것이다'---이렇게 말함직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요. 누구를 통해 역사하셨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세워진 교회이기에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대로 선함이 가득하고 서로서로 권면해요. 서로서로 권면해서 충분히 예수 잘 믿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사도 바울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바울은 지금 무엇을 하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가 있어서 내게 주신 은혜를 위하여 내가 너희들을 돕고자 한다는 바로 그것이에요. 그래서 '생각나게 한다'는 말로 오늘의 본문은 시작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모두(冒頭)에 그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로마에 가고자 한다. 내가 가려고 하는 것은 내가 가서 무슨 특별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너희들의 잘못된 신앙을 교정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 1:11)"---내게 주신 은사가 따로 있거든요. 그런고로 내게 주신 바를 나누어주려고 한다, 이것은 너희의 마음에 보탬이 되기 위한 것이지 수정하든가, 교정하든가, 바로잡든가 하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이런 면에서 볼 때에 그는 얼마나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누가 누구를 가르칠 때에도 그렇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충만한 은혜에 살아도 내게 주신 은혜는 내게 주신 은혜예요. 다른 분에게 주신 은혜가 또 있어요. 그 은혜를 D똕TXT諸뺐¡ 들어야 되고, 내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또 내게만 주신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남에게 나누어주어야지요. 영어로 말하면 sharing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필요해요.
다른 사람이 받은 신앙적 경험, 다른 사람이 받은 은혜를 내가 수용하고 내것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또 내가 특별히 받은 바 은혜가 있다면 이것을 피차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서로서로 성장해나가는 것이에요.
혹 여러분의 가정에서 그런 일이 있습니까? 도대체 대화가 안된다고요. 왜 그런지 아세요? 교만해서 그래요. 저 사람에게서는 들을 것이 없다, 들으나마나다---이렇게 되니까 안되는 것이에요. 나는 나대로 아는 바가 있고, 저는 저대로 아는 바가 있어요. 남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의견이 있고, 여자이기 때문에 가지는 섬세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남녀가 함께 생각을 하면 훌륭한 작품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저만 잘났고, 제가 다 안다고 하고, 남이 말하기 시작하면 말 도중에 허리를 끊어요. 다 안다고, 말하나 마나라고, 들어보나 마나라고 하니, 그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아주 크고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겸손합니다. 그래서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너희들이 이미 들은 복음, 이미 깨달은 복음을 다시 일깨워주겠다는 것이에요.
remind하겠다는 것이에요. 내 말을 들으면서 너희들이 이미 받은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는 것이에요. 그 정도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겸손하지 몰라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15절)"---내게 주신 은혜를 더 해주겠다 함입니다. 이 말은 무엇이냐 하면, 개별적인 받은 은혜가 D똕TXT裏獵募Â 말씀입니다. 누구나 나름대로 경험한 신앙이 따로 있거든요.
이것을 서로 sharing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성령이 임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일러준 말을 생각나게 하리라" 하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고 해서 무슨 특별한 지식을 받은 게 아니예요. 이미 얻었던 지식을 이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들었던 것, 이미 보았던 것, 이미 경험했던 것을, 그 뜻을 알기 시작하고, 그리고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생각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음식을 했는데 밥을 다 먹은 다음에 "어이쿠, 아까 만든 것을 안가지고 왔구먼"합니다. 그러면 무효지요. 생각 안나면 그만 아니에요? 특별히 아이들 시험보는 것도 그래요. 여러분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저 무조건 '시험 잘 보아가지고 덜커덕 붙게 해주세요'---그렇게만 기도할 것이 아니예요. 공부 안한 것을 생각나게 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아무 때라도 공부한 것, 한번이라도 본 것, 기억했던 것을 시험장에서 잘 생각나게 해주세요'---바로 이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까? 시험장에 가서 생각 안나면 말짱 헛것 아니예요?'
저의 친구들은 잘 압니다마는, 저에게 시험보는 은사가 있었어요.
