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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마태복음 4 : 18 - 22)

by 【고동엽】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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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낚는 어부(마태복음 4 : 18 - 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쫓으리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리라.

 

앞서 예수님의 비유 강해 상권은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이야기와 같이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것들입니다. 대개는 예수님의 비유를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긴 이야기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극히 짧은 문장, 아니면 한 단어로 된 것도 비유는 비유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짧게, 혹은 간단하게, 함축성 있게 설명된 비유들을 찾아가면서 계속 예수님의 비유를 강해할까 합니다.

이제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그 한 마디에 나타난 뜻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 랍비의 학원에서 택하지 아니하시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택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동시에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 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택하시지 않았을까? 학자들도 많았는데 왜 학자를 택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문의 당시에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는 사도가 되고 교회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들인데, 왜 이들 제자들을 학식이 풍부한 높은 학자들 가운데서 택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그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고 실제적인 이야기라서 미안합니다마는 교회 성장학(맥가부란 박사 저)이라는 책을 보면, 공부를 많이 한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는 통계학적인 것으로 공부를 많이 한 목사로서 교회를 부흥시킨 목사가 세계적으로 보아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몇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며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하면 왜 안 된다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께서 잘 아시다시피 공부를 많이 하면 사람이 실천력이 없어집니다. 이는 머리에 든 것이 많다 보니 생각이 복잡해서 이럴 것도 같고, 저럴 것도 같고, 이렇게 저울질만 하다가 세월이 다 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나 사업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로 보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사업가 밑의 비서 실장이나 연구 실장 정도이지 직접 사장은 못하며, 더더구나 회장은 더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에 용기가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한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를 약하게 한다는 결점도 갖게 합니다. 가능하면 공부도 많이 하고, 실천력도 있고, 의지도 강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여러 가지를 다 갖춘 사람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쩌다가 한두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지 이점이 좋으면 저점이 나쁘고 하는, 그저 그런 것이 대부분의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가만히 보면 머리가 좋으면 의지가 약하고 지구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주만 믿고 만사를 재간으로만 하려다 보니 진실이 부족할 경우가 없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 갖춘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은 공평하게 하기 위하여 각각 한 가지씩 주셨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보통 사람이야 어디 쳐다보기라도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사람이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다 갖추지 못했음을 보게 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 당시의 명문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도, 랍비의 학원에서도 택하지 않으시고 갈릴리 해변으로 가셔서 택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생활의 현장에서 택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삼기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우리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어부라고 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자연 속에서 일하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따라서 농사꾼이나 어부는 다들 겸손합니다. 왜냐 하면 이 어부는 바다에 풍랑이라도 이는 날에는 꼼짝 못하게 됩니다. 자연의 노도 앞에서는 자기의 능력이나 경험도 불가항력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부들은 미신을 많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저 신에 의지하고 싶고, 신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가장 과감한 것 같고, 가장 용기 있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이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풍랑 앞에서 자연의 위엄 앞에서 겸손합니다. 이러한 겸손! 바로 그것이 어부의 자세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들 어부들은 실천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달리 이론에 묶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론도 있기야 하겠지만 모두가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는 바로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상 9-1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사울을 택하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울은 물론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는 근거는 그의 겸손도 겸손이겠지만 그의 충성, 그의 진실함, 그의 실천력을 보시고 왕으로 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울은 아버지인 기스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하자 암나귀를 찾아 사흘 길을 헤매고 다니는 중이었습니다. 어쨌든 찾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사흘 동안이나 헤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사울은 상당히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그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몇 시간 찾아보다가 "없습니다" 하든지 아니면 하루 해를 채우고는 "아무래도 못 찾겠습니다" 하면 그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흘 길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울을 보시고, 그를 왕으로 택해 세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실천력이 있는 사람, 행동이 뒤따르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부들의 협동심입니다. 