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복음과 바울(1:1 ~ 7)
로마서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나름 대로들 예찬론(禮讚論)을 펴고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로마서의 중요성을 가장 단적으로 멋지게 갈파했다 할만한 사람은 아마도 필립스라는 사람일 것입니다. 일찍이 저 유명한 대영 박물관장(大英博物館長)으로 있을 때에 이 사람은 말했습니다. "온 세계를 다 준다 해도 나는 이 대영 박물관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대영 박물관을 그토록 소중히 여겼다는 것인데, "그러나"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일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로마서를 단 한 페이지라도 가져온다면 그것과는 이 대영 박물관을 서슴없이 맞바꿀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부터 공부해나가고자 하는 이 로마서는 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귀중한 성경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성경은 대략 주후 300년대에 있었던 사본들을 수집해서 편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박물관장으로 볼 때에는 진품이 있어야 하겠거든요. 그래서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친필 서신, 파피루스에 쓴 그 로마서, 복사본이 아닌 그것을 가지고 온다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고 하는 대영 박물관과도 맞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서는 소중하다는 얘기지요.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마치 하나의 둥근 다이아몬드 반지와 같다. 로마서는 그 반지의 다이아몬드 그것과도 같다. 그 다이아몬드에서도 로마서 8장은 마치 빛을 발하는 다이아몬드의 끝 부분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혹 천재지변으로 온 세계에 있는 성경책이 다 없어진다고 해도 로마서만 있으면 충분히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가 다 남겨지지 않는다 해도 로마서 8장, 그 한 장만 있으면 그것만 보고도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좀 지나친 듯 싶습니다만, 이것은 그만큼 로마서를 지극히 사랑하고, 로마서를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간증인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여러분은 오늘부터 시작하여 로마서를 몇 번이고 읽어보세요,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한 열 번쯤 읽다보면 분명히 여러분에게 얼마나
크게 은혜가 되는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로마서를 공부할 것이므로 어차피 많이 읽게 될 줄로 압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은혜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 몇 사람을 들 수가 있습니다. 먼저 세계 교회를 위해서 크게 역사 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 된 것이 바로 이 로마서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한때 사교에 심취했고, 잘못된 철학을 통해서 방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예수 믿어서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애를 썼습니다마는 여전히 그의 생활에는 이렇다할 변화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서 그 타락된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추상적 진리로만 성경을 상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일어나 성경을 펴서 읽어라." 그 부분이 바로 로마서 13장 13절로 1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말씀의 능력이 오면서 그 방탕했던 생활로부터 온전히 자유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된 것입니다.
또 한 사람,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있으면서 구원을 얻고자, 바르게 살고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보고자 갖은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두 가지의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죄의 문제입니다. 그는 죄 사함의 기쁨을 얻지 못했어요. 죄 사함의 신비를 그는 아직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wrath of God,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그는 피부로 느끼면서 떨고 있었습니다. 항상 고민했습니다. 내 죄, 내 죄 하면서 안절부절못했어요 성경을 읽어도 고민이요, 기도해도 두려움뿐이었습니다. 그래,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로마에 있는 성 계단을 무릎으로 그대로 기어 오르내렸습니다. 그래도 이렇다할 큰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주님의 크신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전에도 수없이 듣고 읽은 말씀이었지만, 이제야 성령 안에서 생명의 빛이 그 마음을 비추었고, 그는 벌떡 일어납니다. "바로 이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하여 루터는 비로소 죄 사함의 기쁨을 얻게 되고, 두려움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여기서 힘을 얻어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 로마서가 준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를 들 수 있습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 그는 올터스키에잇이라는 거리를 지나가다가 한 조그마한 교회에 들렀습니다. 웨슬리는 그곳에서 몇 사람이 모여 로마서 서론을 공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로마서 강해를 들으면서 그는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온 세계를 위하여 오신 주님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오신 주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은 뜨거워진 그 열정으로 감리교가 시작됩니다. 이 또한 로마서가 주는 영적 감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일본의 타이세이 미치하라라는 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분은 본래 불교 스님입니다. 그러면서도 절간에 앉아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성경에 심취됐어요. 너무나도 좋은 말씀이어서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절간의 승려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로마서 8장 32절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그는 깨닫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이 말씀이 그 마음에 아주 밝은 빛으로, 생명력으로 확 다가옵니다. 