공부는 열심히 안하는 편인데 시험만 보았다 하면 잘 보거든요. 그래, 친구들이 제게 물었어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시험을 잘 보느냐?" 저는 농담으로 이렇게 대답했어요. "나는 성령이 역사해서 그래." 왜냐 D똕TXT0하면 시험장에만 들어서면 다 생각이 나니까요.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맨 먼저 시험지를 내고는 나가버려요. 또 못된 생각이지만 시험 다 본 다음에 다시 읽어보는 법이 없었어요. 틀리면 틀린대로 놓아두고 말아요. 안돌아봐요. 뒤돌아보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다고 했어요. 쓸데없는 생각이었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생각이 나야 해요. 그런데 생각나게 하는 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일생일대에 참 큰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실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신일고등학교에서 체육관 겸 강당을 지었는데 그 헌당식 예배에 제가 설교를 맡았어요. 그런데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어요.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시간에 신학대학에 가서 강의를 하고 있었어요. 하루 지난 다음에야 생각이 났어요. 새벽기도에 나가서 '가만 있자, 어제 신일학교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하고 수첩을 보니까 정말 어제예요. 얼마나 머리가 아팠는지 몰라요. 어찌 이럴 수가 있나 했어요. 그 때에 제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생각 안난 것이 내 죄입니까?' 어떻게 해요? 생각 안나면 그만 아니예요? 수첩에 써놓으면 뭐합니까? 안보면 소용없지요. 그렇잖아요? 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잘난 척할 것 없어요. 하나님께서 스위치를 요만큼만 돌려놓으시면 소용이 없어요. 아무 것도 아니예요. 아무리 공부를 하면 뭐해요? 바로 그 시간에 까맣게 생각 안나면 소용이 없잖아요? 써놓으면 뭐해요?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다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너희로 옛날에 들었던 복음, 이미 깨달았던 복음을 D똕TXT"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복습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말하고 있다 함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복음은 복음 스스로 역사하는 것이에요. 복음 스스로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복음에 협력자가 되고 있는 것이에요. 전하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복음 그 자체의 역사에 작은 협력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function을 자기 기능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적 자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나는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씀합니다. 일꾼---'레이트고스'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번역하면 minister, 봉사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예와 같은 위치에 있지마는 노예가 아니예요. 일꾼이에요. 노예는 억지로 하는 사람이고, 일꾼은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일을 안할 수 있으면서도 하는 사람이 일꾼이에요. 노예는 안할 수가 없어서 하는 것이에요. 피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일꾼은 스스로 선택해서 좋은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에요.
랩이라고 하는 랍비가 있었는데, 그가 어느날 귀한 손님 몇 분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점잖은 양반이 부인과 같이 손수 음식을 만들고, 음식을 나르고,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손님 침실을 준비하는데, 어지러운 것을 다 치우고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돈하는 것이에요. 손님이 너무도 미안해가지고 "선생님, 그럴 것 있습니까? 한 사람만 고용하면 몇푼 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이런 일을 시킬 수가 있는데 왜 선생님이 손수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보시오, 내가 이 일을 D똕TXT僿玖庸 얼마나 기쁜지 아시오? 손님을 대접하는 이 기쁨을 누구에게 주라는 말이요? 게다가 돈까지 주면서, 그것은 말도 안되지요." 여러분, 이런 마음을 가져보았습니까? 정말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한테는 무엇 한 가지라도 내 손으로 해야지요. 요새 세상은 좀 달라졌어요. 이상해졌어요. 그래서 불행해진 것이에요. 옛날에는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면 다 집에서 대접을 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음식을 만들고 준비를 했어요. 그 만드는 동안에 사랑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런 정성은 다 어디 가고, 목사님을 대접한다고 하면 '어느 식당으로 갈까?'---이 정도가 되었으니까 행복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일하는 기쁨, 자원하는 기쁨---이것은 못말리는 것이에요.
이것은 본인만이 아는 것이에요. 어떻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겠어요? 이게 바로 일꾼이에요. 언제든지 내가 솔선해야지요. 그래야 기쁨이 있잖아요? 가끔 우리 교인들이나 장로님들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자동차 운전 그만하시고 이제는 운전기사를 두시지요.
우리 교회가 가난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럴 때에 저는 대답합니다.