이들 어부들은 결코 혼자만의 독립된 어부가 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재주가 많고 힘이 장사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못하는 일이 이 어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노를 젓는 사람, 그물을 깁는 사람, 그물을 던지는 사람 등 필요에 따라 일을 하되 모두가 다 협력해야 합니다. 일단 한 배를 탔으면 이제는 공동 운명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서로 서로 협력함으로 목적을 달성할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협동 정신이 어부들에게는 강하다는 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다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어부들의 인내입니다. 저들의 일이란 때에 따라서는 언제까지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한 인내와 지구력이 또한 어부들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해 쓰실 때에는 바로 이런 사람을 찾아 쓰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제 어부를 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히 의역된 기록입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헬라 원문대로 하면 '알리에이스 안드로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안드로폰이라는 말은 사람에 대하여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본래는 "낚는다"는 뜻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을 잡는 어부로 번역을 하기도 이상한 까닭에 번역하는 이들이 이것을 "낚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비단 "낚는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보세요, 우선 당장 여기 본문을 보아도 모순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였는데 진작 저들은 그물을 던지고 있고 그물을 깁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낚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물을 치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잡는, 사람을 낚아내는 그런 어부, 직역대로 하면 "사람에 대한 어부", 즉 물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어부라고 하는 직업은 당시 사회에 있어서 장인(匠人)과 함께 그렇게 높은 신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코 가난한 것도 아니요, 또한 무식한 사람도 아닙니다. 아주 무식하면 어부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있어서 이 어부들이 그렇게 무식했다고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사도행전(4 : 13)에 보면 갈릴리의 어부인 이들에 대하여 불학 무식한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 하여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학문이 없다는 것으로 씌어진 헬라 원어인 '아그람마타'의 본래 뜻은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무식한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 것이나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서를 쓴 것을 보아서도 분명히 이들 어부들이 글을 모를 정도로 무식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한 눈으로 내려다볼 때에는 무식하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볼 때에는 가난하다든가 무식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사회적인 신분상으로 볼 때에는 낮은 신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갈릴리에 있어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여러 방법 중에서도 그물을 높이 둥그렇게 던지는 것이 가장 많았습니다. 물론 그물을 치기도 하겠지만 대체로 이러한 방법으로 물고기를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물고기를 잡으면서 평생을 살아 온 이 사람들을 불러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셨으면 이제는 목적과 대상만 바꾸는 것이지 그 방법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부라는 것입니다. 방법은 꼭 같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나 사람을 잡는 것이나, 물고기를 낚는 것이나 사람을 낚는 것이나 꼭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낚시질을 하던 사람을 영적인 낚싯군으로,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낚던 사람을 하나의 사람을 낚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순간적으로 세상적인 것을 잡던 사람들을 영원한 가치의 것을 잡아들이는 그러한 어부들로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당시의 어부들에게는 세 가지의 주어지는 교훈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어부는 이래야 된다는 것인데 그 첫째는 물을 잘 보라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어부는 물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잘 보아야 하고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물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가를 알아야지 만약에 그것을 모른다면 물고기는 다 잡은 것이 되고 맙니다. 물을 보라! 이 물을 보는 눈을 배워야 합니다. 그 눈이 없으면 물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물을 보는 이 눈을 갖지 않고는 물고기 또한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물고기를 보라는 것입니다. 저 물 속 깊이 있는 물고기를 잘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는 멀리 보라는 것입니다. 바로 눈앞에만 볼 것이 아니라, 저 멀리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훈이 어부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것은 매우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나아가 적어도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어부가 물을 보면서 그 물 속에 뛰놀고 있는 물고기를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생명의 움직이는 방향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지? 인간들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요즈음 미국에서는 에이 아이 디 에스(AIDS, 즉 후천성 면역 결핍증이라는 이름도 긴 이 병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참으로 속수무책입니다. 이것은 천재(天災)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어떤 말까지 전해지느냐 하면 천벌을 받은 사람이니 치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주장하는 데모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더러운 사회가 천벌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텔레비전에서 보셨겠지만, 사람의 피부에 곰팡이가 쓸고 마구 썩어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속수무책입니다. 100% 다 죽는답니다.

