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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의 운명1(롬1:24~27)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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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의 운명1(롬1:24~27)

 

 

오늘의 본문은 버림받은 자의 운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이 본문을 계속 상고하게 되겠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갈 때에 어떤 길로든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구원이 있고, 선한 일을 할 때에 반드시 하나님께로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 시기가 좀 늦더라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고, 선한 일을 했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반대로 악한 일을 했을 때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신앙이 확실한 것처럼 심판에 대한 신앙도 확실해야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심판에 대한 신앙이 확실해야 구원에 대한 신앙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우선 심판의 form과 양태가 각각 다릅니다. 이런 모양으로 저런 모양으로 심판이 있습니다. 자연을 통하여, 재난을 통하여, 질병을 통하여, 우환을 통하여, 다른 많은 사건들을 통하여, 혹은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심판이 있음을 우리가 압니다. 심판의 양상은 내가 생각한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다를지라도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또하나, 심판의 시간이 다릅니다. 내가 생각한대로 오늘 죄를 지으면 내일 벌받는 게 아니예요. 어떤 때에는 좀 길게 5년 후, 10년 후 일 수도 있어요. 어느 때에라도 반드시 심판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그 축복이 수천 대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불의의 길로 행하면 그 죄가 3, 4대까지 이어질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죄가 3, 4대까지 이어질 것이다.'--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좀 늦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반드시 있을 것이니까요. 시간적인 차이는 있으나 심판은 반드시 있습니다.

또 하나, 누구를 통하여 심판을 받느냐 함입니다. 내가 갑이라는 사람에게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갑이라는 사람을 통해 내가 보응을 받는 것은 아니예요. 내가 김이라는 사람에게 못된 짓을 했으나 이제는 내가 박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은 여기 이 사람이에요. 그러나 내가 아픔을 당할 때에는 저 사람으로부터, 전혀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저 사람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노라, 이렇게 떠들고 있어요. 거기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배신했든지 배신했으면 그 사람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배신당하는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내가 피해를 입힌 사람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요, 하나님의 심판이 빗나간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겸손하게 생각해보세요. 다 내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에요. 문제는 그 사람으로부터 당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당할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심판은 반드시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이지요.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심판에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있어요. 주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심판을 당해야 됩니다. 그 심판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또 세상 끝에 있을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의 심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일단 죽은 다음에 가사 상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대요. 사실은 완전히 죽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아는 한 분은 죽은 사람의 시체를 시체실에 보관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곳이 꽉 차서 하룻밤을 그냥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시체실에 넣으려고 보니까 그 사람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더라는 거예요. 이런 유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심리적으로 유도해서 연구해본 결과는 이렇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대개 두 가지 현상을 경험한다고 해요. 하나는 어떤 강을 건너간다는 거예요. 재미있는 얘기지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아주 빠른 순간인 것 같은데 그 찰나에 자기의 일생이 눈에 환하게 보이더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리도 빠른 시간에 필름이 돌아가는지, 자기 모습과 더불어 그 일생이 확 나타나서, 그래서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는 거예요. 이게 심판이에요. 이는 심리학자들의 얘기에 불과합니다마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리라'--자기의 모든 행위, 그 깊은 것까지 드러납니다. 이게 심판이에요. 종말론적 심판입니다.

