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새로운 관계(7:1 ~ 6)
오늘의 본문은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깊고 오묘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에 담긴 아주 깊은 뜻을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합니다. 한편으로, 어떻게 하면 이것을 여러분한테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국문학을 전공했다면 좋았을 걸… 왜냐하면 언어의 부족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좀더 좋은 말로, 좀도 평이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비사(比辭)는 신앙생활을 완전히 해결해주는 참 귀한 말씀입니다. 아주 깊은 말씀이에요. 확실한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실제적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왜 우리에게 기쁨이 없을까, 왜 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까, 왜 나는 하나님의 자녀된 그 큰 특권을 누리지 못하나?'-이렇게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것은 아직도 복음의 진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복음의 진짜 그 깊은 뜻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오늘의 본문말씀은 비사이면서도 아주 깊은 세계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설명은 잘 못하더라도 부디 성령 안에서 여러분이 이 말씀을 잘 알아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정말로 이 본문을 여러분의 신조로 삼고, 신앙으로 삼고, 철학으로 삼고, 그리고 이대로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무릇 신앙이란 먼저는 이 신앙 내용을 깨달아서 의식화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체계화해야 됩니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이해해야 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완전히 내 것이 됩니다. 자, 그런데 가슴으로 이해가 됐는데 생각으로는 이해가 안돼요. 또, 생각은 이해가 됐는데 가슴이 따라가지를 않아요. 그런가하면 체계적으로 이해하지를 못했는데 부분적으로 이해해요. 성경 이쪽만 보고 저쪽은 안 보았어요.
모름지기 우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맥락을 체계 있게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가리켜서 소위 신학화, theologizing이라고 합니다. 철학화하고, 나아가 신학화해서 완전한 신앙이 될 때에 어떤 흔들림도 당하지 않아요. 어떤 유혹이 와도, 어떤 시험이 와도, 어떤 이상한 소리를 들어도, 전혀 거기에 끌리지 않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내가 어떤 처지에 처해도, 내가 가난하건 부하건, 건강하건 병들건, 살건 죽건, 그건 문제가 안되게 됩니다. 아무리 큰 사건이 닥쳐도 이 신앙을 확고하게 가지고 사는 사람은, 이런 체계에 사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어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것을 일깨우는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바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법적 관계에서 말씀합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이는 문화적 관계에서 말씀함입니다. 2천 년 전의 그들의 문화 속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적 관계로 이해합니다. 이것을 굉장히 의지적인 것입니다. 또 합리적인 것입니다. 우리네 민족은 아무래도 좀 감정주도적인 성향의 민족이라고 생각됩니다. 감정이 끓어오르면 정신을 못 차려요.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요. 한번 격해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됩니까? 못돼도 '너 죽고 나 살자'는 돼야 할 것 아니예요? 그런데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다 죽고 그대로 끝내버리고 말자는 거예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감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거예요. 좀 냉정하게 이해하는 성향이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율법을 배워왔기 때문에 철저하게 율법적으로 이해할 줄 압니다. 특별히 로마사람들은 다시 로마법적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법을 만들고 법을 지키는 거예요. 법에 따라서 의인이 되기도 하고 죄인이 되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법대로 살면 살고 법에 저촉되면 죽고… 이런 엄한 법적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라틴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서양사람들과 우리를 가만히 비교해보면, 우리네 입장에서는 저쪽을 잘 이해 못할 때가 많아요. 그 사람들은 아주 법적으로 이해해요. 우리는 감정적으로 이해해요. 그 사람들은 냉정해요. 그런데 우리는 정이 많다고는 하지만 어떤 때에 보면 정신 못 차려요. 