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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린대로 행하리라(민수기 14장 26절~35절)

by 【고동엽】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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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린대로 행하리라(민수기 14장 26절~35절)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 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인간이 언어로 의사를 전달하듯이, 무릇 동물들에게도 그 나름대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고 합니다. 소리로 전달하기도 하고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전달해서 서로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어(言語)라고 하면 역시 인간의 전유물(專有物)입니다.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동물'이라고도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동물이라는 말로도 바꿔 이해할 수 있는 이 말은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학에서는 미개인과 문명인을 언어 구사 능력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구사할 수 있는 어휘가 5백 단어 미만이면 '미개인'이라고 합니다. 3천 단어 이상을 구사하면 '시민'이라 하고 3만 단어 이상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면 소위 '지성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단어의 개념이 명확하고 언어 구사 능력의 폭이 넓을 때, 그만큼 폭넓은 생각과 깊은 의미를 내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이 마음에 있으면 사상이요, 말이 입을 통해서 전달되면 언어요, 말이 고정되면 뜻이요, 말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이 행위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는 '말씀'이라는 단어는 전해지는 말씀 외에도 속에 있는 말씀, 말씀의 존재성까지를 의미하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말이 전개되는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화를 나누거나 자기 생각을 말로 전하는 경우에, 남에게 하는 그 말을 실상은 자신이 먼저 듣습니다. 남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됨을 기억하십시다. 따라서 선한 말을 할 때에는 마음이 선해집니다. 악한 말을 할 때에 마음이 악해지고, 격한 말을 하면 스스로가 격분하게 됩니다. 더러운 말을 내뱉으면 듣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이 먼저 더러워집니다.

인격이 추해집니다. 마음에 있어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말을 함으로써 마음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은 그 마음에 액선트를 가하는 것이요, 말 자체가 그 마음의 형태를 구성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말을 배의 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향방을 조정하듯이, 말이 인격을 좌우하고 운명을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말이 가는 대로 인격이 형성되고, 인격이 가는 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두 번째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말을 남들이 듣습니다. 잠언 15장 1절에서는 남에게 하는 말에 대하여 훌륭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아무리 격분한 사람에게라도 유순한 말로 좋은 대답을 하게 되면 그 마음의 분이 가라앉게 되는 것을 우리는 종종 경험합니다. 격동케 하는 말,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마음에 부드러움과 화평을 주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말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가 그러하고 찬양, 감사, 고백, 서원, 맹세가 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진실입니다. 말에 진실이 담겨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실한 말이 있는가 하면 과장된 말이 있습니다. 온유한 말보다는 교만한 말이 흔하며, 유순한 말이 있는가 하면 갈고리 같은 말도 있습니다. 비웃는 말, 시비하는 말,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 혹은 남의 마음을 침통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써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칼로 찌르듯이 혀로 사람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일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 해서 간단한 경구(警句)하나로 일의 핵심을 찔러 사람을 감동케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있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숙고 끝에 전후의 상황을 고려하여 신중히 하는 말이 있는가하면 자신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불쑥 내던지는 말이 있습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Freud)는 무의식적으로 하는 말이 의식적으로 하는 말보다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술 취했을 때에 하는 말이 진짜요, 마취에서 깨어날 때에 중얼거리는 말에서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잠재의식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자기 존재가 어떤 사건을 통하여 경황 중에 불쑥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남의 일로만 간과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무의식중에 던진 한 마디에 마치 거울을 보듯 나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책임을 져야 합니다. 거울에 비추어진 내 모습이 잘못되었거든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불쑥 튀어나오는 말, 불쑥 나오는 욕설, 무의식중에 내뱉는 한마디---그 속에서 내 진실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동양의 현인 주자(朱子)의 교훈에 있는 말입니다. "남을 험담하는 사람은 경망한 자요, 이와 더불어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비겁한 자요, 이를 듣고 전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다'고 쉽게들 말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십니다. 감찰하시고, 축복하시고, 심판하시고, 보상하십니다. 마음에 대하여, 마음가짐에 대하여, 말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보상하십니다. 우리 행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한 교회에서 40여 년 동안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 성공의 비결 가운데 한 가지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인들의 가정을 방문할 때든지 만날 때든지 언제나 성경 외에 까만 노트를 한 권 가지고 다녔습니다.「교인 불평록」---그 노트에는 이런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교인들이 이러저러한 불평을 늘어놓으면 목사님은 "잘 알았습니다. 그것을 여기에 기록하시고 서명하십시오"하고 노트를 펼칩니다. 40여 년을 가지고 다녔지마는 그 노트에는 단 한 줄도 기록된 것이 없답니다. 서명하고 책임지라고 하면 아무도 서명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여러분, 무슨 말을 하려거든 그 말끝에 서명을 하십시오. 거기에 내 인격과 내 운명을 거십시오. 그렇지 못하겠거든 말을 하지 마십시오. 책임질 수 없는 말, 자신 없는 말을 쉽사리 내뱉지 마십시오. 말은 타오르는 불과 같아서 한번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끝없이 번져나갑니다. 모든 것을 소멸(燒滅)시킵니다. 내가 도화선(導火線)이 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책임질 각오가 아니거든 함부로 쓸데없는 말하지 마십시다.