그런가하면 현재에도 심판이 있어요. 그러니까 심판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성경을 보세요. 바로 왕 같은 사람은 강퍅해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저주받았어요. '아나 데마 애스 토'---'천벌을 받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후로 저들은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가룟 유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에 그는 다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이렇게 현재적으로 심판 받아서 그 심령이 아주 완악해져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 417절에 보면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라고 말씀합니다. "버려두라"--더는 외칠 것도 없고, 권면할 것도 없다 함입니다. 이렇게 버려진 심령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버려두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세 차례에 걸쳐서 보게 됩니다. 버려둔다--영어로는 'give up' 'abandon', 헬라어로는 '하레도켄'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학적으로 한번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버려둠'이라는 것은 곧 심판을 뜻합니다. 심판이라는 사건을 하나님의 능력사건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못하셔서 흘려진 게 아니예요. 하나님께서 심판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한 심령에 대해서도 결국은 버려진다고 하는 심판사건으로 처리하고자 하는 것이 오늘의 성경의 내용입니다. 보세요. 본문말씀 24절에는 종교적인 문제로 버려둔다 합니다. 26절에는 부도덕한 일에 도덕적으로 버려둔다 합니다. 28절에는 인격적으로 버려둔다 합니다. 버림받는다--이 모든 것은 다 현재적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려주셨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양심을 통하여, 자연을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전도자를 통하여 오늘도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당하는 사건을 통해서 누누이, 분명하게, 확실하게 말씀해주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은총 밖으로 밀려납니다. 여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죄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죄를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벼락을 치시면 죄를 못짓지 않겠어요? 또 죄 지으려는 사람이 병들면 죄를 못지을 것 아니겠어요? 또 돈 없으면 못된 짓도 못할 것 아니겠어요?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 상당한 여유를 주시고 permit, 허락하심으로써 죄를 짓는 일도 가능해지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서는 은총 속에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 속에서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말을 안들으면, 한계를 넘었을 때, 이제는 내버리시고 마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보셨습니까? 저는 몇번 가보았습니다마는 지난번에는 한 400여 명의 목사님들이 그곳에서 수양회를 가졌어요. 거기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는 연못처럼 아주 넓은 강이 있어요. 그 강물이 흘러 흘러 폭포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묵은 숙소 앞이 바로 강이라, 저도 그곳에서 배를 타봤는데 가만히 않아 있으면 배가 저절로 슬슬 흘러 내려가요. 그러면 노를 젓거나 모터보트를 타고 다시 거슬러 올라와요. 그러다가도 가만히 있으면 또 죽 흘러 내려가지요. 그런데 그 강에 깃발이 꽂혀 있거나 줄이 매여져 있는 곳이 세 군데 있어요. 그러니까 경계선인 것이지요.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노를 저어야 올라갈 수 있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모터보트를 타야 올라갈 수 있다.' 끝으로 '여기가 강을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다. 이 경계를 넘는다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라고 씌어 있어요. 그런데 1년에 평균 3, 4명이 그대로 흘러 내려가다가 폭포에 떨어져 죽는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며 내려갔다가 아슬아슬하게 돌이켜 올라오는 스릴을 즐기려다 그냥 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1년에 몇 사람씩은 꼭 죽는다고 그래요. 보세요. 한계가 있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우리가 죄도 지을 수 있고, 장난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한계를 딱 넘어서면, 은총 밖으로 떨어지면 이제는 내려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자유가 없어요. 돌이킬 길이 없어요. 