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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낮설교(4,300편)〓/곽선희 목사

주여 뉘시오니이까? (행 9:1-9)

by 고동엽.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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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뉘시오니이까? (행 9:1-9)

 

오늘 아침에는 먼저 군생활의 단면을 소개할까 합니다. 전쟁상황에서 말입니다. 전쟁터에 나
가있는 군인들은 언제나 민감합니다. 실전 상황에서 보초를 서고 있다고 하는 것, 대단히 불
안합니다. 하룻밤이 천년처럼 길게 느껴집니다. 밤중에 보초를 서고 있을 때 말입니다. 어두
움 속에 어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온정신이 그리로 기웁니다. 그리고 사람이 나타나면 "누
구야?"하고 총을 들이대고 소리를 지르게 되어있습니다. 그건 자연한 반사작용입니다. "누구
냐?" 다시 말하면 자기 정체를 밝히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
다. "암호"그럽니다. 상대방에서 그날 밤에 정해진 정확한 암호를 대지 못하면 가차없이 총
으로 쏴 버립니다. 그가 누구냐 하는 것이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누구냐를 밝혀야 됩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과 그리고 암호를 통해서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있다는 것을 밝혀야 됩니
다. 이것이 아니면 그대로 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전쟁상황에 있는 아주 쉽게 있어지는
현실이요 또한 그대로가 사실이었습니다. 또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체의식
과 사명의식이 분명치 않다면 전쟁 상황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올시다. 살아있어야
할 가치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무엇을 위하여 여기 존재하느냐?' 그것을 확실하
게 알고 또 말해야 합니다. 입을 다물면 그대로 쏴 버립니다. 사람 하나가 변화된다고 하는
것, 참 힘듭니다. 여러분 많은 세월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도 그렇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한
번 보세요. 사람 하나 달라진다는 것, 얼마나 어렵습니까? 공부를 많이 하면 달라질까? 천만
에요. 공부하는 것과 사람 달라지는 것은 상관없어요. 많은 경험을 하면 달라질까?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고 병도 걸리고 이런 일 있으면 사람이 달라지겠는가? 그것도 아니더라구요.
그 많은 세월, 실패하고 반복하면서도 사람 달라지지 않더만요. 많은 깨달음이 있으면 좋을
까? 아니면 굳게 결심하면 될까? 어떤 사람은 다시는 도박을 안하겠다고 손가락을 자르고
도 또 하더라구요. 사람의 결심이라는 게 그게 작심사흘이에요. 별개 아니에요.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내 스스로 결심을 해보는데 됩니까? 글쎄 며칠이나 결심대로 살아갈 수 있읍디
까? 사람, 달라지기 어렵습니다. 역사에 보면 바울이라는 사람 하나가 180도 확 돌아갔습니
다. 한 사람이 변했습니다. 그 한사람의 변화로 인하여 세상이 변했습니다. 역사가 바뀌었습
니다.
심리학자 '조지 하버드 미드(George H. Mead)' 라고 하는 분은 인간이 자아를 형성해 나아
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그니피컨트 아더스(Significant Others)'라고 말하고 있습
니다. Significant Others, 의미있는 타인이라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나 아닌 다
른 사람과의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그 만남이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자아를 형성해 간다
는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한평생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내 운명을 좌우합
니다. 자, 보세요. 부모를 만나야지 좋은 부모를 만났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또 선생
님을 잘 만나야지요. 우리 교인들로 말하면 목사님을 잘 만나야지요. 친구를 잘 만나야지요.
