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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승리 (사도행전 12:20~2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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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승리 (사도행전 12:2025)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홍왕하여 더하더라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무 간결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는 조금 힘듭니다. 그러나 좀 자세히 읽으면 충분히 알만큼 설명을 했습니다. 언뜻 보면 이 말씀이 왜 사도행전의 바로 이 대목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역사적인 이야기인데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그 한 구절 한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산 교훈이 큰 것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반부에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죽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과연 성경에 기록될 만큼 중요한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적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 선교적 차원에서도 이 헤롯의 죽음은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하는 사람은 대헤롯이라고 불리는 헤롯왕의 손자입니다. 대헤롯 다음으로는 가장 큰 세력을 확보한 분봉왕입니다. 대헤롯 다음에는 헤롯 아켈라오, 안디바, 헤롯 빌립으로 그 영역이 셋으로 나누어졌었습니다. 그래서 세 분봉왕이 생긴 것입니다. 나누어서 다스리는 왕이라 해서 분봉왕입니다. 말하자면 대헤롯 때에 비하여 세력이 전부 약해졌었지요. 형제간에도 서로 다투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그립바 1세에 이르러서는 다시 통일이 되어 형제들을 다 치워버리고 대헤롯 때보다도 영토가 더 확장되었습니다.

아그립바 1세는 유다와 사마리아 전체까지 다스리는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그립바 1세는 대헤롯의 손자로서 이렇듯 큰 세력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애매한 의미를 가진 왕입니다. 그 위에 왕이 또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로마 황제입니다. 어디까지나 로마 황제가 아그립바 왕의 상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그 왕 노릇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의 환심도 사야 되고 로마 황제에게도 잘 보여야 됩니다. 로마 황제가 볼 때에 '저 사람은 믿을 수 있다'해야 됩니다.

로마 황제의 속셈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 말아라, 로마 황제인 나를 잘 섬겨라'입니다. 둘째는 유대, 사마리아 그 땅이 자못 시끄러운 곳인데 제발 조용해줬으면 좋겠다, 로마에 항거하는 소동이 없고, 혁명이 없어야 되겠다----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샬롬적인 평화가 아니라 Pax적인 평화를 원했습니다. 큰 힘, 로마 황제의 그 엄청난 권력 앞에 온 세계가 조용하기를 바랍니다. 주인의 큰 세력 앞에 노예들이 다 쇠사슬에 묶여 있지마는 불평 없이 조용한 것처럼 말입니다. 공동묘지의 고요함 같은 평화를 원했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엄청난 죽음이 있고, 엄청난 억압이 있습니다. 오로지 로마적인 Pax 개념으로 조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을 내세웠는데, 이 헤롯이 유대나라 왕이라고 앉아 있으니까 그 동안은 유대사람들이 조용해요. 그리고 이 헤롯왕이 아주 재주가 좋아요. 비교적 나라를 잘 다스리는 편이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그립바 1세가 오늘의 본문에 보니까 죽었습니다. 아그립바 1세가 비참하게 죽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이 헤롯왕은 죽고 "하나님의 말씀은 홍왕하여 더하더라"합니다. 말씀의 승리, 교회의 승리, 복음의 승리를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두 사건은 대단히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헤롯 아그립바 1, 이 사람은 야고보를 죽였습니다. 야고보가 의인이냐 악인이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안 지었느냐를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로마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에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조용하다면 죽는 것이 좋습니다. 죽였다고 보고한다 해서 로마에서 왜 살인을 했느냐,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였느냐 하고 따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법입니다. 또한 유대쪽으로는 헤롯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속의 이른바 종교지도자들의 호감을 살 필요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고, 특별히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무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는 이유 없이 야고보를 목베어 죽인 것입니다. 죽였더니 아니나다를까 그 무리들이 대단히 좋아해요. 헤롯 왕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거 괜찮구나, 한 사람 죽이면 좋아하니 두 사람 죽이면 더 좋아하겠구나-----이래서 초대교회의 대표적 인물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 감옥에 잡아넣었는데 베드로는 뜻밖에도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옵니다. 이것이 보통 사건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헤롯 아그립바 이 사람은 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놓쳤구만-----이렇게 심상할 뿐 그 이상의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자기가 왕 된 데 대한 신앙적 이해가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잘났든 못났든 하나님께서 왕 되게 해서 왕 된 것입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헤롯은 왕이 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이유야 어쨌든지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권력 위에 권력 있고, 그 위에 또 권력이 있거든요. 하나님의 큰 왕권아래 자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는 것,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 그런 것을 몰라요. 알 바 아니던 사람입니다. 자기 영달, 자기 출세, 자기 향락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헤롯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은 야고보를 죽였지만 조금도 가책이 없어요. 의인을 죽였는데 무사할까? 죄 없는 사람을 목베어 죽였는데 괜찮을까? 이만큼의 두려움도 없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죽이려고 했다가 그의 출옥을 알고 나서는 파수꾼들을 잡아다가 모조리 처형하고 맙니다. 어떻게 되어서 그렇게 철통같이 지켰는데도 놓쳤느냐--이렇게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파수꾼들을 잡아다 다짜고짜 죽이고 마는, 이 정도의 인간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여기에 따릅니다. 바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역사다, 하는데 헤롯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관심도 없고 보니 알 길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헤롯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신비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지금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고도 무지합니다. 그러니 깊은 고민도 없어요.

