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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 술은 새 부대에(마가복음 2장 18절~22절)

by 【고동엽】 2022.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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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마가복음 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 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공부할 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귀중한 교훈이며 상징적이자 비유적인 격언입니다. '포도주'도 비유요 '부대'도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잠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는 그 사건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미흡한 사람에게는 의문을 던졌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그 엄청난 사역을 보면 도저히 그가 촌구석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분이 아닌 것 같았고, 한촌(寒村) 나사렛에서 목수 일이나 하며 자라실 분이 아닌 것 같았고, 예루살렘 언저리도 아닌, 마치 유대의 서자(庶子)쯤으로 취급당하는 변두리 갈릴리 지방에서나 역사 하실 분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귀족 신분으로나 왕족 신분쯤으로 나시고 그런 위의(威儀)를 가지고 도성 예루살렘쯤에서 목청 높게 역사 하심이 마땅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에닐흔쯤 되시는 노련한 랍비인 것도 아니라 겨우 서른 살 젊은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시고 자라시고 사시는 모습에서 '의외(意外)'라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누구라 없이 나이 겨우 서른에 나타나 무슨 대 역사를 한다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에 비유해서 예를 든다는 것이 퍽 외람된 것 같습니다마는, 제가 스물일곱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 나이 많으신 원로 목사님과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저를 부르는 호칭에서 아예 '곽목사'는 간데온데없고 성()을 빼버린 '젊은 목사'로 불리었습니다. 여기까지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기 목사'라고, '병아리 목사'라고 스스럼도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빨리 늙어야지 못쓰겠다'했는데, 어느덧 이렇게 늙었습니다. 젊다는 것이 그토록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서른세 살 때에 겪은 일 한 가지는 지금도 선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로는 서울에서 제일 큰 교회였던 영락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한 경직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그 부흥회를 한번 인도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 때의 부흥회는 참 길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겨우 서른 셋'인 저보고 부탁을 하시기에 "한 목사님 계신 교회에 제가 감히 어찌 가겠습니까? 저는 나이가 어려서 안되겠습니다."하고 사양했더니 한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세 살에 끝을 내셨는데……" 저는 할말을 잃고 하릴없이 영락교회에 갔고, 집회를 인도했던 것입니다.

서른 살, 갈릴리 촌사람, 목수의 아들이자 자신도 목수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는 이런 분인데, 지금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요 권세 있는 역사입니다. 귀신을 쫓는가 하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십니다. 율법을 해석하는가 하면 전하는 메세지가 정말 권세 있는 자의 메시지입니다. 아주 권능 있는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하시는 역사나 말씀을 보아서는 그야말로 이것은 새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와 같이 신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과거라든가 생애라든가, 이런 것을 생각하니 그를 영접하기가 힘들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듣는 자와 그의 추종자가 또한 문제입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따르는 것만도 문제가 되는데, 예수님 스스로 하시는 말씀이 또 설상가상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에 대하여 '너희는 나와 상관이 없다, 버림받은 저 사람들, 소외당한 저 사람들, 저 업신여김 받고, 죄인취급 받는, 죄가 있건 없건 죄인취급 받는 저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왔다' --이러시니 더 충격적입니다. 북한에서 하는 소리로는 '접수하기 힘든'일입니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전부가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중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볼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 잘믿는 사람으로 어떤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까? 많이 우는 사람입니까 많이 웃는 사람입니까? 대체로 종교인이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초라한 인상으로 와 닿기가 보통입니다. 옷도 남보다 꾀죄죄하고 행동거지도 좀스럽소, 은둔적이고, 사람들 앞에 떠벌리지 않고, 나타나지 않고, 산에 가서 기도도 좀 많이 하고, 금식도 잘하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표정도 심각하고 많이 우는 사람이 종교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칫집에다 비유하십니다. 실제로 예수 잘 믿는 것은 많이 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웃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웃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한다 금식한다, 아무리 법석을 떨어도 잘못 믿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많이 웃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구제하는 셈이 됩니다. 일단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는 않거든요. 속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웃고 다닌다면 문제가 없는데, 마치 세상걱정 혼자 다 하는 듯이 심각한 낯을 하고 다니면 남들이 '저 사람 어디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하고 걱정을 하게 만듭니다. 은근히 남을 어둡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유와 희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당시의 종교인들이 가진 종교적 개념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율법해석 하시는 것을 보아도, 분명히 낡은 율법인데도 새로운 해석으로 신선하게 하십니다. 지엽적이거나 변두리만 빙빙 돌다 마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게 근본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헤아려서 전하시되 창조적으로 해석하시고 독특하게 권위 있는 해석을 하십니다. 제아무리 잘났다 하는 종교인이라도 말문이 막히게 하십니다. 이게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교훈의 특징인즉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살고 계심입니다. 그 속에서 살고 계심입니다. 바리새인은 말만 하지 행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생활 자체가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물며 디모데같은 사람도 요샛말로 찜찜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꼭 따라야 될 것 같은데, 따르자니 예수님의 과거나 신분이 마음에 걸리고 안 따르자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고 해서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이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어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 중에 어떤 충격이 있었나 보십시다. 본문의 문제를 보면 먼저 금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하는 것이니라."