여기에 우리의 결함이 있어요. 이것은 일면 좋은 점이기도 하지만 약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엄격하게 법적 관계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이는 로마사람들의 문화이니까요. 편지를 받는 쪽이 로마사람들이거든요. 동시에 히브리사람들의 히브리 문화적인 율법적 관계에서 이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율법과의 관계에 살던 사람이 이제 법적으로 그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습니다. 새로운 관계입니다. 여기서 자유함이 이루어지는데, 그 자유란 법적으로 주어지는 자유입니다. 나를 속박하던 것이, 그 관계성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것을 끊어버리는 거에요. 그런 순간에 나는 온전히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와 같이 절대로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에 속할 때에 더욱 더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과의 관계를 벗어나 이제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결혼 관계를 비유로 들어 이를 설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 결혼만큼 보편적인 것이 없거든요. 인류의 대부분이 다 결혼은 하니까요.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엄격한 결혼 문화에 삽니다. 그런데 이 결혼 문화야말로 문화인류학에서 연구해보면 저마다 조금씩 달라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문화가 옳은 줄 알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아요. 예컨대 우리는 일부 일처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일부일처제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성서적이고, 문화적이고, 원칙적이고, 원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지금부터 백년 전으로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웬만큼 쓸만한 남자들이면 아내가 서넛 되는 게 보통이었어요. 우리가 존경하는 세종대왕도 다수의 후궁을 두셨어요. 지금도 아프리카나 중동같은 데에 가보면 일부다처제를 볼 수 있어요.
얼마전에 제가 중동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좀 한가한 시간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해서 이곳저곳 돌아다녔지요. 그래 가게에서 이것 살까 저것 살까 하고 좀 둘러보는데, 가게 점원이 뭘 하나 가리키면서 "이걸 사세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을 나한테 필요 없는데요"했더니 '사모님' 갖다 드리라고 합니다. 저는 대답했지요. "나이에 걸맞지 않는데요." 그랬더니 "아니, 마누라가 늙은이 뿐입니까? 젊은 마누라한테 주면 되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래 제가 돌이켜서 물어봤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아내가 몇이오?" "저요? 다섯이에요." 그래서 "그러면 서로들 싸우지 않소?"했더니 "왜 싸웁니까? 얼마나 사이가 좋은지 몰라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마지막말이 재미있어요.
"하나 가지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저보고 다섯 개 사 가지고 가라고 합디다. 보세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자기네의 문화예요. 무릇 문화라는 것은 오랫동안 익숙해온 하나의 관습입니다. 집단관습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의 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남성위주적인, 가부장적인 문화 안에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면 그 여자는 완전히 그 남자에게 매이는 것입니다. 이젠 남자에게 속하는 거예요. 완전히 예속되는 거예요. 그가 여자를 돌보든 안 돌보든 상관없어요. 만일에 그가 살아 있고, 그와 결혼관계를 맺고 있는 동안에 여자가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고 한다면 그것은 간음이에요.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에요. 아주 큰 죄입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여자를 때려죽일 정도입니다. 그만큼 큰 죄가 되는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여러분도 가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로마에 가면 폼페이라고 하는 곳이 있어요. 2천 년 전의 그 화려했던 도시가 무너지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어요. 그곳의 벽화를 죽 보다보니 그 중에 이런 그림이 하나 있어요. 여러분도 혹 그곳에 가게 되면 한번 자세히 보세요. 말을 탄 군인이 여자를 말로 밟고 지나가요. 말로 밟아 죽이는 거예요. 빛깔은 퇴색했지마는 그래도 아직은 알아 볼만해요. 저게 무슨 장면이냐고 물어보니, 그 해설이 이렇습니다. 남편이 여러 해 동안 군대에 나가 있다가 이제 돌아와 보니 아내가 딴 남자하고 결혼했어요. 그래 정조를 어겼다 해서는 말을 탄 채 아내를 밟아 죽이는 거예요. 자, 여기서 생각해보세요. 지금 남편은 멀리 가 있어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라요.
