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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믿음의 소재(사도행전 27:1~1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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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믿음의 소재(사도행전 27:112)

 

우리의 배 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하니라 이튿날 시돈에 대니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음을 허락하더니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바울은 이제 한 죄수로서, 사실은 죄인이랄 것이 없습니다마는 죄인 아닌 죄수로서 다시 로마에 가 로마황제 곧 가이사에게 최고의, 최상급의 재판을 받기 위하여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은 당연히 유대나라에서, 유대정권 하에서 합법적으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로마로 갑니다. 유대사람의 신분을 떠나서 로마사람의 신분으로 바뀌는 시간입니다. 그는 유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의 죄나 죄목이나 행실을 알아내려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무조건 바울을 죽이려고만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모하게 이렇게 죽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이 시간에는 그의 신분이 둘이지요. 국적이 둘입니다. 유대사람이라면 동시에 이제 로마시민권을 가진 로마시민의 입장에서 로마사람 가이사의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는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한 죄수가 지금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적입니다. 정치적으로나 외형적으로는 한 죄수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알거나 모르거나 하나님 앞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이 시작됨입니다. 참 오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전도여행을 할 때마다 안디옥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보내고 그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고…… 이렇게 자유로운 몸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4차 전도여행은 다릅니다. 죄수의 몸으로, 이것이 전도여행인지 아닌지, 전도의 길이 열리는 것인지 막히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주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이에 다시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마는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이 로마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한 선교사, 위대한 한 사도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게 아니고 하나의 죄수에 의해서 복음이 로마로 전해지고 있다----대단히 놀라운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전파 되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 하겠습니다.

한국교회사를 살펴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이 타고 온 배가 있는데, 그게 사실은 아편을 싣고 나오는 배였습니다. 그러니까 아편장사 하는 배입니다. 바로 그 배를 타고 선교사가 옵니다. 참 아주 고약한 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그릇은 말이지요, 배이든 비행기든, 혹은 어떤 환경이든, 그가 어떤 인격이든 관계되지 않습니다. 참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우리 한국에 맨 처음 신교의 복음을 전파 받은 사람들은 장사꾼들이었습니다. 장사하러 중국에 갔다가 거기서 복음을 듣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꼭 선교사라고 하는 거창한 이름으로만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 한 죄인이 로마로 압송됩니다. 이것이 엄청난 역사를 이룹니다. 대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엄청난 사건이 여기서 지금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1절을 다시 보세요.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체포된 그에게 이렇게 위로하시고 계십니다. 위로이면서 약속이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환상 중에 들은 주님의 음성, 이것이 바울에게는 가장 큰 희망이요 위로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서 아무튼 그는 본래 기도하고 바랐던 로마 행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처음인 27장 첫줄을 보십시오. "우리의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여기에 '우리'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우리'----누구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한 사람이 아닙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자세히 보면 사도 바울은 혼자서 전도여행을 다닌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동행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들썩들썩 보내셨습니다. 그래, 서로 협력하며, 또 협력을 얻고 협조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람의 협조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과 함께 하시고 그를 보내시지만 동시에 사람을 동행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 협력자, 필요한 사람을 늘 함께하게 하셨어요. 참 놀라운 일입니다. 혼자 가도 될 텐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말입니다. 안 그래요? 아무튼 그와 협력하는 동역자가 꼭 동반합니다. 그래서 제1차 전도여행 때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바나바와 함께 갑니다. 2차 전도여행 때에는 실라가 동행합니다.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자세히 보면 누구라고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마는 누가가 동행합니다.

