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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누가복음 5장 27절~39절)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8절)" 하신 오늘의 잠언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서도 가장 혁신적 성격을 띤 말씀의 하나입니다. 무릇 예수님의 교훈이 다 혁신적이고 개혁적입니다 마는 오늘 주시는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유달리 두드러져 보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잠언에 비추어 우리는 나 자신에 관하여 한번 성찰(省察)해볼 것입니다. 내가 살아오고 있는 일상의 굴레, 낡은 테두리는 그 안에서 내가 습관적으로, 타성에 젖어, 별생각 없이 세월을 따라가니까 그렇지 그실 알아야 될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나 자신이 문제이기 때문에 모르고, 그 속에 내가 파묻혀 있기 때문에 모를 때가 많은 것입니다. 모르고 넘기는 것, 무심히 넘어가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는 적어도 몇 가지의 중요한 형식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첫째로 세계관의 변화입니다. 'Transforming world view'입니다. 예수 믿으면 당연히 world view의 transforming이 이루어집니다. 세계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제껏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가 하면 가벼이 여겨오던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도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 '내게 중요한 것'이 달라집니다.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무엇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인가, 무엇이 근본인가 -이 같은 문제에 대한 세계관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엄청난 변화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토록 엄청난 것입니다. 세계관이 그리스도적으로 바꾸어집니다. 성서적으로 변화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종래에 가졌던 세계관을 버리게 되고 또 버려야 합니다.
무생물이나 자연현상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어 나무를 보고도 엎드려 빌고 돌부리를 향해서도 두 손을 합장하는 고대의 애니미즘(animism)이라든가, 툭하면 무당이나 찾아다니는 무속신앙 따위가 아직도 내 의식의 밑바닥에 몰래 잠재해 잇는 것이라면 나는 여전히 세계를 부정적으로, 어둡게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면 저렇듯 전통적이고 습관적인 종래의 세계관을 버리고 새로이 성서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점(占)이나 보러 다니고,「토정비결」에 어떻다느니 「정감록」에 어떻다느니 하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 잘못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운명'타령에 '팔자'타령이나 늘어놓고 재수(財數)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고 또 그럴 턱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여름에 우리 교회의 몇몇 분들과 함께 중국의 연길(延吉)에 갔었습니다. 백두산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두산은 날씨 변덕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일껏 스케줄을 잡아 어렵게 찾아 갔다가도 구경을 못하고 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밑에서 사흘이나 머물러 기다렸다가도 끝내 산을 올라보지 못한 채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어요. 두세 차례나 다시 가도 번번이 허탕을 치고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멀쩡한 날이어서 출발했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해서 산행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차를 타고 너댓 시간이나 비포장도로를 덜커덩덜커덩 흔들리면서 가야 산밑에 이릅니다. 그렇듯 고생스럽게 가서도 다행 날이 좋아야 산을 올라보기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고맙게도 초행길에 산을 오를 수가 있어 구경을 잘하고 왔던 것입니다. 떠나기 전에 일행 중 이한빈 장로님이 기도를 했습니다. 좋은 날씨를 주셔서 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십사고 기도했는데 정말로 날이 좋아서 잘 보고 온 것입니다. 산을 내려왔을 때에 일행 중의 누가 그곳 사람들보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잘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더니 공산당간부하나가 비위가 상했는지 "하나님의 은혜는 무슨…… 재수가 좋았던 게지"하고 '공산당원답지도' 않은 소리를 하더랍니다.
옛 세계관을 깨끗이 버리고 성서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게 되면 나 자신을 볼 때에도 그전에 보던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관(自己觀)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쓸모가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한숨을 쉬면 안됩니다.