"운전하는 이 재미를 누구에게 주란 말이오? 운전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이렇듯 자신은 재미있는 게 생각하는데 '노동을 한다, 소망교회가 가난해서 기사를 마련해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운전한다'---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없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원적으로, 자발적으로---사도 바울은 그렇게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이에요.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다, 나는 예수의 일꾼이 되어 일을 하고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D똕TXT%세 번째로,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하나님의 손에 쓰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말도 주시고, 일도 주시고, 표적도 주시고, 기사도 주시고, 능력도 주시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신다---이렇게 느끼고 있어요. 여러분이 이 시간에 교회에 나오셨는데, 여러분 스스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나와서 기도를 할 때에 무엇부터 생각을 하십니까? 이 자체가 기적 아닙니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은 그저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만 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리로 인도하신 것이에요.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고 계세요.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계세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쓰실 때에는 필요한 모든 은사를 함께 주십니다. 일만 시켜놓고 능력을 안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일만 맡겨놓고 지혜를 주시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필요한 모든 것을 주세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건강도 주시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용기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믿고 있어요.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18절)"--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어요. 이렇게 주셔가면서 나를 쓰시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이것이 바울이 자기 안식입니다. 아주 철저해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쓰여지고 있다 함입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예요. 오늘도 여러분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필요한대로 쓰십니다. 또 쓰실 바에는 거기에 따르는 모든 것을 주세요. 능력과 D똕TXTW5기사와 은사와 용기와 지혜… 다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안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필요한 일인데, 당신의 일을 가능케 하는 일인데 왜 안주시겠습니까?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바울이 참으로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보세요.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18절)."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는대로만 일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성령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것 외에는 말하지 아니하노라 함입니다. 자, 이제 성령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하심, 그것 외에는 일체 말하지 않는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인기를 생각하고 말하든가, 자기 유익을 생각하든가, 자기 판단적인 이야기를 안하다는 것입니다. 전혀 안해요. '성령의 역사 외에는'---이 말은 그렇게 충격적인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일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의 역사이외의 일이 너무 많아요. 왜, 밥보다 고추장이 많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밥 먹기 위해 고추장을 먹는 것이지, 고추장을 먹기 위해 밥을 먹겠어요? 성령의 역사는 이해하는 것---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들은 그렇지 못해요. 그 외에 부수적인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아주 귀한 간증입니다. 성령의 능력에 꼭 붙들려서 말하고, 행동하고, 이적을 나타내고, 이렇게 일해왔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바울 스스로 간증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D똕TXT7바로 pioneer정신입니다.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20절)"---남이 이미 교회를 세워놓았다면 나는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할 마음은 없다 함입니다. 이것은 참 귀한 마음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이루셨으니까 내가 가서 간섭할 필요가 없어요. 여기에 또 들어가서 내가 세워야겠다---그러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늘 문제가 됩니다. 지금 러시아의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러시아에 선교하러 간다고 합니다. 그래, 많이 가기는 갔는데 문제가 있어요. 가만히 보니까 러시아에 가서는 전부 자기 교파를 세우는 것이에요. 장로교다, 감리교다, 따지고 있어요.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이 참 골치 아프다고 그래요. 보세요. 러시아에는 희랍 정교가 있지 않습니까? 그 천년 역사를 가진 교회를 우리가 지금 도와야 합니다. 그로하여금 다시 용기를 내어서 찬란했던 그 옛날처럼 선교적 역사를 감당하도록 도와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희랍 정교의 대주교 앞으로 성경책을 인쇄하는 인쇄기를 하나 보내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한번 갔더니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몰라요. 자, 어쨌든 거기에 희랍 정교라는 교회가 있잖아요? 바로 지난 주에도 그 분들이 여기 와서 찬송을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들어가서 장로교니, 감리교니, 성결교니, 하고 또 새워야 하겠습니까? 이게 얼마나 협소한 생각입니까? 그래, 서로 충돌해가지고는 심지어 '희랍 정교는 이단이다'---이런 말까지 해서 시끄러워졌잖아요? 나중에는 거기 있는 선교사들이 모여가지고 도와달라고 해서, 제가 러시아에 갔을 때에 대주교를 만나가지고 정식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우리 한국 선교라는 것은 그저 자유주의, 중구난방이라서 저 하 D똕TXT'고 싶은 소리 다 하고 누구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무슨 말을 했더라도 그것은 한국 교회를 대표한 말이 아니니 깊이 이해해주십시오.' 그렇게 영어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 분이 이런 대답을 해요. "I understand what you mean. Don't worry." 얼마나 제가 부끄러운지 몰랐어요. 어디다 대고, 러시아 가서, 모스크바에 가서 희랍 정교를 이단이라고 돌아다니느냐 그 말이에요. 이게 되겠어요? 자, 바울은 정말 할말이 많은 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인고로 교회가 일단 세워져 있으면 내가 들어가 또 세우는, 그런 일을 안하겠다, 그래서 아무도 교회 세우지 아니한 곳에, 예수믿는 사람이 없는 곳에만 다니면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썼노니(20절)"---참으로 오늘의 교회가 배워야 할 말씀이에요.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남이 교회 세워놓은 데 가서 또 옆에다 세워놓고 '저쪽 교회는 이단이고, 어쩌고저쩌고……' 이게 되겠느냐는 말이에요. 이것은 안된다,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함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냐?---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기는 개척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이에요.
