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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니 두려워 말라(마태복음 14장 22~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내니 두려워 말라"-오늘은 이 말씀을 제목으로 해서 이적을 공부하겠습니다. 앞서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고 하는 귀중한 사건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광야에 머물러 밤새 기도하시게 되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게네사렛, 갈릴리 바다를 동에서 저로 건너가게 됩니다.
때는 밤 사경(四更)이라고 합니다. 밤 시각을 갈라서 일경, 이경, 삼경, 그리고 사경이라 부릅니다. 이 사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때는 밖에서 보초를 서는 일이 많았습니다. 군사들도 보초를 서고 양을 치는 사람들도 밤을 새워서 야경을 하게 됩니다. 야경 하는 사람들이 4교대를 합니다. '일경'하면 첫 번째 보초를 선 시각, 이경은 그 다음, 그리고 삼경. 사경, 이렇게 됩니다.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무렵이 사경에 해당합니다. 아주 깊은 밤입니다. 이런 밤중에 큰 풍랑이 일어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일을 멀리서 아시고 저들을 향하여 오십니다. 타고 오실 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풍랑 속에서는 물을 건널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물위로 걸어오시는 기적을 나타내시게 됩니다. 물위를 땅 위로 걷듯이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도 저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물위로 걸어오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지요. 유령인가, 귀신인가, 저들은 설상가상으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It's me!"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나는 나다, 나니까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심시키고 계십니다. 그때였습니다. 주께서 아직 배에 도착하시기도 전인데, 그런 순간에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나섭니다.
참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보고 소리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참 인심도 좋으십니다. 덜렁대는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라" 하십니다. 베드로가 물위로 내려섰습니다. 절벅절벅 물위로 걸어갑니다.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러나 아깝습니다. 예수님만 똑바로 바라보고 걸어갔으면 마침내는 예수님께 다가가 물위에 선 채 악수라도 할 뻔했는데 실패했습니다. 잘 나가던 이 사람, 어느 순간 풍랑을 보고 불현듯 두려워합니다. 그 순간에 발이 그만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질겁을 하여 소리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시고는 베드로를 데리고 배에 오르십니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2절)."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대사건과 관련지어서 보아야 됩니다. 그 굉장한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은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습니다. 메시야는 정녕 왔다, 그것도 갈릴리에 왔다, 예수님이 메시야다, 굉장한 분이다, 이제 우리는 살았다-이렇게 생각하면서 저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욕망과 이것을 연계시킵니다. 이제는 독립했다, 로마군은 다 물러갈 것이다. 이나라의 모든 부정부패가 다 없어질 것이다, 메시야의 나라가 올 것이다, 다윗의 왕국, 솔로몬의 왕국과 같은 화려한 앞날이 있을 것이다-그들은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떠받들려 했습니다. 억지로 왕을 삼으려 예루살렘까지 에워싸고 가서 '호산나'를 외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를 중심해서 혁명을, 독립운동을 일으킬 생각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될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틀림없이 예수님의 우편에, 또는 좌편에 도열해 앉는 의젓한 장관들이 될 것이다-이렇게 점쳤습니다. 이 갈릴리 어부들이 지금 벼락출세하게 생겼습니다.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들은 그런 기분으로, 예수님께서 기적으로 만들어주신 떡을 군중들에게 열심히 배식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누어주시는 떡을 들고 가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는 기분이라니, 받아먹는 사람들보다 나누어주는 제지들이 더 신이 났을 것입니다. 발이 땅을 밟는지 구름을 탔는지 모를 지경이었겠지요. 이런 굉장한 순간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걸 이대로 놔두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제자들, 그러다가 실성할는지도 모릅니다. 군중들은 그들대로 왁자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혼란이 눈앞에 보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것,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군중들의 행위와 욕망과 기대로부터 떠나려고 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그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피하셨습니다.
