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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빗나간 숭배자(사도행전 14:11~1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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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숭배자(사도행전 14:1118)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오늘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루스드라에서 사도 바울은 설교하는 도중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한 불쌍한 사람을 직시하게 됩니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듣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믿음이 생기고, 중생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영혼이 소생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영감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영혼과 이런 마음과 이런 정성에는 분명 육체의 건강이 회복되리라 믿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앉은뱅이에게 아주 직선적으로, 간단하게 명령을 합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10)"--이 때, 앉은뱅이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벌떡 일어납니다. 이 사람이 앉은뱅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기적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고, 들어보지도 못한 기적입니다. 바울의 설교 시간에 참으로 희한한 장면을 보게 된 것입니다. 즉각적으로 이 사간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본문에도 나오는바,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제물과 화환을 가지고 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앞에 엎드려 제물을 불태움으로써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신들의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 이분들은 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신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여기에 현현하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섬겨야겠다 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앞에 제물을 차려놓습니다. 이 때에 바울이 이것을 거절하고, 제사를 못하게 하는, 그런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그것은 전설입니다. 신화적 전설입니다. 어느 나라에든지 전설이 있고, 또 신화가 있습니다. 신화라고 하는 것은 '만들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어디까지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신화라는 그 이야기 속에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 뜻과 교훈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하지 말라든가, 진실 하라든가, 혹은 부모에게 효도 하라든가, 못된 짓을 하면 반드시 망한다던가, 하는 교훈을 신화적 방법으로 이야기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형식과 이야기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그 속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것만 알아들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월이 가면서 신화가 자꾸만 입에서 입으로, 전설로 내려오다 보면 어느 사이에 그만 뜻은 간 데 없고 이야기만 남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으려고 합니다.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희 집 뒷동산에 까치집이 몇 개 있었는데 견우 직녀 이야기를 얼마나 들었던지, 매일 보는 까치지만 유독 그 날은 까치머리가 얼마나 상했나 하고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를 만나게 해주려고 까치가 하늘로 올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점점 정말 있었던 사실로, 역사적 사실로 믿으려 합니다. 또한 그렇게 사실화하면서부터 그것이 과장됩니다. 그 다음에는 이에 따른 더 과장된 해석을 하게 됩니다. 결국, 신화는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누가 만든 것인지, 무엇 때문에 이야기하게 된 것인지 모를 정도로 과장됩니다. 그것 신화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이 루스드라 사람들이 그렇듯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도 신화적 전설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쓰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제우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헬라사람들이 섬기는 이 제우스신은 모든 신의 왕으로 추앙되고 있습니다. 로마사람들로 말하자면 주피터입니다. 로마사람들은 주피터, 헬라사람들은 제우스입니다. 또한 "허메"라는 말은 헤르메스를 가리킵니다. 이 또한 헬라사람들의 신입니다. 이 두 신() 사이의 관계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쓰스와 허메, 이 두 신이 어떤 날 아무도 모르게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지상에 내려왔답니다. 그런데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또한 어떤 모양으로 세상에 올지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그랬었겠지요. 그런데 빌레몬이라는 사람과 그 아내 바우기가 자기 집으로 모셔서 잘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이 후에 제우스 신이 하늘로 올라가서는 자기 영접치 아니한 마을을 다 진멸 했답니다. 그리고 자기를 영접한 이 두 사람으로 제우스 신당을 지키는 신전 수호자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죽은 자리에는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른바 두 그루 나무에 대한 전설이지요. 신을 잘 영접한 두 사람이 변신해서 나무가 된 것이라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런 신화를 다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울과 바나바가 나타나서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는 쓰스고 하나는 허메다, 만일 이번에 영접하지 않았다가는 우리는 아주 죽는 것이다, 참으로 중요한 기회다, 이번 기회는 절대로 놓치면 안되겠다--그래서 제물을 가지고 와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얘기가 됩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모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고,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서두르는데 바울과 바나바는 이것을 절대로 못하게 말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상숭배 하는 것은 첫째,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운 가운데서 그만 바른 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합리성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생각을 저버리게 됩니다. 두려운 감정의 반사작용으로 우선 경배부터 하는 것입니다. 무지하기 때문이지요.

또 하나, 이루지 못하는 소원 때입니다. 소원은 있는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 어디에다 힘을 빌려야겠다 싶어서 소원을 비는 것입니다. 나무한테도 빌고, 바위한테도 빕니다. 아무한테라도 빌어서 자기의 욕망과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능력은 미치지 못하고, 욕망은 멀리 있고, 또한 인간의 힘으로써는 이 욕망을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고 할 때, 아무 신이라도 만들어서 그것에 빌어서라도 소원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상이 생깁니다.

