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무명 용사의 승리(출애굽기 17장 8절~16절)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 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덱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 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 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 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전쟁에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패전한 입장에서 구구한 변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싸움은 언제나 이겨야만 합니다. 승리에는 외적인 승리와 내적인 승리가 있습니다. 가령, 싸워서 이겼는데 도덕적으로 졌다면, 이것을 승리라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이긴 것 같은데 너무 많은 희생을 지불했고 비참한 학살을 했기에 싸움 뒤에 오는 공포와 보복으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면 과연 승리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도덕적인 싸움과 인격적 또는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승리에도 도덕적 차원에서와 영적인 차원에서의 승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싸움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양심의 성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는 물론 자기 양심 앞에서도 나는 정당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승리가 승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 하나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놓고는 정당방위라고 변명합니다만, 이 정당방위가 진정 그를 양심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중요하고 믿음이 중요하며 총력단결과 성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초토화해서 진멸해야만 이긴 것입니까? 이렇게 이겨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 오는 허망함과 절망은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욕망을 포기하게 해서 순복케 하고 복종케 하면 승리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혹은 많은 탈취물과 노획물을 잔뜩 싣고 개선가를 부르며 북을 치면서 입성해야만 승리더냐 말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화해에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살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있습니다. 증오를 버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여기에 진정한 싸움이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참 승리란 오히려 고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처음으로 겪는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진멸하시고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구경만 했고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가 뒤따라 올 때에도 이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정말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바라만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 다 수장되어 진멸되는 모습을 보고서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가서 싸우라"시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그대로 나가서 싸우라고 전합니다. 훈련도 받지 못한 이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고, 그리고 승리를 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 싸움을 통하여 스스로 승리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백성들로 하여금 승리의 영광과 승리의 의미를 누리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행동적으로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단련으로 너희가 직접 나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전쟁을 통해서 백성들이 완전히 하나되게 하는 귀한 일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넷째는 교육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 백성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표적이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 역할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앞에 나가서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최일선에서 칼과 창을 들고 피를 흘리며 적과 싸우는 군사들로, 그들의 공로는 대단히 크며 그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둘째는 이 군사들 바로 뒤에 있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서 그 신앙적 용기를 가지고 진두지휘합니다. 장군으로서의 수고와 고뇌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자리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긴 다음에는 지휘관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 이 전쟁은 지휘관인 여호수아 뒤에 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산 위 높은 곳에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목적도 방법도 결과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백성들이 전쟁을 하고, 산 위에서는 계속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들려 있으면 전쟁에 이기고 내리면 집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전쟁을 이기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모세는 80이 넘은 노인입니다. 그러니 손을 들고 있기에는 너무 피곤합니다. 손이 자꾸 내려옵니다. 넷째로 아론과 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세의 양쪽에서 한 손씩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고 훌은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의 남편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루종일 모세의 팔을 붙들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누가 승리로 이끈 것입니까? 지금까지 설명 드린 네 사람의 역할이 다 중요하고 수고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7에 보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담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에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싸움은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저들을 네 손에 붙였다. 네 발로 밟은 땅은 다 네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상의 두 말씀이 떨어져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했고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허락과 약속과 명령이 있어야만 싸움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은 노략질(삼상 15:9)이나 강도 행위가 아니며 더우기 자구지책(自救之策)도 아닙니다. 사무엘상 15:19의 아각의 사건이나 여호수아가 이끈 전쟁 등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침략이나 강탈이 아닐 뿐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인다는 의미도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전쟁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저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가나안을 심판하셨고 애굽과 블레셋과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간혹 판사들께서 어떤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형선고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가끔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목사님 또 사형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무척 괴롭습니다." 저는 어떤 죄인가 묻고 나서 대답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죄인은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판사는 마음이 좀 가벼워져서 통화를 끝내곤 합니다. 누가 미워서 재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집행하는 자의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면 땅벌레처럼 강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진멸하시는데 우리가 집행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을 쏘고도 "할렐루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서나 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시니 마음은 아프지만 내가 집행한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이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키 위해 여리고 성을 정탐한 뒤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니 들어가서 취하자고 믿음의 눈으로 관찰했습니다. 다른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들이 너무 창대해서 자신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으니 들어갈 수가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비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믿음의 사관(史觀)으로만 본 것입니다. 셋째는 성결함입니다. 여호수아 3:5이나 7:13에서 계속적으로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며 순종하는 자는 자신들이 먼저 성결해야 합니다. 다른 동기나 방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순종입니다. 가감 없는 절대 순종으로, 다 죽이라고 하면 다 죽여야 합니다. 아까워서 남겼다가 벌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탐욕과 명예욕은 금물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전쟁에 나갔다가 승리하자, 자기가 이긴 것처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 왕의 왕위를 폐하시지 않았습니까? 명예욕은 안 됩니다. 그 승리는 결코 내 것이 아님을 사울은 알아야 했습니다. 다섯째는 협력입니다.
