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믿음으로 행하는 길(롬14:13~23)
오늘은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절)." '죄'라고 할 때, 우리는 자꾸만 소극적인 의미의 죄만 생각하게 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렇게 '하지 말라'한 것을 범했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말씀은 아주 높은 차원에서 이를 다시 설명해줍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것이 죄다-대단히 중요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면서도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쉽게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의요, 살인하지 않는 것이 의요,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 의요, 간음하지 않는 것이 의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쉽지 않아요. 보세요. 성경에서 말씀하는 '살인'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살인입니까? 우리는 살인(殺人)이라고 읽지마는 히브리 원문대로는 '죽이지 말라'입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에요. 그러면서도 소를 잡아먹고 양을 잡아먹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라는 것이 법일진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참 어려운 것이에요. 이렇듯 우리가 진리에 대해서나, 율법에 대해서나, 의에 대해서 추상적으로 설명할 때에는 아주 쉽고, 이해도 되는 것 같지만 생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사건에 부딪힐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의가 되는지 알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어떤 사람하고 결혼을 할까요?"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결혼은 신앙 좋은 사람, 건강한 사람, 봉사정신이 있는 사람, 사람을 섬기고 수고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기도할 줄도 알고, 교회 봉사도 하는 그런 사람하고 한다면 좋겠지요"-이런 대답은 쉬워요. 이해가 잘 돼요. 그런데 문제가 어디 있는고 하니, 그 다음에 다시 와서 "Mr.박하고 결혼할까요? 아니면 Mr.김하고 결혼할까요?"-이렇게 질문하는 데는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이 추상적 진리를 우리 현실 속에 적응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고로 보다 더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의를 이루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먼저 의로워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로워야 하고, 또 하나님 앞에 의로워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온전하게 합쳐져야 됩니다. 합쳐져야 온전한 의가 되는 거이에요. 다시 말하면, 나의 양심으로는 이것이 옳은 일이에요.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아요. 그러면 의로울 수가 없어요. 또 하나님 앞에는 의로운 것 같은데 나 자신은 영 마음에 안 들어요. 못마땅해요. 이럴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무릇 나 자신에 대한 양심 문제, 이웃에 대한 성실, 또 이웃이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여주느냐가 중요합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여주는가, 옳다고 하는가, 그르다고 하는가?-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완전한 의를 이루고자 한다면 하나님 앞에 옳고, 나 자신의 양심을 보아서도 옳고, 이웃에게도 옳다고 인정을 받는 그런 행위가 되어야겠지요.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젊은 사람이 군대에 가서 신병훈련을 마친 다음에 휴가를 나왔습니다. 그는 군대 갔다온 선배를 만나 이런 어려운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군대 생활을 똑바로 할 뿐 아니라, 바르고 진실하고 멋지게 보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많습니다. 어떤 때에 보면 대대장은 가라고 하고 중대장은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똑같이 대대장도 가라고 하고 중대장도 가라고 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예요. 대대장은 가라고 하고 중대장은 가지 말라고 하니, 나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배가 뭐라고 가르쳐주었는지 아십니까? "보다 더 상급자에게 순종하게, 중대장은 가지 말라 하고 대대장이 가라고 하거든 대대장의 말을 듣고, 대대장이 가라고 하고 사단장이 가지 말라고 하거든 사단장의 말을 듣게. 보다 더 상급자의 말을 듣는 게 옳아." 이것을 배운 후배는 부대로 돌아가서 바라던 대로 군대생활을 잘 했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런 복잡한 문제에 부딪힐 때에는 보다 더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다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행동하려고 할 때에 모든 사람으로부터 다 지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다 옳다 인정함을 받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실제적으로 어려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신앙 양심대로 해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신앙 양심대로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확신대로 할 것이에요.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마땅치 않아도 성경이 말씀한대로 할 것이요,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못받아도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나가노라면 먼 훗날에 잘했다 싶을 거예요. 잘했다 칭찬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당장 사람한테 좋은 얘기를 들으려고만 생각하다보면 이리 눈치보고 저리 눈치보는 가운데서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일도 못합니다. 