유대사람들에게는 금식을 하는 종교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종교 의식이라 하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금식하는 분들이 있기는 있지만 필수적 절대적인 종교 의식은 아닙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말고 싶은 사람은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종교 의식은 아닌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금식은 강제성이 있었습니다. 일년에 하루, 이른바 '속죄일'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합니다. 온 백성의 죄, 일년 동안 쌓인 온 백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날입니다. 여기서 빠지는 사람은 회개에서 제외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하루만은 회개하고 자복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다 금식을 합니다. 금식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 전적으로 집행되고 있으니까 먹고 마실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의 금식에도 자원성도 있습니다. 특별히 잘 믿는다는 사람의 경우, 자원하여 금식하는 것입니다. 요새도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나는 잘 믿겠다, 좀더 잘 믿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자원하여 금식을 하는데, 이를테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한마디로 종교생활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합니다. 금식을 하되, 하루종일 굶는 것은 물론이요 물도 마시면 안됩니다. 물 냄새도 맡아도 안됩니다. 요새의 금식을 보면 물은 마셔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원래의 정통적인 금식은 물도 마시면 안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금식입니다. 요새는 흔히들 금식을 하루 했다거나 열흘 했다거나 사십 일 했다거나 하고, 오래 하는 것이 능사인줄 아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얼마나 오래 하느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일주일에 두 번 한다는 것은 이틀을 금식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틀인고 하니 새벽 6시에 식사하고 저녁 6시에 식사하니까 이틀이 됩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한 끼 굶은 것이 이틀 금식이 됩니다. 점심 한 끼 굶는 것입니다. 저들은 12시간 금식이 곧 하루 금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수천 년 동안 지켜오는 전통적 금식법입니다. 하루 금식이라 하면 낮 금식을 의미합니다.

해뜰 때부터 시작하여 해질 때까지이니 열두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정말로 물 한방울 안 마시고 밥 한술 뜨지 않은 채 온전히 굶는 것입니다. 물 마시고 쥬스 마셔가면서 며칠을 두고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이리저리 산책하듯 왔다갔다 하면서 물도 마시고 쥬스도 마셔가면서 금식한다 하는 것이 아니라 12시간을 곁눈 안팔고 딱 엎디어 있는 것이니, 이러한 금식이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한번 비교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바리새인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 말하자면 경건한 생활을 한다는 이 사람들, 특별히 이름을 가진 이 사람들이 일주일에 이틀씩을 금식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금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비가 생긴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하고 저들은 시비를 겁니다. '제자' 이 말에 깊은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 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안합니까?"합니다. 시비가 될만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제자들이 금식을 했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시원치 않은 제자들 때문에 선생님이 봉변 당하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신부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해어질 때에야 금식하는 것이 아니냐?" 귀중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그 당시의 결혼풍속(wedding custom)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결혼식 끝에도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가지 않습니다. '신혼여행'이란 우리네가 지어낸 말이고, 제대로 말하자면 '밀월여행(蜜月旅行)'입니다. 결혼 직후의 달콤하고 즐거운 때를 둘만이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하면, 둘만이 어디 가서 즐긴다고 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싸우고 돌아오는 사람도 많거든요.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 간다고 사흘 잡고 가더니 사흘 못 채우고 이틀만 있다가 오기도 합디다. 왜 조퇴(早退)했느냐고 물었더니 "심심해서"랍니다. 둘만이 마주앉아 있으니까 할 일도 없고 할 말도 없어지고, 생전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데이트는 많이 했으니까), 그래서 심심하더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속을 보면 결혼식을 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자기네 집에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 교인들에게 충고해줍니다. 되도록 이면 토요일 날 결혼식하고 웬만하면 신혼여행은 가지 마라, 그냥 집에 있거라, 집에 있어 부모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아라, 어차피 이젠 죽을 때까지 같이 살 것인데 굳이 신혼여행이다 뭐다 하고 서두를 것 있느냐, 결혼식 이튿날이 주일이니 부모님들과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드려라, 그렇게 하고 정 신혼여행 가고 싶으면 월요일에 떠나도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충고를 하는데, 착하게도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 제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은 신혼여행을 가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집에 머물면서 잔치를 합니다. 이 때에는 특별히 신랑의 친구들도 오지만 신부의 친구들이 다 소개됩니다. 친척 친지들이 다 모여서 일주일 내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한껏 높이는 것입니다.탈무드에 보면, 사람이 거짓말하면 못쓰지만 이 일주일 동안에는 신부가 예쁘지 않더라도 예쁘다고 거짓말해주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신부 예쁘다는 말은 거짓말일지라도 죄가 아니기에 참으로 그 때에는 그저 가장 예쁘다고, 제일 잘났다고, 참으로 훌륭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을 해주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에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유치하고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그 날은 그저 즐겁기만 해야 합니다. 조금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다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주일 동안은 신랑을 왕과 같이, 신부를 왕후와 같이 떠받드는 것입니다. 온 집안, 온 이웃에서 이렇듯 '영광'을 받으면서 일주일 동안을 지내는데, 이런 대접받는 것은 일생에 그 때 한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일주일 동안에 금식할 자가 있겠느냐, 말도 안되는 것이 아니냐 하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위해주기도 하고 사랑해주기도 하고 좋은 음식을 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와서 같이 놀아준다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일주일 동안이 가장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 없는 잔치라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마는 제가 하객으로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가 나타나지 않아서 결혼식 못하는 것을 한번 보았습니다. 참으로 민망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무슨 변입니까? 미용실에서 화장하고 나오는 신부를 옛날 애인이 나타나 납치해갔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혼전연애(婚前戀愛)는 신중하게 조심할 일입니다.