여기서 그는 생명을 얻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벌떡 일어나 절간을 떠났고, 마침내 전도사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 후로 무려 25년 동안을 전도인으로서 하나님께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얘기가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로마서를 통해서 특별히 은혜 받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읽어서 아시는 대로 로마서에는 상황적인 얘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 다음에 공부하겠습니다마는, 고린도서나 데살로니가서, 빌립보서나 다른 편지들을 보면 그 편지를 받고 있는 대상, 그 교회의 상황적인 얘기가 많습니다. 그 교회에 분열이 있다든가 그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다든가 하면 그것에 얽힌 사람 이름도 나오고, 그것은 이렇게 처리해야겠다, 그것은 이렇다 하고 여러 가지 상황적인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가 귀한 까닭은 기독교 교리 전반을 깨끗하게, 교리 문제와 윤리 문제를 고루고루 체계있게 다루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길게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당당한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고, 당대에 온 세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서 복음을 꼭 전해야 되겠다, 하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이 막히는 거예요. 꼭 가야겠는데 막히는 거예요. 만부득이 그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위험이 있다는 것도 그는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거기서 순교하고 로마에 가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만사를 제치고 로마로 가려 하지를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래서 만일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 그가 로마에 못 가게 되더라도, 애초에 그가 전하고자 했던 복음을 이 편지로 대신하려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의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평생에 전하던 복음을 요약해서, 논리 정연하게 교리와 윤리를 다 설명해서 이것을 편지에 담아 로마에 보냅니다. 만일에 로마에 못 간다 해도 이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복음입니다. 바울이 평생 전하던 복음이 온전히 여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 그런 차원에서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오늘의 본문 내용은 로마서의 서론입니다. 헬라식 편지라는 것은 언제나 이렇습니다. 맨 처음에 발신자를 쓰고, 그 다음에 수신자를 쓰고, 세 번째로 문안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네 편지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수신자를 먼저 씁니다. '부모님전상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에게'…그 다음에 문안 인사를 씁니다. '기체후일향만강하옵시며……'로 시작해서 편지 내용까지 다 씁니다. 그 다음에 맨 마지막에 '불초 여식 올림'하고 자기 이름으로 끝맺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편지 형식입니다. 그래서 편지를
서류적으로 처리하려고 하면 아주 골치 아파요. 이게 누구에게서 온 편지인가를 알려면 부득불 맨 마지막을 보아야 하거든요. 그래 할 수 없이 편지의 첫머리에다가 그 사람의 이름을 다시 써놓습니다. 그래야 찾기가 쉬워요. 그렇지 않고 그냥 뒀다가는 첫머리는 전부 다 '목사님에게'라고 썼으니까 누구한테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 헬라사람들의 편지는 좀 버릇이 없다 싶지요? 자기 이름부터 먼저 쓰니까요. 그렇지요?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논리적이예요. 누가 보낸다는 말이 먼저 있으니까요. 그래 나는 아무개다, 라고 설명하고 그 다음에 누구에게, 맨 마지막에 문안을 쓰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은 맨 먼저 발신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발신인은 누구다, 그 속에 자기 소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1절)"--이 말씀을 헬라 원문대로 보면 '파울로스 둘로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파울로스'--바울이라는 글자가 맨 처음에 나옵니다. 우리네는 수식어가 먼저 나오지만 그 사람들은 주어가 먼저니까요. 그런고로 '나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한다'--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여기에 바울에 대한 소개가 나오게 됩니다. 바울은 여러 가지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엄격히 따져보면 두 가지로 자기를 소개하는데 하나는 종이요, 하나는 사도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택함을 받은 사도다, 하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둘로스'--이 종이라는 말을 우리는 지금 실감하지 못합니다. 종이 얼마나 비참하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종이 없으니까요. 이런 노예가 없으니까요. 노예라는 것은 쇠사슬에 묶여서 일하는 사람이요, 주
인 마음대로 팔고 사는 존재입니다. 노예에게는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어요. 그저 주인이 하라는 대로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말하는 게 듣기 싫다고 말을 못 배우게 해서, 노예는 알아듣기만 하지 말도 못해요. 그래서 옛 기록에 보면 노예와 당나귀는 꼭 같은데 노예는 말귀를 알아듣고 당나귀는 못 알아듣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노예는 완전히 동물 취급당하고 생산 수단으로 쓰였습니다. 아예 말을 못하게 했어요. 듣기만 하고 말도 못하지만 할 필요도 없었어요. 물론 가르친다던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요. 이렇게 일껏 부려먹다가 늙으면 내버리고 하는 것이 바로 노예입니다. 철저하게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노예요'하고 자기 소개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종이라는 말을 결코 부끄러운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입니다. 종이라는 말을 영광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 그 속에 진정한 충성이 있는 것입니다. 또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오늘이라도 내가 누구의 종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내가 영광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바울이에요. 나는 예수의 노예다, 나는 이 노예 됨을 자랑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문제는 누구의 노예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노예, 예수의 종-그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이것이 충성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지고의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바친다 봉사한다 하고, 걸핏하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지만, 누가 죽는 것을 좋아합니까? 