협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이 전쟁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을 순종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신 일꾼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나 다윗에게도 허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명하셨고 여호수아를 쓰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이루는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관점으로 본문을 보겠습니다. 먼저 나가서 싸우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들은 순종과 용기를 가지고 싸웁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 뒤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날 무렵, 이 전쟁이 꼭 일어나야 하느냐 아니냐로 백악관의 모든 각료들이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손님 한 분이 백악관에서 하루 밤을 쉬게 되었는데 웬일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서성이다가 따로 옆방에서 자는 링컨 대통령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이 밤에 기도할 때에 그것을 들어주신 하나님, 그가 지혜를 구할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오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약하고 미천하고 죄가 많습니다. 주님, 우리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저는 저의 지혜와 군대, 그리고 온 국민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나라를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뿐입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 없이는 싸울 수도 없거니와 기도 없는 싸움은 올바른 싸움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계속 손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대하 20:15-19에 보면,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 왕이 유대를 침범합니다.
온 백성이 두려워서 당황하자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대로 서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라" 하신 말씀 그대로 그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이 바로 승리의 요인이요, 기도가 승리의 근본적인 힘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피곤하여 손이 자꾸 내려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적군과 마주서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손 좀 들고 있을 수 없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손이 내려오면 전쟁은 지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다. 차라리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은 상대가 있어 서로 맞붙어 싸우니 생명을 걸고 싸울 수 있지만, 혼자서 멀거니 손들고 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곤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들도 때로 피곤하여 졸면서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졸면서 운전하는 것은 죽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졸게 됩니다. 이처럼 피곤은 무서운 것입니다. 모세의 팔이 자꾸 내려오자 아론과 훌이 옆에서 받쳐 줍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동생에게 따지거나 시기 질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형님 동생 관계를 떠나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그를 도왔습니다. 즉 아론은 하나님의 종의 손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승리는 무명 용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무명 용사는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 패하므로 계속 손을 올릴 수 있도록 옆에서도 왔습니다. 피곤한 자를 돕는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스펄젼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자로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그런 영력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해서 그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저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어느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모든 연주자 중에서 어느 분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오른쪽에 앉은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그 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는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뒤에서 협력하는 사람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에 보면,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그는 너희와 나를 시원케 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바나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기분 좋게 일하도록 도왔다는 뜻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시원케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답답하게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좀 시원하게 옆에서 붙들어 주면 모세처럼 전쟁에 이기게 될 것 아닙니까?
