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믿음으로 사는 생활
오늘의 본문은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믿음으로 사는 비결도 가르쳐줍니다. 지난 시간에는 믿음으로 사는 생명의 신비로운 체험에 대해서 상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신비로운 연합-이것은 문자 그대로 생명적 신비입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생명적 신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어버렸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부활했으며, 종말론적 부활이 저 앞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재에도 신비로운 부활 생명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의지도, 내 지식도 아닙니다. 내 생각도 아닙니다. 그 생명력, 부활의 생명력이 신비롭게 역사 하여서 내 마음을 주장하고, 내 의지를 주장하고, 내 생각을 주장해요. 그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입니다. 죽음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를 동시에 체험합니다. 동시에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 자기의 죽은 모습을 보면서 놀랍니다.
어떤 이는 옛날에 백화점을 지나가다가 아주 좋은 다이아반지 같은 게 눈에 띄면 발이 딱 붙어 가지고 안 떨어졌다고 해요. 가도오도 못했다고 해요. 자나깨나, 꿈에도 그놈의 다이아반지가 눈에 선하고.… 이래서 남편을 며칠동안 들볶아 가지고 꼭 그것을 손에 넣고야 직성이 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어보니까 안목부터 달라지더라고 해요.
이제는 그런 것 보면 '저거 먹을 것도 아니고 볼만한 것도 아니구나. 그냥 돌멩이인걸 가지고…'전혀 그것에 관심이 없어지더래요. '참, 나 원…' 하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의 변화가 놀랍더래요.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옛날에는 그런 거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갖고 싶다는 마음도 없고, 남이 가진 거 부럽지도 않고-신비롭잖아요? 신비로운 게 별일인가요? 이런 것이 신기한 거예요. 그저 이렇듯 자기의 옛 모습이 죽은 것을 보고 놀랄 따름이지요. 그뿐입니까? 스스로가 그렇게도 인색했던 사람인데 오늘은 베푸는 사람이 되었어요. 전에는 미워하고, 증오하고, 시기 질투하던 사람인데, 오늘은 아주 겸손한 사람이 되어 있어요. 옛날 같았으면 절대로 참지 못하던 일이요, '참다니 말도 안되지'하고 참으면 꼭 죽는 것만 같았던 일에도 이제는 참으려 노력할 것도 없이 어느 겨를에 벌써 다 참아졌어요. 전에는 그렇게 밉던 사람이 이제는 불쌍해 보일 뿐이에요.
안됐다 싶어요. 측은하게만 보이는 거예요. 이게 바로 새사람 아니겠어요? 완전히 새 사람 아니겠어요?
모름지기 우리는 저 앞에 있는 영생을 바라보지마는 현재에도 죽음과 생명을 동시에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그 말씀입니다. 예수와 함께 세례를 받아 그 세례 속에 신비로운 자기생명을 스스로 체험하게 됩니다. 이 원리는 단순하며 흔히 말하는 신비경험인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mystical experience인 것만은 아니예요. 이건 실제적인 것이에요. 또 구체적인 것이에요.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감정이나 즐기는 감상적 종교가 아닙니다. 흔히 이런 생각들을 하지요.
특별히 다 옛날사람이 됐습니다마는 칼 마르크스가,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했습니다.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억울한 지배당하고 인권을 빼앗기는 것을 스스로 참고 견디도록 하는 마약적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라고, 그러므로 종교는 아편이다, 라고들 했어요. 저 북한의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어요. 앞으로 그거 고칠 일이 또한 큰일이에요. 저들의 백과사전에 '종교는 아편으로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기막힌 노릇이지요. 정말로 큰 실수를 하는 것이에요. 신앙은 생산력이 있어요. 가장 무서운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요.