그것 반갑지 않은 소리예요.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를 바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의를 바치는 것입니다. 명예와 의--보세요. 바울이 '내가 예수의 종, 예수의 노예다'라고 하는 순간, 자기 명예가 없어져요. 그리스도만 남고 나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라고 하는 자의 인격, 자유… 아무 것도 없어요. 의도 없어요. 이것까지도 전부 그에게 바쳐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역시 바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굉장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적 교리를 말씀함입니다. 자기자신의 의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의 부르심으로 내가 있는 것입니다. 무자격한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지 자격이 있어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무자격한 가운데서 부르는 자의 주도권에 의해서 내가 선택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읽어야 됩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1절)"--여기서 몇 절 건너뛰어 7절을 보세요.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여기에도 '부르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여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복음을 전하는 자요, 같은 부르심을 입었지¸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는 사도로부터 복음을 듣는 자입니다. 이 관계가 분명해야 됩니다. 바로 이 사도권 때문에 고린도서에 보면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성경을 볼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를 사도로 부르셨기 때문에, 그 부르심을 우리가 확실히 믿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음성을 바울을 통해서 듣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분명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도로 부르시고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성도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이 관계를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또 '사도'라고 하는 것은 '아포스톨로스'-'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글자풀이만 할 문제가 아닙니다. 엄격히 말하면 '사도'라는 말에는 높은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보세요. 열두 제자의 명칭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로 넘어가서는 '사도'라는 명칭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제자'는 일반교인을 부르는 명칭입니다. 여기서 달라집니다. 사도행전적 의미로 볼 때에 제자는 일반교인들을 지칭하는 것이요,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선택받은 주의 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깊은 설명이 있겠습니다마는, 결론만 말하면 사도라는 말은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를 뺀 열한 제자를 의미하는 것이에요. 이 열한 명의 제자만이 사도입니다. 그 외에는 사도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한 사람 더 있는데 그가 바로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사도라고 부를 때가 있습니다.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사도라고 부르지 못합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그 다음에 사도의 제자를 '속사도'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 제자가 '감독'입니다. 이렇게 그 명칭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이 사도라고 하는 것에는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세우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또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기록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라고 하는 것은 아주 높고 특별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종이다, 동시에 나는 사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부르심의 역사요, 선택의 역사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도적인 역사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부른다는 말씀과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1절)"--복음전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다, 라고 말씀합니다. 목적은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바울의 마음속에는 정열이 터집니다. "복음"하니까 곧바로 가슴속에서 그만 화산처럼 열정이 터져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자기가 편지 쓰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어요. 발신자, 수신자, 문안, 차례대로 써야겠는데 지금 자기소개 하는 도중에 "이 복음은(2절)…"하고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정열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신 형식을 초월하여 복음이라는 말이 나오면서 바로 복음을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2~4절)"-가만히 보니까 '아들'이라는 말씀이 강조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소위 기독론적 용어가 그 문화적 차원에서 몇 가지로 구별됩니다. 헬라사람들을 위해서 쓰일 때에는 '아들'이라는 말보다 '로고스'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합니다. '말씀' 즉 '로고스'라는 단어를 즐겨 씁니다. 더구나 초대교회 문서에서는 '로고스'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게 헬라문화적인 배경에 있는 사람에게는 '로고스'로 말하게 되고, 이방사람, 가령 로마사람이나 헬라사람 등이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제일 많이 쓰는 단어가 '큐리어스'입니다. '주'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예와 주인과의 관계에서 쓰이는 용어인데 특별한 의미에서 '주'라는 말로 씁니다. 여기에 히브리적 개념이 더해져서 '주'라고 하는 말은 '아도나이'라는 말로 대치됩니다. 그래서 '주'라는 말은 곧 '하나님'이라는 말도 됩니다. 