일본에 가면 신간셍(新幹線)이라는 기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은 기차가 빨라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10분이면 갑니다만 일본의 이 기차는 우리 것보다 두 배나 빠릅니다. 저는 일부러 그 기차를 타 보았더니 귀가 멍할 정도로 빨랐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 기차가 빠른 이유를 설명해 주시어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차는 앞에 기관차가 있어 그 기관차가 나머지 차량들을 줄줄 끌고 가는데, 일본의 신간셍은 기관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차량마다 바퀴가 있고 거기에 모터가 있어서 전체가 똑같이 앞으로 달린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끌고 나머지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차량 모두가 같은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니 빠른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은 혼자 하는 것입니까? 교회도 누구 한두 사람에 의해 있는 것입니까? 전체가 모두 똑같이 협력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여기에 큰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에는 앞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공로가 있고 여호수아에게 공로가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무명 용사 아론과 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싸움에 어떻게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나를 보면서 무명으로 희생하는 그 거룩한 희생 위에 승리가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처해 있는 위치가 전방이든 후방이든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협력하고 동참함으로 큰 역사를 이루는 숨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무명 용사의 승리(출애굽기 17장 8절~16절)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 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덱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 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 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 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전쟁에는 승리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패전한 입장에서 구구한 변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싸움은 언제나 이겨야만 합니다. 승리에는 외적인 승리와 내적인 승리가 있습니다. 가령, 싸워서 이겼는데 도덕적으로 졌다면, 이것을 승리라 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이긴 것 같은데 너무 많은 희생을 지불했고 비참한 학살을 했기에 싸움 뒤에 오는 공포와 보복으로 두려움에 떨게 된다면 과연 승리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싸움에는 도덕적인 싸움과 인격적 또는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따라서 승리에도 도덕적 차원에서와 영적인 차원에서의 승리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의 싸움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양심의 성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는 물론 자기 양심 앞에서도 나는 정당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승리가 승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변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나 하나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놓고는 정당방위라고 변명합니다만, 이 정당방위가 진정 그를 양심으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중요하고 믿음이 중요하며 총력단결과 성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적인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반드시 적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초토화해서 진멸해야만 이긴 것입니까? 이렇게 이겨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뒤에 오는 허망함과 절망은 더 큰 좌절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욕망을 포기하게 해서 순복케 하고 복종케 하면 승리감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혹은 많은 탈취물과 노획물을 잔뜩 싣고 개선가를 부르며 북을 치면서 입성해야만 승리더냐 말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화해에 있습니다. 진정한 승리는 살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있습니다. 증오를 버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여기에 진정한 싸움이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참 승리란 오히려 고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처음으로 겪는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에 열 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진멸하시고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구경만 했고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가 뒤따라 올 때에도 이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벌벌 떨기만 했지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말씀하셨고, 그들은 정말 홍해 앞에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모습을 바라만 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애굽 군사들이 홍해에 다 수장되어 진멸되는 모습을 보고서야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가서 싸우라"시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그대로 나가서 싸우라고 전합니다. 훈련도 받지 못한 이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고, 그리고 승리를 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 싸움을 통하여 스스로 승리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백성들로 하여금 승리의 영광과 승리의 의미를 누리도록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행동적으로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믿음의 단련으로 너희가 직접 나가서 싸우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이 전쟁을 통해서 백성들이 완전히 하나되게 하는 귀한 일이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넷째는 교육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 백성을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대표적이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이 싸움에서는 네 종류의 사람 역할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앞에 나가서 싸우는 군사들입니다. 최일선에서 칼과 창을 들고 피를 흘리며 적과 싸우는 군사들로, 그들의 공로는 대단히 크며 그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합니다. 둘째는 이 군사들 바로 뒤에 있는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서 그 신앙적 용기를 가지고 진두지휘합니다. 