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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비유(요한복음 2: 13 - 2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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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비유(요한복음 2: 13 - 22)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주제가 다양함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바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높은 가치의 비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 자신을 주제로 한 비유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포도나무다"하고 나는, 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나타난 비유는 나는 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쓰지 않으신 짧은 말씀이지만 모든 비유 중에 가장 주요한 높은가치의 의미를 가진 비유입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것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일컬어 표현하는 의사다, 선생이다, 혹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다 하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 기독교 교리의 초점이 되는 십자가와 부활을 주제로 한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문자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의미상으로는 '나는 성전이다'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를 말씀하심이며 "일으키리라"고 하신 것은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비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성전에 관계된 이야기는 이외에도 여러 곳에 있으며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성전에 대한 개념이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성전의 의미를 바르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께서 12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던 일입니다.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던 요셉과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잃은 줄도 모르고 집으로 내려가다가 뒤늦게 알고는 사흘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게된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아들 예수를 찾던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에서 선생들과 이야기하는 예수님을 보고는 어머니 마리아가 나와 네 아버지가 얼마나 근심하며 찾았는지 아는냐며 조금은 꾸중하는 듯한 말투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불과 12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시기를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2:49)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으로 엄청난 진리를 말씀하는 것으로 자녀를 키우는 우리들로서는 반드시 기억해야 될 말씀입니다. 자녀들을 교육하는 입장에서 할아버지집도 중요하고 삼촌, 이모집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으로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 겠습니까? 이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요 이 성전을 중심으로 내 인생을 가꾸어 간다는 인식으로 자란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제 겨우 12살된 나이에 나는 지금 내 아버지 집에 있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 집! 그러므로 이것은 아버지의 집이지 내 집은 아닙니다. 성전의 주인은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외에 누구의 집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세상 법으로 보자면 교인들의 소유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의미상으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아버지의 집에 아들인 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성전 된 의미인 것입니다. 어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자녀들이 둘러앉아 있는 이것이 곧 하나님의 가정이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거기에서 축제를 벌이며 아버지를 찬양하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정식구들이 함께 모여 있는 건물, 그 집을 가리켜 우리가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신령한 관계, 즉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자녀가 되어 모두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는 그러한 관계를 잘 설명해 주는 상징이 됩니다. 그 때문에 저는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잘 쓰지 않고 있는 천당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천국이라는 말보다 더 좋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보다는 하나님의 집이라는 개념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천국이라 하지 않고 천당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 이에 대한 하르낙의 표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한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이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곳 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다음 또 하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성전의 개념은 "기도하는 집"(21:13)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은 사람을 만나거나 사업적 인맥을 찾아 교제를 하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사업을 하고 친교를 합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 하나 예외가 없이 한사람, 한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을 위한 방법으로 내용을 담아 이루어진 형식과 예식이 우리의 예배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집이요 하나님께 예배하는 집이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구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도의 응답은 언제나 하나로 통하는데 그것은 복잡하게 자초지종을 들어 조목 조목에 대한 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이 한마디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응답이란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역경에 있든지 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그 한마디만 들려주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대로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데야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기도의 응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곳이 아버지의 집인 하나님의 성전인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 성전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집이,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강도가 찾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강도는 돈이 많은 곳, 또는 그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곳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작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집은 문을 잠그지 않아도 도둑이 들어갈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지난날 신학교를 다닐 때에 보면 625전쟁 직후라서인지 책가방을 들고 버스를 타게 되면 당시에는 소위 쓰리꾼으로 통하던 소매치기들이 칼로 가방을 찢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는 하였습니다. 