한숨 쉬는 것,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한숨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근심걱정에 이는 것도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예수 믿게 되었으면 옛날의 내 모습, 옛날에 가졌던 자기 존재의식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 된 자기인식, 구속받은 소중한 성도 된 자기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람과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내가 늘 시기하고 질투하고 증오해오던 사람인데,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그 사람이 이제는 반갑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아직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성도라면 눈에 보이는 세계가 다 이전에 보던 그 세계가 아닙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것이 성도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예 D똕TXT"수믿기 전에 보던 세계는 그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고운 꽃도 곱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事)와 물(物)이 두루 부정적으로만 보였습니다. 짜증만 났습니다. 인간사 모든 관계가 여간해서 달갑지를 않았습니다. 고부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자녀와의 관계도 부모와의 관계도 형제간의 관계도 그저 피곤하기만 했습니다. 무릇 가족간의 관계부터가 아름답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부터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계로 새로워집니다. 그렇게 되게 마련이요 그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지방의 회교국가 같은 데서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예사로 큰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전에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아주 벗어나 전혀 새로운 공동체로 영입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추방해버립니다. 집에서도 쫓겨나고 직장에서도 쫓겨납니다. 딴 데로 떠나야 합니다.
저렇듯, 예수 믿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본디 새로운 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것 맞아들이기를 두려워합니다. 예뻐 보이고 싶어 미장원에 갑니다. 용기를 내어 머리 모양을 여태까지 하고 있던 모양과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오래도록 망설여오던 일을 단행하고 만 것입니다. 밖에 나오니 낯이 화끈거립니다. 사람마다 내 머리 모양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남들이 유심히 보아주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는 그렇게만 느껴집니다. 내 머리가 남에게 예뻐 보일는지 이상스러워 보일는지,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기가 이렇게나 힘이 듭니다.
새 옷을 하나 사 입었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은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입니다. 새로운 것을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어렵습니다. 새것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합니다. 부분적으로 개방하고 부분적으로 수용하기를 원합니다. 전적으로 확 바꾸어버리기는 두렵습니다. 바꾸어야 한다면 되도록 조금만 바꾸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입니다.
예수 믿는 데도 저러한 성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적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미봉책으로나 구태의연한 자세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되도록이면 구습에 그대로 파묻힌 채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싶어합니다. 예수는 믿되 나는 나 그대로, 내 스타일을 고치지 않은 채로, 그대로 가진 채로 믿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예수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요대로가 좋습니다. 요대로 있겠으니 복이나 주시오'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도 변화함이 없이 부동자세로 있으면서 예수는 예수대로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저 복이나 주십시오' -'복'자체의 개념을 바꿀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복이 도대체 무엇이냐 할 때, 돈은 복이 아니다, 건강만도 복이 아니다, 복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라고 복의 개념부터 바꾸어야 하는데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내가 생각할 때 그저 오복(五福)이 복이다, 오래 살아야 복이고 건강해야 복이고 아들 낳아야 그게 복이지 무슨 소리냐?'- 예수 믿으면 이런 복을 받는다면서, 기도하는 것이 늘상 이런 복을 달라고 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복의 개념을 수정할 마음이 없어요. 오히려 그 마음이 변화할까봐 걱정입니다. 자신은 요지부동으로 앉아 있으면서 '하나님이여 오래 살고, 건강하고, 부자 되고…… 그저 이런 복만 주세요' 합니다. 일반적으로 잘못된 신앙 성향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익히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참 가난하게 사셨던 것 같아요. 요샛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쉬 알아듣기 힘들 것입니다. '헌 옷에 생베 조각을 대는 사람 없다' --기워 입기를 해보았어야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옛날에 양말을 기워본 적 있습니까? 요새는 양말 기워 신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겠습니다마는 저 가난하던 시절의 우리들은 양말을 많이도 기워보았습니다. 그래보아서 알지만, 헌 양말을 기울 때도 새 헝겊을 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덕누덕 헐어버린 헌 양말을 버리지 않고 두었다가 다른 헌 양말을 기울 때에 그 조각을 떼어내서 대고 깁는 것입니다. 