지금 60%가 죽었고 나머지 40%도 죽어가고 있는 중이랍니다. 걸렸다하면 속절없이 죽어만 가는 이것이 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물고기를 보아야 합니다.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가? 이 세대가 도대체 어디로 흐르고 있는가? 그것도 볼 줄 알아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움직이는 방향! 물고기의 생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적어도 어부가 되려면 물고기의 생리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물고기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경우에는 어떤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번은 동해안에서 오징어 잡이하는 배를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제가 옆에서 지켜보면서 "세상에 미련한 놈이 오징어구나"하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오징어 잡이라면 그래도 낚시질 정도는 해서 잡는 것이려니 했으나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밤에 바다를 향하여 집어 등을 환하게 켜 놓으면 여기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는 떼거리로 가득 모여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 저기서 물레를 감듯이 마구 잡아채면 되는데, 이 오징어들이 그저 아무데서나 마구 걸려나오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생긴 것도 미련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도 미련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도 무엇이라도 하나 따먹고 잡혀야지 그냥 멍청하게 모였다가 긁어모으듯 잡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부들은 고기의 생리를 연구합니다. 어떤 물고기는 무엇을 좋아하나? 어떤 소리를 좋아하나? 요즈음은 심지어 미끼가 아닌 소리로 잡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정한 전파로 소리를 내게 하여 그 소리를 듣고 물고기가 모여들면 그 때에 잡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물고기의 생리를 잘 연구하여야 된다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전도를 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성향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남편을 전도하고자 하면서도 20년을 같이 살면서 아직도 전도하지 못하는 분이 있는데 그것은 조금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래도 이상한 사람입니다. 적어도 그 정도로 함께 살았다면 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남자란 목소리만 클 뿐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랍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 앞에서 4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좀 살살 꾀어서 교회에까지 데리고 나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종래 못하고서 어떤 때는 매까지 맞고 다닐 정도이니 문제가 크지요제발 공부 좀 하세요. 공부해야 합니다. 물고기를 공부하여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슨 말을 하면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하면 서비스(Service)가 좋고 하는 것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꼭 싫어하는 일만 하고 다니는 것은 무슨 생리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고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제 전도를 하려면 저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끼를 두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일단은 저가 좋아하는 일을 하여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먼저 맛있는 것을 주어 즐겁게 한 다음이라야 물고기를 잡을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 또 하나의 비결은 결정적인 시기를 포착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낚시질을 할 때에도 물듯 말듯 한 것을 조바심에 그만 제대로 물지 않은 것을 채면 안됩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물은 다음에 늦어져서도 되지 않습니다. 물자마자 딱 낚아채야 하는 이 결정적인 시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저희 교회 여전도회원들이 봉사하는 일 중에 특별히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안내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 지방에서 오시는 분들이기에 구경하려고 왔지만 무엇이 무엇인지 내용도, 구조도 모를 뿐 아니라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는 지도 알지를 못합니다. 게다가 모처럼의 나들이에 굽 높은 구두까지 신고 왔으니 장시간 걸어다니다 보면 발은 다 부르트고 말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우선 편안한 신발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운동화를 빌려주는 것을 비롯해서 몇 시간 동안에 보아야 하는가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구경거리를 선택해 주며, 전화를 걸어 주고, 화장실을 안내하는 등 할 수 있는 친절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돈 한 푼 안 드는 봉사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친절을 베풀며 안내를 하고 나면 구경을 끝내고 돌아갈 즈음에는 그렇게들 고마워한답니다. 그래서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발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때에 가서 한 마디 하면서 "우리 구경 잘했으니 여기 좀 앉으세요"하고 앉힌 다음에 "우리 다 같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하고 몇 마디로 짧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끝에 가서는 "예수쟁이구먼"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와서 별 도리가 없지 없습니까?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 동안에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결정적인 시기를 잡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도를 하려면 결정적인 시기를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소리를 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분이 고독해 할 때, 병들어 고통스러울 때 위로해 주며, 혹 기쁜 일을 당했을 때 함께 기뻐하며 축하해 주는 거기에 만남이 있습니다. 어부와 마찬가지로 이 결정적인 시기를 바로 포착할 수 있어야 전도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끝까지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 한 마리를 못 잡았어도 숨을 죽이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태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낚시질이라는 것은 인내를 배우는 작업입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낚시질을 하실 만큼 낚시질을 좋아하시고 건강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면 빈 바구니로 들어오셔서는 할머님께 구박을 받기도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이것은 철학이다. 이것은 도를 닦는 것이지 반드시 물고기를 잡아야 하나? 너의 할머니는 그것을 모른다"며 서운해하십니다.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성급한 사람은 낚시질을 좀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고요히 앉아서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한 마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전도하려면 인내하여야 합니다. 10년이든, 20년이든 끝까지 인내하여야 합니다. 구원의 낚시에 걸려들 때까지 꾸준히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한번 예수 믿으라고 권해 보았다가 안 된다고 하여 그만두라는 식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생명! 이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주인에게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물질을 하고 물고기를 잡아들이는데 있어서도 그 전체를 주관하는 선장이 있습니다. 이 선장의 명에 따라 그물을 이쪽에 던져라 하면 이쪽에, 저쪽으로 던져라 하면 저쪽으로, 잡아당겨라 하면 잡아당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저도 그런 것을 몇 번 보았습니다만 한 40여 명이 양쪽으로 나뉘어 그물을 끄는데 맨 가운데 한 사람이 앉아서는 "이쪽에는 좀 빨리 끌어, 저쪽엔 좀 천천히 끌어"하고 한 마디씩 던지면 여기에 절대 순종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람의 말을 어기면 물고기는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때에만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러시면 그 쪽으로 던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 여러 말 할 것이 없어요. 이제는 끌어올려라 하면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절대 순종! 그것이 충실한 어부의 자세입니다.