신랑 신부가 있어서 잔치가 됩니다. 음식이 좋아서 잔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부의 입장에서는 신랑이 있음으로 잔치인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데 신부가 어찌 금식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데 무슨 금식이냐?"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일생이 그 일주일 동안의 잔치와 같아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시간,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이어야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일생입니다.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전부입니다. 그가 나의 만족이요 나의 감사입니다. 나의 속죄입니다. 나의 의()입니다. 그가 나의 명예요 나의 영광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남학생' '여학생'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이야기합디다. 남녀공학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특별한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보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공부를 덜 열심히 한다고 해요. 특히 수학 같은 과목을 놓고 보면 남학생들은 이것을 공부해서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되는데, 여학생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서 가르치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하긴 어쩌다 시집 한번 잘 갔다 하면 퍼스트 레이디도 되는 수가 있기는 합니다. 이래저래 여학생들은 대체로 공부보다는 화장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반드시 나무랄 일만도 아닌 것일까요?

무릇 신부란 순결 하나로 통하는 것이요, 신랑이 신부를 사랑해주면 그것으로 다입니다. 잘나고 못 나고가 없습니다. 남편사랑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남편사랑 못 받으면 소용없습니다. 남편 사랑 못 받는 신부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사랑을 흡족히 받는 사람이 잘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부가 잘나고 똑똑해도 신랑 사랑 못 받으면 헛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 신분이 높아지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광을 얻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나의 나됨이 엄청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일이 아닙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금식의 규례는 초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금식이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반문하십니다. 신랑과 같이 있는 신부처럼 나와 함께 있는 제자들은 만족한 마음으로 감사, 찬송, 충만,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금식은 문제가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실 종교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에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릇 어떤 종교 의식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형식화하기 쉽고, 의식화하기 쉽습니다. 외식화(外飾化)하기 쉽습니다. 종교 의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진 신앙적 내용이 생활 형식으로 나타남인데, 하나님 앞에 되는 일을 사람 앞에 보이려는 것으로 외식한다면 되겠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이요 무서운 일입니다.

둘째는, 습관화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자칫하면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습관화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것도 습관화하게 되면 으레 새벽이면 일어나 나오는 것이다 하고 나오기 쉽습니다.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전처음 나오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문화화 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전체와 함께 이렇게 집단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이 한다고 하니 나도 같이 하는 것이요, 해왔으니까 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의식(儀式)이 공로화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봐주실 거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거다, 죄도 용서해주실 거다 --이같은 망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 제일 무서운 것은 세속화입니다. 수단화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명예를 얻고 위신을 얻고 목적이 딴 데 있어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의식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는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입니다. 어느 사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한 16년 전이 되겠습니다. 저희 교회 개척하기 직전에 '삼각교회'라고 하는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신다고 하기에 주일날 낮에만 설교목사로 몇 달 동안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모여대 학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가보니 목사님이 안 계셔서인지 장로님이 대신 집례를 하시더군요. 처음 그곳에서 설교를 할 때입니다. 단상에 올라가서 평소의 제 습관대로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저를 쿡 찌르면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노라 대답하고 돌아서 서 끓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기는 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서서 꿇어 엎으렸더니 제 엉덩이가 교인들에게 향하지 않았겠습니까? 좀 찜찜하고 별로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 예배를 마치고 내려와 장로님에게 물었더니, 그 장로님의 얘기가 그 교회에서는 수십 년 동안 목사님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목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교회 목사는 아니지만 여기에 있을 동안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해 버릇하면 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기도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습관화입니다. 고정관념에 빠진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한 사람들 앞에서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경망스러워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전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에는 이 의자를 설치하는 데에만도 얼마나 많은 반대가 따랐는지 모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지 의자에 앉아서 하면 되겠느냐며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예배당 절반에만 의자를 놓고는 마음대로 택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했더니 모두들 슬금슬금 다 올라앉더군요. 그래서 의자를 늘리게 되었습니다. 고정관념 때문에 의자 하나 놓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제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하지는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는 고정관념으로 과거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고정관념으로 과거와 같을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적인 말씀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옛것을 좋아합니다. 익숙해서 편하기 때문입니다. 습관화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던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는 옛것을 선호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굳어지고 심해지면 옛것에 매인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보수(保守)는 좋지만 보수주의(保守主義)는 문제가 있습니다. 배타적 보수주의에 매여 떡 버티고 앉아서 새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합니다. 옛것만 옳다고 합니다. 특별히 나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옛날 이야기만 하고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별것 아닙니다. 옛날에 그렇게 크게 여겨졌던 것도 지금 와서 보면 조그맣고 보잘것없습니다.

