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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가항력적 사명! (행 4:13-22)

by 【고동엽】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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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항력적 사명! (행 4:13-22)

 

본문말씀은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는지, 어떤 자세로 살아갔
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시사(示唆)하고 있습니
다.
4장 8절에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산 인물들을, 믿음으로 살아온 역사적 인물들을 거론하고 나서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38절)." 믿음으로 살기에 두려운 것이 없
습니다. 맹수도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이렇듯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순교사(殉敎史)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저한 어느 신앙의 사람이 잡혀와 재판장 앞
에 섰습니다. 끝가지 예수를 믿겠노라 하는 그에게 재판장이 태형을 가합니다. 그래도 그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찬송을 부릅니다.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빙그레 웃을 뿐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파하고 괴로워하라고 때리고 협박을 하는데 오히려 더욱 좋아라
고 찬송을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재판장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아무리 때려야
소용없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매맞았다고, 핍박받았다고 더 좋아합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상이 더 크다고 좋아합니다." 그러자 재판장이 "그렇다면 아예 죽여버릴까?" 합니다. "
죽이면 예수 이름으로 순교해서 하늘나라 간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그럼, 어떡하면 좋
을까? 정배를 보낼까?" "정배를 보내면 혼자 조용히 있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되
었다고 더 좋아할 것입니다." "때려도 안되고 죽여도 안되고 정배를 보내도 안 된다…… 그
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 사람은 이렇게 충고합니다. "돈을 많이 줘서 석방시
키십시오. 저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돈이요 향락이요 타락입니다. 저들은 죄를 제일 무
서워합니다. 그밖에는 무서운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물며 베드로와 요한이겠습니까?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 순간 이 자리
에서 집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해도 상관없습니다. 매를 맞아도 죽임을 당해도 조금도 개의
치 않습니다. 성령을 입어 그만큼 담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니 그들
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말했다고 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 없이 말함을 보고
(13절)……" 여기서 '기탄 없이'는 헬라어로 '파르레시안'입니다. 똑같은 말이 29절에도 나옵
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주옵시며" - 여기 나오는 '담대히'가 헬라어로 '
파르레시아스'인데 '파르레시안'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탄 없이'와 '담대히'로
번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탄 없이' '담대히'는 둘 다 거침없고 용기가 있다는 것을 나타
내는 말입니다. 추호도 두려움이 없는 용기를 나타내는 수사(修辭)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의
지의 용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용기입니다. 신령한 용기입니다.
우리 현대인 모두가 다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이렇듯 나약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기에 대하여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
다. '용기를 낼 만한 건더기가 있어야 용기도 나오는 것이 아니냐? 지식이 있든지 돈이 있
든지 지위가 있든지 권세가 있든지 해야 용기도 나오는 것이지'하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용기가 없습니다. 돈 있는 사람은 걱정이 더 많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은 더 소심합니다. 오히려 무식한 사람이 용기가 있습니다. 무식한 용기가 있습니
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만용이지 참 용기가 아닌 것입니다.
결혼식 주례를 서다보면 신랑은 근심에 싸여 있고 신부는 울고 있는 경우를 간혹 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크게는 난감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지요. 신혼여행
다녀오고 부터 난감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은 옛날사
람에 비하여 물질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교육적으로 더 풍요합니다. 그러나 옛날사람보다
용기가 없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가졌던 용기와 담대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성령 충만에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충만이 어떻게
그들을 자극했기에, 어떻게 격동시켰기에 저러한 용기가 생긴 것입니까? 먼저, 성령 충만으
로 해서 성경 지식에 통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기 있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
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있는 예언의 말씀을 모두 통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읽
었던 성경이요 전에도 알던 성경이지만 그 뜻이 통하지 않았는데 성령을 받고 보니 바로 그
싯점부터 성경의 내용에 환히 통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예언들이 예수님에 이르러 마침내
이렇듯 성취되고 하는 것을 성경 안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성경 안에서 모든 문제의 해답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어요.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사적 경륜 안에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경륜 속에 이 사건이 있고, 내가
있고, 오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보니 용기가 생깁니다. 흔히 보면 자신을 버려진 존재처
럼, 자신이 하는 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에 비겁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작은 일이 큰 일인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음으로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
다. 얼마 전 연변에 학교를 지어놓고 가진 개학식에 참석하여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
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40여 성상이나 뿌리깊이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중국 땅에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나가 학교를 세우리라고야 어찌 상상
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오묘하신 역사 가운데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
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절로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용기가 생깁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사랑합니
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
까? 죄 없는 그분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는데 죄 많은 내가 그분을 위하여 죽는 것이 하나
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감복해서 이 생
명 아깝지 않게 내던집니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유감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
다.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
2:17)"-----피를 쏟아 부어도 기쁘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
랑함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가운데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려움 없는 사랑이란 겁 없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
이 중요합니다.
