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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조상(롬4:9~17)
이 시간은 믿음의 조상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의 사람되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된 이것이 우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으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확실한 믿음의 표본이 먼저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의 성격을, 그 내용을 시시로 다시 한번 확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에 비추어보면서 내 믿음이 어떠한지, 또 내 믿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간시간 바르게 깨닫고 또 바른 믿음에로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서 4장 전 장에 걸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이 이렇게 아브라함을 자꾸 거론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고로 모세 이전, 훨씬 이전의 아브라함부터 이야기가 되면 율법을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유대사람이나 이방사람이 다 그 앞에서는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보다 훨씬 더 위로 올라가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시작으로 잡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의도입니다.
또 한 가지는,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으로부터 우러름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이라고 하면 꾸뻑 죽는 것입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그러면 물론 우리도 그래야지-이렇게 됩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런고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모두가 아브라함을 익숙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서부터 나이 많은 사람까지 이스라엘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아는 그것의, 그 내용의 핵심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일이요, 또 바른 소재 선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모델입니다. 그 믿음의 유형인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그런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의 유형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의 유형과 같은 것이라는 거예요. 같은 맥락이기 때문에 굳이 사도 바울은 그 많은 믿음의 조상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중요한 사건으로, 중요한 모본(模本)으로 내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9절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 행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앞서 6절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오늘의 9절에서도 "이 행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행복, 이 축복,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이거야말로 가장 큰복이요, 근본적인 복입니다. 복중에서 가장 큰복은 죄사함받는 복입니다. 우리가 다른 복은 다 못 가졌다 하더라도 죄 사함 받는 복만 받으면 내 생활은 전체적으로 의미가 달라집니다. 죄 사함 받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고난은 나를 향한 더 큰 축복을 위한 과정입니다. 시련입니다.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통하여 아무리 재산이 많거나 명예를 얻었다 하더라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고 한다면 그가 가진 재산, 그가 가진 명예는 절대로 그에게 복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큰 시험이요, 큰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불행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근본, 모든 축복의 근본은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것-이것이 복의 뿌리입니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재산이 있다 없다, 병약하다 건강하다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시간 시간 확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귀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제 무슨 고통이 있겠습니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죽는 시간에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는 음성이 들린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괴로운 세상에서 나를 하나님나라로 옮겨놓으시는구나--아마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거예요.
모든 복의 근본, 그것은 바로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는 것이 최대의 복입니다. 근본적이요 종말론적인 복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변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몇 번이나 고꾸라져도, 곤두박질을 해도, 이 복에 대한 성격은 항상 그대로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자, 이제 이렇게 귀한 복에 대해서 바울은 설명을 합니다. 이 행복에 대하여, '이 행복이' 어떻게 온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이란 죄인이 구원받는 길을 말씀함입니다. 믿음과 회개와 용서와,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그 자유에서 오는 행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미 죄를 지은 자에게는 율법이란 죽음입니다. 죽음의 선포요, 저주요, 심판입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는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입니다. 그런고로 자유 합니다. 이제 더는 율법이 나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그 무서운 소리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죄지은 자에게 무서운 형벌이 있다는 것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죄 사함 받는 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관계와 율법의 관계를 우리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로마서의 주제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의 관계란 믿음이요, 의요, 약속이요, 그리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관계란 범죄에 대한 심판이요, 가책이요, 두려움이요, 진노요, 형벌이요, 저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이 큰 행복을 얻었는데, 이 행복을 얻는 순간이, 얻는다고 하는 이 사건이 할례 받음으로부터 된 것이냐, 아니면 할례 받기 전이냐--이걸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간 문제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두지 맙시다. 