며칠전, 성밖거리라고 불렸던 곳을 가봤습니다. 그 성밖거리에는 성밖교회와 숭실대학과 유명한 냉면 집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그 거리는 꽤나 넓고 컸는데 이제 보니 아주 조그맣더군요. 옛날에 저는 그 거리를 자주 왕래했었습니다. 성밖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냉면 집에 가서 냉면도 먹곤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더군요. 숭실대학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대학에 들어가 돌아보는데 옛날에는 그리도 웅장하고 크게 보이던 건물이 지금 보니 아주 작아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크게 느껴졌던 골목길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골목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좁게 느껴지겠습니까? 여러분, 과거에 매여서 배타적으로 새것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물론 현재에 매여서 타협적으로 옛것을 개입시켜보려고 하는 생각도 문제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회귀적(回歸的) 보수주의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것 같다가도 틈만 생기면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든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우리에게 신앙적 개혁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앙에든 과거에 대한 수용적 개념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이야기와 새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순수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옛것과의 관련을 끊으면서 새롭게 현재의 새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전진적인,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이는 많을지라도 생각만은 젊어야 합니다. 생각까지 늙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늘 새로운 문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전진적 개혁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적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하여는 수용적 개혁의 자세를 가지고, 동시에 새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이 신앙적 개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술은 내용물이요, 부대는 담는 용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릇입니다. 그릇과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문제입니다. 사용하는 그릇에 따라 내용물이 좌우됩니다. 그릇이 작으면 내용물은 조금밖에 못담고, 그릇이 크면 많이 담게 됩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에는 더 묘한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의 유대 풍속을 생각해보시다. 옛날에는 그릇이 퍽 귀했습니다.

양이나 염소의 목을 잘라서 가죽을 홀랑 벗긴 후, 그 가죽을 잘 말려놓으면 이것이 바로 물병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물이나 포도주 같은 것을 넣은 다음에 아구리를 꽉 졸라매면 깨지거나 터질 염려가 없어 아주 편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부대는 오래될수록 신축성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아직 발효가 덜된 상태여서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아놓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필경 꽝 하고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술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게 되고 맙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를 다 경험하시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래된 포도주는 이미 발효될 대로 다 발효된 것입니다.

더는 발효될 것이 없습니다. 이런 포도주라면 낡은 부대에 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터질 리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새 포도주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발하는 능력, 터지는 능력, 팽창하는 능력, 확장하는 능력, 자라나는 능력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낡은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터지고 맙니다. 모름지기 그릇은 그 내용물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용물인 포도주 자체가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대는 그 폭발력을, 그 생명력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서, 자기 자신을 크게 만들어서 그 포도주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커질 때에 나도 함께 커지고, 포도주가 팽창할 때에 나도 함께 팽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수용력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새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수주의적 신앙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사실, 보수적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의'가 붙으면 나쁜 말이 됩니다. 보수주의란 절대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의라는 뜻입니다. 결국, 보수주의적 신앙도 새로운 사상이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새 술입니다. 새로운 진리입니다. 이것은 계속 팽창합니다.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 자신을 키워가면서, 나 자신을 넓혀가면서 새것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원수처럼 지냈던 사람을 지금은 친구처럼 만나기도 합니다. 옛날생각 하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넓혔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묻지 않고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떤 핍박이 있었고, 어떤 일로 서로 죽일 듯이 물고 뜯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마음으로 가슴을 넓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옛날에 매여서 언제 무슨 일로 네가 나한테 이렇게 했지 하고 앙심을 품는다면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적 진리에 대한 창조적 수용성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백년 동안 옳다고 여긴 생각일지라도 단숨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라면 내가 수십 년 동안 신봉해왔던 진리일지라도 가차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개혁적인 의지가 아니고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고식적인 생각, 고정관념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어찌 새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용물인 그 말씀에 합당한, 그 말씀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적 진리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고 헌신할 때에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마가복음 21822)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 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헤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이 말씀이 오늘 공부할 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귀중한 교훈이며 상징적이자 비유적인 격언입니다. '포도주'도 비유요 '부대'도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신선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잠언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는 그 사건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미흡한 사람에게는 의문을 던졌고, 어떤 사람에게는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그 엄청난 사역을 보면 도저히 그가 촌구석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실 분이 아닌 것 같았고, 한촌(寒村) 나사렛에서 목수 일이나 하며 자라실 분이 아닌 것 같았고, 예루살렘 언저리도 아닌, 마치 유대의 서자(庶子)쯤으로 취급당하는 변두리 갈릴리 지방에서나 역사 하실 분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귀족 신분으로나 왕족 신분쯤으로 나시고 그런 위의(威儀)를 가지고 도성 예루살렘쯤에서 목청 높게 역사 하심이 마땅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에닐흔쯤 되시는 노련한 랍비인 것도 아니라 겨우 서른 살 젊은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시고 자라시고 사시는 모습에서 '의외(意外)'라고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무리도 아닙니다. 누구라 없이 나이 겨우 서른에 나타나 무슨 대 역사를 한다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입니다.