또한 어부는 협력하여야 합니다. 모두가 기능적으로 협력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은 노를 젓고, 그물을 던지는 사람은 그물을 던지며, 낚시질을 하는 사람을 낚시질을 하고, 잡은 물고기를 고르는 사람은 물고기를 고르는 등 전부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어부라고 하여 모두가 낚시질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서로가 여러모로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의 처지로 말하자면 기관장도 있고 막일꾼도 있어서 보다 더 세부적으로 협력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가 다 본 교회를 위해 협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모아들이고 말씀은 목사님이 전하시며, 또한 장로님이 할 일이 따로 있고, 권사님이 할 일이 따로 있으며, 집사님이 할 일, 평신도가 할 일이 각각 다르게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기능적으로 우리 각자가 할 일이 따로 있어요. 따라서 그에 맞도록 다같이 도우며 협력해 나갈 때에 이 전도 사업은 완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결론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되게 하리라"는 말의 헬라 원어는 '포이헤소'란 말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것을 이것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사람을 낚는 어부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이미 가진 바의 소질, 이미 주신 경험, 이미 주신 달란트, 이미 주신 재산, 건강 등 이 모든 것을 쓰십니다.

저들이 어부이기 때문에 어부가 되리라 하신 것이지 만일에 장사꾼이었더라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동안은 네가 돈을 버는 장사꾼이었지만 이제부터는 사람을 버는 장사꾼이 되리라"고 하셨을 것만 같습니다. 또한 이 사람이 의사였다면 "너는 이제까지 육체의 병만을 고쳤지만 이제부터는 영혼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리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어부였기 때문에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직업도 있고, 내가 가진 소질도 있고, 내가 받은 달란트도 있어요. 하나님은 그것을 고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생이라면 선생으로, 법관이라면 법관으로, 농삿군은 농사짓는 것으로, 가정부는 가정부로서 있는 처지 그대로를 두고 방법은 여전한 가운데 사람을 낚는 그 일에 종사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리라!" 주님이 친히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고로 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다만 주만 따르면 만드시는 것은 주께서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주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부르시던 장면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명상하고 있는 시간이 아닙니다.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는 시간도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거나 어느 회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도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같이 예수님께서는 생활 현장에서 그 전부를 부르셨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중에 있었고 그물을 깁는 사람들을 향해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또한 마태 같은 사람은 세관에 앉아 세리의 일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 저를 보시고 "나를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전적으로 주님께서 주도하심으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나는 배운 바도 없습니다, 가진 바도 없습니다 하며 이유를 댈 것도 없습니다. 어부를 어부 되게 하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다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오늘 우리는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사람을 얻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간에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케 하는 일에 종사한다는 그런 목적을 두고 우리 각자의 직업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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