또 한가지, 이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향락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자기 죄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잘못을 회개하고 도덕성을 묻는 일이 없습니다. 도덕적인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사람들이 우상을 많이 섬깁니다. 그럼으로써 소원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한 것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고……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것, 분명히 화가 돌아올 텐데 이 화를 어떻게 면할까 하고 궁리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에 자기의 생활을 고친다던가 혹은 도덕적으로 바로잡을 생각은 안하고 우상을 섬겨버리는 것입니다.

신의 진노를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아가서는 향락주의가 됩니다. 죄를 정당화하거나, 혹은 죄에 대한 가책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일종의 신화적 향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래서 무당이 정신없이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 춤추는 것을 바라보면 혼을 빠뜨리게 됩니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뭐든지 다 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일들이 다 우상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또한, 사회학적인 것이 있습니다. 권력자나 돈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화살을 그려서 붙여놓고는 여기에 경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내게 경배하라, 뿐만 아니라 너희 집에서도 나를 경배하라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을 만들어놓고 절하라 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내 앞에서 절하듯이 내 모양을 그려놓은 그림이나 내 상에 절을 하라, 그것이 곧 내게 절하는 것이다--이것이 이제 세월이 흐르면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권력자가 자기를 향한 인간적인 존경만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선 신적인 존경을 받기 위하여, 물리적인 경배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중심에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하여, 경배를 받기 위하여, 만들고 강요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것이 종교화하여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래서 우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자 더 실제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신비에 대한 숭배입니다. 신비에 대한 숭배--뭔가 좀 이상하게 보이면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입니다. 바위가 이상하게 생겼으면 '저기 저 바위는 보통바위가 아닐 거야'해서 절을 합니다. 나무도 이상하게 생겼으면 ', 저 나무는 몇 천년 되었으니까 뭔가 고유한 영력이 있을 것이다'해서 또 절을 합니다. 그밖에도 무엇이든지, 불이 일어나면 불을 섬기고, 해가 뜨면 해를 섬깁니다. 보름달이 둥그렇게 떠오르면 아들을 낳게 해줄 것이라며 그것을 향하여 빕니다. 신비한 것은 다 섬기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 또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신기하다고 여기거나 신비한 일을 경험했을 때에는 그 뜻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저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깊은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신비한 것을 보는 순간에 그대로 엎드려 절을 하고 숭배해버립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신기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떡 일으켰습니다. 모두들 이 모습을 보고 굉장하다 하고 놀랍니다. 이 때, 아마도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으면 응당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하였겠지요. 그런데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네끼리 제물을 가져다가 신으로 섬기겠다 하니 이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아도 이런 일이 많지요. 자연신론이라는 거이 그렇습니다. 자연을 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은 신비롭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조물입니다. 자연 자체를 경배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입니다. 아무리 신기해도 그렇습니다. 컴퓨터가 신기하다고 그 앞에 절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아무리 신기해도 섬길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연을 경배하고, 그 앞에 빌고 하는 것은 안될 일입니다. 세네카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자연이여,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이렇게 그대를 섬기고 있노라.'그리오라는 작품에 보면 에드먼드는 이렇게 외칩니다. '그대 자연이여, 나의 여신이여, 그대의 법을 예배하노라.' 자연을 섬기는 사람들의 지성적인 외침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신기해도 자연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자연 앞에 절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사람을 섬기는 것은 더욱 잘못된 것이지만 자연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됩니다. 욥기 312628절에 보면, 욥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를 반성하면서 이렇게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조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이게 무슨 말입니까? 태양이 떠오를 때에 신기롭고, 달이 해맑은 빛을 내리비칠 때에 신비롭지만 그 앞에 내가 합장을 하고 절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했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기우제를 지낸다거나 태양 앞에 절을 하는 것 따위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다 피조물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그 뒤에 계시는 창조주, 그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길 것이지 결코 자연을 숭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능력이 있고 신비함이 있다 해도 그 신비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존재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 앞에 무릎을 끓고 그를 경배할 것이요. 그를 존경할 것이요, 그를 숭배해야 합니다. 신기한 사건이나 신기한 물건이나 신기한 자연 자체를 숭배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한번 더 봅시다. 바울은 지금 자기를 경배하면서 신으로 우상으로 섬기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극구 사양하고 있습니다. 진실한 겸손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 경우에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 하나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을 때, 못된 소리를 들었을 때에 분하고 괴로워서 제정신을 잃고 페이스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 둘은, 칭찬을 들을 때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남이 자기를 보고 유식하다 하면 가만있습니다. 가만있으면 아는 것이 되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다 잘못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지요. 지나친 존경을 받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도 죄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긍정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아닌 것은 아니요,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어떤 존경을 받더라도 내 위치는 꼭 지켜야 됩니다. 나의 나됨을 지켜야 됩니다. 자기진실은 꼭 지켜가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턱없이 존경받고, 칭찬 몇 번 들으면 그만 정신이 없어져 가지고 페이스를 잃어요. 안될 일입니다. 어린아이들, 정초에 색동옷을 지어 입히고는 부모님들이 둘러앉아 "얘는 착해서 싸우지도 않고 옷을 더럽히지도 않는다"고 자꾸 칭찬하면 꼬리치마 잡고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지냅니다. 이렇게 사흘 동안만 입혀놓으면 그 아이는 병원에 입원해야 됩니다. 넘어지기도 하고, 찢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터지기도 하고 하는 것이 어린이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 살아야 합니다. 어른으로 살아서는 못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보면, 사살은 시원치 않은 사람인데 자꾸만 "그 사람 잘 믿어" "그 사람 진실해, 부지런해"하고 칭찬을 하면 이 사람, 자기 본색을 모르게 됩니다. 대체로 밖에서 지나치게 칭찬 받는 사람이 집에 돌아가면 자기 아내하고 싸우기 쉽습니다. 아내 한 사람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거든요. 제발 허세에 빠지지 마세요.

