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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의 운명2(롬1:28~3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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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자의 운명2(롬1:28~32)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버려진 자의 운명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택하심을 압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간증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믿는 줄 알았지만 상당한 신앙에 이르게 되면 그실 내가 믿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전도자를 만난 것도 그렇고, 내가 마음 문을 연 것도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매를 맞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채찍을 들이시면서 까지 강하게 역사 하셔서 어떻게든 안 믿으려고 하고, 주께로부터 멀어지려고 그렇게 발버둥쳤던 나를 결국은 믿게 하셨어요. 그래 오늘의 내가 있게 하셨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여기에 하나님의 절대 은혜가 있다. 오히려 나는 안 믿으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믿게 하셨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이 여기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 이제 나는 택하심을 받아서 부르심을 받고 이렇게 구원 얻은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데 한편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된 것일까?'여기서 우리가 하나의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셨습니까? 하나님께 지혜가 없습니까, 하나님께 능력이 없습니까? 왜 저 사람은 안 믿습니까?

나를 인도하신 그 능력이 왜 저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까?'--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논리적 결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것이라고요. 어떤 이유로든 간에 좌우간 버림받았어요. 그래서 구원받음이 선택이라면 버림받음은 예정이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확고한 신학적 이론을 전개하게 됩니다. 때때로 우리가 이를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구원받고 선택되었다고 하는 것은 기분 좋지만, 버림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기분 좋지 않아요. 그래서 불평합니다. 결국은 신앙의 깊이와 좀더 나아가서 신학적인 넒은 이해에서만 소화될 수 있는 그런 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에도 이것을 누누이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자를 버리셨다 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나중에 주님 앞에 가서, 심판대 앞에 서서 천당 가고 지옥 가고 해서 딱 갈라진다면, 그 때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상관없겠어요. 그 전에, 숨넘어가지 직전에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심판을 그 때로 미루어 나면 좀더 이해가 쉽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주신 말씀의 깊은 뜻은 현재적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르러야만 심판이 있는 게 아니고, 지금은 벌써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옥 가는 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은 구원 못 받아요. 현재적 심판을 받은 사람이 있다--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또한 심판은 있으나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선택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처럼 누가 버림받은 사람인지 우리는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칼뱅에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를 왜 합니까? 천당 갈 사람 다 정해져 있는데." 칼뱅은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천당 갈 사람이 누군지 모르니까 전도하지요. 전도는 내가 하지만 구원받는 것도, 전도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그 사람이 믿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지는 일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반대하다 지옥 가는 것도 예정된 일이지요." 참으로 유명한 대답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하나님의 사랑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현재적 심판이 있음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진실할 수 있을 때에 진실하지 않고, 회개할 수 있을 때에 회개하지 않으면 이것이 거듭되어 어느 한계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신다는 거예요. 내어버리는 그 순간부터는 회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고, 선행할 수도 없고, 진실할 수도 없어요. 지난 시간에도 살펴보았듯이 종교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 섬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거부하기에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셨더니 어리석게도 우상을 섬기더라 하지 않습니까? 정말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언젠가 제가 일본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대체로 일본의 절은 좀 낡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고야의 절은 아주 번쩍번쩍하는 새 절간이에요. 금으로 지붕을 덮어씌웠습니다. 그래 일부러 그곳에 한번 들어가 보았는데 좀 놀랐습니다. 마당에 커다란 여우상()이 하나 있어요. 자기네가 만들어놓고는 그 여우를 섬기는 거예요. 또 거기에 학을 셀 수도 없이 많이 접어서 산더미처럼 쌓아놓았어요. 제가 여우를 왜 섬기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사랑의 신이라고 대답합니다. 우상 섬기는 사람들, 참 미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저들이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어버리시면 우상 섬길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심판 받은 자의 모습이에요. 그런가하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더러움, 무질서 가운데로 버림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난 시간에 여기까지 상고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28절과 32절을 눈여겨보세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28)"--여기에 자유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28)"--give up,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에 내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상실한 마음이라는 것은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인간성 파괴입니다. 인간의 성품적 심판을 말씀함입니다. 성품에 심판이 내렸어요. 그런고로 이제는 기뻐하는 것, 슬퍼하는 것, 그 감정 자체가 이미 병들어 버렸어요. 심판을 받아버렸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즐거워해야 하느냐, 즐겨야 할 것을 즐기는 게 아니예요. 느껴야 될 것을 느끼는 게 아니예요. 바르게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왜요? 심판 받은 사람이니까, 이미 심판 받은 심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인격과 성품에 심판이 내렸어요. 이제는 병리적 성품이에요. 타락한 인격이에요. 생각, , 느낌이 전혀 정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결과입니다.