헌 양말 천을 떼어내서 헌 양말을 기워야 맞는 것입니다. 헌 양말 깁는 데 새 헝겊을 갖다대고 기우면 헌 양말 천과 새 헝겊의 서로 다른 탄력 때문에 못쓰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 깁기를 해보신 것 같습니다. 해보신 솜씨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말씀하실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헌 옷을 기울 때는 생베 조각을 갖다대고 깁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했다가는 둘 다 못쓰게 된다. 그러니 헌옷은 헌 헝겊조각으로 기워야 할 것이요 새 옷은 새 헝겊조각을 갖다대고 기워야 한다"라고, 경험이 있으셔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이어 37절에서는 같은 뜻의 다른 예를 더 드시고 계십니다.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 여기서 우리는 술이 '포도주'라는 것과 부대가 '가죽부대'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이 잠언말씀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포도주입니다. 발효가 덜된 포도주, 그러니까 아직도 발효를 계속하고 있는 포도주를 가죽으로 만들어진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가죽이되 양의 가죽입니다. 당시 그곳에는 용기(容器)가 다양한 것이 아니어서 이렇듯 양의 가죽으로 만든 부대를 용기로 썼습니다. 이같은 가죽부대에 포도주를 담아 아구를 꼭 묶어 죄어놓으면 둘러메고 다닐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무주머니나 비닐주머니처럼 잘 깨지지도 않고 휴대하기도 편리한 용기였습니다. 이 부대에다 발효가 덜 된 '새 포도주'를 담아 아구를 죄어 놓았으니 속에 든 포도주가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자연히 용적이 늘어납니다. 이 경우, 부대가 새 부대이면 용적이 같이 늘어나므로 감당을 할 수 있으나 한 부대이면 신축성이 떨어져 있으므로 여기에 새 포도주를 넣었다가는 발효를 할 때에 그 용적의 팽창을 감당할 수가 없어 쉽사리 터지고 마는 것입니다. 당연히 술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낡은 부대에 는 발효가 끝난 낡은 술이나 넣을 것이다 하심입니다. 경험해보셨으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공통적으로 생각할 문제는 새것을 도입, 수용한다는 문제입니다. 문제는 새 것입니다. 새 헝겊, 새 술이라 하셨습니다. 새 헝겊은 새 천에, 새 술은 새 부대에---새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새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운 자세로 받아들여야 하겠는데 옛 마음, 옛 자세, 옛 습관, 옛 세계관 그대로를 가지고 받아들이게되면 옛것까지도 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 망치고 맙니다. 새로운 진리는 물론, 옛날에 가졌던 습관이나 전통도 다 무너지고 맙니다.
다 깨어지고 맙니다. 여기에 공통적인 문제가 있는가 하면, 이 두 가지 비유를 비교해보면 차이점도 있습니다. 헌 옷과 생베 이야기는 부분적인 개선을 의미합니다. 이미 옷이 해졌어요. 부분적으로 찢어진 데가 있습니다. 이것을 기우기 위하여 미봉책으로 어느 부분을 갖다 대어보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옛 종교의 결함을 메우는 정도로 생각해서는 기독교도 바로 받아들일 수 없고 내가 가져왔던 전통적인 것도 버리게 된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옛 습관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몸에 밴 습관이 있습니다. 혹은 옛날부터 가져온 자기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이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에는 결코 이것을 보완하는 정도로 받아들일 생각을 해서는 안되고 완전히 새 마음으로, 전적으로 새로운 자세로 수용해야만 기독교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의미상으로 보면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오늘의 성경말씀은 바리새인들의 경직성을 겨냥해서 비판하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네 교리에 꽉 묶여 있어요. 자기네가 지키고 있는 율법, 제도, 전승, 생활태도에 꽉 붙들려서 한 걸음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이것은 낡은 부대다. 이 낡은 부대에다는 신선하고 생동력 있는 복음을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에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됩니다. 'New approach'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경을 보는 자세부터 달라야 합니다.
늘 이야기합니다마는 우리가 성경 읽을 때에는 다른 책 읽듯이 읽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누워서 보지 말 것입니다. 잠옷바람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바른 자세로, 기도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소설책 읽듯이 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몸의 자세부터 달라야 하고 마음의 자세가 달라야 합니다. 비판하려는 마음으로가 아니라 듣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접근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예배드리는 자세도 그렇습니다. Approach의 자세가 벌써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라는 새로운 전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던 전통을 수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효도를 말합니다마는 그 효도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효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인권은 세상이 말하는 인권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에서 말하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 기쁨이나 행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기쁨이나 행복과는 다릅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달라요. 이 다르다는 관계를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말씀입니다. 새로운 전통 (new tradition)입니다.