또한 의지적 결단이 있음으로 용기가 생깁니다. 주님 앞에 내 생명을 바쳤습니다.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결심을 해버렸습니다. 이미 생명을 바쳐버렸습니다. 그래놓고 남은 시간을 사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렇듯 성령께서 우리에게 신령한 지식을 주시고, 사랑
이 충만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주십니다. 이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귀한
진리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와 같이 하실 때에 기탄 없이 말하게 됩니다.
지식이 충만하게 됨으로 말을 잘합니다. 용기가 생김으로 거침없게 됩니다. 이 모두가 하나
님의 역사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거침없이 말함을 듣고 기이히 여기
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으로 알았다가(13절)……" '학문 없
다'는 헬라어 원문대로 하면 '아그람마토이'입니다. 여기서 '그람마'는 영어로 gram- mar
곧 '문법'입니다마는, 원래 헬라어 '그람마'에는 '문법'이라는 뜻이 없습니다. 단순히 '글'이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부정의 '아'가 붙은 '아그람마'는 '글이 없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
마디로 '글을 모른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일컬어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한도 글을 알았던 것 같고,
베드로도 그의 서신에서 보여지듯 그리 무식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
는 유식한 것을 볼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촌사람-----아그람마타입니다. 글도 모르는 그런
무식한 사람들이 담대히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역사
가 아닐 수 없지 않습니까?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 비교해 볼만한 성경말씀이 있
습니다. 사도행전 26장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원래 유식한 사람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
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지금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각하'앞에서 일장 연설을 합
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장황하게 설교를 합니다. 이에 베스도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
을 합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24절)." 사도 바울이 유식했기에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식하기에 학문에 미쳤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
는 그리스도께 미친 것입니다. 결코 인간적 지식의 결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
신 용기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본래 베드로는 다혈질의 사람입니다. 대개 급한 사람, 욱하는 성질의 사람이 실상은 형편
없이 약합니다. 속으로는 약합니다. 그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
이다"라고 스스로 장담해놓고는 다음날 아침에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혹시나
군인이 와서 창을 들이대고 찌를 태세로 "너 예수 알지?"하고 물었다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
이니까 모른다고 했다 하더라도 조금 동정이야 하겠지만 보십시오. 비자(여종)가 와서 "이는
갈릴리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하니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못나기는 참 못난 사람입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인만 했던가요? 맹세도 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threefold deny'----삼중부인을 했습니다. 이렇듯 비겁하던 사람이 지금은 담대히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고 있는 그 공회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바로 그 공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공회에 나와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
을 전합니다. 그야말로 성령께서 주시는 특별한 용기요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용기는 인간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또한 베드로는 변론에 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철학적
훈련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낱 갈릴리의 어부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간에는 베드로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
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어디서 이다지도 유창한 변론의 능력이 생기
는 것입니까? 이 역시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용기의 source(근원)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베드
로와 요한은 본래 무식한 사람입니다. 저렇듯 담대하게 변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본문말씀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13절)……"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 - 예수님의 제
자요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실이 용기의 근원입
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저들을 오늘
날과 같은 용기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은 참으로 엄청난 신앙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천
양(天壤)의 차이입니다. 특히 고난을 당할 때에나 죽을 때에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
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는 승리가 있습니다. 장례식에 한번 가보십시오. 예수를 믿는 사
람과 안 믿는 사람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한번 장례식을 집례하는데 거기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한 분 참석했습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지 않고 뒷전에서 머쓱히
구경만 하더니 장례식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제게 다가와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예
수 믿는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르네요." 사실 우리에게나 찬송이지 믿지 않는 사
람들이 들을 때에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참 이상하네요. 부활을 진짜로
믿는가봐요" 합니다. 그래서 "그럼요. 진짜로 믿고 있습니다"라고 확실히 말해주었습니다. 그
리고 얼마 후에 보니 그분이 교회에서 보이더라구요.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예수 믿
는 사람들은 장례식에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제가 아는 분 가운데 자신의 장례식 때에는 '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하고 찬송가 78장을 불러달라는 부탁을 해놓은 분이 있
었습니다. 멋진 사람입니다. 눈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
는……' 이런 찬송이 울려 퍼지는 장례식,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부활을 믿는 사람의 복
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부활신앙이 용기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14절)" - 병 나은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는 제사장들에게나 베드로와 요한에게나
아주 중요한 문제로 와 닿습니다. 사십 세가 넘도록 앉은뱅이였던 그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
으켰습니다. 지금 그가 제사장 앞에 건강한 몸으로 베드로와 요한과 나란히 서 있습니다. 그
가 서 있음으로 모든 박해자들이 할말을 잃게 됩니다. 힐난할 말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나
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이 나아서 눈앞에 버젓이 서 있는데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렇듯 엄연히 산 증거가 있는 데야 어떻게 힐난을 하고 핍박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편으로 돌려서 생각해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또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저라도 이런
일이 있으면 신이 나겠습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켰
습니다. 그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
에게 나타난 이적 때문이 아니요, 한 사람이 걷게 되었다고 하는 신기한 능력 때문이 아닙
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역사 하신다는 사실
이 그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예수님의 생명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나를
통하여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다고 생각합니까? 그 역사가 여기 나타났습니까? 그것을 보는 순간에 여러분은 용기의 사