그러나 실은 살아 있어요. 살아 있는 동안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면 안돼요. 어느 때에라도 남편이 죽으면 그 때부터는 다른 사람한테 가도 돼요. 여기에는 조금도 잘못됨이 없어요. 하나 또 중요한 게 있어요.
죽었어요. 그런데 아내는 남편이 죽은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모르고 있는 동안에 다른 사람한테 가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죽었다고 하는, 관계의 청산이 있어야 아내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에요. 이젠 딴 남자와 연애를 해도, 누구를 만나도 조금도 문제될 것이 없어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됩니다. 남편은 지금 멀리 가 있는 경우, 여기서 지금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중요한 것은 저기에 남자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 입니다.
저기멀리 가 있는 남자가 죽었으면 내가 하는 행동은 딴 남자를 보아도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러나 살아 있으면 나의 그 같은 행동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묘한 얘기지요? 나의 행동은 마찬가지예요. 이러나 저러나 간에. 그런데 저기에 가 있는 남편이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에 따라서 내 행동이 아름다울 것이 될 수도 있고 죽을죄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원리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저같은 관계를 비유로 끌어들여서 본문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여자는 남편에게 결혼하면서부터 완전히 매이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듯 철저하게 매이지만 남편이 죽으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하는데,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남편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씀함입니까? 옛남편이라는 것은 먼저는 죄를 말씀함입니다. 죄가 옛남편이에요. 우리는 죄와 관련을 맺었어요. 그리고 죄와 관련을 맺어서 죄를 생산하며 살았어요. 죄에게 완전히 매여 있었어요. 그런데 그 죄가 죽어버렸어요. 죄가 죽어버리는 순간, 죄의 능력이 죽어버리는 순간, 나는 죄와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요. 죄의 그 권능,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 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에요.
율법을 '옛남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매여 있었으니까요. 율법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율법의 능력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나는 죄인이에요. 꼼짝을 못해요. 그러나 율법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면서 율법이 죽었어요. 좀더 신학적으로 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능력으로써 율법의 능력이 완전히 정지되고, 도말 되고 말았어요. 그런 순간에, 이것을 믿고 이것을 아는 순간에 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이에요.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과 이혼해 가지고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말하면 옛남편은 율법 하에 있는 인간의 자기존재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능력도 중요하지마는 나라고 하는 존재도 중요해요. 내가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어야 돼요. 그 말은 뭐냐하면 이렇습니다. 옛날의 결혼 습속으로 보면 남편이 죽을 때에 사실은 그 아내도 이미 죽은 거예요. 지금도 인도 같은 지방에서는 그런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는 더더욱 많았습니다. 남편이 죽을 때에 아내도 같이 죽였어요. 같이 묻어버렸어요. 소위 순장(殉葬)이라고 하는 습속입니다. 피라미드나 중국의 유적들을 봐도 그래요. 남편인 왕이 세상을 떠날 때에 그 많은 아내들을 다 죽여서 함께 화장을 해버렸어요. 이는 철저하게 남편한테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남편이 죽는 순간에 그 결혼관계 하의 존재로서는 아내도 완전히 죽은 거예요. 흔히 미망인(未亡人)이라 하지 않습니까?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사실상은 죽은 거예요. 이렇게 완전히 죽어야, 그 처리가 깨끗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좋은 얘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존 F. 케네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뒤로도 한참동안 화제가 된 것이 있었지요. 그 부인이 어찌했습니까? 그 당시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을 제가 봤는데 미망인이 남편의 묘 위에 결혼반지를 딱 빼서 올려놓더니 "I love you"하고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자유인입니다. 오나시스한테 갔어요. 그걸 보고 우리는 '세상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남? 그래도 일국의 국모(國母)인데, 말이 되는가'하고 비난했습니다마는 서양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마침 제가 미국에 있던 때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곳 사람들에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smart하대요. 깨끗하대요. 하긴 그렇기도 해요.