이에 비유해서 예를 든다는 것이 퍽 외람된 것 같습니다마는, 제가 스물일곱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 나이 많으신 원로 목사님과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저를 부르는 호칭에서 아예 '곽목사'는 간데온데없고 성()을 빼버린 '젊은 목사'로 불리었습니다. 여기까지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애기 목사'라고, '병아리 목사'라고 스스럼도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습니다. '이거, 빨리 늙어야지 못쓰겠다'했는데, 어느덧 이렇게 늙었습니다. 젊다는 것이 그토록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서른세 살 때에 겪은 일 한 가지는 지금도 선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로는 서울에서 제일 큰 교회였던 영락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한 경직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그 부흥회를 한번 인도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그 때의 부흥회는 참 길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겨우 서른 셋'인 저보고 부탁을 하시기에 "한 목사님 계신 교회에 제가 감히 어찌 가겠습니까? 저는 나이가 어려서 안되겠습니다."하고 사양했더니 한 목사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른 세 살에 끝을 내셨는데……" 저는 할말을 잃고 하릴없이 영락교회에 갔고, 집회를 인도했던 것입니다.

서른 살, 갈릴리 촌사람, 목수의 아들이자 자신도 목수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는 이런 분인데, 지금 하시는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요 권세 있는 역사입니다. 귀신을 쫓는가 하면 죽은 사람도 살려내십니다. 율법을 해석하는가 하면 전하는 메세지가 정말 권세 있는 자의 메시지입니다. 아주 권능 있는 말씀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하시는 역사나 말씀을 보아서는 그야말로 이것은 새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와 같이 신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과거라든가 생애라든가, 이런 것을 생각하니 그를 영접하기가 힘들어요.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를 듣는 자와 그의 추종자가 또한 문제입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따르는 것만도 문제가 되는데, 예수님 스스로 하시는 말씀이 또 설상가상입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십니다.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당시의 유명한 종교 지도자에 대하여 '너희는 나와 상관이 없다, 버림받은 저 사람들, 소외당한 저 사람들, 저 업신여김 받고, 죄인취급 받는, 죄가 있건 없건 죄인취급 받는 저러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왔다' --이러시니 더 충격적입니다. 북한에서 하는 소리로는 '접수하기 힘든'일입니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전부가 행복과 기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중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볼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예수 잘믿는 사람으로 어떤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까? 많이 우는 사람입니까 많이 웃는 사람입니까? 대체로 종교인이라 하면 어딘지 모르게 좀 초라한 인상으로 와 닿기가 보통입니다. 옷도 남보다 꾀죄죄하고 행동거지도 좀스럽소, 은둔적이고, 사람들 앞에 떠벌리지 않고, 나타나지 않고, 산에 가서 기도도 좀 많이 하고, 금식도 잘하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모습을 상상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표정도 심각하고 많이 우는 사람이 종교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칫집에다 비유하십니다. 실제로 예수 잘 믿는 것은 많이 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웃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웃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한다 금식한다, 아무리 법석을 떨어도 잘못 믿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많이 웃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저 웃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구제하는 셈이 됩니다. 일단 남에게 걱정을 끼치지는 않거든요. 속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웃고 다닌다면 문제가 없는데, 마치 세상걱정 혼자 다 하는 듯이 심각한 낯을 하고 다니면 남들이 '저 사람 어디 아픈가?' '무슨 일이 있나?'하고 걱정을 하게 만듭니다. 은근히 남을 어둡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유와 희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당시의 종교인들이 가진 종교적 개념으로는 납득이 안가는 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신선한 것이었습니다.

율법해석 하시는 것을 보아도, 분명히 낡은 율법인데도 새로운 해석으로 신선하게 하십니다. 지엽적이거나 변두리만 빙빙 돌다 마는 것이 아니라 뿌리깊게 근본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헤아려서 전하시되 창조적으로 해석하시고 독특하게 권위 있는 해석을 하십니다. 제아무리 잘났다 하는 종교인이라도 말문이 막히게 하십니다. 이게 충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교훈의 특징인즉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살고 계심입니다. 그 속에서 살고 계심입니다. 바리새인은 말만 하지 행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생활 자체가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충격적이었습니다.

하물며 디모데같은 사람도 요샛말로 찜찜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꼭 따라야 될 것 같은데, 따르자니 예수님의 과거나 신분이 마음에 걸리고 안 따르자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고 해서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이게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어이 예수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맙니다.

그러면 본문의 사건 중에 어떤 충격이 있었나 보십시다. 본문의 문제를 보면 먼저 금식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하는 것이니라."