부득불 이렇게 서로 대결될 때에는, 의견이 나누어질 때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으로부터는 혹 오해를 받고 비방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다음에 신앙 양심대로 하고, 그 다음에 사람의 평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21절에 "아름다우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22절에 보면 "복이 있도다"-복되도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끝에 가서 보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믿음으로 해야 한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교훈을 우리가 본문에서 읽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실제적 행위의 규범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해봅시다. "아름다우니라"-어떻게 아름다운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까지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절)"-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을 헬라어로 칼로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선하다는 뜻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우리는 아름다운 일, 선한 일을 찾아가야 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됩니다. 이웃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부담을 주지 말 것입니다. 이웃에게 고민을 주지 말 것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내 마음대로 행동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고민거리를 주기도 합니다. 괴로움을 줘요.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에 검소한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 마치 무슨 결혼식장에라도 온 것처럼 아주 멋지게, 좀 이상하게 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합시다. 바로 몇 주일 전에 보니까 유독 한 사람만이 아주 화려하게 한복을 차려 입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고서 교회에 들어와 앉았다면 그것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할 문제를 주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나? 좀 머리가 돈 사람인가?'-자꾸만 생각하게 만들어주지 않아요? 사람이 보통으로 사는 게 좋지, 너무 이상하면 꼭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은 다행히도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가끔 주일날에 보면 커다란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분이 있어요. 그래, '하와이에서 온 아주머니인가?'하는 생각을 했어요. 왜 남들 고생하게 만듭니까? 이상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도 죄예요. 평안하게 느끼도록 해줘야지요. 그런데 자꾸만 부담스럽게 만들어요. 그 외에도 복잡한 문제가 많습니다. 길거리를 다닐 때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눈에 거슬리는 일이 있잖아요? 우리의 생활 속에는 이 정도가 좋은데, 유달리 튀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걸 볼 때에 좀 걸리거든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거예요.
소화하기가 어려워요. 의심이 나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고, 오해하게 하고…… 그런 것은 좋은 게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든가, 포도주를 마시든가, 이렇게 함으로써 믿음에 약한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흔히들 우상의 제사에 참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해요. '우상의 제물에 이빨자국이 났나? 고기는 고기로 먹으면 되는 것이야. 음식은 음식이야. 아멘, 하고 먹으면 되잖아?'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이에요.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아니, 저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구먼. 어쩌자고 예수 믿는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나?' 합니다. 자, 이런 사람한테 먹는 것을 들켰어요. 이것도 시험에 걸리는 것 아닙니까?
이제 갓 예수 믿게 된 청년 하나가 장로님댁에 심부름을 갔다고 합니다. 마침 목사님과 장로님들 몇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서로 더 드시라고 권하고 있었어요. 한 잔 더 드세요, 한 잔 더 드세요, 하고 말이에요. 그런데 이 청년, 뒤에서 가만히 들으면서 '아, 목사님이나 장로님도 자기들끼리 모일 때에는 술 한 잔 하는구나'하고 생각했대요. 뭘 마시는지 보이지는 않고 서로들 한 잔 더 드시라고 하니까요. 사실은 이런 말도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 때문에 그 사람은 큰 시험에 든 거예요. 그러니까 거리끼는 일은 하지 마세요. 그게 좋은 일이요, 선한 일입니다. 선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무슨 돈을 줘야만 구제가 아니에요.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기 말 것이요.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 의심을 한다거나 또 그런 얘기는 자꾸 할 필요가 없어요. 데카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진 의심이 있습니까? 당신 혼자 가지고 계세요. 내가 가진 의심도 많으니까.' 뭘 자꾸 물어보니 뭐니 해가지고, 이상한 얘기, 걱정이 되는 얘기를 자꾸 해가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또하나 걱정거리를 올려줍니다. 그러니까 좋은 말이면 얼마든지 하지마는, 그저 어둡고 언짢은 말은 웬만하면 안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남에게 부담을 주잖아요? 선이 못됩니다. 칭찬은 선이 되지만 다른 말은 하면 안돼요.