군중들을 피해서 광야로 들어가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허망한 꿈은 또 예사로운 문제입니까? 제자들의 그 오해에서 오는 엄청난 기대, 세속적인 영광에 대한 욕망, 이 불을 한시바삐 꺼야 합니다. 잘못되었다가는 정말 미쳐 돌아갈 판입니다. 무슨 변이 날지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배에 태워 디베랴 그 바다로 재촉해 내몰았습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시려는지 짐작되지 않습니까? 군중들의 들뜬 마음도 가라앉히고, 제자들의 허황한 꿈을 깨뜨릴 생각이셨습니다. 저들을 거친 바다 속으로 내몰아서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고자 하신 것이 주님의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22절을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제자들이 군중 속에 그냥 있다가는 이제 굉장한 일이 생길 것이므로 '즉시' 떼어내서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섬세한 눈으로 읽어보면 공교롭게도 참 재미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즉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즉시'-'emergently'는 위급한 경우의 '긴급히'라고 하는 뜻이 됩니다. 한창 부풀어오르는 세속적인 욕망을 단숨에 즉각 끊어버린다는 의도가 내포된 표현입니다.
그런가하면 27절에서는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안심시키는데도 '즉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지금 풍랑도 무서운데다 어둠 속에 희끄무레한 '귀신'까지 나타났으니 설상가상으로 무섭습니다. 정신들이 반쯤 나간 채 와들와들 떨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은 '즉시'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지체없이 저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안정시켜주십니다. 31절에서는, 베드로가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 "나를 구원하소서" 소리치자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십니다. '즉시'라는 표현은 이렇게 세 군데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하나 하나가 다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제자들만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또 어째서 주님을 두고 그네들만 배를 타고 건너갔을까요? 그들은 애당초, 예수님은 어떻게 바다를 건너오실 것입니까, 묻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아무도 이에 대해서 이렇다할 대답을 할 수가 없겠습니다마는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빨리 건너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요?"하고 감히 묻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오시려 하십니까? 예수님 두고 우리만 어떻게 갑니까? 안가겠습니다." 이런 응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저들은 아무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깊이 생각할 것이 이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도 오십 명씩 무리 지어 앉히라 하시니 "어째서요?"라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뿐입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 돌을 옮겨놓으라 하실 때에도 "돌을 왜 옮기라십니까? 뭘 하시려고요?" 이렇게 묻는 사람이 없습니다. 옮겨 놓으라시니 옮겨놓는 것이지요. 죽은 사람의 상여가 지나갈 때에도 주님은 손을 대어 상여를 멈추십니다. "남의 상여는 왜 멈춥니까? 뭘 하겠다는거요?" 따위로 시비를 벌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권세'라는 말을 씁니다. 때로 회의 같은 것을 해봐도 거기에 권세 있는 사람이 있습디다. 누군가가 한마디 점잖게 하면 전체가 조용해집니다. 그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기만 해도 잠잠해집니다. 말하자면 그런 사람만 있으면 회의가 잘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을 열면 다 옳다고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그러면 회의는 끝입니다. 이같이 권세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어서서 입만 벙긋해도 "앉어" "시끄러"따위의 야유가 나오고 시끄러워집니다. 숫제 말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니까 권세 없습디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찬의 매너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권세가 있어야 됩니다. 말이 헤퍼 가지고 어디 가서나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들어주지를 않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렇게 권위가 없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열두 살 때부터 권세가 있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한마디 할 때에 한다하는 어른들이 깜짝 놀라고 귀담아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가부를 논하지 맙시다. "왜?"라는 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배타고 건너 가라시니 "예"하고 건너갈 뿐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어른이 뭐라고 하면 "알았다니까요!" 볼멘소리부터 나오기 일쑤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단코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머무르시면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가라 재촉하십니다. 저들은 아무 대꾸 없이 그렇게 합니다.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것 저런 것 알 바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세였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갑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는 모습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비교해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3절로 27절에서 우리가 본바, 예수님께서 한번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신 일이 있습니다. 도중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다말고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예수님은 안 계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라고 하는 것은 남북으로 길게 되어 있는데, 길이가 20.3킬로미터, 쉽게 20킬로미터 남짓 됩니다. 20킬로미터라면 50리-이 정도밖에 안 되는 길입니다. 그리고 폭은 12.8킬로미터니까 40리쯤 됩니다. 갈릴리 바다는 이런 정도의 호수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들 부르고 있습니다. 양쪽에 산이 있고 사막도 있어서인지 기후 변덕이 심해서 난데없이 풍랑이 인다거나 하는 갑작스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수심은 60미터쯤 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8장의 그 첫 번째 항해 때는 낮이었으며, 오늘의 두 번째 항해 때는 한밤중 사경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갔고 이번에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갑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갔고, 두 번째는 예수님 없이 제자들만 항해하게 됩니다.