죽었는데 끊어야지 무엇 하러 사진만 쳐다보고 울고 앉아 있어요? 우리는 그런 면에서 좀 부족함이 있어요. 정을 못 끊어요. 만일에 이미 죽은 사람한테 '이렇게 내가 노상 징징 짜면서 살아야 좋겠습니까, 아니면 차라리 깨끗이 끊고 다른 데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게 낫겠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죽은 사람이 어느 쪽을 원할 것 같습니까? "어딜 가?"-그럴 것 같습니까? 어쨌든 케네디 부인은 아주 칼로 자르듯이 돌아섰어요. 그리고는 다른 사람한테 갔어요.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것 잘했다고 합니다. 늦기 전에 새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관계가 그렇습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죄와의 관계를 끊었어요. 율법과의 관계를 끊었어요. 그런데 내 마음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어요. 내 기억 속에서 끊어지지 않았어요. 내 감정 속에서 끊어지지 않았어요. 아직도 처리가 안됐어요. 아직도 율법에 매력이 있고, 아직도 죄에 이끌리고 있어요. 아직도 죄된 자기존재, sinful manner가 있어요. 이게 그대로 살아 있는 거예요. 어정쩡해 가지고, 이러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와 '결혼'할 자격이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전 사람을 깨끗이 청산하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이런 얘기가 들려옵니다. 제주도에 신혼여행간 사람들한테 종종 벌어지는 일입니다. 신랑이나 신부나 예전에 연애하던 사람이 있었겠지요. 요새는 다 개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더라도 결혼식을 했으면, 결혼식 '땡'하고 올리는 순간에는 이전 것 완전히 끊어야 되지 않겠어요? 제가 사실 결혼식날 이 말을 꼭 하고 싶은데 듣는 사람이 이상하게 들을까봐 말하지 않아요. '옛날에 애인이 있었더라도 오늘로 끝이다'-마땅히 그래야 되잖아요? 서양사람들은 그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차마 그 말을 못합니다. 결혼 주례에서 그러면 정말 무슨 일이 있는가보다 생각할까봐요. 그러나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에요. 결혼식날 '이 사람하고 사랑하겠습니다'하면 옛것은 싹 끊어야지요. 애인이 있었든 없었든, 애인이 몇이 되었든 간에 상관없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제주도 신혼여행을 가서는 남편 목욕하는데 옛애인한테 전화 걸었대요. 그걸 들켰으니 끝났지요.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제주도 가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이런 일이 종종 있다고. 이것은 아주 잘못된 일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죄와의 관계를 끊었어요. 율법과의 관계도 끊었어요. 그러나 마음속에서 이게 아직 청산되지 얹었어요. 내 영혼이 깨끗하지를 못해요. 이러면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깨끗해질 수가 없어요.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제대로 될 수가 없어요. 이래서 예수를 바로 못 믿는 거예요. 알겠습니까? 내가 완전히 죽어버려야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말씀한 얘기를 책에서 본 것입니다. 어느 날 연못의 개구리들이 한곳에 모여 노래를 하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마침 푸른 하늘에 학이 날아가는데, 부러워 죽겠거든요. 그래 개구리 한 마리가 용감하게 나서가지고 학을 보고 말했습니다. "나도 한번 하늘을 좀 날아 봤으면 정말 좋겠다. 내 평생소원이 그거야."학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래? 그러면 내가 아이디어를 낼께. 우리가 기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날을 테니 너는 그 가운데서 막대기를 딱 물고 있어라. 그러면 너도 하늘을 날게 되어 하늘 구경 할 수 있지 않겠니?" 이래가지고 개구리는 하늘에 딱 올라갔습니다. 연못 위를 빙빙 도는데 그것 참 희한하거든요. 밤낮 팔딱팔딱 뛰기만 하다가 하늘을 날아보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아주 신이 나서 좋아하고 있는데 밑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워 가지고 소리를 지릅니다. "야, 너 참 재주 있다. 어디서 그런 생각이 나왔느냐? 너는 참 복도 많고, 지혜도 많다. 누가 그런 생각을 했니?" 그러자 하늘을 날던 개구리는 "내가 했다"하고 입을 딱 벌렸어요. 그래 그만 툭 떨어졌지요.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세요. "내가 했다. 나다"-이러면 죽어요. 아직 덜 죽여서 그래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것들이 살아 있으면 안돼요. 깨끗이 청산을 해야지요. 청산하고 다시 시작을 해야지요. 