그 다음에는 새로운 구조가 있습니다. 의식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그러니까 된다 안 된다 논하지 말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안되나 교회적으로는 됩니다. 그래서 다른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어려운 문제가 생기는 것은 교회에 교회 나름의 구조가 있는데도 세상에서 계산하던 대로 주판 튕겨보고 된다 안 된다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가지 더 말씀드릴까요? 교회 차원으로 무슨 일을 위하여 의논할 때에 보면 흔히 "그건 우리가 생각할 때는 좀 다른데요"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배당을 짓는다든가 할 패에 보면 "아, 요새같은 불경기에 어떻게 예배당을 짓습니까?" 합니다. 그러나 참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불경기에 지어야 잘 지을 수 있습니다. 불경기라고 해서 헌금 줄어드는 법은 없습니다. 세상 상식으로 생각할 때에는 이상하지요. 불경기에 예배당을 지으면 싸게 짓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경기라고 하는 문제가 교회와는 관계가 없어요. 게다가 경제 공황이니, 환난이니, 핍박이니, 지진이니 하는 것들이 있으면 예배당은 만원이 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기억합니다마는 연전에 'KAL기 사건'이라고, 여객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 터진 다음날 보니 교인이 훨씬 많이 왔습니다. 무슨 사건이건 사건만 터졌다 하면 세상일은 안 되는데 교회는 만원이 됩니다.
신앙인은 의식구조가 다릅니다. '안 된다'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면 되는 것이고, 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은 우리의 밥이다'하고 거기 들어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나머지 열 사람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더라'하고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새로운 의식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도 그렇거니와 사도 바울도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 혹은 옛날에 생각하던 대로 똑똑한 척하고 된다 안 된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 자체가 틀리다는 말씀입니다.
좀더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이 새 교리는 무슨 적극적인 새로운 의식구조(positive thinking)를 창조 한다든가 만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새로운 의식을 가진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께서 주시고 성경이 주는 교리를 내가 받아들인다,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의 잠언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 내가 새 술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이 여기 있어요. 생명력이 여기 있어요.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 나온 책 가운데 제목이 아주 충격적인 것이 있습디다. 「교회 성장은 교인이 방해한다」 납득이 갑니까? 짚이는 데가 있지요? 교회 성장은 교인이 반대한다, 교인이 전도하는 척하거나 잘 전도하는 것 같지마는 정작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못 들어오게 한다, 늘 먼저 믿는 사람이 말썽이다, 오래 믿는 사람이 말썽이다, 딱 버티고 앉아서 못 믿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죽 열거했어요. 서울 안의 어느 교회라고 합니다마는 그 교회가 참 복잡해졌어요. 예배당을 더 크게 지으려고 하는데 장로님 몇 분이 반대해요. 도대체가 부흥되는 것을 반대해요. 주차장 늘려야 하고 예배당 또다시 지어야 하니 귀찮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잘 믿는데 왜 자꾸 말썽이냐고 합니다. 참 대단한 고정관념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교회 성장을 교인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아주 섭섭해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고정관념, 편견, 구습을 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형식(form)에 있어서는 버리기가 쉬운데 내실(meaning)에 있어서는 버리기가 어려워요. 안나가던 교회에 나가고 우상 섬기던 것 불태워버리는 것은 쉬워요. 그러나 내적으로, 정신과 의식구조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한 여자가 시집을 가고 한 남자가 장가를 가서 가정을 이룹니다. 전에 혼자 자던 것이 둘이 자고, 혼자 살던 것이 둘이 살고, 일단 그렇게 가정이라는 것을 이루었어요. 이건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 자체가 확 달라져서 결혼한 자의 의식, 가정을 가진 자의 의식으로 바뀌는 데는 적어도 3년은 걸립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을 살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합니다. 의식이 바뀌지를 않아요. 그러니 얼마나 어렵습니까? 결혼했다면 '여기가 내 집인데'하고 거기서 살 생각을 해야지 걸핏하면 친정생각 하여 전화하고, 이것 가져 오라 저것 가져 오라 합니다. 시집을 갔으면 이제는 친정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렸을 때의 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총각처녀 때의 일도 싹 잊어버려야 하는데 여전히 비몽사몽간에 있거든요.