회개도 못하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그 상태를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내버렸다--이것도 하나님의 심판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칼뱅 신학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칼뱅의 신학이 젊은 사람들에게나 혹은 젊은 신학자들에게 항상 비판을 받는 부분이 한군데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예정해놓으셨다'하는 부분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마음에 드는데 '지옥 갈 사람도 예정하셨다'--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은 절대은총 속에서, 불가항력적 은혜 속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동시에 버림받고 지옥 가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다'--이렇게 평가하고 보니 버렸다는 것, 하나님의 포기도 곧 하나님의 의지라는 설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하고 지옥 갈 사람을 예정해놓으셨다--이런 말이 되는 것이지요. ,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온전한 것으로 믿을 때에 이 부분을 이제 이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쉽게 얘기할 테니 잘 이해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못된 인간이라도 어떻게든 구원하시고자 선지자를 보내시고,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시고, 전도사를 보내시고, 감동하게 하시고, 사건으로 때리기도 하시고, 매도 치시고, 병 걸리게도 하시고…… 그야말로 온갖 노력을 다하시면서 구원하시고자 애쓰십니다. 그런데도 이 고집센 인간은 끝까지 끝까지 말을 안 들어요. 우리 같았으면 이럴 때에 할 수 없다,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듯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포기하고 마셨다고 생각해요. 인간적으로는 이것이 말이 돼요. 그러나 하나님을 평가하기로 들면 '하나님이 무능하다. 하나님이 그것 하나 구원하지 못하시나? 왜 못하시느냐? 왜 그 인간 하나를 구원하지 못하시느냐?'하게 되지요. 그러나 보세요. 칼뱅의 충성된 신학적 의지로 볼 때에는 하나님께서 무능하셔서 구원 못하신 게 아니라 안 하신 것이다, 그 말입니다. 잘라버리신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셨던 것이다, 그 말입니다. ,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포기도, 버림받는 것도 예정이라는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제 그 말의 의도를 알 수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능동적으로, 하나님께서 의지적으로 심판해버리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못 받는 것이다--하나님의 구원의 온전하심, 그 능력의 온전하심을 이렇게 설명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는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옥 가는 것까지 예정하신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고 얘기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를 말할 때에 결국은 하나님의 버리심, 심판의 버리심이 현재적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만부득이 버려지는 심령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 점이 칼뱅의 신학적 고민이었습니다. , 그러면 오늘 여기 보니 버리는데 어디다 버렸는고 하니 우상숭배에 버렸다, 곧 무신론자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셨고 알게 해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반항하고, 불신하고, 안 믿고, 안 받아들이다보니 이제는 모르게 되고 말았어요. 모르게 되는 심판을 받았어요. 이제는 알려고 해도 몰라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하나님을 더듬어 알려고 했습니다. 알려고 하여 애쓰고 봤더니 우상이더라, 그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불러보았더니 그게 우상이더라, 그 말씀입니다. 그래요. 예수그리스도 없는 신관--그것은 곧 우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말한다면 양심이다, 진리다, 선이다 하고 중요한 문제들이 있습니다마는 다 모르게 되고 말았어요. 이제 부인하고 거역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좀더 나아가서는 거역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이미 거역한 것 때문에 모르게 되어버렸어요. 이젠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어요.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지요. 가끔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국민학교 1학년 때부터 1 더하기 23이다, 라고 공부해나가야 됩니다. 부지런히 공부해야 돼요. 그렇게 나아가다보면 a 플러스 bc, 하는 것을 공부하게 되고, 이렇게 꾸준히 공부를 해나가서 고3이 되었어요. 이제 열심히만 하면 고31년만 해도 훌륭한 성적을 올릴 수가 있지요. 그러나 애초부터 1 더하기 2부터 공부를 게을리 했어요. a+b 할 때에는 놀러다녔어요. 드디어 고 3 때가 되어 밤을 새우고 가정교사 두고…… 별짓 다 하지만 될 일이 아니거든요. 지났어요. 바로 이런 얘기입니다.