배우자를 잘 만나야지요. 또, 그런가하면 동업자를 잘 만나야지요. 이 만남이라고 하는 관계,
이것을 흔히 우리는 인연이라고 합니다만은 이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음을 우리는 생각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리차드 라이더(Richard Leider)' 라고 하는 분은 가방을 다시 싸라. '리팩킹 유어 백스
(Repacking Your Bags)' 라고 하는 그런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두려
워하는 것이 뭐냐하면 "자기가 현재 서있는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의미없는 생을
살았다' 라고 생각될 때, 그렇게 확인될 때,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그것을 가장 두려
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만남의 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들
을 많이 만나고 살았어요. 참으로 잘 만난 겁니까? 아니면 악연입니까? '왜 하필이면 이 사
람이냐? 왜 이런 사람을 나는 만났을까? 이 만남 때문에 나의 인생은 망가졌어요'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바로 이분 만난 것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다. 이 만남은 하늘이 내
게 주신 축복이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까?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자기 마
누라를 보고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만나고 당신이 나를 만난 것은 하늘이 준 가장 큰 복이
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랍니다. 그러면 가장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
니까? "이 웬수야" 그러는 사람이죠. '하필이면 왜 내가 너를 만났겠냐 그 시간에? 왜 그 장
소에서 내가 너를 만나가지고 이렇게 망가졌냐?'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에요. 자, 여러분 너무 직선적으로 말씀드립니다만은 너무 귀한 얘기이기에 제가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에 정문술 집사님이라고 있어요. 전 미래산업 회장이신데 이
분이 요 근자에 300억이라고 하는 재산을 카이스트에 연구비로 이렇게 기증을 했습니다. 그
래서 화제가 됐습니다. 장안에 화제예요. 300억을 과학기술원에 바쳤다. '도대체 어떤 이유
일까?' 했더니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그가 그 사업이 부진하고 연구발전이 안되어가지고 고
민하고 있을 때, 회사가 아주 어려울 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찾아가서 얘기한 것도 아닌
데,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첨단기술을 전수해 줌으로써 회사가 살아났습니다. "그 고마움,
한평생 내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인이 찾아와서 그 첨단기술을 전수해 주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나는 이 은혜를 갚고 싶었어요. 그래서 300억을 드렸다 하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
은 누구냐? 이광형이라고 하는 현재 카이스트의 교수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또 묻습니다. "
당신은 어째서 그 회사에 찾아가서 그 좋은, 훌륭한 기술을 전수해 주었습니까?" 그분은 대
답합니다. "국가가 저를 선진국 유학까지 시켜서 그래서 나로 하여금 과학기술인을 만들게
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봉사하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이 정문술 회장과 이광
형 교수의 만남, 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요, 또 은혜로 생각하고 은혜를 아는 그런
사람들의 만남의 관계로 그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찾아가서 만나는
것을 탐구적 만남이라고 하겠지만 타인이 나를 찾아와서 만나 주실 때, 이것은 은총적인 것
입니다. 인연이 아니라 이것은 은총입니다. 그걸 잊지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새사람이 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행전에만도 같은 이야기가 세번이나 기록됩니
다. 본문과 22장 6절 이하, 26장 12절 이하에 기록됩니다. 모름지기 바울은 한평생 전도하고
다닐 때 어디 가서든지 자기가 예수를 만난 이야기는 계속적으로 말했을 거라고 생각이 됩
니다.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자세히 종합해 보
면 그리스도의 역사로 나타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발견한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바울을
찾았다는 것이올시다. 창조적이고 강권적이고 일방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찾아 바울
을 만나주십니다. 특별히 가는 길을 막고 만나주십니다. 바울은 나름대로 철학도 있고 생각
도 있고 사명도 있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소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야 될 거라고, 이
것만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는 다메섹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그리고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몽땅 잡아다가 죽여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예루살렘에서 그 먼길 다메섹까지 가는 거예요. 공문을 받아가지고 체포령을 받아가지고 가
는 길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철학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왜냐
하면은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에요. '너 죽고 나 죽자'예요. 이런 사람들은 절대 용납해
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대교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 이것이 자기 사리사욕이 아닙니다. 율법을 고수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은
용납해서 안된다고 생각하고 사명을 가지고 가는 길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길을 딱 막았
어요. 큰 빛으로 막아놓고, 가는 길을 정지시키고 그리고 사울을 만나주신 것이올시다. 개인
적으로 부르십니다. 개별적으로, "사울아" 하고 부릅니다. 이름을 부릅니다. 언제 안 분이라
고 사울의 이름을 개별적으로 부르신 것이올시다. 그때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제가 이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깜짝 놀라면서 '주여, 뉘십니까?' 하고 정체 확인을 합니다. '당신 누
구요?' 난 그 바울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바울이 키가 작아서 이렇게 용기가 있는지 어떻
게 그렇게 할 수가 있어요? 그 밝은 빛 앞에서 어찌 그럴 수가 있어요? "당신 뉘십니까?"하
고 물어요. 다시 말합니다. 이 시간이 정오입니다. 뭐 계시를 받고,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
그러다가 어떤 꿈을 꾸면서 "오! 주여" 뭐 그런 얘기하고는 다릅니다 이거는요. 대낮에, 정
오에,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당신 누굽니까?' 라고 확인을 합니다.
전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마틴 루터를 생각해내곤 합니다. 연상하게 됩니다. 루터는 좀 키가
크고 눈도 큰, 그런 잘생긴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좀 겁이 많기는 하지요만은. 그가 법
과대학 다닐 때, 학생 때입니다. 여름방학을 해가지고 시골로 돌아가는 길에 걸어서 자기 친
구와 같이 가다가 비가 오면서 벼락을 쳤어요. "꽝"하고 내려치면서 자기 친구가 타죽는 거
예요. 시커멓게 타서 죽었어요. 그 무서운 장면에서 그는 그대로 꿇어 엎드리고 헛소리 기도
를 했다는 거 아닙니까?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이렇게 말했답니다. 뒤에 그가 깨닫고 얘기합니다만은 '성 안나여'라고 한 것도 무슨 소리인
지 모르겠고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뭐 이게, 도대체 정신없는 기도를 한 거죠.