신앙에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신앙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생산력을 가지고 있어요. 활동력을 가지고 있어요. 마치, 전기는 눈으로 볼 수 없지마는 큰 힘을 가지고 있어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는 것과도 같아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지마는 이 믿음이 모든 방면으로 엄청난 힘을 나타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풍부한 종교감정뿐 아니라, 신비한 체험뿐이 아니라, 생동력과 창조적 역사가 신앙 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보면 기도하는 골방에서부터 시장바닥에 이르기까지 장소와 시간을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이 신앙은 신앙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는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집에 가서는 비기독인으로,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예요. 참그리스도인이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저런 형편에나 이런 형편에나 할 것 없이 항상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의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본문말씀에 중요한 요절이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14절)"-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대한 실제적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 생활 속에서 귀한 신앙의 위력을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라고 12절에서 말씀합니다. 왕노릇-이미도 상고했습니다마는 이런 말은 직역하는 길밖에 없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 같아요. 지배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훨씬 강한 표현이에요. 그래서 왕노릇이라고 했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자유가 없다는 말씀이에요. 내 주인이 따로 있어요. 우리는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자유라고 하는 이름이 있을 뿐이지 자유란 없어요. 실제적으로 없어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의 마음에 얼마나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을 자유라고 말한다면 자유가 있는 것이지만 사랑의 노예도 노예이거든요. 자유가 없는 것이지요. 실제적으로 이렇듯 우리는 자유 없이 살아가는데,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사단의 노예가 되었음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음이냐,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느냐 사단을 왕으로 섬기고 있느냐, 죄의 지배하에 죄의 왕노릇하는 거기에 끌려서 죄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의의 지배하에 살고 있느냐, 조금 더 깊이 말하여 율법에 노예가 되어 있느냐 아니면 은혜에 사로잡혀서 은혜에 노예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14절 끝에 가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율법의 지배하에 있는 게 아니라 은혜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에요. 증오의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이에요. 사람이란 어떤 면으로든지 미쳐 가지고 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에 미쳤느냐가 중요해요. 미쳐도 똑바로 미쳐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미친 사람을 보면 남 보기에는 딱해도 본인은 행복해요. 그는 완전히 미쳐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무엇에 미쳤느냐, 입니다. 오늘도 돈에 미친 사람, 권력에 미친 사람 등 여러 가지에 미쳐서 정신 못 차리고 다녀요. 결국은 자유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의 종이냐, 무엇을 왕으로 섬기며 살고 있느냐, 누구를, 무엇을 주로 섬기고 사느냐, 그 무엇이 왕노릇하매 그 지배하에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죄로 다시는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제는 주인이란 오직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내 주인이고, 그가 내 왕이고, 나는 그만을 섬기고, 그 권력 하에 그를 섬기며 자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조목조목 들어서 말씀합니다.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죄가 왕노릇 못하게 하라,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 함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죄를 지은 자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이에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죄의 위협 아래서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그렇다면 '내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말해버리면 좋을 것을, 거짓말을 거짓말 아니라고 하다보면 점점 일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사실도 기억해야 되고 거짓말도 기억해야 되니까요. 그래서 거짓말 많이 하는 사람은 머리가 복잡해요. 눈이 뱅글뱅글 돌아요. 아주 체질까지 못쓰게 돼요. 으레 그렇게 되는 거예요. 거짓말을 거짓말 아니라고 하니까 또 거짓말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자꾸 쌓여요. 회개 안 하려고 하니까 계속 범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죄가 또 죄를 짓는 현상이지요. 회개하지 않으면 또다시 죄를 짓게 돼요. 죄로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완전히 회개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때에라도 '너는 죄인이다'할 때에 '아니다'할 것 없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대답을 이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다'할 때에 '내가 왜 죄인이야?' '나만 죄인인가, 뭐'하고 나온다면 점점 더 일이 복잡해지지요.
어느 사이에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아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인격 치고 가장 훌륭한 인격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잘하는 인격이 가장 훌륭한 인격이에요. 어느 경우에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렇게 부족한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말 한마디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사이에 죄의 노예가 되고, 형벌의식의 노예가 되고, 저주의식의 노예가 되고, 율법의 노예가 됩니다. 완전히 붙들립니다. 이제는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꼼짝못하고 죄가 나를 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어집니다. 회개하기까지는 도리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다시는 죄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합니다. 죄의 노예될 필요가 없어요. 죄가 인도하는 대로 끌려 다닐 필요가 없어요. 이미 지은 죄는 사함 받았고, 지금 지은 죄는 회개했고, 또 율법이 나를 저주하려고 할 때에 나는 이미 죄 앞에, 율법 앞에 죽은 자로 살고 있어요. 고개를 들지 않아요. 완전히 죽었어요. 율법이 아무리 엄하다 해도 죽은 자를 심판하지는 못해요. 내가 죽음으로써 나는 심판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다시 공부하게 됩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죽으면 감옥에서 나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돼요.
죄로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라-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계속적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죄를 다 사하셨다는 사실을 항상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 죄를 사하셨다는 사실을 항상 선언하고 간증하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나의 죄인된 모습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로 나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길입니다.