사실은 두려워해야 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고도 무지합니다. 그러니 깊은 고민도 없어요. 사실은 두려워해야 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이렇게 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혀 신령한 고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헤롯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헤롯에게 결정적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 점에 우리가 깊이 착안해야 합니다. 결정적 시간-----심판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질병의 고통이 주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광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불의한 사람의 형통, 불의한 사람이 잘될 때에 그것을 성공이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축하할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것으로 인해서 크게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불의하고 죄의 길을 간다고 한다면 오히려 실패하게 되고, 병들게 되고, 일이 잘못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봅시다. 세상에서 세상 방법대로, 마음대로 살던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사업이 잘돼야 되는데 반대로 점점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손해 많이 보았다고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는 이럴 때에 알아듣도록 설명을 해주기가 참 힘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영혼을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잘못된 그 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믿지 않는 사람이 가졌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불 신앙적 방법으로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해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가치관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장사하는 것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활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련을 겪는 것입니다. 시련을 다 겪게 하시면서 목적도 세계관도 방법도 바꾸어놓고야 다시 다음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과정이 한참 걸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가졌던 생활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서 예수 믿자마자 복만 듬뿍 받기 바란다면 그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헤롯을 심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과 역경과 실패가 아니라 영광이었다는 것입니다. 형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헤롯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서거든 때가 온 줄로 알라"하였습니다. 거룩한 곳에 있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거룩한 곳에 있어요. 성공해서는 안될 사람이 성공해요. 천하에 고약한 사람에게 돈이 주어져요. 그건 망조입니다. 절대로 성공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점을 알아야 됩니다.

, 이제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노여움을 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계가 불편했다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헤롯의 마음에 거슬렸을까? 성경에는 그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아래의 문맥을 보아서입니다. 예루살렘 쪽에 있는 두로와 시돈은 항구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식량 등속을 무역하려고 하면 두로와 시돈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내륙에 살므로 바다에 대해서는 좀 익숙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두로와 시돈이라는 항구도시를 이용해야 되는데 이 점에서 아마도 두로 시돈 사람들이 헤롯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았던가 봅니다. 말하자면 비위를 건드렸겠지요. 그래서 노여워했다고 했는데, 헬라 원문대로 보면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적대감을 품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모종의 정치적 음모를 꾸미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헤롯이 지금 기분이 안 좋아 있어서 두고보자, 한번 혼을 내줄 테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알고 있으면서도 헤롯과의 불편한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은 이곳 사람들이 헤롯으로부터, 유대나라 사람들로부터 식량을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헤롯과 화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그런 것입니다. 좀 어색하게 번역되어 있지마는 헤롯이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줄로 알면서도 식량문제 때문에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통하여 헤롯과 화목하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원치 않으면서도 헤롯에게 잘 보이려는 속셈이지요. 여기에도 때가 왔어요. "헤롯이 나를 택하여"라고 했는데, 이 날이 어느 날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역사가 요세푸스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요세푸스는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황제 글라우디오의 생일 축제가 있었어요. 축제는 여러 날 계속되는데 그 둘째 날입니다. 헤롯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글라우디오를 즐겁게 하겠다고 가이사랴에서 축제를 준비한 것입니다. 거기 주둔하고 있는 많은 로마군인들을 청해 가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큰 잔치를 벌였는데, 로마 황제는 그 자리에 없으니까 결국은 자기가 황제처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위한 잔치 라지만 결국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은으로 만든, 은을 두드려서 만든 찬란한 옷을 입고 상석에 앉아서 뭇시선으로부터 영광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이 이 때를 타서 왕의 환심을 사고 자기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헤롯의 일장연설 끝에 그들이 아첨하는 소리를 보세요.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22)"-----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저들이 아그립바를 향하여 "당신을 이제부터 신으로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당신은 사람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신으로 섬기겠습니다-----헤롯 왕은 기분이 좋았겠지요. 아첨하는 사람이 대개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우상이 생깁니다. 그래서 왕마다, 교만한 왕마다 "내가 신이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라면 그런 아첨의 소리를 들었을 때면 마땅히 백성들을 꾸짖어야 합니다. 한 사람 생각나지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을 때에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베드로에게 절을 합니다. 베드로는 황급히 잡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오, 이러지 마시오"합니다. 정신이 제대로 든 사람의 태도이지요. 그런데 이 헤롯은 자기를 신이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 앞에서 오히려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불경스럽다. 그런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하고 책망을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면에 미소를 띠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칭찬과 아첨을 그대로 수용한 것입니다. 일은 그 때에 일어났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때에 아그립바는 극장의 천막 기둥에 앉아 있던 불길한 징조의 새 올빼미를 보았고, 그 순간에 복통이 일어나 궁전으로 옮겨졌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닷새 후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으면서 아그립바는 마지막 말을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부른 것으로 인하여 나는 죽게 되었다"----정신 딱 한번 차린 것 같아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불의한 중에 형통하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이 일이 잘되고 장사가 잘되고 잘살게 되거든 망조가 가까운 줄 아세요.