장군으로서의 수고와 고뇌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자리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이긴 다음에는 지휘관 장군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면류관을 씌워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 이 전쟁은 지휘관인 여호수아 뒤에 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산 위 높은 곳에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목적도 방법도 결과도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지금 모세가 손을 들고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 아래에서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백성들이 전쟁을 하고, 산 위에서는 계속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손이 들려 있으면 전쟁에 이기고 내리면 집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전쟁을 이기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모세는 80이 넘은 노인입니다. 그러니 손을 들고 있기에는 너무 피곤합니다. 손이 자꾸 내려옵니다. 넷째로 아론과 훌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모세의 양쪽에서 한 손씩 붙들고 있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고 훌은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의 남편입니다. 이 두 사람은 하루종일 모세의 팔을 붙들었고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러면, 이 전쟁은 누가 승리로 이끈 것입니까? 지금까지 설명 드린 네 사람의 역할이 다 중요하고 수고했습니다만 가장 결정적인 중요한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47에 보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다윗이 골리앗 앞에서 담대히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승리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을 할 때에 적어도 다음 다섯 가지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싸움은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저들을 네 손에 붙였다. 네 발로 밟은 땅은 다 네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상의 두 말씀이 떨어져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했고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허락과 약속과 명령이 있어야만 싸움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은 노략질(삼상 15:9)이나 강도 행위가 아니며 더우기 자구지책(自救之策)도 아닙니다. 사무엘상 15:19의 아각의 사건이나 여호수아가 이끈 전쟁 등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침략이나 강탈이 아닐 뿐 아니라 내가 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인다는 의미도 아닌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전쟁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저 백성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가나안을 심판하셨고 애굽과 블레셋과 바벨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간혹 판사들께서 어떤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형선고 하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가끔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목사님 또 사형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무척 괴롭습니다." 저는 어떤 죄인가 묻고 나서 대답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죄인은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판사는 마음이 좀 가벼워져서 통화를 끝내곤 합니다. 누가 미워서 재판하는 것입니까? 여기에 사사로운 감정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단지 집행하는 자의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면 땅벌레처럼 강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저들을 진멸하시는데 우리가 집행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을 쏘고도 "할렐루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전쟁은 내가 살기 위해서나 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시니 마음은 아프지만 내가 집행한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이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둘째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을 정복키 위해 여리고 성을 정탐한 뒤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니 들어가서 취하자고 믿음의 눈으로 관찰했습니다. 다른 정탐꾼들은 아낙 자손들이 너무 창대해서 자신들은 그 앞에 메뚜기 같으니 들어갈 수가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에 비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믿음의 사관(史觀)으로만 본 것입니다. 셋째는 성결함입니다. 여호수아 3:5이나 7:13에서 계속적으로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집행하며 순종하는 자는 자신들이 먼저 성결해야 합니다. 다른 동기나 방법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순종입니다. 가감 없는 절대 순종으로, 다 죽이라고 하면 다 죽여야 합니다. 아까워서 남겼다가 벌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탐욕과 명예욕은 금물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전쟁에 나갔다가 승리하자, 자기가 이긴 것처럼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사울 왕의 왕위를 폐하시지 않았습니까? 명예욕은 안 됩니다. 그 승리는 결코 내 것이 아님을 사울은 알아야 했습니다. 다섯째는 협력입니다.
협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이 전쟁에서 보듯이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을 순종하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신 일꾼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나 다윗에게도 허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지명하셨고 여호수아를 쓰시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을 함께 이루는 구체적인 순종입니다.
이제 위와 같은 관점으로 본문을 보겠습니다. 먼저 나가서 싸우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승리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들은 순종과 용기를 가지고 싸웁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볼 수 있습니다.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을 데리고 나가서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신앙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 뒤에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미국에 남북전쟁이 일어날 무렵, 이 전쟁이 꼭 일어나야 하느냐 아니냐로 백악관의 모든 각료들이 심각하게 의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손님 한 분이 백악관에서 하루 밤을 쉬게 되었는데 웬일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와 서성이다가 따로 옆방에서 자는 링컨 대통령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솔로몬이 밤에 기도할 때에 그것을 들어주신 하나님, 그가 지혜를 구할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오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의 도움 없이는 이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약하고 미천하고 죄가 많습니다. 주님, 우리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저는 저의 지혜와 군대, 그리고 온 국민을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나라를 일으키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할 뿐입니다"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 없이는 싸울 수도 없거니와 기도 없는 싸움은 올바른 싸움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계속 손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대하 20:15-19에 보면, 여호사밧 왕 때에 모압 왕이 유대를 침범합니다.