중요한 것은 할례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 함 받은 것이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 내적인 축복을 받고, 그 영적인 축복을 받고, 그리고 나서 할례 받는 것이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할례에 대해서 대단히 높은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할례 받은 백성이다, 이렇게 우쭐하는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요새 사회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사회학적 증거는 오직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할례이고, 또 하나는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되어서 안식일이기보다는 안식일을 지켜서 이스라엘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그렇듯 소중히 여기는 할례는 물론 육체에 받는 할례이거든요. 우선 이스라엘사람들이 할례를 베풀 때에 전통적으로 쓰는 할례식 기도문을 한번 소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할례를 시행할 때에 저들은 이런 말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거룩히 구별된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 그의 자녀로 인침을 받은 자에게 복이 있을지어다"하고 랍비가 말합니다. 그리고 랍비는 또다시 말합니다. "몸에 아브라함의 인침을 받지 못한자는 유월절 떡을 먹지 말지어다." 이런 기도와 함께 할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된 표를 몸에 지니는 것입니다. '표'를 몸에 지니는 것이에요. 그래서 흔히는 저들을 '할례당'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할례를 너무 자랑하고, 할례를 가장 높은 긍지로 내세우기 때문에 '할례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참 할례라는 것은 그렇게 외형적이거나 의식적이거나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의 본문에 아주 놀랍게도 세밀하게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는데, 그것이 할례시에냐 무할례시에냐, 할례 받음으로써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느냐, 아니면 의롭다 함을 먼저 받고 그 다음에 할례 받은 것이냐--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만 물으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창세기 17장 10절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두 장(章)이 차이납니다. 성경으로는 두 장 차이지만 시간적으로는 14년이나 차이져요. 그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어 괴로워하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신다고 분명히 약속을 하셨는데 주신다 주신다 하시면서 안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10년이 지나갔어요. 아브라함은 기다리다 지쳤어요. 아내는 점점 늙어가고…… 한심하거든요.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을 만나주시니까 아브라함이 답답해서 말씀드립니다.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아브라함을 밖으로 끌고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라 하십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가득찼지요. 꽉 찼단 말씀입니다. 그 넓은 하늘에 별이 꽉 찼는데, 이제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하십니다. 이거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아들이라고는 아예 없는데, 하나도 없는데 '하늘에 별같이'라 하시니 하늘에 별은 그만두고라도 어떻게 아들 형제라도 좀 주시고 나서 말씀하시지 싶어요. 안 그래요? 그런데 이건 지금, 전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답답해하며 10년 동안이나 기다려온 바로 이 아브함을 보고 하늘을 쳐다보라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저 별과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브라함이 이 '엉뚱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요. '예,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겠지요. 약속하시니 그대로 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되겠지요. 아멘'하고 믿어요. 정말로 믿는지 안 믿는지야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시는데 모르시겠습니까? 이 사람이 코웃음치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말로 믿었어요. 전적으로 믿었어요. 그 믿는 것을 보시고-성경은 이렇게 말씀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여기서 의롭다 함을 얻어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어요. 아브라함에게도 실수가 많았어요. 벌써 10년 동안 여러 가지로 고민도 했고 실수도 했어요. 그러나 분명히 그는 믿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요. 그대로 믿는 순간,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나머지 일은 전혀 돌아보시지 않아요. '너는 내 백성이다, 너는 나의 택한 사람이다. 너는 내 자녀다'하고 인치시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순간인 것입니다.
그 후에 14년이 흘러갑니다. 그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많아졌습니다. 그 가정에 어려움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내년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내년에 이삭이 태어나게 하시는데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실수를 했습니다. 서자를 만들었습니다. 서자가 태어났습니다. 이스마엘이 벌써 14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책망하신다면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너는 왜 이렇게 믿음이 신통치 않느냐, 아들을 준다면 주는 줄 알지 왜 외도는 했느냐, 약속 취소다--이러신다면 끝나는 거지요. 안그렇습니까? '너는 죄인이다'하시면 죄인이에요. 분명히 아브라함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파기했기 때문에, 의심했기 때문에 행동으로 나타난 거예요. 물적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추궁하신다면, 그 행위를 심판하신다면, 다른 신학적 용어를 빌려 율법적 관계로 아브라함을 대하신다면 아브라함은 낙제인 것입니다. 이미 끝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휘청거렸지만 하나님은 그러하시지 않아요. 그래서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흔들리느냐, 왜 휘청거리느냐, 내 앞에서 온전하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엘 샤다이-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왜 휘청거리느냐, 하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내년에'하시고 이 때에 소중한 할례법을 주십니다. 내년에 이삭이 태어나거든 할례를 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너도 나이많지마는 이제라도 할례받아라 하십니다. 같이 할례의 법을 주십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이 할례의 법이 주어질 때에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증으로, 하나의 증거로 몸에 표를 하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의롭다 함을 얻은 데 대한 표요, 인치심입니다. 사인(sign)입니다. 실(seal)이 됩니다. 도장을 찍으신거예요.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 됨을 확증해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의 약속을 몸에 지니고,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면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마침내 할례 받은 자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14년 후에 된 일이고,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할례 때문에 된 게 아닌 것입니다. 할례라는 의식이 아브라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의롭다 함을 얻은 그 믿음이 아브라함을 만든 것입니다. 할례는 다만 그 의롭다 함을 얻은 의를 하나님 편에서 확증해주신 것일 뿐입니다.