어정쩡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율법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가 되고야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선명해지는 거예요.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가 되고야,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야 그리스도인된 자기정체 향유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야 그리스도인된 생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지 아니하면 완전히 살 수 없다--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서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 본문을 보면, 옛날에는 죄와 더불어 관계를 맺어서 그 정욕 속에서, 거기서 죄의 열매를 맺으며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관계를 끊고 그리스도께 속한다, 하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맺는다'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영어로 beget 또는 bor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었다'-죄와 관련되어 있는 동안에는 죄와 사망의 열매를 맺었어요. 율법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저주와 심판의 열매를 맺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오늘의 성경말씀에 중요한 요절이 있어요.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4절)"-'다른 이에게 가서' 곧 그리스도와 결혼을 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은혜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열매, 은혜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똑같은 사건이에요.
잘한 일도 있고 잘못된 일도 있어요. 여러분도 잘 아시잖아요? 어떤 사건이 여기 있어요. 그런데 사랑의 눈으로, 은혜의 눈으로 이 사건을 볼 때에는 실수한 것도 애교로 보여집니다. 잘한 것은 착한 일로 보여지는 거예요. 이렇듯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보면 그 사건을 아름답게 보게 되지요? 그러나 율법적 관계로 확 돌려놓으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면 벌써 '무엇을 바라고 또 그 짓을 하나'하게 돼요.
선한 일 하는 것도 달갑게 보이지 않아요. 나쁜 일을 하게 되면 더더욱 약해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요. '자원봉사'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은혜의 관계에서 생각하면 주는 자나 다 아름다워요. 자원봉사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이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자원봉사도 은혜로운 사람이 볼 때에는 '참 수고하는구나. 좋은 일 하는구나. 얼마나 귀한 일이냐? 합니다. 좀 실수해도 괜찮아요. 자원봉사로 하는 것이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 실수해도 '아름답구만'-이렇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적 관계의 시각으로 보면 '무엇을 또 바라고 왔나?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낼 작성인가? 생색내러 왔나? 도둑질하러 왔나?' 합니다. 율법적 관계에서 '자원봉사'를 보면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나쁘게 볼 수밖에 없어요. 달가운 일로 보이지 않아요.
우리가 볼 때에 어린아이들은 전부가 실수 투성이지요. 가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말도 실수하고…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랑의 눈으로 보니까 얼마나 예뻐요? 넘어지는 것은 더 예뻐요. 실수하는 것은 더 아름답고요. 어린아이도 저가 은혜의 관계에 있음을 알기에 제가 좀 실수했다고 해서 쫓겨나리라고는 생각 안해요. 부모님은 나를 좋아한다-은혜의 관계 속에 있어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러나 율법적 관계에서 보면 이것은 실수요, 이것은 잘못이요, 이것은 저주요, 이것은 나쁜 행동이요, 이것은 악한 일이요, 하고 비판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고로 중요한 것은 내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관계성의 문제예요. 내가 지금 누구에게 속한 자냐 하는 것이에요. 그리스도께 속해서 온전히 은혜의 사람이 되고, 은혜의 시각으로 보고, 은혜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은혜의 시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계에 살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만 충실한 은혜생활을 못하고 있어요.