누가는 참 귀한 일꾼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함에는 디모데가 참 좋은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누가가 참 귀한 일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우리'라 함은 누가가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그것을 암시하고 있어요. 누가는 이를 기록하면서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어요. '우리가'---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죄수가 가는데 죄수 아닌 사람이 죄수인 바울을 위해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누가는 참 훌륭한 분입니다. 디모데후서 4, 즉 바울의 유서라고 하는 그 마지막 편지에도 보면 누구는 어디로 갔고, 누구는 어디로 보냈고, 어떻게 어떻게 했다, 지금 내게는 누가만 함께 있다, 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그와 끝까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그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바울의 건강을 위해서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시라면 뭐 전갈을 먹더라도 건강하도록 해주실 것이지, 왜 비실비실 하는 시원치 않은 사람으로 만드시고, 그래놓으시고는 의사 누가를 동반하게 해주셨는지------여기에 참 놀라운 humanity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두고 신학적 용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God's humanity-----이것은 하나님의 인도(人道)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성'이 여기 나타납니다. 평생을, 지금도 누가가 바울 옆에서 동반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겸손하여 '바울과 누가가'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우리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죄인이 가고 있습니다. 죄인 아닌 사람이 죄인 곁에 동행합니다. 한 사람은 피동적으로 가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능동적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불가피하게 끌려서 지금 압송되어 가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자의적으로 복음을 위하여 바울 곁에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깊이 상고해보면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했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니었어요. 사도행전 21장에서 바울은 체포됩니다.

그러니까 21, 22, 23, 24, 25, 26의 여섯 장에 걸쳐, 즉 예루살렘과 가이사랴에 있는 동안에, 체포되어 가지고 고생하는 동안에 바울은 줄곧 홀로 지냈습니다. 여기서는 누가가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늘 동행하는 자가 있었지만 감옥에 있을 때에는 혼자였습니다. 그 많은 핍박을 혼자 당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것은 바울이지 누가가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나사렛당의 괴수 바울한 사람만 죽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갖은 모략과 계책을 다 세웠습니다. 오직 바울만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때는 홀로 감옥에 있습니다. 홀로---그러나 바울은 홀로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주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이렇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보세요. 때로는 협동, 협력하는 자가 있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시간에는 혼자 가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특별히 그와 함께 하고 계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금 로마로 갑니다. 성경을 보니 중간에 옮겨 타기도 하고 그럽니다만 그런 과정은 제가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나 배가 지금 가고 있는데, 여기에 한 일행이 지금 가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도자입니다. 누가 지도하고있습니까? 본문에 보니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1)"라 합니다. 백부장이 맡았다고 합니다. 로마 백부장, 이 사람이 책임자입니다. 총 지휘자올시다. 백부장은 군입니다. 군인이 죄수들을 데려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 배에서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할 수 있는 최고권력자입니다. 그 다음에는 누가 있는고 하니, 선주가 있습니다. 배의 주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돈벌려고 가는 것입니다. 이 배는 화물선이라 지금 많은 짐을 싣고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기술의 책임자요 기술의 대표자인 선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주와 선장 그리고 정치를 대표하고 있는 백부장 율리오, 이렇게 세 사람이 실권자입니다. 오늘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처음에는, 이 세 사람이 최고요, 그 중도 백부장이 제일입니다. 여기에 한 사람, 죄수의 모양으로 배를 타고있는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현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죄수이지요. 어디까지나 죄수입니다. 백부장이 그를 좀 특별히 본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니까 조금 선심도 써요.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3)"-----이런 얘기도 있어요. 백부장이 '바울은 죄가 없는 사람인데, 어쨌든 일이 복잡해져서 로마까지 가는구나' 생각해서 다른 죄수처럼 여기지 아니한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어디까지 죄수는 죄수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배가 가면서 점점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런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백부장, 선장, 선주의 위상은 점점 떨어지고 바울만 점점 높아집니다. 이 배가 로마에 도착할 때쯤 되어서는 바울이 최고로 떠오릅니다. 명령을 바울이 합니다. "먹어." 그러면 먹습니다. "정신차려." 그러면 정신차려요. 이렇게 됐어요. 바울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 권세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풍랑과 함께 영적 권세는 높아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평안하고 건강하고 할 때에는 돈 많은 사람이 제일이요, 공부 많이 한 사람이 제일이요, 권력자가 제일이요 합니다만, 큰 환난이 있고 죽음이 있고 아주 어려운 고통에 있을 때에는 영적 권세를 가진 자가 가장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제일 큰 권세를 행사할 때가 언제인고 하면 장례식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일행은 배를 타고 지금 미항(美港)까지 왔습니다. 이 미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일을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구구한 사정은 읽어보시는 그대로이니까 따로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 "간신히"라는 말씀이 있어요. "여러 날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7, 8)"-간신히, 여러 날 걸려서,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려가면서 미항까지 도착했다는 것이예요. , 이러한 경험이 있으면 이제는 정신차려야 될것 아니겠어요? 이미 이런 징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정신을 못 차렸어요.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주제입니다.