오늘의 우리에게서 비유를 들어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결혼식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하면서 보면 요새는 옛날과 달라서 결혼식 하는 주인공들이 그리 어색해하지를 않아요. 제가 30년 전에 결혼할 때만 해도 신부가 들어올 때에 얼마나 느리게 들어오는지 몇 번이고 재촉을 해야 했어요. 부끄러워서지요. 가락지를 끼워주고는 고개를 못드는 채 비틀고 했어요. 이렇듯 몹시도 부끄러워했는데, 요새는 달라요. 가락지 낄 때 보면 망설임 없이 척 끼고, 잘 안 들어가면 침 발라가면서 탁 끼고 해요. 부끄러울 것 뭐 있냐, 하는 태도입니다. 또 들어올 때에 서로 손을 붙들고 들어와서 단 앞에 이르렀으면 일단 손을 놓아야 되는데 안 놓잖아요? 그래서 좀 잠깐 헤어지라, 이따가 내가 잡으랄 때에 잡으라고 일러줍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붙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정 붙들고 있으면 내버려둡니다마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옛날과 달라서 붙들고 돌아다니고 몇 년씩 마음대로 연애해오다가도 결혼식 때에 보면 놀라운 게 있어요. 신부도 울고 신랑도 우는 모습을 보아요. 그런 사람들이 있습디다. 요새는 신랑 쪽이 더 많이 울어요. 결혼서약 할 때에 우는 신랑 신부가 많아요. 이게 뭘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감격스럽다는 얘기지요. 그만큼 이게 중요하다는 얘기지요. 결혼식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결혼식 했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것은 피곤한 노릇이에요. 결혼식 했으니 도리 있나, 싫어도 헤어질 수 없고… 모르겠다, 그냥 살지 뭐-어때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요. 이것은 옳지 못합니다. 결혼식보다 먼저 있는 게 무엇이겠어요? 사랑입니다. 약속입니다. 약속은 미리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 형식상 예식의 자리에 나와서, 교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번 "사랑하겠느뇨?" "예"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전에 벌써 나무 밑에서 다 한 거예요. 저들끼리 다 한 거라고요. 중요한 건 마음이지요. 마음으로 내가 이 사람과 평생을 같이하겠다 하고, 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그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진실한 사랑, 그것이 중요한 거지 예식이 중요한 거예요? 또 다른 말하자면 결혼반지가 중요한 겁니까? 결혼반지 하나 끼워놓고 딴 짓 하는 데야 반지가 뭐 중요해요? 결혼식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사랑 없는 결혼식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 누구처럼 제주도에 신혼여행 갔다가 옛날 애인한테 전화 걸다 들켜 가지고 매맞고… 그래 가지고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결국은 내적인 거예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할례의 의식은 꼭 필요하기는 해도 우선(優先)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고로 그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믿음,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적으로 나타나는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또 한 가지, 믿음은 자동 케이스가 아니예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할례는 자동 케이스예요. 난 지 8일만에 할례 행하는데 당자가 뭘 알아요? 이것은 그 민족으로 태어난 이상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러나 믿음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입니다. 인격적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의롭다 함이 있는 것이에요. 믿음의 조상이 있다고 해서, 그 혈족, 그 민족, 그 전통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영적인 바른 관계, 즉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격을 봅시다. 다시 한번 오늘의 본문에 보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약속입니다. '약속'이라고 하면 헬라어로 '휴퍼스케이시스'라고 하는 약속이 있고, '에팡겔리아'라고 하는 약속이 있어요. 휴퍼스케이시스라고 하는 말은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네가 이러이러하면 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에팡겔리아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이렇게 약속한다, 그런고로 이렇게 하라--얘기가 다르지요. 내가 네게 아들을 준다 할 때에 네가 이렇게이렇게 하면 내가 아들을 주리라 하신다면 조건적인 약속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아들을 준다, 그런고로 너는 이렇게 하라 하시는 것이면 얘기가 다르지요. 이 후자가 절대적인 것이에요. 내가 너를 의롭다 하노라, 그런고로 거룩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아라-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일방적으로 주어져요. 절대적으로 주어지요. 무조건적으로 주어져요.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이같이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그 약속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약속에 대한 진실한 응답, right response--바른 응답이 믿음입니다. 백 세건 이백세건 상관하지 마세요. 아들을 준다, 하실 때에 '자격이 없는데요' 따위의 소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준다 하시면 '알았습니다, 아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믿는 믿음, 받아들이는 믿음,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곧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그 믿음입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약속이 있고, 약속을 내가 믿었어요. 믿은 다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는 나의 자격이나 나의 부족함이나 허물은 관계가 없어요. 그런고로 은혜입니다.