온 백성이 두려워서 당황하자 하나님은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그대로 서서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것을 보라" 하신 말씀 그대로 그 전쟁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함이 바로 승리의 요인이요, 기도가 승리의 근본적인 힘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피곤하여 손이 자꾸 내려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적군과 마주서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손 좀 들고 있을 수 없느냐고 나무랄 수도 있습니다. 손이 내려오면 전쟁은 지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다. 차라리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은 상대가 있어 서로 맞붙어 싸우니 생명을 걸고 싸울 수 있지만, 혼자서 멀거니 손들고 있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도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곤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들도 때로 피곤하여 졸면서 운전할 때가 있습니다. 졸면서 운전하는 것은 죽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졸게 됩니다. 이처럼 피곤은 무서운 것입니다. 모세의 팔이 자꾸 내려오자 아론과 훌이 옆에서 받쳐 줍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동생에게 따지거나 시기 질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형님 동생 관계를 떠나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관점에서 그를 도왔습니다. 즉 아론은 하나님의 종의 손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승리는 무명 용사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 무명 용사는 모세의 손이 내려오면 전쟁에 패하므로 계속 손을 올릴 수 있도록 옆에서도 왔습니다. 피곤한 자를 돕는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스펄젼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자로 교회를 많이 부흥시킨 역사적인 분이십니다. 한 제자가 그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그런 영력있는 설교를 하시며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습니까?" 목사님은 아무 말씀 없이 그를 데리고 교회 지하실로 안내해서 그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두 권사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 할머니들께서 교회와 저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분들은 교회를 위하는 깨끗한 소원 이외에는 아무런 소원이 없는 분들이십니다. 이름도 명예도 없이 드리는 이 기도 때문에 교회가 건재합니다"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어느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모든 연주자 중에서 어느 분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오른쪽에 앉은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그래서 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그 자리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는 구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뒤에서 협력하는 사람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18에 보면,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에 대해서 소개하기를 "그는 너희와 나를 시원케 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바나는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기분 좋게 일하도록 도왔다는 뜻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시원케 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답답하게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좀 시원하게 옆에서 붙들어 주면 모세처럼 전쟁에 이기게 될 것 아닙니까?
일본에 가면 신간셍(新幹線)이라는 기차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요즘은 기차가 빨라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10분이면 갑니다만 일본의 이 기차는 우리 것보다 두 배나 빠릅니다. 저는 일부러 그 기차를 타 보았더니 귀가 멍할 정도로 빨랐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 기차가 빠른 이유를 설명해 주시어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차는 앞에 기관차가 있어 그 기관차가 나머지 차량들을 줄줄 끌고 가는데, 일본의 신간셍은 기관차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 차량마다 바퀴가 있고 거기에 모터가 있어서 전체가 똑같이 앞으로 달린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끌고 나머지는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차량 모두가 같은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니 빠른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은 혼자 하는 것입니까? 교회도 누구 한두 사람에 의해 있는 것입니까? 전체가 모두 똑같이 협력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여기에 큰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얼핏보기에는 앞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공로가 있고 여호수아에게 공로가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무명 용사 아론과 훌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싸움에 어떻게 승리가 이루어지고 있나를 보면서 무명으로 희생하는 그 거룩한 희생 위에 승리가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처해 있는 위치가 전방이든 후방이든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협력하고 동참함으로 큰 역사를 이루는 숨은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가정〈창세기 29장 10~20절〉 (0) | 2024.06.12 |
---|---|
들린대로 행하리라(민수기 14장 26절~35절) (0) | 2024.06.12 |
이제 용서하소서(창세기 50장 15절~21절) (0) | 2024.06.12 |
마음을 시원케 하는 사람(고린도전서 16장 13절~18절) (0) | 2024.06.12 |
불신의 이유(요한복음 5장 37절~47절) (0) | 2024.06.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