여기에 보면 '미항'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미항은 아름다운 항구라고 해서 미항(美港)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상으로 볼 때, 동서로 길게 놓여있는 그레데라는 섬의 남쪽에 위치한 항구가 미항입니다. 그리고 이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항구가 뵈닉스입니다. 오늘은 이 두 항구에 대한얘기입니다. 미항이라고 하는 이 항구는 아주 조그마한 항구요 배가 지나가다가 잠깐 머무르고 가는 공용 정박소입니다. 그런데, 왜 미항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곳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풍랑을 막는 데는 좋아요. 다시 말하면 안정되고 안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미항이라고 부릅니다. 여기는 큰 도시도 없고 큰집이라든가 무슨 큰 상업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머물만한 곳은 못됩니다. 자연 조건은 아주 좋은 항구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머물렀다가 뵈닉스로 가려고 할 때, 다시 출항]을 하려고 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이 지금 출항을 말리고 있습니다. '가지 말아라'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바울은 그 이유를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9)"라고 말씀합니다. 금식하는 절기라는 것은 속죄일을 말합니다.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은 히브리말로 '욤 키푸르'인데, 이 날은 유대력으로 디스리월 10, 710일입니다. 우리가 쓰는 달력으로 말하면 9월 하순쯤 됩니다. 그런데 이 지중해 연안은 가을이 아주 짧습니다. 여름이 지나기 무섭게 곧 겨울이 되고 맙니다. 이래서 이런 계절을 '지중해 계절'이라고까지 별명 지어 말합니다. 그래서 이 때쯤 되면 이 지중해 연안은 바람이 심하고 풍랑이 심해서 항해를 못합니다. 오늘날같이 철갑선으로 만든 큰배라도 아무 때에나 다닐 수 없는데 하물며 그 때의 목선이겠습니까? 바람으로 가는 돛단배이기 때문에 바람이 심하면 어디든 갈 수가 없어서 부득불 어느 항구에든 머물러서 겨울을 나고 그 다음에 다시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 어차피 로마까지는 못 갑니다. 이게 중요한 점이예요. 아무리 가려고 해도 못 간다는 것은 저들은 다 알고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겨울은 나야 되는데 미항에서 나느냐 뵈닉스에서 나느냐, 그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미항이냐 뵈닉스냐-그런데 이미항은 조그마한 곳으로서 안전하기는 하지만 답답하고 괴로워요. 좀 불편해요. 과동(過冬)하기가 불편합니다. 그런데 뵈닉스라고 하는 항구는 큰 항구라서 거기까지 가기만 하면 유흥가도 많고 위락시설도 많고 술집도 많기에 한겨울 동안 향락하면서 지낼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나서 봄에 로마로 가면 되겠다, 라고 저들은 생각한 것이지요. , 어차피 로마는 못 가는데 여기 미항에서 겨울을 날 것이냐, 아니면 뵈닉스로 갈 것이냐-본문에 보는 대로 많은 사람들이, 다수가 뵈닉스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 여기는 불편하다. 저리로 가자. 그곳에 가서 겨울을 나자'---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입니다. 그리되면 좋겠으나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한 마디 합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9, 10)"-가지 말아요, 안가는 게 좋겠소, 라고 합니다. 그가 무슨 계시를 받아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얘기예요. 위험을 자초할 것 없다,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간신히 왔는데 다시 또 먼길을 떠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고로 가지 말자, 그 말씀입니다. 이것은 자연법칙에 순응함이요, 이미 가지고 있는 상식에 따른 판단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자연계시적인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그만한 판단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되고, 이렇게 하면 좋고 이런 때는 나쁘고, 이 때는 겨울이고 이 때는 여름이고, 어느 때에 씨를 뿌리고 어느 때에 거두고…… 적어도 이런 이성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에는 자연계시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혜에 의거하여 가지를 말아야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들은 뵈닉스로 가자고 우기는 거예요. 바울은 안전한 곳을 택하는 게 좋겠다 합니다. 그래서 가지 말자 합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적인 판단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라고 할 때에 자연과학적 요소를 아예 무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나이애가라 폭포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 폭포 상류에 있는 호텔에서 며칠 동안 세미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뱃놀이를 합니다. 모터보트도 있고 노 젓는 배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줄을 쳐놓은 곳이 있어요. '여기는 위험합니다. 오지 마십시오'라는 표시지요. 그곳이 나이애가라 폭포 상류이기 때문에 조금 가다보면 물이 빨리 흘러내려서 폭포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조심하라고 줄을 죽 쳐놓았는데 세 번이나 쳐놓았습니다. 한번 치고 '요주의', 그 다음에 또 치고 그 다음에 또 치고. 그런데 사람들이 못돼서 그 가까이 가는 것을 좋아해요. 살짝 갔다가 싹 돌아오는 스릴(thrill)을 맛보자는 것이지요. 생명을 건 스릴입니다. 어쨌든 사람들이 뱃놀이를 하는데 거기까지 가까이 갔다가 돌아오고, 그 다음에는 조금 더 가까이 갔다가는 돌아오고…… 이 장난을 되풀이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이상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가까이 갔어요.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이르러 배가 막 떠밀려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그는 큰 소리로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이여, 구원해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응답이 없었어요. 그냥 떨어지고 맙니다.

