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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문 비유(요한복음 10 : 1 - 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무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문으로 드나드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후로는 문으로 드나들 때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우리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다 새롭게 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배경에는 아름다운초원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장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가 유목민이어서 양과 목자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잘 아는 보편적이 생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이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생각할 것은 1절 말씀에 기록된 "진실로 진실로"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마는 헬라 원문대로는 "아멘 아멘"하는 말로서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강한 의미 전달을 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의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만 스물 다섯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주의를 집중시키는 말로서 이야기 중에서도 꼭 알아 들어야 할 내용을 두고 쓰여진 말입니다. 성경을 보면 마음에 잘 새겨두라는 뜻으로 쓰여진 말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진실로 진실로"하는 말과 '종말로'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목장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면 저 만큼 푸른 초원이 있고 그리고 양의 우리가 한곳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초원과 양의 우리 사이에는 문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루 종일 초원에 나가 풀을 뜯던 양들은 저녁이 되면 우리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어두움 자체가 무섭기도 하지만 사나운 짐승들이나와서 양들을 해치기 때문에 양들도 그것을 알고는 해가 뉘엿 뉘엿 해지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들 모여드는 것입니다. 저들이 밖에서 풀을 뜯을 때에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만 일단 해가 지기 시작하고 무서움이 느껴져 오면 이제는 목자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 한 마리만을 몰고 앞서 가면 나머지 양들은 그대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까이에 이르면 저절로 한 마리씩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여 밤을 지낸 양들은 새벽이 되면 이제는 빨리 나가고 싶어서 우리 안을 맴돌다가 목자가 문을 열어 주면 좋아라고 뛰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저녁이 되면 다시 우리로 돌아오고, 그리고 아침이 되면 또 나가는 이런 생활이 양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훈련이면서도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여기에는 양과 목자와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와 우리 밖, 다시 말하면 우리와 초원이나 들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을 경계로 하여 문에서만 나오면 넓은 초원으로 향하게 되고 문안으로 들어가면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이라고 하는 것에서 두 가지의 기능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를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보호하는 기능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있으면 이제는 이리나 사자 같은 맹수가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요즈음 우리네 집들에도 보면 자물쇠를 둘 셋씩 잠그고는 하는데 잠근다는 것, 그리고 문안에 있다는 것은 안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거기에 보호와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문을 열고 나감으로 꼴을 뜯는 배부름과 자유함이 있게 됩니다. 이에 9절 말씀을 보면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라고 하였는데 이 구원이란 본래 위험으로부터 보호함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죄와 사망, 그리고 사탄과 모든 유혹으로부터 보호함을 받는다는 뜻에서 "내가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번 문을 열어 주면 자유롭게 뛰어나가 넉넉한 꼴을 먹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문에는 두 가지의 기능 즉 보호하는 기능이 있음과 동시에 성장케 하는 양식을 공급받게 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가정에 있어서의 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면 열었던 문을 다시 잠그고 집안에 들어서면 안전함과 동시에 자유함이 있어서 옷을 입거나 벗어도 상관할 바가 없는 평안한 분위기 속에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고 튼튼한 집이라 하더라도 문을 잠그지 않고 있다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이 결정적인 보호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똑 같은 문임에도 보호함도 아니요 자유함도 아닌 오직 속박만을 느끼게 하는 감옥문이 있습니다. 그 집에 사는 것을 기뻐하는 자에게는 위로와 평안과 구원의 문이 되지만 그 집을 통해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자에게는 감옥이요 감옥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때 이 문에는 구원함의 보호와 자유의 뜻이 있는 반면에 심판의 뜻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히브리 원문을 살펴보면 두 가지 종류의 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열고 닫는 문짝이 달려있는 문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통로로서 굴처럼 뚫려있는 페타트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델게트라고 표현되는 문으로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념의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통로의 의미에서 쓰여지는 문과 차단의 의미에서 쓰여지는 문이 각각 다른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쓰여진 "문"에는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쉽게 우리의 기억에서 되살릴 수 있는 대표적인 문 몇 가지를 생각해봅니다. 그 하나가 야곱이 형의 손길을 피하여 하란으로 향하는 길에 고백하는 "하늘의문"(창 28:7)입니다. 이것은 꿈에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 야곱이 생각하는 "하늘로 통하는 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의 문은 예수님께서 열 처녀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간 동안에 신랑이 옴으로 신랑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만 들어가고 문이 닫힘으로 뒤늦게 기름을 준비하고 돌아온 다섯 처녀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리며 애원을 해도 문은 다시 열려지지 않았다는 그 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은 지혜로운 다섯 처녀에게는 열려진 문이 되 미련한 다섯 처녀에게는 닫혀진 문입니다. 똑같은 문인데 한 사람에게는 열렸고 한 사람에게는 닫혔으며 열린 자에게는 영광과 축복이 있었고 닫힌 자에게는 슬피 울며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는 종말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문은 그대로 천국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은 내가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 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극적이면서도 참으로 심각한 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노아 방주의 문입니다. 사람들의 행위가 악함을 보시고 홍수로 멸하실 것을 예고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홍수의 날을 이르게 하실 때 순종의 사람 노아의 가족과 명하신 대로의 동물들이 방주로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방주의 문을 닫으셨던 것입니다. 그때 그 방주의문을 닫으신 하나님께서 하늘 문도 열고 닫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이라시며 나를 아는 자에게는 내가 문을 열어주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이요 고마운 말씀입니까? 내가 문이다! 