또 하나, 두 번째 방법은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절)"입니다. 이 말씀은 원문상으로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원문에서 보면 이 말씀은 '죽어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죽어버릴 육체-mortal body라고 했습니다. 사욕이라는 게 왜 문제가 되는고 하니 바로 죽어버릴 육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떤 욕망도 내 죽어버릴 육체에 딸린 거예요. 육체와 함께 사라질 거예요. 물질-생각해보세요. 며칠동안이나 내가 가지고 있을 것입니까? 아름다움이 며칠이나 갈 것입니까? 참 한심한 것이에요. 썩어질 육체입니다. 죽어버릴 육체입니다. mortal body-썩고 있어요, 지금. 곧 섞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육체가 가진 욕망도 무상한 것이지요. 거기 끌려 다닐 필요가 없어요.
끌려 다닐만한 가치가 없어요. 그런고로 사욕에 끌려 다니지 말라고 말씀해요. 육체의 정욕, 물질에 대한 욕심, 이 더러운 욕망에 절대로 노예가 되지 말라 함입니다. 그 욕망 자체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라는 거예요. 사특한 욕망, 가지고 싶은 욕망, 되고 싶은 욕망… 다 소용없는 거예요. 다 헛되고 무상한 것이에요. 이걸 빨리 깨달아서 거기에 노예가 되지 말라 함입니다. 그래야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어요.
잊지 말 것입니다.
내가 누구한테 속았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욕심 없는 사람 속는 것 봤습니까? 내게 욕심이 있으니까 속았지요. 내게 욕망이 있기 때문에 시험이 시험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자에게는 시험이 없어요. 돈의 가치를 부정하고 사는 사람에게 돈이 유혹이 됩니까? 육체의 욕망을 값지게 여기니까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잘것없는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에게 왜 그것이 문제가 되겠어요?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 갖가지 욕망, 그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첫째, 죄의 권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회개한 사람에게 아무 것도 아니예요.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이 모자란다는 뜻입니다. 빛 앞에 어두움은 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죄의 권능, 그것을 너무 높이 평가하지 마세요. 믿는 사람 앞에는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겁내지 마세요. 비겁해지지 마세요. 넉넉히 이길 수 있어요. 미리부터 겁을 낼 것 없어요. 죄라는 것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것이에요.
둘째는 죄에 기회를 주지 말아야 됩니다. 나의 나됨과 약함을 알았으면 이제는 죄에게 기회를 주지 마세요. 에베소서 4장 26절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짖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 말씀합니다. 분할 때가 있어도 곧 지워버려야지 오래 가지고 있으면 안돼요.
마귀로 틈을 엿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미운 마음이 있으면 죄짓게 돼요. 욕망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실수하게 돼요. 유명한 루터의 말이 있지 않습니까?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길이 없으나,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된다"-지당한 말입니다. 내게 무슨 욕망 같은 것이 슬쩍 일어나 지나가는 것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예쁜 아가씨가 지나가는 것 보면 '참 예쁘구나!'하고 한 번 감상했으면 됐지 다시 또 돌아보지는 마세요. 그러면 빠지게 됩니다. 예술작품 보듯이 말씀입니다. 그렇지를 않고 또 보고 또 보고 하다가, 꽁무니 따라가다가 함정에 빠지는 수가 있어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절대로 기회를 주지 마라-잊지 말아야 돼요.
또하나는, 겸손해야 됩니다.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됩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거예요. 그런고로 믿음으로만 이길 수 있어요. 주님께서 힘을 주셔야 이길 수 있어요. 내 의지로, 내 능력으로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착각하는 그 순간에 벌써 넘어지는 거예요.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힘에 따라서만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으로 살 때에 이길 수 있어요.
또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됩니다. 자녀 됨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과거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어요. 지금도 사랑하십니다.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확인할 때에 죄를 이길 수 있어요.
또하나는, 항상 충만함이 있어야 됩니다. 사람이 허하면 안돼요.
속이 비어 있으면 안돼요. 항상 차 있어야 돼요. 감사로, 찬송으로, 능력으로, 지혜로, 말씀으로, 항상 차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사욕, 이 더러운 욕망을 넉넉히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불의의 병기로 쓰여지지 말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악한 자의 목적에 쓰여지지 말 것입니다. 목적이 잘못되어도 안되지만 죄스러운 방법을 빌려도 안돼요. 목적은 선한데 방법은 악하다-안될 일입니다. 악한 자의 방법을 절대로 흉내내서는 안됩니다. 흉내내는 동안에 빠지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기회로든 간에 마귀에게 순종해서는 안됩니다. 마귀에게 종이 되든가, 마귀의 어떤 것으로, 노예로, 기구로, 병기로 쓰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돼요. 어떤 이유로든 그래야만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제,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라고 했어요.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참 귀한 말씀이에요. 의의 병기라고, 군사적 용어로 말씀합니다. 군에서 사병이 장교에게 순종하는 것 같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군대의 세계라는 것은 참 엄격한 것입니다. 명령에 절대 복종입니다. 생명까지도 명령에 따라 바쳐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왜'라고 묻지 말아야 됩니다. 작전계획을 다 아는 게 아니예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이게 군인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이렇게 되면 삽니까, 죽습니까?' 물을 것도 없어요.