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급할 것 없습니다. 낙심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지레 '아무리 생각해
도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 것 같지 않아, 내가 나를 봐도 쓸모 없으니 하나님께서 보시기
에도 쓸모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에 용기는 우러
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예수님의 생명력이 지금 내 안에 역사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이제는 무
서울 것이 없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는 참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름 없이 많은
봉사를 합니다. 헌금하는 데에, 봉사하는 데에 용기가 있고 담력이 있습니다. 쩨쩨하지 않습
니다. 이러한 용기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신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와 함께 역사 하신다는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
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요. 용기를 가질 수밖에요. 병 나은 사람이 눈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용기의 근원이 되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거침없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베드로의 용기는 근본적으로 그의 진실한 경건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하나님 앞에서' -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의식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합니다. 지난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사람 앞에 있었기에 비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의 눈총이 무서웠고, 사람의 핍박이 무서웠기 때문에 그만
예수님을 모르노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보니 이제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오
늘날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
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비겁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에 나는 진실한 용
기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있다는 확실한 자아의식을 가
지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말씀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박해를 당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핍박
을 통하여 예수 믿는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불
과 수일 전의 일입니다. 바야흐로 핍박이 극에 달하여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
합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기독교가 서른 번 이상이나 박해에 부딪히고 있다는 것
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핍박은 언제나 있습니다. 복음은 핍박과 함께 전해집니다.
이상하게도 핍박이 많은 곳에 복음은 훌륭하게 활발하게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
회의 생명력도 핍박 가운데에 있습니다. 편안하기만 하면 교회는 약해집니다. 핍박 가운데에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요, 이천 년 기독교사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보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를 핍박합니다. 말레이시아만 하더라도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파키스탄, 터키에서도 기독교의 복음을 전할 수 없
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그렇습니다. 기독교서적의 판매도 금하고 있습니다. 알바니아
에서도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렇듯 기독교를 금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는지 모릅니다. 한번 예수 믿었다가 온 가족이 공동체에서 쫓겨나고 직장에
서 쫓겨나는 등 얼마나 어려운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공산주의 사회
는 물론 중동이라든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 20절 말씀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20절)."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역사 하심으로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고 가
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 충만한 사람은 결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봉사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몸을 바쳐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는 그런
강박관념이 있어야 합니다. 일년이 다 가도록 누구한테 전도한번 안하고도 편안하다면 죽은
영혼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이 전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안하고는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런 불붙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불가
항력적 사명입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조용히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능동적 용기가 나타납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어떤 핍박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나, 어떤 핍박 가운데서나 줄기차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1950년 중국에서 교회를 폐쇄할 때에 조사
한 통계에 따르면 그 당시 기독교인이 3백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2년에 다시 통
계를 내보니 줄어야 할 기독교인이 6천만 명으로 늘어나 있더랍니다. 이것은 그 많은 핍박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꾸준히 전파되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예수 믿는 많은 사람이 핍박
으로 순교하고 정배가고 숱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복음은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여기서 '옳은가'라는 말은 '선이냐 악이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라고 하는 이 말은 의냐 불의
냐, 어느 쪽이 의로우냐를 묻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옳으냐를 묻는 말
입니다. 사람을 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옳습
니다. 눈치를 봐도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치를 볼 것이 아닙니다. 그리
고 우리는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를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곧 의로운 일입니다.
지금 공회의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
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21절)"-----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은 베드로가 옳은 줄 알면서도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줄 알면서도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 막을 길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막으려고
합니다. 핍박해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도 핍박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려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자기들의 지위가 다 무너지는 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회개하지 못하고 베드로를 핍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저들이 진정 예수를 믿었다면 더욱 존경받는 귀한 인물들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로 말미암아 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회개로
말미암아 내 모든 것이 세워집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신령한 용
기를, 강권적 사명의식을 바로 깨닫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과 함께하여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통하여 큰 역
사를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다물어서도 안되고, 행동을 중단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처지, 형편, 지위, 지식…… 모든 것을 동원하시어 오늘도 크고 놀라
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역사적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없는, 세상이 감
당하지 못하는 용기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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