두 번 다 풍랑을 만나서 죽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저들을 도우셔서 무사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항해 때는 바람과 바다가 숨죽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하고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는 제자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마침내 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굉장한 사건, 요새말로 하면 '성공적인 사건'-오천 명을 먹이신 그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고 나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안될 때에만 기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패를 만나면 철야기도도 하고 금식기도도 합디다. 그러나 일이 잘되어서 성공을 하고 보면 기도하지 않아요. 뒤가 타고 급해지면 새벽기도도 매일 나오던 사람이 일이 잘된 다음에 보니까 나오지 않더군요. 이런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칭찬을 들었습니다, 성공을 했습니다, 큰일을 맡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영광을 얻었습니다-이와 같이 형통하는 날에 우리는 오히려 더, 한적한 곳을 찾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심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속에 큰 시험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성공 뒤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광야에 들어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큰 시험을 이겨야 하겠기에 기도합니다. 고난받을 때 기도할 것입니다. 큰 칭찬을 들었을 때에 또한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세 가지의 엄청난 시험을 목도합니다. 첫 시험이 배고픔이요, 세 번째 시험은 사단이 주님의 굶주림 앞에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하는 시험입니다. 천하만국과 영광이 눈앞에 훤히 펼쳐집니다. 엄청난 시험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떠납니다. 적어도 뱃길만은 자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부들이 아닙니까? 밤이고 낮이고 물에서 살던 사람들입니다. 갈릴리 바다를 손금 보듯이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셔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 문맥에 드러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그런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경험, 수십 년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배를 타고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난 것입니다. '바사노스'라고 하는 이 '고난'의 뜻은 '죽을 지경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의 의도대로 보면 세속적인 욕망과 허영심 같은 것을 떼어버리기 위해서 풍랑이 필요했습니다.
실제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풍랑이 일어날 때에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 옆에서 장관 노릇 한번 하는가 했더니 장관은커녕 여기서 지레 죽는가보다-안 그렇습니까? 잠시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가슴이 부풀었는데 죽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죽으면 무엇이 소용 있습니까? 자, 이런 처지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나 자신의 구원문제입니다. 오직 그뿐입니다. 나라의 문제며 정치의 문제며 영광의 문제가 대숩니까?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는 나의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죽을 판인데 장관 감투가 대숩니까? 영광에 찬 꿈과 화려한 상상이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고난이 인간 실존을 깨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고난 당하고 있음을 아신 것 같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영감으로 저들이 보입니다. 배 위에서 떨고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허둥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눈에 선합니다. 이런 경우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사 건져주시옵소서." 이러고 말지 귀찮게 일부러 갈 것까지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이십니다.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마는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직접 멀리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만 하셔도 충분히 그 풍랑은 고요해질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친히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오셔서 위로하고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 친히 고난 속에 함께 하셨을 때, 배에 오르셨을 때,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을 때에 풍랑은 고요해지고 배는 안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흔히 "기도만 하면 되지 꼭 가봐야 되나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끔 그럴 때도 있어요. 구제를 한다 무엇을 한다 할 때에도 돈만 보내면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위로하고, 드려야 합니다. 고난에 다소라도 함께 한다는 것, 몸을 움직여서 동참한다고 하는 의식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밤 사경에 오시는 예수님을 잘못 보고 "유령인가?" 착각합니다. 이러는 데도 하나의 배경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있을 때,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베드로를 무사하게 해달라고,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러나 정작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을 받아서 감옥을 나와 집에 갔을 때, 어린아이가 나와서 보고는 안으로 뛰어들어가 베드로가 문밖에 서 있다고 알리자 안에서 뭐라고들 그럽니까? "귀신인가보다" "베드로의 영혼이 왔나보다"-이렇게 한마디씩 합니다.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는 해놓고 정말로 응답을 받았을 때는 믿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으면 하는 소원이 없었겠습니까? 어쩌면 예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만 보냈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셨으면 좋았을걸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렇게 소리지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작 예수님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나셨을 때에는 "귀신인가보다"-이렇게 되고 맙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이렇게 초라하고 어리석습니다.