예수를 믿음과 함께 우리는 내적으로 확연히 변해야 합니다. 순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새 술이 계속 발효되고 있는 것입니다. 부대도 같이 늘어납니다. 커지면 커지는 대로 내 마음도 같이 커져야 합니다. 내 의식도 바뀌어야 합니다. 내 생활도 바뀌어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확장되고 계속적으로 변화를 일으켜야 되는 것입니다.
'continuing transformation'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의미에서 개혁적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개신교입니다. 'Protestant'입니다. Protest가 무엇입니까?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옛 구조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교의 특징은 계속 바꾸는 것입니다. 거기에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구태의연한 것은 못봐줍니다. 모든 일에서 개혁적이어야 합니다. 옛날에 머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부분적으로 수정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아예 뿌리째 바꾸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 개혁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자기갱신에 힘써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오늘도 성경 읽다가 새로운 진리를 또 받아들이고, 옛것을 버리고, 소중히 몇십 년을 지켜왔더라도 오늘 깨달으면서 잘못됐다고 생각되면 확 버립니다. 늘 새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임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원래 수구주의자(守舊主義者)들이 옛것을 지키려고 하는데, 보수적인 이런 생각은 참 문제가 됩니다. 수구주의자들의 특징인즉 첫째는 자기가 잘못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각, 이 세계관이 잘못될 수 있다,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줄 몰라요. 내가 수십 년을 해온 것인데, 수백 년을 해온 것인데 이것은 잘못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몇백 년이 아니라 몇천 년을 해온 것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시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지 못하면 이것이 독선(獨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방식에 변화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경직되는 것입니다. 변화는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대로 있고 싶어요. 그게 편하거든요. 변화는 모험이므로 싫어요. 모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고자 하는, 변화를 거부하는 의식구조, 경직성으로 기울게 됩니다.
세 번째는 새것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에 해오던 것만 좋고 새것은 무조건 반대, 경시합니다. 배타주의에 빠집니다.
아주 많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네 번째는 자기 뜻에 변화를 거부합니다. 생각을 바꾸기 싫어해요.
생활 자체의 변화를 원치 않아요. 자기는 항상 옳고 옛것은 항상 옳아요. 변화를 원치 않습니다. 고집과 완고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 배후에는 안정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안주의식(安住意識)입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요.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변화를 싫어해요. 있는 그 자리에서 easy going입니다. 편의주의입니다. 편안하게 그대로 머물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일을 하려면 다 힘들어요. 많은 모험도 따릅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던 일 하는 것은 쉽습니다. 마치 낡은 옷 입은 것과도 같아서 편치 않습니까? 그러나 거기에는 발전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새 술은 새 부대에'---새 술이란 생명력이 있고 변화가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용하려면 여기에 합당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 자세가 요구됩니다. 때로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옛것을 버리는 용기, 새것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를 잘 준비해 가지고 새 술을 담아야 하겠습니다. 새 술이 움직이는 대로, 새 진리가 내게 말씀하는 대로, 새 진리가 내게 깨달음을 주는 대로, 나는 그대로 수용하고 언제든지 즉각적으로 순응할 수 있는, 따라갈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늘이라도 무엇을 깨달았을 때에는 즉각적으로 실천하십시오. 좀 있다가 하지, 내일 하지, 내년에 하지…… 이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오늘 당장에 그대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새 부대는 새 술을 담을 때에만 그 새로움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새 부대에 낡은 술 담아보았댔자 새 부대된 가치마저도 없어져요. 오늘 우리가 새 술 자체의 창조적 능력을 내 안에서 다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새 부대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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