자, 그런데 이에 비해서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바울이 얼마나 굉장한 분입니까? 이 밝은
빛 앞에 "사울아" 할 때 "당신 누구요"하고 물어봐요. 예수님께서 정체를 밝혔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예수는 죽은 줄만 알았어요. 예수같은 분은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죽여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예수가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제자를 핍박하고 내 교회를 핍
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네가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은 곧 나를 핍박
하는 것이다. 너는 나를 핍박하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밝
혔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누구냐 하는 것을 밝혔고 바울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것
까지 다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네가 나를 핍박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서 그는
참으로 깜짝 놀랍니다. 여기서 그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대로 쓰러질 수 밖에요. 그대로 죽
을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죽은 자와 같은 바울을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6절에 보면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네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할 것
인지를 일러줄 사람이 있느니라" 다시 말하면 또 다른 만남이 이어질 것이다. 들어가라. 그
리고 아나니아를 보내서 그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를 이제부터 어떻게 살
아야 할 것인지를 일방적으로 일러주게 됩니다. 그래서 5절에 가서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
을 하십니다. '내가 이방사람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 이방인의 사도로 내가 쓰려
고 한다, 하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데이빗 씨맨즈'라고 하는 분은 사탄이 인간에게 유혹할 때에 치명적 유혹의 방법
은 지극히 심리학적이라고 말했어요. 물질적인 게 아니죠. 환경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심
리학적이라고 . 첫째, 나는 아는 재능도 없다. 나는 아무 재능도 발견할 수가 없다. 나는 무
능하다. 그 마음이 문제라 이거예요. 이렇게 자존심을 낮추어 버려요. 자존심을 짓밟아 버리
는 거예요. Low Self-esteem, 이게 바로 사탄이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또 하나는 내게는 미
래가 없다. 꿈도 없고 미래도 없다. 또 하나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나는 아무 자신감도 없다
' 그런 마음을 일으켜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너는 아무 쓸모도 없다. 네 죄가 얼마나 많
으냐? 네가 얼마나 미련한 놈이냐? 네가 얼마나 게으른 놈이냐? 너는 하나님 앞에 아무 쓸
모가 없다. 그것이 마귀가 주는 마음이에요.
다시 돌아가서 생각합시다. 사도바울이 누굽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예수 믿
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또 잡아다 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간 발악발악하는 이
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꽉 붙들어서 이제 너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위해서 나를 위해 수고해야겠다. 그를 사용하시게 됩니다. 그를 고용하시게 됩니다. 사
도바울은 주님께 말합니다. 나는 빌립보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나는 그리스도께 포로가 되었다. 내가 살고저 하던 방향은
이게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것도 이것이 아니다. 내가 목적 삼았던 것도 이것이 아니다. 그
런데 나같은 죄인을 , 교회를 핍박한 나를 붙들어서 포로해서 주의 사람 만들었기에 나를
사로잡은,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간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으로 돌아가보면 모세란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가 80세
입니다. 바로 궁전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처갓집 양을 치면서 이리저리 배회한지가 40
년입니다. 인생으로 말하면 세상 다 살았습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 이렇게 초라하게 한평생
이 지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호렙산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
는 순간 역사의 의미가 바뀝니다. 과거의 80년이 하나하나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이
있기 위해 있었던 일이요. 그의 많은 실수도 이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 그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의미를 바꾸어 놓았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고,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를,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서 자기 정체를 알고 자기 사명을 알
고 자기의 남은 운명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찾아 만난 게 아니라 예수께서 바울을 만나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길을 막고 만나 주었습니
다.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수고해야겠
다고 . 이것이 중요한 만남이올시다.
"주여 뉘십니까?" 오늘도 우리는 질문해야겠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나와의 바
른 만남, 바른 정체의식, 그 속에 내 새로운 생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많은 시간 헛된 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
님을 만나게 하시고, 주님을 만나 확실히 아는 동안에 나의 나됨을 알게 하시고 내가 어느
시점에 있는 것도 알게 해주셔서 오늘 주님을 만나는 이것을 기점으로 해서 새로운 의미로
생을 살아가게 하시고 모든 만남에 은총적 의미를 깊이 깨닫는 귀한 시간 되게 해주시고,
그 모든 사건 속에 부르심과 사명이 있음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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