나를 통해서 너희들이 하늘나라로 들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가야한다고 생각할 때 지혜로운 다섯 처녀에게 열렸던 것처럼 천국 문이 열린다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마는 그러나 우리 앞에 놓인 문이 열리지 않는 다면 그것처럼 괴롭고 비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내가 문이라시며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양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가 되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하늘 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계 4:1) 특별한 계시는 물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인 지혜도 하늘 문이 열릴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양의 문이라는 이 말씀을 두고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가 구원으로 통하는 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이란 이런 문 저런 문이 여기도 있고 저기에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마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의 "내가 문이다"라는 말은 구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문 하나 밖에 없는 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는 대개 하나의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은 좁고 협착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14) 한 마리씩 들어가고 한 마리씩 나오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이 생명으로 통하는 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은 하나의 가능성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되시고 문이 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이르는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문이란 집안으로 들어가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문이 닫히고서는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문에는 절대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문을 통해서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생각하는 "내가 양의 문"이라는 말은 여기에 들어서면 이제부터는 안전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아무리 쫓기다가도 문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다른 세계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날 밖에서 떨다가도 문 하나 열고 집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벌써 따뜻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문 하나를 두고 안과 밖이 전혀 다른 세계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철학적으로도 그런 것이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합리적이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성경을 읽으면 모든 것이 은혜 스럽고 쉽게 이해가 되지만 그리스도 밖에서 신앙 없이 성경을 보려고 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되어 문이 닫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안에 들어선다는 것은 새로운 소망과 은혜의 새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때로는 이 문안이 조금 불편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밖 세계에 비해서 협소하기 때문인데 그래도 참고 기다려야함은 원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생각하는 것은 이 문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문이라고 해서 아무에게나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격이 따로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절도나 강도에게는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또한 이리나 사자에게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양에게만 열어 주는 문! 이것이 바로 양의 문입니다. 양 외에 어느 누구도 이문으로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문은 도둑이나 맹수에게는 닫히는 문이었고 양들에게는 열리는 문이었습니다. 미국 텍사스의 돈 많은 한 부자가 세계 여행을 하는 중에 영국을 가게 되어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국왕이 거처하는 버킹검 궁전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불짜리 지폐를 한장 꺼내어 문지기에게 주면서 나를 좀 들어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문지기가 하는 말이 "천불아니라 만불이라도 안됩니다. 다만 여왕이 초청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왕실은 왕이 초청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돈이 많다고 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자격은 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이 누구에게나 열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의 양에게만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문이라는 것은 참으로 철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즈음에는 문에다 초인종에 자물쇠를 둘 셋 만들어 달고 게다가 밖으로만 보이는 구멍을 만들어 땡강하고 소리가 나면 먼저 구멍으로 내다본 다음에 누구요 하고는 확인을 한 다음에 열어줍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집을 맡기고 나갈 때에는 아예 누구가 와도 열어 주지 말라는 다짐을 하고는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문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람에게만 열어 주시는 철저함과 까다로움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문에도 정당하게 들어가야 하는 코-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당당한 신분이라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정당하게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문에 맞는 열쇠로 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문은 그 문의 열쇠로 열 수 있는 것이지 열쇠가 많다고 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열쇠는 주인이 기뻐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의 어느 가정의 초대를 받아 하룻밤을 함께 지낸 후 열쇠를 써도 좋다는 대접을 받아 본적이 있습니다.
간혹 영화 같은 데서도 볼 수 있듯이 벽돌 하나를 빼내어 열쇠를 감추는 것을 보여주면서 여기에 열쇠가 있으니 당신이 먼저 오거든 이 열쇠로 열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냉장고와 부엌도 마음대로 쓰면서 당신 집 같이 지내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집에 출입하는 자격을 완전히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양의 문이요 천국으로 통하는 문이다! 이 문으로만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목 생활을 자세히 보시면서 이 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것은 먼저 내가 그리스도의 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주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 천국으로 통하는 열쇠를 내 손에 쥐고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기차를 탈 때에 보면 특별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1등 대합실이나 2등 대합실, 다시 말하면 좌석표가 있는 표를 가진 손님들이 드나드는 대합실이나 개찰구는 서두르지도 않고 조용하며 손님들도 점잖아 보입니다. 그러나 좌석표가 없는 완행열차 대합실은 개찰원이 나오기 전부터 밀치고 부딪히며 야단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서 앉을 자리가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니 불안하고, 불안하고 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서두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통하는 문에 대한 확실한 자격증, 그 열쇠를 꼭 쥐고 사는 사람은 아무 때에, 무슨 일을 만나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열쇠가 시원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내가 가진 열쇠가 천국문에 맞을 것 같지도 않고 열릴 것 같지도 않아 계속 자신이 없습니다. 흔히 많이 듣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이대로 죽어서는 자신이 서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자니 불안하고 마음에는 여유가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앞에 있는 열려야 할 문이 열려있지 않은데 어떻게 내 현실이 평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문이 항상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내게로 오라시며 거듭 거듭 초청을 하십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이 닫혔다는 비유의 말씀도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언젠가는이 문이 닫혀집니다. 그런 후에는 그 누구에게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의미에서 좁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말했듯이 시간적으로 닫힐 때가 있어서 한번 닫히고 나면 다시 열 수가 없다는 뜻에서입니다.
문이 열렸을 때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고 하십니다. 이는 내가 먼저 주님을 향하여 마음 문을 열 때에 주님께서 내게로 들어오시고 그런 후에 내가 다시 주님께로 갈 때에 주님께서 나를 위해 문을 열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문을 닫는다면 주님께서도 나를 위한 문을 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오묘한 뜻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자기 양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이 문으로 드나들며 꼴을 먹다가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이 문이 환히 열리는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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