누가 뭐래도 나는 나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무식한 것은 무식한 것입니다. 못난 것은 못난 것입니다. 남이 잘났다고 칭찬한다 해서 잘난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우선 진실하고 볼 것입니다.

그래야 잠부터 잘 올 것입니다. 입맛도 좋을 것입니다. 건강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보세요. 자기에게 오는 찬사를 극구 사양합니다.

베드로도 보세요. 성전 미문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을 때, 사람들이 자기를 존경하여 모여들 때에 뭐라고 합니까?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합니다.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요, 다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그 사람을 낫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떼에 고넬료와 그의 일가가 자기를 보고 엎드려 절할 때에 그들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같은 얘기가 나옵니다.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5)." 나나 당신들이나 다 같은 사람이다, 허물도 있고 죄도 있는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나는 다만 심부름을 한 것이다,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결코 별다른 삶이 아니다, 당신들도 믿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를 통해 역사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들도 통해서 역사 하실 것이다, 절대로 우리 일행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이러한 고백 인줄 압니다. 세상에 가상 설득력이 있는 것이 진실입니다.

가장 위대한 설득력이 바로 겸손입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면서 남을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하시킬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척하면서 남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잘난 척하면서 남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내가 의인인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완전히 자기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럼으로써 저희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을 짓습니다. 그런 헛된 일 하지 말라고, 전도하는 것인데 이런 일을 하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합니다. 그 다음에 17절 말씀을 눈여겨보세요.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자연 계시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대자연, 또 되어지는 모든 사건, 이적을 통해서, 이 신비를 통하여 마음이 깨끗하면 이 대자연을 통해서만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충분히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타락하고, 죄에 빠지고, 변질되었기 때문에, 본래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연 계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자연 계시는 우상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구원받지 못한 심령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어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이 대자연을 보면서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요.

사실로 중생하고 그 심령이 거듭나고 깨끗해진 사람이라면, 예수의 피로 깨끗해진 사람이라면, 새소리를 들으면서 주의 소리를 듣고, 하늘을 보면서 주님의 얼굴을 보고, 매일 아침 전달되는 신문을 보면서도 주님의 경고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하나님의 음성 아닌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손길 아닌 것이 없어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래전에 제가 이런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예쁘게 생긴 여집사님이 좀 짓궂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가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가 뭐라고 물었는고 하니 "목사님, 목사님은요,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그녀에게 "집사님은 하나님을 모르세요?" 반문했고, 그녀는 다시 "목사님은 하나님을 아세요?"합니다. 목사님은 그제야 "잘 질문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저는 깜짝깜짝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놀라고 있을 뿐입니다, 내 눈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 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가 들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하시는 일을 매일매일 깨닫고, 보고, 체험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하는 얘기지요.

누가 하나님을 뵈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지금 뵙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깨끗한 심령은 바다에 가서 물소리를 들어도, 또 총총한 별빛을 보거나 복잡한 거리에 나가 있어도, 누가 태어나거나 죽었거나, 모든 되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가까이 느낍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의식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말씀으로 주시고,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이 특별계시를 통해서 구원받는 심령이라야 그에게 자연 계시가 자연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계시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신비와 이적 속에서 삽니다. 그러나 신비에 놀랄 것 없이 그를 조성하신 하나님만 섬겨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나 능력은 나타납니다. 많은 사건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됨을 조금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실한 겸손, 위대한 겸비(謙卑), 그리고 위대한 진실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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