유대사람들에게는 금식을 하는 종교 의식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 종교 의식이라 하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이런 것들이라 하겠습니다. 금식하는 분들이 있기는 있지만 필수적 절대적인 종교 의식은 아닙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말고 싶은 사람은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종교 의식은 아닌 것입니다. 그 당시의 이스라엘사람들에게 금식은 강제성이 있었습니다. 일년에 하루, 이른바 '속죄일'에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합니다. 온 백성의 죄, 일년 동안 쌓인 온 백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날입니다. 여기서 빠지는 사람은 회개에서 제외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하루만은 회개하고 자복하기 위해서 온 국민이 다 금식을 합니다. 금식이 먼저가 아니라 회개하는 일이 전적으로 집행되고 있으니까 먹고 마실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사람들의 금식에도 자원성도 있습니다. 특별히 잘 믿는다는 사람의 경우, 자원하여 금식하는 것입니다. 요새도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나는 잘 믿겠다, 좀더 잘 믿고 싶다 하는 사람들이 자원하여 금식을 하는데, 이를테면 바리새인과 서기관, 한마디로 종교생활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경우,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합니다. 금식을 하되, 하루종일 굶는 것은 물론이요 물도 마시면 안됩니다. 물 냄새도 맡아도 안됩니다. 요새의 금식을 보면 물은 마셔도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마는 원래의 정통적인 금식은 물도 마시면 안됩니다. 그야말로 완전한 금식입니다. 요새는 흔히들 금식을 하루 했다거나 열흘 했다거나 사십 일 했다거나 하고, 오래 하는 것이 능사인줄 아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얼마나 오래 하느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일주일에 두 번 한다는 것은 이틀을 금식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틀인고 하니 새벽 6시에 식사하고 저녁 6시에 식사하니까 이틀이 됩니다. 따라서 엄격히 따져 말하자면 한 끼 굶은 것이 이틀 금식이 됩니다. 점심 한 끼 굶는 것입니다. 저들은 12시간 금식이 곧 하루 금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수천 년 동안 지켜오는 전통적 금식법입니다. 하루 금식이라 하면 낮 금식을 의미합니다.

해뜰 때부터 시작하여 해질 때까지이니 열두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정말로 물 한방울 안 마시고 밥 한술 뜨지 않은 채 온전히 굶는 것입니다. 물 마시고 쥬스 마셔가면서 며칠을 두고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도 싶습니다. 이리저리 산책하듯 왔다갔다 하면서 물도 마시고 쥬스도 마셔가면서 금식한다 하는 것이 아니라 12시간을 곁눈 안팔고 딱 엎디어 있는 것이니, 이러한 금식이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하고 한번 비교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바리새인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 말하자면 경건한 생활을 한다는 이 사람들, 특별히 이름을 가진 이 사람들이 일주일에 이틀씩을 금식했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금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비가 생긴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은……"하고 저들은 시비를 겁니다. '제자' 이 말에 깊은 의미가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 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안합니까?"합니다. 시비가 될만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십니다. 어찌 생각하면, 제자들이 금식을 했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을 시원치 않은 제자들 때문에 선생님이 봉변 당하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신부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해어질 때에야 금식하는 것이 아니냐?" 귀중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그 당시의 결혼풍속(wedding custom)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결혼식 끝에도 신혼여행이라는 것을 가지 않습니다. '신혼여행'이란 우리네가 지어낸 말이고, 제대로 말하자면 '밀월여행(蜜月旅行)'입니다. 결혼 직후의 달콤하고 즐거운 때를 둘만이 즐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하면, 둘만이 어디 가서 즐긴다고 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싸우고 돌아오는 사람도 많거든요.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혼여행 간다고 사흘 잡고 가더니 사흘 못 채우고 이틀만 있다가 오기도 합디다. 왜 조퇴(早退)했느냐고 물었더니 "심심해서"랍니다. 둘만이 마주앉아 있으니까 할 일도 없고 할 말도 없어지고, 생전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데이트는 많이 했으니까), 그래서 심심하더라고 하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풍속을 보면 결혼식을 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은 자기네 집에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 교인들에게 충고해줍니다. 되도록 이면 토요일 날 결혼식하고 웬만하면 신혼여행은 가지 마라, 그냥 집에 있거라, 집에 있어 부모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보아라, 어차피 이젠 죽을 때까지 같이 살 것인데 굳이 신혼여행이다 뭐다 하고 서두를 것 있느냐, 결혼식 이튿날이 주일이니 부모님들과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드려라, 그렇게 하고 정 신혼여행 가고 싶으면 월요일에 떠나도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충고를 하는데, 착하게도 그대로 실천하는 분들이 있어 제 마음이 여간 기쁘지 않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사람들은 신혼여행을 가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집에 머물면서 잔치를 합니다. 이 때에는 특별히 신랑의 친구들도 오지만 신부의 친구들이 다 소개됩니다. 친척 친지들이 다 모여서 일주일 내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를 한껏 높이는 것입니다.탈무드에 보면, 사람이 거짓말하면 못쓰지만 이 일주일 동안에는 신부가 예쁘지 않더라도 예쁘다고 거짓말해주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신부 예쁘다는 말은 거짓말일지라도 죄가 아니기에 참으로 그 때에는 그저 가장 예쁘다고, 제일 잘났다고, 참으로 훌륭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을 해주는 것입니다. 결혼식 날에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사람들은 유치하고 무식한 사람들입니다. 그 날은 그저 즐겁기만 해야 합니다. 조금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다 소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주일 동안은 신랑을 왕과 같이, 신부를 왕후와 같이 떠받드는 것입니다. 온 집안, 온 이웃에서 이렇듯 '영광'을 받으면서 일주일 동안을 지내는데, 이런 대접받는 것은 일생에 그 때 한번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일주일 동안에 금식할 자가 있겠느냐, 말도 안되는 것이 아니냐 하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위해주기도 하고 사랑해주기도 하고 좋은 음식을 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와서 같이 놀아준다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일주일 동안이 가장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 없는 잔치라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래된 일입니다마는 제가 하객으로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가 나타나지 않아서 결혼식 못하는 것을 한번 보았습니다. 참으로 민망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무슨 변입니까? 미용실에서 화장하고 나오는 신부를 옛날 애인이 나타나 납치해갔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혼전연애(婚前戀愛)는 신중하게 조심할 일입니다.