탈무드를 읽어보니까 재미있는 말이 있습디다. '결혼 잔치에 참여했을 때에 신부가 예쁘지 않아도, 그녀가 예쁘다는 거짓말은 죄가 안 된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야유, 신부가 왜 저 모양이지? 나이가 얼마야? 이게 두 번째 결혼 아니야? 보아하니 늙었구먼"-뭐 이런 얘기하는 것이 다 선이 못되는 거예요. 결혼식에 가서는 무조건 신부가 예쁘다고만 하는 거예요. 다른 소리하면 안돼요. 더구나 음식을 먹을 때에 남들이 맛있다고 하면 나도 같이 맛있다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남들은 다 맛있다고 하는데 "김치는 이상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런 것이 다 맹추 같은 일이에요. 이것은 선이 아니예요. 거리끼는 것 아닙니까? 좋은 분위기에다가 돌을 던지는 거예요.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거리끼는 말은 하지 말 것입니다.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말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부담이나 걱정이나 오해나 근심을 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이야기는 하지 말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나로서는 좋으나 표현의 방식이 다릅니다. meaning은 같으나 form이 다릅니다. 그가 자라온 문화 배경에 따라서 다른 거예요. 다 같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어요. 사랑은 같은 사랑이지마는 표현 방법이 다르니까 그 다른 부분에서 오해가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계관이 달아요. 생각하는 것이 달라요. 또 하나,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어요. 아직도 이런 것을 소화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 앞에서 이것은 위험한 말이에요. 덕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의 그 이해력, 소화력, 극복하는 힘이 약하다는 것을 내가 알고 대해야지요.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 앞에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 같이 말입니다.
전에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요새 같으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마는, 30년 전만 해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다방, coffee shop에 가는 것은 좀 거리끼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제직회에서 이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안수 집사 두 사람이 "장로, 목사들이 다방에만 다니고, 그렇듯 죄를 짓다니!"하고 막 호통을 치고 연설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 큰일났어요. 교회에는 별로 얘기할 데도 없고 해서 주일날 예배 마친 다음에 장로님들이 다방에 간 일이 있었거든요. 아,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성토를 하는 거예요. 막 비난을 해요. 그래서 제가 그 집사님 두 분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용히 하시고 잠깐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한마디 물어보았어요. "집사님, 다방에 가보셨어요?" "아, 내가 왜 가요? 그런 술집같은 데를." 그제야 왜 그 분들이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제가 알았어요. "가보세요. 절대로 술집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 안하셔도 됩니다" 그랬더니 "나 그런 데 안가요"하고 화를 냅디다. 그래, 다른 사람들도 다 웃고 말았어요.
자, 왜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까? 배경은 간단해요. 그 사람은 왕년에 술집에서 술을 많이 마셨던 사람이에요. 그러나 이제 예수믿고 회개하고 왔는데, 술집에서 기생들하고 먹어본 솜씨가 있어서 다방에서 아가씨들이 차를 준다고 하니까 '못쓴다, 어디 그런 데를 가느냐?'-이러는 거예요. 그 사람의 배경으로 봐서는 그도 그렇지 않아요? 아가씨들이 차를 주다니, 안된다는 거예요. 그것은 죄라는 거예요. 그 사람으로는 그럴 수 있어요.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각각 가진 배경이 달라요. 살아온 문화가 다릅니다. culture and subculture입니다. 생각하는 것, 이해하는 것이 다를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깊이 생각을 하고 행동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일단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나대로 마음대로 할 수가 있지마는 저 분을 위해서 내가 기다려줘야지요. 또 일단은 이해하는 방향에서 생각해야지요, 듣는 자세를 가져야지요. 그리고 내 입장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 그 믿음, 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내가 조심해야지요. 좀 삼가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내 편에서 조심해야지요. 내 편에서 거리끼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형제로 거리끼게 함이 마땅치 않다, 거리끼지 않도록 하라 함입니다.
거리끼게 하는 일이 형제로 죄짓게 하는 것이 되고, 형제로 오해하게 하는 것이 되고, 형제로 실족케 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남의 믿음을 파괴하는 일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런고로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형제를 사랑합니까? 사랑한다고 하면 먼저 무엇보다도 그 영혼을 사랑해야 되고, 그 인격을 사랑해야 되고, 그 사람의 세계관을 사랑해야 됩니다.