, 여러분, 이것은 안 된다, 안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사람도 경고하고, 양심도 경고하고, 이성도 경고하는데 굳이 그 쪽으로 가요. 그러면서 '믿습니다, 주여!' 해봤자 어디로 갈 것 같아요?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와 같습니다. 음식도 몸에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어요. 적어도 상당한 지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것은 좋고 이런 것은 나쁘고 한 것을 알아요. 저는 얼마 전에 이런 통계를 봤어요. 담배가 얼마나 나쁘냐 하면 담배 피우는 사람하고 안 피우는 사람의 폐암 발병률을 살펴본즉 담배 피우는 사람이 안 피우는 사람보다 60배가 높다고 하는 통계였습니다. 6배가 아니고 60. 심지어는 담배 안 피우는 사람도 담배 피우는 사람하고 같이 살면 폐암 발병률이 2배나 높아진다고 합니다. , 이렇게 담배가 나쁜 줄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면서 '주여, 건강을 주세요'하면 말이 되는 것입니까? 담배 피우는 사람은 건강을 위하여 기도할 자격도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뻔한 상식을 가지고도 계속 나쁜 짓만 하면서 '주여, 건강을 주세요'한다면 아이들 말마따나 웃기는 소리,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까? 이것은 신앙이 아니예요. 이것은 기도도 아니예요.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이자 자연 계시적 말씀이요 상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실 때에 어떠하셨습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뛰어내리는 게 믿음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뛰어내리라 하면 '오냐, 뛰어내릴 테니 보아라'하며 '주여'하고 훌쩍 뛰어내려야, 그리고서 팍 올라가서 할 것 같지요? '보아라, 적어도 이 정도다'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뛰어내리라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4:7)"하시면서 뛰어내리시지 않으셨어요. 안 뛰어내리셨나 못 뛰어내리셨나 하지 마세요. , 이것 보세요. 이게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 누가 과학적으로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을 가리켜 덮어놓고 불 신앙이라 몰아붙이지 마세요. 짐짓 비과학적으로 사는 것이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지 마세요. 약을 먹으면, 간단히 아스피린 하나 먹으면 될 것을 굳이 안 먹어가면서 여러 날 동안 신음하면서 주님이 고쳐주실 것이다, 하니, 이 무슨 쓸데없는 짓이예요? 그 썩은 배 잠깐 째버리면 될 것을 가지고 나는 안 짼다고, 손 안대고 그냥 있겠다고,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미련 떨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자연법칙입니다. 자연도 하나님의 섭리예요. 우리가 그만큼 알고 있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러면 감사하게 생각을 했어야지요. 감사하게 생각하고 수술도 받고 약도 먹고 그럴 것이지, 안 하는 것이 능력이고, 안 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손을 쓰자는 사람보고 되레 어떻게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한다면 꼭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얘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얼핏 믿음이 없는 것 같아 보여요. '안 된다, 금식하는 절기가 지난고로 이 때에 가서는 안돼. 가지 마라. 인명에도 피해가 있을 것이고, 재산에도 손해가 많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해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선장과 선주는 부득부득 가자고 우겨요. 선장은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뵈닉스에 가서 한겨울 동안 좀 향락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또 선주는 자기 경험을 믿는 거예요. 내가 운항을 잘하는데 여러 해 경험해보니까 그저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 보니 "그 항구가 과동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12)"-속셈이 있으므로 쓸데없는 구실을 붙이면서 모험을 감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모험인지 알 수 없어요. 이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신앙일 수는 없어요. '아무쪼록 뵈닉스까지 가자.