신랑 신부가 있어서 잔치가 됩니다. 음식이 좋아서 잔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부의 입장에서는 신랑이 있음으로 잔치인 것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데 신부가 어찌 금식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데 무슨 금식이냐?"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일생이 그 일주일 동안의 잔치와 같아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시간,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이어야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일생입니다. 신랑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나의 전부입니다. 그가 나의 만족이요 나의 감사입니다. 나의 속죄입니다. 나의 의()입니다. 그가 나의 명예요 나의 영광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남학생' '여학생'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이 이야기합디다. 남녀공학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특별한 아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보아 여학생들이 남학생들보다 공부를 덜 열심히 한다고 해요. 특히 수학 같은 과목을 놓고 보면 남학생들은 이것을 공부해서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되는데, 여학생들은 시집만 잘 가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서 가르치기가 참 힘들다고 합니다. 하긴 어쩌다 시집 한번 잘 갔다 하면 퍼스트 레이디도 되는 수가 있기는 합니다. 이래저래 여학생들은 대체로 공부보다는 화장을 더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반드시 나무랄 일만도 아닌 것일까요?

무릇 신부란 순결 하나로 통하는 것이요, 신랑이 신부를 사랑해주면 그것으로 다입니다. 잘나고 못 나고가 없습니다. 남편사랑을 받으면 그만입니다. 제아무리 잘났다 해도 남편사랑 못 받으면 소용없습니다. 남편 사랑 못 받는 신부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사랑을 흡족히 받는 사람이 잘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부가 잘나고 똑똑해도 신랑 사랑 못 받으면 헛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예수님으로 인해서 내 신분이 높아지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광을 얻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나의 나됨이 엄청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귀한 일이 아닙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금식의 규례는 초월할 수 있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금식이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반문하십니다. 신랑과 같이 있는 신부처럼 나와 함께 있는 제자들은 만족한 마음으로 감사, 찬송, 충만, 영광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금식은 문제가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실 종교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에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릇 어떤 종교 의식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형식화하기 쉽고, 의식화하기 쉽습니다. 외식화(外飾化)하기 쉽습니다. 종교 의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진 신앙적 내용이 생활 형식으로 나타남인데, 하나님 앞에 되는 일을 사람 앞에 보이려는 것으로 외식한다면 되겠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이요 무서운 일입니다.

둘째는, 습관화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자칫하면 알맹이는 빠져버리고 습관화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나와 기도하는 것도 습관화하게 되면 으레 새벽이면 일어나 나오는 것이다 하고 나오기 쉽습니다.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전처음 나오는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 문화화 할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전체와 함께 이렇게 집단 습관이 되기 쉽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남이 한다고 하니 나도 같이 하는 것이요, 해왔으니까 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의식(儀式)이 공로화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봐주실 거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거다, 죄도 용서해주실 거다 --이같은 망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 제일 무서운 것은 세속화입니다. 수단화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인정을 받고 명예를 얻고 위신을 얻고 목적이 딴 데 있어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의식을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면 이는 참으로 무서운 죄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입니다. 어느 사이 고정관념에 빠지기 쉽습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한 16년 전이 되겠습니다. 저희 교회 개척하기 직전에 '삼각교회'라고 하는 교회에 목사님이 안 계신다고 하기에 주일날 낮에만 설교목사로 몇 달 동안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모여대 학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가보니 목사님이 안 계셔서인지 장로님이 대신 집례를 하시더군요. 처음 그곳에서 설교를 할 때입니다. 단상에 올라가서 평소의 제 습관대로 의자에 앉아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장로님이 저를 쿡 찌르면서 꿇어 엎드려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노라 대답하고 돌아서 서 끓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기는 했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돌아서서 꿇어 엎으렸더니 제 엉덩이가 교인들에게 향하지 않았겠습니까? 좀 찜찜하고 별로 안 좋다는 생각이 들어 예배를 마치고 내려와 장로님에게 물었더니, 그 장로님의 얘기가 그 교회에서는 수십 년 동안 목사님들이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만일 누구든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경건하지 않은 목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교회 목사는 아니지만 여기에 있을 동안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해 버릇하면 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 번이라도 무릎을 꿇지 않고 기도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습관화입니다. 고정관념에 빠진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 습관화한 사람들 앞에서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경망스러워 보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의자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30년 전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을 때에는 이 의자를 설치하는 데에만도 얼마나 많은 반대가 따랐는지 모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야지 의자에 앉아서 하면 되겠느냐며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할 수없이 예배당 절반에만 의자를 놓고는 마음대로 택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했더니 모두들 슬금슬금 다 올라앉더군요. 그래서 의자를 늘리게 되었습니다. 고정관념 때문에 의자 하나 놓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제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만 치부하지는 마십시오. 지금도 우리는 고정관념으로 과거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고정관념으로 과거와 같을 일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적인 말씀입니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22)."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옛것을 좋아합니다. 익숙해서 편하기 때문입니다. 습관화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던 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들에게는 옛것을 선호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굳어지고 심해지면 옛것에 매인 보수주의자가 됩니다. 보수(保守)는 좋지만 보수주의(保守主義)는 문제가 있습니다. 배타적 보수주의에 매여 떡 버티고 앉아서 새것은 무엇이든지 반대합니다. 옛것만 옳다고 합니다. 특별히 나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옛날 이야기만 하고 옛날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별것 아닙니다. 옛날에 그렇게 크게 여겨졌던 것도 지금 와서 보면 조그맣고 보잘것없습니다.