자, 선교사들이 여러 나라에 선교를 하러 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이 있고, 또 40년을 있어도 그 나라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어학에 재주가 없어서 그렇겠지요. 그러나 선교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 나라 문화를 존경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말을 못배운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 갔다면 중국 문화를 사랑해야 됩니다. 한국에 왔다면 한국 문화를 사랑해야 됩니다.
제가 잘 알고, 지금도 프린스턴 대학에 계시는 마펫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미국에 두 번째 유학을 갈 때에 그 분한테 3년 동안 장학금을 받기도 했어요. 지금은 선교사 40년 생활을 은퇴하고 두 내외분이 조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그 집에 가보았는데, 제 느낌대로 말씀드릴께요. 들어서자마자 꼭 귀신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한국의 골동품이란 골동품은 다 갖다놓았어요. 쌀 뒤주는 tea table로 써요. 그 다음에 뭐 담뱃대니, 갓이니 하는 것들을 가득 갖다놓아서 우중충해요. 또 그것만이 아니예요. tea table 위에는 환등기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찍어놓은 필름이 거기에 다 들어 있어요. 아무때나 누르기만 하면 서울이 나오고, 대구가 나오고, 강원도가 나오고, 교회가 나와요. 이 분은 자나깨나 한국을 좋아해요. 한국의 문화가 그렇듯 좋답니다. 그래, 온 집에다가 골동품을 가득 갖다놓고 그 속에서 살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분이 바로 선교사라고, 사실 이 분은 평양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 고향은 평양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북 사투리로 '피양'이 고향이라고 해요.
여러분, 이것은 정말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를 좋아하면, 그를 사랑하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좋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의 얼굴도 좋고, 그의 말하는 것도 좋고, 그의 옷입는 것도 좋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헤어 스타일도 좋고, 그 사람의 목소리도 좋아요. 또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옷입는 것도 좋고, 넥타이도 좋아요. 다 좋아 보이는 거예요.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렇게 존경하게 되고 좋아지면 거리끼는 것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일부러 거리끼는 일만 골라가면서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일없이 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이것이 선이요 이것이 아름다움이다-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것이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유명한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여기서 '만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입니다. 가정법(假定法)에서 이 말을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아니해서 다른 사람의 실족함이 없다고 한다면 나는 영원히 안먹을 것이다.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얼마든지 먹어도 되지만 그까짓것 가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손해를 줄 수 있다면 나는 안먹을 것이다, 그것도 영원히-이 얼마나 강한 표현입니까? 정말 다른 사람을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무엇이든지 참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끊겠습니다-그러한 높은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흔히들 상황률이라는 말을 합니다. 죠셉 플레츄어의 유명한「situ-ation ethic」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총 주제는 이렇습니다. 상황률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Only love can justify means-오직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어서 되는 일만이 옳은 일이고, 사랑이 없이 되는 일은 아무리 아름다운 일처럼 보일지라도 선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랑만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무한한 자유를 누립니다마는 이웃을 위하여, 이웃의 믿음을 위하여,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제한하고 때로는 스스로 자유를 버립니다. 내 판단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복되다, 하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절)"-이것이 복된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지마는 자기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근본적으로 사랑을 저버려도 안됩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스스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독립된 믿음,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중심에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에 대한 넉넉한 theological interpretation, 신학적 해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성서적으로 옳고, 논리적으로 옳고, 체계적으로 옳다, 합리적이고 신학적이다-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양보하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내가 희생하기도 하고 한 걸음 물러서기도 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어디까지나 옳다. 이것이 옳은 일이다'-그것을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저를 위해서 내가 한 걸음 양보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확신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절대적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한테도 거리낄 수가 없어요. 누가 비난하든 말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에요. 확실하니까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바-이것은 확신입니다. 그런데 당장은 이것이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가 때때로 어린아이들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모를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그러나 언젠가는 너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확실히 믿고 이런 자신감이 있어야 돼요. 