그것은 절대로 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거든 오히려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에 대하여 항상 민감해야 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경륜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잘되는 일이든 못되는 일이든 그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하나님께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훈련시키십니다. 때로는 내가 끊지 못한 것을 끊게도 하시고,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도 하시고, 내가 교만할 수밖에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겸손하게 만드시기도 하시며, 허영의 사람을 진실의 사람되게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신비로움 가운데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는 이것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여기에 무감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가 탈옥했는데도 이 사람 헤롯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가책이 없어요. 도덕적으로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나아가 ''이라고 하는 황홀한 호칭을 들으면서 이것을 침묵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여러분을 칭찬합니까? 그렇거든 아니라고 하세요. 가만히 있으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 "아니오"에서 지나치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고 갸륵하다, 진실하다 할 때에 "아닙니다, 잘못 봤습니다, 나 그런 사람 아닙니다"하고 분명히 말하세요. 가만히 있으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누가 다른 누구를 흉봅니다. 그럴 때에 내가 "그렇지 않을 텐데요?"하지를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 사람이 또 딴 사람에게 가서 나를 가리키며 아무 집사님도 그럽디다, 하고 옮깁니다.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한 말로 옮겨요. 이럴 때에 나는 억울하겠지요? 억울할 것 없어요. 그 말 할 때에 가만히 있었을 뿐이라고 변명할 것입니까? 가만히 있었으니까 말한 것이 됩니다. 이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말같지 않은 말이면 듣지를 말아야지 떡 앉아서 들어놓고는 동의한 일이 없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미 동의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침묵의 수용-----"당신은 신이오"하고 소리지를 때에 헤롯은 기분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어요. 가만히 있는 것으로 인하여 그는 마침내 죽습니다. 죽을 때에 가서야 "너희가 나를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죽는다"하고 술회합니다. 신이라고 했다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신이 아니오, 라는 말을 못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선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아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몰라요. 나의 나됨은 내가 알고 있어요. 남들의 과대한 칭찬을 그대로 수용하려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참이라고 하는 진실도 있지만 reality라고 하는 의미의 진실이 있어요. 사실대로 높고 낮고는 묻지 마세요. 죄인이냐 의인이냐도 묻지 마세요. 도덕적으로 선하냐 악하냐도 묻지 마세요. 악은 악대로 악이고, 선은 선이고, 불의는 불의라고 말하세요. 그게 진실입니다.

헤롯은 인간으로 받을 수 없는 높은 칭찬과 존경을 그대로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었어요. 그 죄로 인하여 죽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을 심판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을 심판하실 때에 핍박하는 그 순간에 벼락을 내려치시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렇게 하면 핍박받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핍박으로부터 보호받는 것처럼, 자기들의 능력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가 교회 핍박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에 그 사람이 당장에 벼락을 맞았으면 싶은데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가만히 두고보세요. 조용히 기다려보세요. 얼마후면 그는 자기 함정에 빠져서 자기 죄로 인하여 망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핍박하는 자를 심판하시는 방법입니다. 야고보를 죽이는 순간에도 헤롯은 무사했어요. 베드로를 체포할 때에도 무사했어요. 그러나 가이사랴에 돌아가서 그 같은 영광을 누리면서, 극치의 영광을 누리면서 벌레에 먹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자기 죄로 인하여 심판 받도록 그렇게 심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이 주는 큰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로챘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이런 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순간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혹이라도 내게 영광이 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시편 가운데서, 하나님이여 영광을 내게 돌리지 말아주소서, 하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을 다시 읽어 나가보면 교회를 극단적으로 핍박하던 사람이 죽어버리고 나니까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지더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높아지더라, 바울이 높아지더라, 스데반이 어떠했더라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지금 쫓겨다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지더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개인의 이름도 여기에 나타날 이유가 없어요.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이 흥왕해지더라 합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이 구제금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가는데 마가 요한을 동반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마가 요한에 대한 이야기는 다시 뒤에 공부하게 되므로 여기서는 더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헤롯의 죽음과 말씀의 승리-이 관계가 아주 오묘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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