왜? 옛관계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어요. 아직도 보상심리에 매여 있어요. 아직도 세속에 매여 있어요. 그리고 아직도 죄의 노예가 되어 있어요. 내 마음이 아직도 그런 상태라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옛남편이 죽어야 한다, 죽은 것을 확인해야 한다, 확실하게 관계를 끊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와 새로운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야 한다, 이제는 의문(儀文)에 속한 것이 아니다, 영적이다, 은혜다, 그리스도다, 성령의 신령한 생활로 들어가야 한다, 하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남자는 일곱 번 다시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자는 사랑 받는 정도에 따라서 하루에 얼굴이 세 번 변한다.' 말 되지요? 그저 사랑 받는다 생각하면 벌써 활짝 피었다가, 사랑이 좀 식었나 싶으면 이내 시들고 맙니다. 사랑이 떠났나 싶으면 죽어 있어요. 벌써 얼굴에 나타나요. 사실이 그래요.
율법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의 관계에서 소화하고 있는 사람이 볼 때에는 이것도 아름답고 저것도 아름다워요. 모든 일에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왜요? 이것은 전부 사랑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이라고, 이런 일도 나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것이라고 믿어지는 거예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충성하고, 그리스도께 맹세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가 항상 확증하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게 바로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혼하고 결혼하라-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새 사람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관계를 깨끗이 청산하되, 죽음의 관계에서 법적으로만 죽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죽는 거예요.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의식 속에서 죽어야 돼요.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돼요. 그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옛날에 내가 좀 잘못한 게 많아요. 해서, 지금은 돌이켜 예수를 믿으면서도 '정도가 있지. 그 때에 내가 워낙 못된 짓을 많이 했으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고 하지만 그것은 용서가 안될 거야'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하나 생기면 '맞아, 그 때의 그것이 지금 갚음을 받는구나'-이렇게 자꾸 연결짓습니까? 그렇다면 관계를 아직도 끊지 못했음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느 쪽으로 돌아갑니까? 완전히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관계도 죽고, 의식도 죽고, 판단력도 죽어버려야 해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전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호세아서가 있습니다. 보면 호세아가 창녀를 데려다가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녀로서는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야말로 감지덕지지요. 창녀생활 하던 것을 데려다가 결혼했으면 결혼하는 그 날부터는 깨끗하게 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 여자가 옛버릇을 못 버려요. 다시 또 집을 나가버려요. 다른 남자와 사귑니다.
마지막에는 노예로 팔려가 버려요. 집에 있는 동안에 이 창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경에 보면 그 이름이 참 묘해요. 아이를 낳아 가지고 호세아가 그 이름을 뭐라고 지었는고 하니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 하는 뜻이에요. 호세아가 생각할 때에 좀 수상했던 모양이지요. 내심 '이게 아무래도 종자가 틀리지'하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호세아 3장에 보면 눈물겨운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여자를 다시 찾아 오라. 팔려갔으니까 돈주고 사와라'하셔요. 그래 이 더러운 여자를, 그것도 팔려간 것을 도로 사다놓고, 그 다음에 호세아가 말씀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이제부터는 너는 나만 사랑해다오. 나도 너만 사랑할 테니'-기막히지요? 나도 너만 사랑할 테니까 이제부터는 다시는 다른 남자와 연애하지 말고 나만 사랑해다오-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과거가 만신창이였더라도 상관없어요. 오늘 이 시점부터 과거와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는 거예요. 옛사람은 죽었어요.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관계로 다시 결혼을 하는 거예요. 이런 관계를 원함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의 생활이라는 것은 새로운 관계의 생활입니다.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행복관--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랑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와 연합된 관계에서 의와 화평과 진리와 은혜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곽선희 목사 새벽설교 (0) | 2022.12.02 |
---|---|
생의 두 원리(롬8:18~39) (0) | 2022.12.02 |
인간 실존(롬7:14 ~ 25) (0) | 2022.12.02 |
바울의 선교관(롬15:22~33) (0) | 2022.12.02 |
복음 전파의 책임(롬10:16~21) (0) | 2022.1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