모르는 거예요. 이젠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어요.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선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고 양심대로 살아보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못해요. 해보면 알지 않습니까? 스스로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진실하고자 해도 진실할 길이 없어요. 왜요? 이미 버려졌기 때문이지요. 멀어졌어요. 아주 멀어졌어요. 제가 언제 한번 책에서 이런 것을 읽었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공부를 해야되는데 어쩌다 1시간쯤 공부 안하고 지나버리면 그 다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데 2시간 걸리고, 만일에 하루를 책 안보면 다시 책 보는데 이틀이 걸리고, 만일 1년을 공부 안하고 놀다가 다시 공부하려들면 2년이 걸린다는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멀어져서 심판 받은 심령이 될 때에는 돌이킬 길이 없어요. 필경 우상숭배, 무신론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를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24)"--놀라운 진리입니다. 우상숭배가 정욕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욕,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15절에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합니다. 욕심이라는 것이 슬쩍 지나가야 돼요. 정말이지 머리 위에 앉는 새를 막아야 돼요. 그러나 슬쩍 지나가게 하는데 이것이 잉태돼요. 마음에 잉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1차적인 심판입니다. 그 다음에 이 죄가 자라나요. 죄를 지었으면 곧 회개해야 되겠는데 계속 성장합니다. 여러 가지로 변명하면서, 남에게 전가하면서 자꾸 자라요. 이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정욕이, 욕심이 죄를 짓고 죄가 점점 자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셔요. 내버려두는 것, 이것이 벌써 심판이지요. 잘못된 길로 가면 다리라도 부러져야, 사업이라도 망해야, 병이라도 들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야 그게 사랑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사형통입니다. 정욕대로 되고 있어요. 정욕적인 것, 이 더러운 정욕이 오히려 성공하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정욕대로 되는 것, 이것은 버려진 상태에서 오는 것이다--대단히 중요한 결론입니다. 굉장한 진리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자기가 우상이 되면서 욕심이 점점 커질 때, 이것이 바로 심판으로 치닫고 있는 증좌다,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로써 창조주로서 주인이 되시고, 오히려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좁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진리의 길, 좁은 길, 선한 길로 인도해서 생명으로 인도하시건만, 우상은 그렇지 않아요. 우상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 주인되게 하고 향락에 빠지게 하고 넓은 길로 가게 해요. 그래서는 죄를 합리화해나가다가 사망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상숭배자의 심리를 한번 살펴봅니다. 왜 우상을 섬기느냐--이것은 심판 받은 모습입니다. 우상 섬기는 사람마다 가만히 보면 자기 행위,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이제 보세요. 내가 무엇이 잘못됐어요. 그러면 이건 내가 잘못한 것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종교적으로 이건 내가 잘못한 것이다--이렇게 내가 잘못했다고 처리하고 뉘우치고 돌이켜야겠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우상숭배자는 이것을 운이 나빠서다, 재수가 없어서다, 액운이 씌인 것이다, 합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자에게는 도덕이 없어요. 여러분, 어디 가서 무당한테 뭘 물었을 때에 당신 죄지었군요, 회개하세요, 하는 말 들어봤습니까? 그런 것은 없어요. 자기의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이건 액()이 끼어서다, 잡귀 때문이다, 하면서 원인을 딴데로 돌려버려요. 이것이 우상숭배의 원인입니다. 복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 화나 잘못된 것은 꼭 남의 탓으로 돌려버려요. 그렇게 타()에 돌리는 순간에는 자신의 죄책과 고통으로부터 좀 벗어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거예요. 그래서 우상을 많이 섬기고 제사를 많이 드려야 조금 시원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라도 돌이킬 생각을 안해요. 행동을 돌이키고 생활자세를 바꿀 생각은 없이, 제사를 많이 드려서, 굉장하게 해서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행가 가사에 이런 소리가 있지요? '불효자는 웁니다'---꼭 불효자가 제사를 많이 드려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으니까요? 효자보다도 오히려 못된 불효자가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심리입니다. 또한 우상숭배자에는 순간적인 망각을 도모하는 심리가 있어요. 가책도 있고, 괴로움도 있어요. 그래서 제사의식 따위를 통해, 우상숭배라고 하는 종교의식을 통해서 심리적으로 잠깐 자유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먹고 마시고 뛰논다'하는 성경의 말씀대로 그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 하는 것입니다. 떡먹는 데 관심이 있는 거예요. 향락과 먹고마시는 일에 관심이 있어요. 이것은 굉장한 정신적 쾌락주의입니다. 죄에 대한 정당화 행위입니다. 이래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근본은 정욕이 아니겠어요? 회개하지 아니하려하는 더러운 정욕, 욕심이 거기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사(24)"라고 말씀하는데 이런 정욕을 '애피투미아'라고 합니다. 이건 좋지 않은 욕망이며 우선 향락으로 치닫는 더러운 욕심이에요. 동시에