심판 받아서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끝까지 싫어했어요.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를 내어버리셨어요. 그 결과로 이와 같은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상실한 마음"--곧 타락한 마음입니다. 헬라어로 '아도키몬'이라고 하는 이 말은 버려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병든 마음을, 타락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심령에 하나님이 없을 때에 반항하는 자가 되고 그 무서운 결과로 이런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배로 말하면 키가 없어요. 자동차로 말하면 핸들이 없어요. 브레이크가 없어요. 나침반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와 같은 인간성이 초래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그것은 심판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자신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부터 주어지는 이 모든 불의한 죄명이 다 기록될 텐데 그것이 전부 심판 받은 결과라는 것이에요. 그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가만히 보세요. 사람들마다 바로 살아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노력해봐야 하루도 못가요. , 왜 자꾸만 쓰러져야합니까? 왜 결심한대로 못합니까? 왜 생각하는 길이 다릅니까? 왜 즐거워하는 것도 다릅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상실한 마음입니다. 버려진 마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버릴 때에 이러한 인간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결과로 어떻게 되나 봅시다. 첫째가 '불의'입니다. 헬라어로 '아디키야'라고 하는 이 말은 의에 반대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길의 떠날 때에 의를 찾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것 참 오묘한 말씀입니다. 많은 철학자들, 많은 정치가들, 많은 윤리가들이 나름대로 얘기합니다. 이것이 의다 저것이 의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얘기해봐야 말짱 헛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의란 있을 수 없어요. 가끔 우리는 이런 얘기를 들어요. '나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대개 독재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해요. 그래서 정말로 의가 있었나요? 의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심판받았기 때문이에요. 이마누엘 칸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의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날 우리 나라에 새마을 연수원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어요. 그곳에 교수들이나 국회의원들, 혹은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가서 연수받았습니다. 저도 한두 주일에 한번씩 그곳에 나가서 강의를 하곤 했지요. 거기서 가르치는 교수들을 교육하는 곳에도 제가 1년에 두 번씩 나가서 강의했어요. 그런데 그 교수들에게 고민이 있었어요. 무슨 고민인고 하니, 그분들이 "나라를 위해서 부지런 합시다. 나라를 위해서 정직 합시다. 나라를 위해서 성실 합시다"하고 강의하지만 정작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가 없대요. 그래서 말하기가 힘들다고 해요. 어떤 사람들은 정면으로 질문을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대요. 상당수의 교수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만 기독교를 전파하는 시간도 아니니까요. 그 가운데 우리 교회 집사님들로 여러분 계셨어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그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는 의를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의입니까? 의의 기준이 없고, 의의 뿌리가 없어요. 그런고로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심판을 받는데, 결국은 의를 모르게 되고 말아요. 무엇이 의인지 몰라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법이다'하지 않아요? 결국은 이래서 독재자가 있고, 더 큰 악으로, 불의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 없이 의는 없다 하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 결과가 추악입니다. 헬라어로 '보네리아'라고 하는 이 말에는 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남을 해하고자 하는, 남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이라고 헬라사람들은 해석합니다. 또한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을 해한다는 것은 사실 괴로운 일이 아닙니까? 그럴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러나 심판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남을 해하는 것을 즐겨요. 요새 온 세계가 마약을 퇴치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마약을 끊기가 왜 어려우냐, 그 이유는 바로 이렇습니다. 옛날에는 마약을 복용하면 정신이 해롱해롱해지고, 잠이나 자고, 그저 자기 혼자 즐기는 줄로만 여겼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렇지 않아요. 마약에 취하면 엄청난 성적쾌락을 누리게 된답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은 다른 일반적인 생활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 피를 즐기게 된답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게 즐겁다고 해요. 이것은 사단의 가장 무서운 수법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외국에서 일어난 아주 무서운 사건들을 보면 다 마약에 관계한 사람들이 행한 일들입니다. 남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한다든가, 꺼린다든가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거예요. 이것이 추악이에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시지요? 로마의 원형극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면전에서 사람과 짐승이 싸우게 하고, 사람끼리 싸우게 하고, 결국은 어느 하나가 죽는 것을 보면서 환호했어요.

우리가 영화에서도 보지 않았습니까? 한쪽이 쓰러지면 사람들이 엄지손가락을 밑으로 향했어요. 어서 찔러 죽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피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어요. 보세요. 하나님 없는 사람의 성향이 추악으로 기울어집니다. 이것도 심판이에요.