먼저는 약속에 대한 감사입니다. 내 부족함도 묻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신다-감사해요. 아브라함은 여러 번 실수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일방적으로 또 지켜주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정말 죄송스러워요. 아브라함의 입장으로 보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합니까? 아들 주신다는 것도 사실 황송스런 일이지요. 그래도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그 동안에 내가 이것저것 잘못했습니다마는 그저 감사합니다-은혜예요. 은혜의 관계에 사는 거예요.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것을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이 약속을 받는 자녀, 자녀됨--becoming sons of God, 하나님의 자녀 됨,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그걸 온전케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여건이 주어지든지 그건 모두가 다 은혜인 것입니다.
내가 그런 모처럼의 믿음을 가졌어요. 이 믿음이 가끔 흔들려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시련을 주시기도 하고, 손해를 주시기도 하고, 어려움을 주시기도 해요. 이건 다 은혜인 것입니다. 왜요? 약속을 받아나갈 수 있도록 내 믿음을 견고케 해주시니까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자녀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생각하는 은혜란, 이 믿음을 가지게 하고, 이 행복을 가지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기 위해서, 자녀 됨을 완성하기 위해서 있어지는 모든 여건을 다 은혜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 벌리고 안벌리고, 건강하고 병들고, 출세하고 못하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내가 믿음만 지킬 수 있으면 좋아요. 그리고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은 이 고귀한 신분을 내가 더 온전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되기 위해서 주어지는 여건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다 은혜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 은혜입니다. 이 믿음을 온전케 하는 역사, 이 믿음을 굳세게 하는 역사, 다 은혜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일이 잘 되면 믿음이 없어지고, 일이 어려워지면 믿음이 생기는 사람 있지요? 이 사람은 체질상 좀 일이 돼요. 팽팽해야 될 사람이에요. 그래야 신앙생활 제대로 합니다. 일이 풀렸다 하면 빗나가는 그런 사람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어떻게 돼야 은혜입니까? 돈 벌리면 예수 안 믿을 사람, 그래도 돈벌어야 복이겠습니까? 그건 은혜가 아니예요. 은혜란 물질이 아니예요. 은혜란 물량적인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자녀 됨을 온전케 하는 그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소화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적 관계란 본문에도 보면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15, 16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깨닫게 하는데 치료를 못합니다. 그런고로 깨달음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죄에 빠집니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왜 그런고하니, 이미 죄인이면서도 아직도 자기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자기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건방진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게 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을 수가 없고, 자신은 점점 절망하게 되고, 하나님께는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율법적 관계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는데 보아하니 공부는 이미 틀렸어요. 그 동안 통 공부 안 했고 잘하지도 않으면서 지금도 끝까지 자기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거에요. 율법주의,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절망이요, 하나님 앞에는 진노를 사게 됩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집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게 되는데 하인에게 비오는 날이니까 손님이 오거든 우산을 문 옆에다 세워놓고 들어오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인이 문간에 서 있는데 손님이 오는 것을 대문 틈으로 내다본즉 우산을 들고 옵니다.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우산을 문 옆에 접어놓고 들어오세요"하며 문을 열어주고 또 열어주고 했어요. 그런데 웬사람 하나는 우산을 들고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하인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우산 접어서 여기 두세요"했어요. 그러니까 그 손님은 "나는 우산 없이 비 맞으면서 그냥 왔는데요!"합니다. 하인은 "그럼 집에 다시 가서 우산 가져오세요"합니다. 이런 멍청한 사람 좀 보세요. 고정관념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입니다. 주인이 왜 우산을 문간에 두라고 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불가능하거든요. 이미 다 끝났거든요. 내 의, 내 율법적인 의로써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확실하거든요. 그럼 손들어야지요. 한 번 더 한 번 더 하면서 결심을 새로이 하고-쓸데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진노를 살뿐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모든 믿는 자의 조상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자의 조상입니다. 거기에 '이 행복이'있습니다. 구원받은 자의 행복, 죄 사함 받은 자의 행복,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누리면서 되어지는 모든 여건들이 다 내 믿음을 위함이요 구원을 완성케 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은사라고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는 그 행복, 행복한 자의 그 행복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시 한번 감사하고, 다시 한번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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