그리고 거기 가서 겨울을 나자'-여기에 선장도 '그래' 선주도 '그래'하고 죽을 맞춥니다.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더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요. 더 많은 사람이 그 쪽으로 쏠립니다. 더 많은 수효가,더 많은 사람이-이른바 민주주의라는 것의 원리입니다. 민주주의도 이런 문제를 안고 있어요. 숫자 많다고 옳은 것은 아니예요. 한 사람이 말해도 옳은 것은 옳은 거예요. 그런데 대다수가 그리하자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인가요? 여러분, 이렇게 여론에 의해서 진리를 결정하고, 민심에 의해서, 수의 의해서 하는 게 무조건 특효라는 생각, 이것 옳은 것이 아니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정치가도 그래요. 국민들로부터의 인기를 너무 생각하는 것 좋지 않아요. 그것을 의식하면서 별로 필요치도 않은 발언을 자꾸 하는 일이 많아요. 결국은 먼 훗날에 지지 받도록 행동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지금 당장에 지지 받자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못돼요. '지금은 반대 받아도 좋아요, 옳은 길이면 가야지요, 먼 훗날에 뜻을 알 때가 있겠지요'하는 태도가 떳떳한 지도자의 취할 바라고 생각합니다.

선주도, 선장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뵈닉스에 가자고 해요. 조금 위험하기는 하지만 아무쪼록 거기까지 가서 겨울을 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험이었어요.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혹은 자기 신뢰적인 것이었어요. 자기의 기술을 믿었어요. 자기의 경험을 믿었어요. 괜찮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어요. 그실 자기가 우상이 되는 시간이었어요. 인간이 무서운 죄를 범하는 시간이었어요. 다시 말해서 불안전한, 안전치 못한 길을 통해서라도 향락을 취하려, 모험을 하려고 드는 것, 이것은 잘못이었어요.

여러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죄와 벌을 아시지요? 아마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인간을 돌로 나누어요. 보통사람과 특별한 사람, 범인과 비범인, 보통사람과 초인간으로 말입니다. 보통사람은 다 법을 지키고 살지만 초인간은, 이를테면 왕은 법을 안 지켜도 된다, ? 더 큰 일을 하기 위하여…… 이런 생각을 해요.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 그가 돈이 조금 필요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큰일을 해야겠는데 그에게는 돈이 없었어요. 그런데 쓰레기 같은 한 늙은 노파가 쓸데도 없이 돈을 참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 노파는 이제 다 살았고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같은값이면 그녀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큰일을 해야겠다'하고 생각을 해요. 초인간적으로 법을 초월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죽였어요. 돈을 가졌어요. 자기 이데올로기에 의거해서는, 자기 철학에 의거해서는 정당한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로 깊어지는 죄책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일생동안. 그게 '죄와 벌'입니다.

여러분, 어떤 일로도 잘못된 것은 정당화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가 율법이 되고 있어요. 여기'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향락주의가 있어요. 불 신앙이 있어요. 자기 경험을 믿는 우상숭배가 있어요.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큰 어려움을 겪고 맙니다. 그 사건은 다음 시간에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여러분, 276명의 생명을 책임진 백부장이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바울의 말씀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습니다. 세상은 그래요. 바울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얼마나 좋을 뻔했어요? 바울이 나중에 얘기합니다. '내 말을 들었더라면 좋을 뻔했거니와'-어쨌든 그들은 바울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지지하니까 그 성원에 의지해서결정을 하고 미항을 떠납니다. 결정적인 실수입니다. 결국은 이 배는 파선 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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