파스칼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기적이 없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러분, 기적을 믿습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반드시 기적을 믿어야 합니다. 기적 없이 예수를 믿겠다고 한다면 애당초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을 거꾸로 본 것입니다. 성경은 기적으로 충만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합니다. 바다를 고요하게 하고 바다 위를 걷기도 합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이상하게 볼 것 하나도 없습니다. 별다르게 볼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다정한 말씀입니다. 더 없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어린아이들끼리 어른이 없는 집을 볼 때가 있지요? 어머니가 문을 두드리면 "누구요?"하고 작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걱정 마라, 엄마다"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와!"하고 환호합니다.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에고 에이미,' 곧 나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확증해주십니다. 당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알게 해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이시라면 날보고 걸어오라고 해보십시오"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라"고 하십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베드로가 무슨 심사로 가보겠다고 했겠습니까? 예수님이 빠지려고 하여 건져드리러 가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랬을까요? 단순한 호기심입니다. 한마디로 목적 없는 이적입니다. 그저 물위로 걸어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입니다. 그 이적 자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마는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정이고 방법일 뿐, 중요한 것은 물에 빠져들어 가는 제자들을 건지시기 위해 서둘러오신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오는 과정 그 자체가 이적인 것입니다. 제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러분, 이적 자체에 너무 연연하지 맙시다. 이적이 거꾸로 되었건 바로 되었건, 있건 없건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의 구원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구원을 목적으로 달려오고 계십니다.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기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필요한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일전에 중국에 갔을 때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목사님이 몇 분 안 계십니다. 어떤 분이 제게 묻습니다. "목사님, 우리는 성경도 잘 모르고 예수님 믿은 지도 얼마 안됩니다. 이런 우리가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십니까?" 물론 들어주십니다. 공산당들이 문둥병 환자를 데려다놓고 고치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증명해보라고 시험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하 교회에서 문둥병 환자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밤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많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이 문둥병자를 고쳐주셔야만 우리가 앞으로 예수님을 믿는 데 지장이 없겠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던지 눈앞의 문둥병자가 깨끗해지는 기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기적을 본 후로 그들의 마음에서 핍박의 그늘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얼마나 핍박이 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필요한 곳에는 어디에나 기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위하여 가시는 곳이 바다면 어떻고 산이면 어떻습니까? 그 길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기적이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하여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언제나 필요한 방법으로 기적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은 허영과 호기심에 불과합니다. 또한 우스운 것은 갈 테면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갈 것이지 바람에 일렁이는 풍랑은 왜 봅니까? 집채처럼 일렁이는 풍랑을 보고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키보다 높은 풍랑을 본 적이 있습니까? 실로 무섭습니다.
조그만 배를 타고 있는데 집채같은 풍랑이 올라와서는 머리 위로, 배 위로 훌쩍훌쩍 넘어갑니다. '요나가 고래 뱃속에 있을 때에 이랬겠구나'라 생각이 듭니다. 물 속으로 쑥 빠져들어 가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배 위로 물이 마구 지나갑니다.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에서 이러한 일을 겪으니 정말로 죽을 지경입니다. 조그마한 목선 정도야 물 속에 쑥 들어갔다가 나옵니다. 겪어보면 풍랑이라는 것도 대단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먼저 안정시키십니다. 풍랑은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생각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풍랑을 보고 무서워합니다. 그 순간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성질 급한 베드로는 바로 '나를 구원하여 주소서'하고 예수님께 손을 내밉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일으켜 함께 배에 오르십니다. 32절의 "함께 오르매"-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조용해집니다.
그러나 풍랑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내니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이 먼저임을 잊지 마십시다. 풍랑이 멎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풍랑 속에 있지만 두려워하지 말라, 곧 고요함을 찾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31절의 말씀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골로새서 3장 2절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땅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은 생각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위를 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어야 했습니다. 바람을 보았기 때문에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믿음 없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반신반의해서는 안됩니다. 확고한 믿음이 서 있어야 합니다.
믿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함께 역사 하십니다. 주님의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거기에 내가 쓰임 받고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주님의 경륜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이 배는 절대로 파손되지 않을 것입니다. 파손되고 안 되고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새는 것을 손보려고 아버지가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 있습니다. 이 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저도 한번 올라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갑니다. 어느 만큼 올라갔을까,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순간, 아이는 겁에 질려버립니다. 꼼짝못하고 부들부들 떱니다. 사색이 된 아이를 보고 아버지가 조용히 말합니다. "아래로는 보지 말고 이 아버지만 쳐다보아라." 아이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아버지를 쳐다봅니다. 거기, 아버지는 미더운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그제야 아이는 안심을 합니다.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니 얼어붙었던 다리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발을 땅에 붙이고 살되 머리는 하늘로 두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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