이런 개념으로 '주'라는 말을 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주'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방적으로 말할 때에 신앙고백으로 말하면 '예수는 곧 주다'--이렇게 되는 것이며, 히브리사람들, 곧 히브리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제일 많이 쓰이는 단어가 '아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이 말이 나옵니다. 비록 살기는 로마에 살아도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대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방인의 복음으로 전해지면서도 형식상으로는 유대적입니다. 율법적 관계에서 설명하고, 지극히 히브리적 맥락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 오늘의 본문에 당장 그것이 나타납니다.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로마사람들이 성경을 아나요? 로마에 있는 히브리사람들이니까 아는 것이지요. 또 "이 아들로 말하면"--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로마에 있는 히브리사람들, 히브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기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로고스'라고도 말하고, '주'라고도 말하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주로 '아들'이라는 말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헬라말 '휘오스'는 히브리사람들에 있어서는 곧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최종 계시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적 계시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본문을 보니 이 '아들'에 대해서는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해서 성경 예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도 예언돼온 것임을 말씀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고도 말씀합니다. 다윗의 혈통-이것은 바로 '왕'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부터 예언되어온 분이십니다, 또 역사적인 분이시요, 역사적 예언이 성취돼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것입니다-이런 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강조된 것이 있습니다.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4절)"-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부활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사람들의 개념, 히브리사람들의 메시야관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는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고, 그리고 부활하셨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민족적 메시야가 아니라 우주적이고 종말론적 메시야로 우리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케뤼그마적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에 베들레헴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애를 많이 강조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이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관심사는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이었어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부활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만난 예수는 부활한 예수입니다. 어떻게 말하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그는 많이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해하는 예수는 부활하신 예수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예수는 종말론적 예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에다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주로 우리 신교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많이 강조합니다. 가톨릭은 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합니다. 그래서 '미사'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매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희랍정교는 주로 부활을 많이 강조합니다. 그래서 옛날 러시아사람들의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부활적인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의 성경말씀에 보면 십자가와 부활이 역력히 나타납니다.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4절)"--하나님의 아들됨을 우리에게 계시해주실 때에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계시해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사도 바울은 복음과 자기와의 관계를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5절)"--우리가 직분을 받았다, 바로 이 복음은 전해져야 하는 것이고, 전해짐으로 효력을 얻게 하는 것이다, 라는 선교적 의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여기에 수신자에 대해서 하는 말씀을 읽어봅시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6, 7절)"--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7절)"--성도, 거룩한 무리로 선택되어서 부름을 받았다 함입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도'--아주 귀한 이름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헬라어로 '하기오스'라고 하는 이 말은 원래 '무리'라는 뜻이 없어요. '거룩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기오스' 곧 거룩한 무리에게 편지한다, 이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7절)"-복을 빕니다. 은혜와 평강-은혜라고 하는 것은 헬라식 문안이요, 평강은 히브리식 문안입니다. 평강-'살롬'입니다. 헬라말로 '에이레네'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안입니다. 그런데 이 문안이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문안을 문안으로 끝내요. 안녕하십니까, 하면 그만이에요. 그 다음 말이 없어요. 이 분들은 문안이 곧 축복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복을 비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그것이 곧 문안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것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로마서의 서론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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