가만히 보면 요즘처럼 말의 사생자(私生子)가 난무하는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책임하게 남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보다 더한 무고죄(誣告罪)는 없습니다. 사람 앞에도 책임을 지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야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도 그러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주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칭찬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칭찬 돌리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욥을 봅시다. 욥은 불시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습니까? 동방의 부자라 불리던 욥이 일시에 그 모든 재산을 약탈당합니다. 열 명이나 되는 자녀를 하루아침에 모두 잃고 맙니다. 그뿐입니까? 자신은 말할 수 없이 심한 악창으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렸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그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고 이제 하나님께서 취하신다"고 증거 합니다. 경망스럽게 망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무엇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때, 억울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갑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도 결국은 언어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말은 긍정적이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너무 자주 입에 올립니다. '입 도둑에 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을 좀 하면 그것 참 좋다 하기보다는 "과연 잘 될까?"하고 입싼 소리를 해댑니다. 속된 말로 '재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뿐입니까? 심지어 자녀들에게 하는 말조차 부정적입니다. 행여 늦잠이라도 들어 깨울라치면 "안 일어나느냐, 아침 안 먹느냐, 학교 안 가느냐"하는 식으로 말마다 '아니(不)'를 붙입니다. 말하는 사람이야 무심코 한다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영 재미없는 말입니다. 또 죽겠다는 말은 얼마나 자주 합니까? 슬퍼 죽겠다는 것이야 수긍할 수 있다지만, 기뻐서 죽겠고 좋아서 죽겠답니다. 죽겠다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죽어갑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는 이 말, 정말 좋지 않습니다. 요즘 '위기'라는 말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아도 난국 아닌 때 없고 위기 아닌 때 없습니다. 지난날은 지난날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모두가 잘못된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신문에서 한번이라도 괜찮다는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씨앗이 된다고 합니다. 망한다, 망한다 하면 그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신앙인에게는 신앙인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해야 합니다. 어느 경건한 성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를 생각한다고 합니다. 첫째, 이 말이 사실인가? 둘째, 이 말이 상대방에게 덕이 될 것인가? 셋째, 이 말이 내가 꼭 해야 할 말인가?---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간혹 자녀들이 가출했다고 저를 찾는 부모님들이 있습니다. 울고불고, 몹시 딱한 형편입니다. 그런데 참 곤란한 것은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남의 탓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모두 제 탓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야 작히나 좋겠습니까마는, 자기 남편이 어떻고 아이 친구가 어떻다는 둥, 세상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다는 둥, 모든 것이 남의 탓이라고만 합니다. 듣기 민망할 정도가 되면 슬그머니 아픈 구석을 찔러줍니다. "그럼 한가지 물어봅시다. 아이가 말썽을 부릴 때에 혹시 한번이라도 '그러려거든 나가 버리라'고 짜증낸 적은 없습니까?" "왜요, 나가 죽으라고 호되게 야단을 칩니다." "그렇다면 소원을 성취한 셈이군요.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그것만도 감사한 일 아닙니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말은 무서운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헬라사람들은 말에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고스란히 사건으로 성취된다고 믿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히브리사람들은 이것을 신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말을 듣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모든 말까지도 다 듣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사람의 말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고, 말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지혜서인「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말이 내가 건너가야 할 다리라 생각하고 말하라. 견고한 다리가 아니면 건너갈 수 없다."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고 그 깊은 운명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말에는 항상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사람에게 하는 말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라는 가르침입니다.