그 다음으로 성경은 '탐욕'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탐욕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불레오넥시아'라고 합니다. 법을 떠난 욕망입니다. 단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탐욕이란 마음에 있는 굴복시킬 수 없는 원수다." 굴복시킬 수 없는 원수--이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굴복시키기가 어려워요. 마음 속의 욕심, 하나님을 떠난 자의 욕심은 무제한입니다. 가만히 보세요. 사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닙니다. 먹으면 얼마나 먹겠으며, 쓰면 얼마나 쓰겠어요? 나이도 들만큼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더 가져야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한계를 모르는 욕망, 이것은 하나님 없는 자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님께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이런 욕망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가질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악한 동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없이 더 가지려는 마음, 남이야 살든 죽든 나만 더 가지려는 마음--이것이 바로 탐욕이라고 하는, 심판 받은 성품입니다.

그 다음은 '악의'입니다. '카키야'라고 하는 이 말은 성품적 파괴현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동기적으로 악한 거예요. 악의라고 하는 것은 뜻이 악해진 거예요. 그런고로 행동에서 악이 오는 게 아니라 동기적으로 악한 것입니다. 의지 자체가 악하다--하나님 없는 자의 성품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다섯째가 '시기'입니다. 질투와 시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 시기라는 것은 자신의 처지는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는 스스로의 모습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모습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 원망하는 마음이 시기로 나타납니다. '나에게는 왜 이런 일이 있을까? 저 사람은 잘되는데……' 결국은 시기 질투하게 되지요. 성경에 보면 가인이 그러했고, 사울 왕이 그러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시기에 빠져요. 사울과 같은 사람은 후회를 많이 해요. 내가 이래서는 안되는데 해요. 그러나 번번이 뉘우치면서도 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마침내 그 때문에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살인'입니다. 헬라어로는 '포노스'라고 합니다. 보세요. 시기 질투가 끝까지 갑니다. 욕심이 끝까지 갑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건만 남의 생명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인을 하게 됩니다. 시기와 탐욕이 끝에 가서는 결국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분쟁이 있습니다. '포노스'라고 하는 살인, '에리도스'라고 하는 분쟁--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자의 결국입니다. 이것은 극단적 이기주의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나만 생각하게 돼요.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어요. 결국은 분쟁할 수밖에 없지요. 악한 세계는 반드시 분쟁합니다. 갈라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안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고야 그 아래에서 형제애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에서는 나만이 존재합니다. 결국은 분쟁뿐입니다.

그 다음이 헬라어로 '도로스'라고 하는 '사기'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악독'이 있습니다. 이 모든 죄악이 전부 심판의 결과로 옵니다. 또 한 가지,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니 "수군수군하는 자요(29)"라고 말씀합니다. 수군수군하는 것도 하나님 없는 마음이에요. 가만히 보면 수군수군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마다 종종 자기는 수군수군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디다. 그랬다가 망신도 당하고, 그래 다시는 안 하겠다 생각하지만 또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어느 사이에 '우리끼리만 압시다'하고 수군거립니다. 남을 헐뜯기나 하고 있어요. 여러분, 지금 나이 50이 넘었거든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조심하세요. 좋은 얘기 이외에는 하지 말고, 나쁜 얘기는 듣지도 마세요. 그렇게 살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제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나이가 들면 덕담 이외의 이야기는 안 하는 법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으로서도 옳고, 이제 곧 하나님 앞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마땅한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수군수군하고 있어요. 철없는 사람들이지요. 수군수군한다고 해서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왜,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바로 다 하나님 없는 마음에서 오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면 되겠습니까? 흔히들 이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가수들이 유행가를 부르는데 유독 아주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는 사람이 있어요. 슬픈 노래를 많이 부르는 사람은 팔자가 슬퍼진다고 해요. 가만히 보니까 이별의 노래를 많이 부른 사람은 꼭 이별하고, 고독한 노래를 많이 부른 사람은 자기가 꼭 그 모양이 됩디다. 그것도 한두 번 부릅니까? 수천 번씩 부르지요. 노래도 잘 불러야 하니까요. 보세요. 수군수군하는 사람, 계속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가 당하는 거예요. 제 발등 제가 찍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큰 부끄러움을 사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고자질하는 마음, 비밀을 수군거리는 마음, 혹은 남의 얘기를 옮기는 것…… 다 시기 질투에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 수군수군하면서 좋은 얘기하는 것 보았습니까? 남모르게 수군수군하면서 남 칭찬하는 것 보았습니까? 수군수군하는 것은 하나같이 남 험담하는 얘기입니다. 본인이 들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이 들어도 안됩니다. 그런데 굳이 왜 이런 말을 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운명이 그렇게 된다는 걸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항상 좋은 마음, 좋은 이야기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 30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해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가장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교만은 심판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후에는 회개하지 못하니까요. 교만한 자라면 사랑도 모르니까요. 제가 결혼 주례할 때에 가끔 '교만을 버리고 살라'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 받을 줄도 몰라요. 결혼하면 뭐합니까? 한평생 살아도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데요. 교만하기 때문에 저 잘난 척하고, 같이 사는 배우자 앞에서도 자기가 잘났고, 자식을 놓고도 자기가 잘났고, 친척 중에서도 자기가 제일 잘났고…… 결국은 고독합니다. 사랑을 모르니까요. 마지막에는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 이렇게 되고 말아요. 왜요? 자기가 남을 모르니까 남도 자기를 모를 수밖에요. 알고보면 교만이란 사실 어리석은 거예요. 교만은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자는 교만하다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어요. 이것 또한 내 마음대로 못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그는 겸손을 최고의 은사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셔서 교만할 수 없게 만드셨다고 말씀합니다(7). 바울이 조금이라도 교만할 낌새면 쿡 찌르시니까요. 육체의 가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 때문에 그가 겸손했어요. 그런고로 바울은 그가 받은 모든 은사 중 가장 큰 은혜, 가장 큰 은사가 나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1차적으로는 그가 예수를 핍박했으니 그렇고, 이제 사도가 된 지금에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그는 절대로 교만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를 겸손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것을 최고의 은혜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은 내 마음대로 못해요. 그것도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겸손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시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꼼짝 못하지요. 반대로 아무리 겸손하려고 백번 천번 결심을 해도 자꾸만 교만해지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혼자 있을 때에나 기도할 때에나 '겸손하겠습니다. 겸손하겠습니다' 생각하지만 누구를 만나기만 하면 어느 사이에 목이 꼿꼿해지고 어깨에 힘을 주게 됩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가 못한 것 같고…… 이것 배냇병신이에요. 참으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내 마음대로 못해요. 겸손은 큰 축복이고 교만은 심판 받은 심령이에요. 끝없이 그대로 교만하고, 아무리 겸손하려고 해도 겸손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제는 끝난 심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왜요? 회개가 없으니까요. 회개할 수도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제사장들이 그러했어요.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니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말씀합니다. 옛날에 로마에서는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은 죽여버렸어요. 부모에게 사형권이 있었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식은 죽여도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았답니다. 그만큼 부모의 명령에 절대복종 해야 되는 것이 당시의 사회 규범이었어요. 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심판 받은 사람인걸요.