옛날에 일선에서 한번 보니까 총소리가 멀리서 따쿵따쿵 날 때에는 그 소리 들으면서 잠도 잘 수 있어요. 그러나 급한 때가 있어요. 'ㅍ'합니다. 아찔합니다. 'ㅍㅍㅍ'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엎드려 있는 바로 옆에서 먼지가 팍팍 일어요. 이렇게 되는 판에 장교는 '후퇴' 혹은 '전진'하고 명령을 내립니다. 지금 총알이 비오듯하는데 가긴 어딜 가요? 그러나 명령대로 해야 합니다. 그대로 엎드려 있다가는 포로됩니다. 아니면 죽습니다. 위험하지마는 '일어서'하면 일어서고, '뛰라'하면 뛰어야 합니다. 그 시간에 '지금은 안되겠는데요' 따위의 소리하다가는 큰일납니다. 군인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군인에게 또하나 있는 게 있어요. 이렇게 생명을 바쳐서 수고해놓고도 마지막에 훈장을 탈 때에는 지휘관이 타요. 졸병은 정말 '국물도' 없어요. 이게 군인이에요. 생명 바쳐서 수고하고도 영광은 대장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의의 병기로 드리라-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명령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절대순종이에요. 이의를 제기할 것 없어요. 그대로 쓰임 받는 거예요. 마치 도구처럼, 마치 어떤 물건처럼 쓰임 받는 것이에요. 이것이 의의 병기로 쓰임 받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말이 많아버리면 시험에 빠져요.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고, 어느 사이에 벌써 마귀의 종이 되어버려요. 입을 다물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해야 돼요. 어떤 사람은 찬송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하는 대목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요. 내 이름도 떠르르하게 나고 각광도 받고-이래야 성에 찬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어디가지나 나는 이름 없이 빛 없이 의에 병기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온전히 쓰임 받는 거예요. 이렇게 쓰임 받는 동안에 죄를 이길 수 있어요.
유혹에 빠질 시간도 없어요. 그걸 알아야 됩니다. 의의 병기로 나를 하나님께 드려요. 드린다는 말은 헬라원문으로 볼 것 같으면 계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드린다는 말입니다. 드렸어요. 또 드려요. 헌신하고, 또 헌신해요. 매일아침 다시 한번 헌신해요. 깨끗한 마음으로 헌신해요. 이렇게 드려보세요. 세상 유혹에 빠질 겨를 없어요. 마귀의 시험에 빠질 겨를 없어요.
가만히 보세요.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은 하지 않아야 될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당연히 해야 될 일을 아니하는 사람은 어느 사이에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게 돼요. 그렇지 않습니까? 공부하는 학생들, 열심히 공부하는데 자기가 해야 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시험에도 안 들어요. 아무 유혹에 빠지지 않아요. 당연히 공부해야 될 중요한 나이에 공부 안하고 돌아가니까 유혹에 빠집니다. 나쁜 동무 사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예요.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서 소중하게 귀중하게 쓰임 받고 있다고 하는, 하나님께 고용됐다고 하는 자기긍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다른 유혹에 빠질 겨를이 없어요. 걱정할 것도 없어요. 여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에요. 빈집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게으른 자가 문제입니다. 한가한 시간이 문제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충만해 가지고 뛰어다닌다면 무슨 시험이 있겠습니까? 아무 문제 될 게 없어요.
더욱 중요한 게 있어요. 혹 실패가 있어도, 부족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부족해도 하나님의 것이에요. 허물이 많아도 하나님의 것이에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고 있다는 이 확신은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 돼요. 유능하면 하나님 일 많이 하고, 무능하면 조금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뿐이에요. 어쨌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말씀은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 아래, 은혜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다시는 유혹의 노예가 되거나, 죄의 지배를 당할 필요가 없어요. 온전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일 때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은혜의 종입니다. 사랑의 종입니다. 자유의 종입니다. 거기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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