교역자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 일생에 딱 두 교회를 섬깁니다. 인천제일교회 16년, 소망교회에서 지금 18년째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죽으면 두 교회밖에는 안되지요. 이제 또 다른 교회 갈 것 같지는 않아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제가 위임식을 두 번 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는 김정목 목사님이라고 하는 분은 교회를 자그마치 200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80이 넘도록 D똕TXT痔㎱擔Ä 한 번도 못해보았어요. 그럴 수밖에요. 한 곳에 가서 한 6개월 있다가 교회가 될만하면 다른 사람 오라고 해서 맡겨놓고 또 다른 데로 가요. 그러니까 자녀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보통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그대로 졸업하는 것을, 무려 10군데로 전학 다녔답니다. 그래도 이분이 자기는 개척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그 분이 저한테 선배되는 분이기에 슬쩍 이런 농담을 해보았지요. "그렇게 개척하고 다니면, 그것 참 쉽고 좋겠습니다. 설교준비 하기는 좋고요." 그랬더니 "옛끼놈!"하고 호통을 치세요. 그리고는 웃으면서 "자네가 진짜를 말했네. 나는 설교 16개월밖에 없어"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그것 또하고 또하고 한다는 것이에요. 그것 좋겠다고 제가 우스갯말로 대답했어요.
자, 보세요. 목회자에게도 나름대로 기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개척하는 데에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개척만 했지 그 다음에 목회는 못해요. 또 어떤 분은 개척은 못해요. 그런데 목회는 잘해요. 이미 세워놓은 교회에 가서 잘합니다. 또 심지어는 예배당 짓는 것도 그래요.
이것도 은사인 것입니다. 한평생 목회하면서 한 번도 예배당 못짓는 사람도 많아요. 남 예배당 짓는 데만 따라가서 목회해요. 이렇게 예배당도 짓고 증축도 하는 것도 사실은 다 축복입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교인들도 그렇지요. 예배당 짓는 데에 헌금하는 것도 아무나 하나요? 예배당을 지어야 헌금을 하지요.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기회에 내가 한몫을 한다는 것도 특별한 축복이에요. 안그렇습니까?
그런고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잘 알아서 하시는 일이 D똕TXT-니까 내가 이러고저러고 안하겠다, 나는 협력자로서 내게 주신 은혜를 따라 보태고, 돕고, 생각나게 하고, 협력할 뿐이다, 내게 주신 은사는 개척하는 것이다, 합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이 여기저기 개척하고 다녔기에 사실은 그의 믿음의 아들들이 수고를 했어요. 디모데 같은 사람이 바로 그렇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 세워놓고는 '디모데야, 빨리 와서 이것 말아라'하고 또 다른 데로 가버려요. 또 오라고 하면 또가요. 디모데는 한평생 이렇게 바울의 시중을 들었어요. 어쩌면 디모데는 개척교회 하나도 못세웠을 것이에요. 그러나 바울이 세운 교회를 뒤따라가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렇게 은사가 달라요. 오늘도 그런 분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어떤 사람은 전도하는데 소질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이들 가르치는 것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부엌일을 잘합니다. 부엌일도 여러 가지예요. 음식 잘만드는 사람이 있고, 설거지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 각각 받은 은사가 있어요. 자기에게 주신 은사에게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에요. 바울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요. '나는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안세운다. 나는 pioneer다. 나는 개척정신을 자기고 역사했다. 그래서 새로운 터를 찾아서 한평생을 복음 사업을 위해서 힘썼다'---그것이 바울의 소신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가졌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의 신학에 주요한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보다 깨끗한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이에요. 항 D똕TXT台ó 바쳐야 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은 예배할 때마다 깨끗한 산 제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바치는 데 있어 제물은 있어요. 이제 제사장이 있어야 되잖아요? 바울은 생각합니다. 이방사람들이 예수믿고 그 더러운 생활에서 벗어나 씻김을 받고 정결해지고 거룩해져서 깨끗한 제물이 되어가지고 하나님께서 제물로 바치도록 하는 내가 제사장이다, 라고요. '이방인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 직무를 맡았노라'---참 소중한 얘기입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제물을 깨끗케 하는 사명도 있고, 드리는 사명도 있고, 제물을 죽이는 사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대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나갈 때, 얼마나 거룩하고 경건해야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의 제사장이다. 이방사람을 예수믿게 하고 구원해서, 거룩하게 성별시켜서 깨끗한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장이다'---그렇게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 직무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정에서 여러분이 제사장입니다. 그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혹 새벽기도에 나오십니까? 식구들은 다 안나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대신 이 자리에 나와서 기도하는 제사장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이 3만 명이라고 하지만 여러분들만 교회에 나왔어요.
대표로 나온 것예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런고로 언제든지, 누군가가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D똕TXT¡]내가 제사장 직무를 맡았노라.'---이것은 그실 희생이에요. 그의 맡은 사명을, 직무를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바울로부터 듣고 배울 것이 많습니다. 그의 겸손, 그의 사명, 그의 신앙, 그의 신앙적 자세…… 이런 것들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우리 또한 그 분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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