며칠전, 성밖거리라고 불렸던 곳을 가봤습니다. 그 성밖거리에는 성밖교회와 숭실대학과 유명한 냉면 집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에 남아 있는 그 거리는 꽤나 넓고 컸는데 이제 보니 아주 조그맣더군요. 옛날에 저는 그 거리를 자주 왕래했었습니다. 성밖교회에서 예배도 드리고 냉면 집에 가서 냉면도 먹곤 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졌더군요. 숭실대학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대학에 들어가 돌아보는데 옛날에는 그리도 웅장하고 크게 보이던 건물이 지금 보니 아주 작아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크게 느껴졌던 골목길이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골목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좁게 느껴지겠습니까? 여러분, 과거에 매여서 배타적으로 새것이라면 무조건 반대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물론 현재에 매여서 타협적으로 옛것을 개입시켜보려고 하는 생각도 문제입니다. 또한, 미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회귀적(回歸的) 보수주의가 있습니다. 잘 나가는 것 같다가도 틈만 생기면 과거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든 데에 커다란 장애가 됩니다. 우리에게 신앙적 개혁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적어도 신앙에든 과거에 대한 수용적 개념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미래에 다가올 새로운 이야기와 새것을 과감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순수한 개혁이 필요합니다. 옛것과의 관련을 끊으면서 새롭게 현재의 새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전진적인,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이는 많을지라도 생각만은 젊어야 합니다. 생각까지 늙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늘 새로운 문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전진적 개혁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적 개혁이란 무엇입니까? 과거에 대하여는 수용적 개혁의 자세를 가지고, 동시에 새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이 신앙적 개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술은 내용물이요, 부대는 담는 용기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릇입니다. 그릇과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문제입니다. 사용하는 그릇에 따라 내용물이 좌우됩니다. 그릇이 작으면 내용물은 조금밖에 못담고, 그릇이 크면 많이 담게 됩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씀에는 더 묘한 의미가 있습니다.

옛날의 유대 풍속을 생각해보시다. 옛날에는 그릇이 퍽 귀했습니다.

양이나 염소의 목을 잘라서 가죽을 홀랑 벗긴 후, 그 가죽을 잘 말려놓으면 이것이 바로 물병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물이나 포도주 같은 것을 넣은 다음에 아구리를 꽉 졸라매면 깨지거나 터질 염려가 없어 아주 편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부대는 오래될수록 신축성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은 아직 발효가 덜된 상태여서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러니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아놓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필경 꽝 하고 터져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술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게 되고 맙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를 다 경험하시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하면 오래된 포도주는 이미 발효될 대로 다 발효된 것입니다.

더는 발효될 것이 없습니다. 이런 포도주라면 낡은 부대에 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터질 리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새 포도주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폭발하는 능력, 터지는 능력, 팽창하는 능력, 확장하는 능력, 자라나는 능력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낡은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터지고 맙니다. 모름지기 그릇은 그 내용물을 따라가야 합니다. 내용물인 포도주 자체가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대는 그 폭발력을, 그 생명력을 수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서, 자기 자신을 크게 만들어서 그 포도주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가 커질 때에 나도 함께 커지고, 포도주가 팽창할 때에 나도 함께 팽창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수용력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요새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보수주의적 신앙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사실, 보수적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주의'가 붙으면 나쁜 말이 됩니다. 보수주의란 절대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의라는 뜻입니다. 결국, 보수주의적 신앙도 새로운 사상이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을 말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새 술입니다. 새로운 진리입니다. 이것은 계속 팽창합니다.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나 자신을 키워가면서, 나 자신을 넓혀가면서 새것을 다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원수처럼 지냈던 사람을 지금은 친구처럼 만나기도 합니다. 옛날생각 하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넓혔습니다.

그래서 과거를 묻지 않고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과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떤 핍박이 있었고, 어떤 일로 서로 죽일 듯이 물고 뜯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원수를 사랑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마음으로 가슴을 넓히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옛날에 매여서 언제 무슨 일로 네가 나한테 이렇게 했지 하고 앙심을 품는다면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창조적 진리에 대한 창조적 수용성을 필요로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내가 백년 동안 옳다고 여긴 생각일지라도 단숨에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라면 내가 수십 년 동안 신봉해왔던 진리일지라도 가차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개혁적인 의지가 아니고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고식적인 생각, 고정관념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어찌 새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낡은 부대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내용물인 그 말씀에 합당한, 그 말씀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그릇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생명적 진리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고 헌신할 때에 큰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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