"우매한 자요"라고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우매하다, 어리석어진다--얼마나 귀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한 내과의사가 어떤 사람의 질문을 받았어요. "당신은 평생 의사로 사는데, 하나님께서 만일에 당신에게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시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얼 구하겠소?" 내과의사는 신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암으로 많이 죽어가는데, 암이 몸에 생기는 즉시로 바로 그 자리가 쑤시고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째고 수술하면 될 것이니까요. 이 암이라는 병은 자각이 되지 않아요. 3, 4, 심지어 10년이 지나 죽을 지경이 된 다음에야 알아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죄를 짓자마자 그대로 벼락이 떨어진다면 간단하지 않겠어요? 쑤시고 아프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심판 받은 심령은 우매해요. 어리석어요. 죄에 대한 아픔을 몰라요.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요. 심판도 보이지 않아요. 결국은 죄와 죄의 매력에 끌려서 깊이 빠져들어 간다는 말입니다. 이게 심판 받은 것 아니겠어요?

그 다음에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무자비--자비가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사람들에게 이런 기록이 있어요. 어느 귀족의 집에 파티가 열렸는데 노예가 와서 일하다가 실수해서 컵 하나를 떨어뜨렸어요. 그래 깨졌어요. 그럴 수도 있지 않아요? 그런데 "당장 저 놈을 악어들이 있는 연못에 집어넣어라"하고 명령해서 그냥 죽여버렸어요. 그야말로 무자비하지요. 오늘도 보면 자비가 없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은 악에 받친 사람이에요. 이것 또한 자기 마음이 아니지요.

, 이렇게 심판받은 자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제 마지막으로 32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보세요. 알고 행하는 것,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이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알고도 행합니다. 본문말씀의 맥락대로 본다면 행할 수밖에 없어요. 이 길밖에 없어요. 그것이 심판 받은 심령이에요. 또한 자기들이 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옳다고 합니다. 정당화한다는 것이지요. 악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악을 행하는 악이요, 둘째는 악을 반복하는 악이요. 셋째는 악을 정당화하는 악입니다. '비록 행위는 악하더라도 결과가 좋다. 나라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이런 소리를 해가면서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불가피했다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내 책임이 아니라고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기들도 악을 행하고 또한 이것을 정당화하고, 옳다고 하고…… 과연 이런 사람이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심판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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