본문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났던 큰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 광야의 가데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땅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들은 그 땅을 정탐해보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였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각각 대표 한 명씩을 뽑아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들은 두 가지 상반된 보고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신앙적입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8-9절)." 나머지 열 사람의 보고는 부정적입니다. 불 신앙적입니다. '여리고 성은 아성(牙城)이다, 도저히 침공할 수 없다, 그곳 거민은 모두 건장한 장정들로 우리는 그 앞에서 마치 메뚜기와 같다, 감히 쳐들어갈 수 없다, 그 땅에는 들어갈 수 없다.' 이 보고를 듣고 육십만 이스라엘 백성은 낙담했습니다. 이제는 죽었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돌로 치려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차라리 이 꼴 보지 않고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불평이 끝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하냐? 잘 알았다.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민수기 20장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또 원망합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죽을 때에 같이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답하십니다.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라, 너희들의 원망을 내가 들었노라. 그대로 행하여주리라, 이제 너희 중 20세 이상 된 자는 다 이 광야에서 죽으리라.' 어디 그들뿐입니까? 모세마저도 말에 실수를 저지릅니다. 10절을 보십시다. 백성들의 원망에 견디다못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하여 분을 냅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이 망할 자식들'이라고 소리지름입니다. 반석을 꽝꽝 두 번 내리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에게도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12절)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는 나를 믿지 못하고 망령되이 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두고 시편 106편 33절은 증거합니다.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어떤 경우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말은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곧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이 되거나 저주가 됩니다. 남편의 임종을 앞두고 몸부림치는 한 여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남편은 유능한 사원으로 수입도 좋았습니다. 게다가 허우대가 훤칠해서인지 여자 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살아생전, 아내를 몹시도 속썩였습니다. 이 부인이 죽어 가는 남편을 들여다보며 몹시도 안타깝게 후회합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어울릴 때에 너무 속상한 나머지, '차라리 이럴 바에야 과부 되는 것이 낫겠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버려라'하고 저주했다고 합니다. 거침없이 저주의 소리를 내뱉었는데 막상 남편의 죽음을 보면서 가슴아프게 후회를 합니다. 내가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인가, 마음이 괴롭습니다. 일년 내내 외박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달라고 몸부림칩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내 말에 책임을 질 것입니다. 아무리 속상한 일이 있다 해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이야기합시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운명을 좌우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들린 대로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또한 영원히 사함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결국 말로써 짓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깨끗이 고쳐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오셨다고 기뻐합니다마는 교만한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시기합니다.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 11:15)"고 한마디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우리 행위가 그다지 선하지 못하고 무슨 큰 일은 못한다 할지라도, 말이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善)이 아니겠습니까? 깨끗하고 거룩한 입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악한 말들을 금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아첨하는 말, 망령되고 허탄한 말, 저주하는 말, 비방하는 말, 자랑하는 말, 다툼과 시비를 버려야 합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서 소명을 받을 때에 무엇에 가책을 받았습니까? 입술이 부정합니다, 입이 더럽습니다 라고 통탄하지 않았습니까?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스랍을 향하여 성전 제단의 핀 숯을 가져다 입술에 대라고 명하십니다. 그것으로 입을 지집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우리의 입을 지저야 합니다. 다시는 내게서 부정한 말이나 저주의 말이나 무책임한 말이나 불신앙적 언어가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중생뿐 아니라 언어의 중생이 있어야 합니다. 행위의 회개뿐 아니라 언어의 회개가 필요합니다. 신앙적 언어---감사와 찬송, 칭찬과 격려, 덕스러운 말, 소망스러운 말, 생명스러운 말, 거룩한 말이 일관하여야 합니다. 무의식중에도 혼미한 중에도 신앙적 간증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설령 돌에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선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은 그 언어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이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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