우왕좌왕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경건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경건의 형식은 때때로 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변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가지는 사랑과 믿음과 경건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모양은 변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에는 전부 신발을 벗고 왔습니다. 신발을 주머니에다 넣어 가지고 예배당에 들어 왔어요. 왜냐하면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간다는 것은 서양사람들의 문화거든요. 옛날 어른들로 보면 세상에 그처럼 고약한 짓이 없어요. 어디 신발을 신고 함부로 들어갑니까? 신발은 꼭 벗어야 했어요. 그래, 신발을 벗다보니까 신발 잃어버리는 사람도 많고, 발냄새도 굉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어요. 제가 지금 강대상이 있는 이 자리에 신발을 신고 올라섰어요. 그런데 아직도 이것을 소화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어떤 교회에 가보면 신발을 벗으라고 그래요.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것이 좀 어색하니까 슬리퍼를 신어요. 아니, 슬리퍼는 신발 아니예요? 이것은 더 우스워요. 참 어정쩡한 거예요. 여기에 확실한 신학적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신발을 벗기는 벗어야겠고, 그게 좀 이상하니까 슬리퍼를 또 신고…… 확실하지 못한 것이지요. 자고로 모양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도 있고, 서서 기도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달라지는 거예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데에 대해서는 자기가 세운 기준에서 책망을 받지 않아야지요. 기준이 없어도 안되고, 우왕좌왕해도 안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해야지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일날 교회 올 때에 왜 차를 몰고 오느냐?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되는데 주일날 차를 타고 다니면 되느냐?'-이것, 말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교회까지 걸어오겠어요? 내가 차를 안타고 버스를 탄다면 그것 또한 남 운전을 시키는 것이니까 마찬가지지요. 또 주일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데 여기서 쓰는 전기는 어떻습니까? 발전소에서 일을 해주니까 우리가 지금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생각하기로 들면 정말 복잡합니다. 오늘도 보면 주일날에 대해서 말이 많아요. 어떤 분들은 "주일날 교회에 왔다가 조용히 집에 가서 식사하고 그래야지, 주일날 이 식당 저 식당 미어터지게 가다니, 도대체가 경건치 못한 일이야"-이런 얘기를 가끔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에 가서 해먹느라고 일하는 것보다야 이왕 해놓은 것을 먹는 게 낫지 않아요?"라고 말해줍니다. 여러분, 이것은 방법이 다르지요.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이렇게 식사를 식당에서 하는 것이 꼭 좋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나쁘다고 할 것도 없어요. 여기에도 지식이 있어야지요. 나름대로 확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바른 해석을 못 내리고 있다가 누가 물으면 '그러고보니 그런가?'-이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안되다는 얘기예요. 많은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많은 신앙에 손해를 끼칩니다. 이래서 문제가 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밀어붙이세요. 그럴 수 있는 확실한 신앙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다보면 어떤 때에는 너무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독선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적어도 자기 양심에 자유를 지켜야지요.
마지막으로 본문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좇아 행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믿음은 곧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내가 구원받았어요. 그 거룩한 은혜 안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계율적인 얘기가 아니라 은혜적인 이야기입니다.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은 곧 신앙적 겸손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적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속받은 자의 감격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어요. 오늘도 그 은혜로 살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절대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의를 부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바로 그렇습니다. self-righteous- ness, 자기 의를 부정해야 됩니다. 내가 혹 선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 의가 되는 것이 아니예요. 내가 이렇게 삼가고, 이렇게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고, 이렇게 믿음으로 살고, 이렇게 정직하게 산다 하더라도 이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가 되는 것이 절대 아니예요.
나는 언제나 죄인이요, 언제나 부족해요, 언제나 완전하지 못해요-그런 가운데서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바로 이러한 믿음으로 행해야 됩니다. 성경은 이 믿음에서 떠나면 다 죄인이라고 했어요. 이 믿음으로 먹고, 이 믿음으로 삼가고, 이 믿음으로 사랑하고-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행위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감사합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감사하지요. 희생을 할 때에도 특권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가 있고, 이런 시간이 있고, 이런 계기를 주님께서 만들어주시기 않았습니까? 무릇 희생도 특권입니다. 옛날 어른들은 순교도 특권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나 순교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런 간절한 마음, 아주 겸손한 충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가운데 행할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고, 봉사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절대로 율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은 믿음으로 해야 된다, 믿음으로 좇아 하는 것만이 의가 된다 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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