이것은 병적인 것이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지된 향락을 좋아합니다. 불법적 향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금지된 향락, 이것은 모험이지요. 모험을 즐겨요. 또 살생을 즐겨요. 옛날에 원형극장이란 것이 있었지 않습니까? 사람과 동물을 싸우게 하고 사람들끼리 칼로 죽이는 것을 구경하면서 좋아했다 해요. 로마에 가보면 그런 원형극장이 아직도 유적으로 남아 있잖아요? 거기 앉아서 보면 그 때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고 해요. 얼마나 잔인한 짓입니까? 그것이 몇 번 둔갑을 해서 변질된 것이 권투시합입니다. 더구나 킥복싱 같은 것 보세요. 때리고 치고 피나고 하는 것보고 와, 와 함성을 지릅니다.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또 죄짓는 것을 즐깁니다. 스릴이 있거든요. 그리고 숨은 쾌락을 즐겨요. 그게 바로 도박입니다. 도박이 별것입니까? 다른 사람 못보게 하고 나만 압니다. 가능하면 남을 속입니다. 이런 것을 즐기는 것입니

. 도박하는 사람들치고도 소위 신사들은 하룻밤에 몇백 불 쓰고 나서는 "몇백 불 극장표 내고 즐긴 거야"라고 말해요. 도박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무서운 시험이 바로 잃어버린 것을 보충하려드는 것이네, 그러면 안되지요. 잃어버린 게 아니다, 그저 표 값을 낸 것이다, 이러고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철학이 있더구먼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이렇듯 속이는 것을 즐기는 것, 감추인 것을 즐기는 것은 맛있는 거예요. 하지 말라는 짓 하는 것, 참 재미있는 것이에요. 이런 것이, 이게 다 더러운 정욕입니다. 싸움을 즐기는 것, 속이는 기쁨, 탈취하는 기쁨, 부도덕의 기쁨--이런 것들이 더러운 정욕에 속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내버리실 때에 우상숭배로 치닫고 우상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26절에 보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두셨으니" 합니다. 더러운 욕심만이 아니라 이제 부끄러운 욕심입니다. 도덕적인 것입니다. 더러운 욕심, 타락한 욕심,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졌다고 합니다. 같은 욕망이라도 욕망 자체가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깨끗한 욕망을 얻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어도 깨끗한 것, 행동을 해도 깨끗한 게 좋아요. 그런데 이 욕망 자체가 구원을 받지 못해서 더러워지면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욕망이 죄 가운데서 무제한으로 발동하고 부도덕해져서 부끄러운 짓을 합니다. 부끄러운 짓을 즐깁니다. 이것은 이성이 완전히 병들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성이 병들 때에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생각해요.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있는 말씀은 2천 년 전 기록이로되 오늘 현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인 양 적나라하게, 읽기조차 부끄럽게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해하여(26, 27)"--변태입니다.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지요.

여러분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오래 전에대리처라고 하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문제작이었습니다. 문제작이라고 해서 제가 한번 구해서 읽어보았었습니다.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변태적으로 빠져들어 간 사람, 그러니까 동성연애니 해서 변태적으로 산 사람을 정상적인 생활로 옮겨놓고자 하니까 치료가 안 되는 거예요. 도저히 치료가 안돼요. 변태적인 것만이 대안일 뿐이에요. 그것도 점점 상승작용을 해요. 에스켈레이팅을 해 가지고 더 강한 자극으로, 더 잔인하게, 더 변태적으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간 것이지요. 이제는 사람의 피를 봐야만 쾌락이 있어요. 이걸 치료할 길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치료가 되겠는가 하고 그 치료하는 임상기록이 그 내용입니다. 끔찍한 얘기입니다. 현대인이 이래서 문제입니다.

더러 젊은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너무 강한 자극을 너무 일찍 받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 결혼을 해도 성생활이 없는 커플이 많답니다. 신혼여행 때부터 성생활이 없대요. 이게 문제가 되어가지고 심야토론에도 몇 번 나왔고 신학자들이 토론하는 데 같이 앉아서 얘기해보았습니다. 왜 없느냐?--날 보고 물어요. 왜 없을 것 같으냐고 해요. 내가 봐도 없을 것 같다고 그랬어요.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텔레비전이니 컴퓨터니 해서 어렸을 때부터 너무 강한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변태적인 강한 자극을 일찌감치부터 간접경험 다 해버렸어요. 이제 사랑하는 아내고 뭐고, 이런 것이 시시해요. 이것 가지고는 아무 즐거움 없어요. 쾌락이 없어요. 강하고 변태적인 그것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제는 정상적인 것, 마일드한 것, 순리적인 것, 순한 자극 가지고는 영 안되는 거예요.

오늘의 본문대로, 그래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호모섹스입니다. 변태적인 이 같은 길로 빠져나갑니다. 이거야말로 심판 받은 것입니다. 부끄러운 욕심에다 하나님께서 내버리셨어요. 버리시는 순간, 동물이 되어요. 동물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동물이 돼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못된 사람 보면 '개 같은 놈'이라 욕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런 욕하면 개가 웃을 거예요. 기가 차다고 할 거예요. "나만큼만 돼봐라"할 거예요. 개는 그만하면 괜찮은 편이지요. 사람이 얼마나 더러워졌습니까? 본인들도 압니다. 스스로 더러운 것에 버려졌다는 것을요. 그래서 절망하고 남 죽이는 것도 쉽게 하고, 내가 죽는 것도 개의치 않아요. 이런 인간이 완전 절망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상당한 보응을 받았느니라"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비인간화했지요. 도덕적으로 타락했지요. 에이즈라고 하는 구제할 수 없는 질병에 걸렸지요. 그래 마구 썩어져나갑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 보면 굉장합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소리지르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전에는 안보이더니 미국에서는 지금 심야에도 막 보여줍니다. 에이즈환자 죽어 가는 것, 참 끔찍합니다.

"상당한 보응을 받았느니라"--여러분,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3절 말씀 보세요.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굳어짐을 면하라, 심판을 면하라 함입니다. 심판 받기 전에, 버려지기 전에 회개하고, 귀에 들릴 때에 회개하고, 지금이라 할 때에 당장 회개하고, 피차 권면해서 회개하고, 바르게 주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버림받는 지경에 이르면 끝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 무서운 현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강팍케 됨을 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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