그런데 항상 가방을 찢기는 사람만 찢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척 보아서 사장 같고 돈이 있을 것 같으니 찢고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을 찢어 보았자 헛수고일 것 같으니 안 찢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은 계속 가방을 찢기는 친구를 향해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해 보았습니다. "당신 가방만 자꾸 찢는 것을 보니 그 가방이 돈 가방으로만 보이는 모양인데 그것은 당신 관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그러니 아무래도 당신은 목사를 그만 두어야 되겠어"하면서 같이 웃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강도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리고 강도의 굴이 되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주 본질에서 떠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만 가득 있는 상태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강도가 드나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하신 이 말씀 역시 하나의 비유입니다. 강도의 굴혈이란 한마디로 강도들이 득실거리는 소굴이요 본거지며 강도질을 해서 얻은 것들을 감추어 두는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성전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냐며 책망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은 내용상으로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장사하는 집이 되기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 성전 안에서 되어지는 모든 행사가 어느 사이에 문화화 되어서 습관화되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저 그날이 되고 시간이 되면 나갔다가 아무런 감격도 없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음먹고 나가자니 별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나가자니 꺼림직하여 그저 들락날락하는 것으로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화화 된 교회가 구라파에 가보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는 본래적인 목적을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래의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는데 그 목적과는 다른 의미의 성전이 되어버렸으니 목적을 상실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강도의 굴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의식주의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형식과 의식에 치중한 결과 마지막에 남은 것은 내용이 없는 복잡한 의식뿐입니다. 많은 제사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말하기를 죄가 많고 도덕적 내용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식을 더 요란하게 했다는 말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상심리인 것입니다. 회개해야할 죄가 많고 감추어진 불의가 많다보니 오히려 더 경건한 것처럼 보다 많은 제사를 드리면서 야단스럽게 제물을 바침으로 죄 사함을 받는 형식을 취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가증한 제사로 인해 하나님께서 크게 책망하시면서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13)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공의와 진리와 사랑인데 그것들은 간데 없이 의식만 번거롭게 계속하고 있으니 이제 다시는 내 앞에 제물은 가져오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그 형식적인 제물에 아주 지쳤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이런 상황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적인 목적을 상실한 내용 없는 성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세 번째는 수단화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목적이어야 함에도 예배 자체가 수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수단이 되고 있는 사람들을 더러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야 아무개와 사귈 수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들이 모두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 나온지 며칠도 되지 않아서 추천서를 써달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등록할 터이니 추천서부터 먼저 해 달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례를 요구하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 당장에 세례 좀 주십시오 하는 경우가 다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세례가 그렇게 행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린다면 예배를 통해서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기복 사상에 빠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싼 제물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는 드려야하겠고 돈을 아껴야 하겠으니 정성 같은 것은 생각할 것도 없이 어떻게 해서든 제물로 합격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제물을 고르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제사를 드린 사람은 어떻게든 싸게 살려는 것이고 장사꾼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아서 돈을 벌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거래가 처음에는 성전 밖 멀리에서 행해지다가 점점 성전 가까이로 오더니 마침내는 성전 안으로 들어와 이제 성전 뜰에서 장사를 하게된 것입니다. 그 본래의 목적은 제물을 준비한다는 입장에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에 장사하려는 수단만 남았으니 그야말로 배로 하나님을 삼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적이 장사에만 있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는 전혀 생각이 없으니 성전이 더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경건해야할 경건이 없게 되고,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믿음이 없으며,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하나님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상화가 되고 미신화가 되며, 구조만 남고 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논리와 변증만 남아서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된다는 끝없는 이야기로 말만 많은 것입니다.

아무튼 지은 바 그 목적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함이 없는 성전이란 성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에게 예배하는 마음이 없다면 성전을 출입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확실한 예배를 드림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것이 없이 사람들만 와글거리면서 장사만 하고있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노하신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시며 소와 양을 성전 밖으로 내어쫓으시고 상과 돈을 엎으시면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게 됩니다.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하고 묻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긴 설명을 하시지 않고 간단히 잘라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변론을 싫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사람들과 긴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도 그와 같이 간단하게 말씀을 하시게 되는데 그 의미가 너무 깊은 것이어서 유대인들은 물론 제자들 도그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 뜻을 알게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음으로써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저들이 알 수 있도록 그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설명을 하셨더라도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설명을 듣고 깨닫기보다는 오히려 책잡기만 하면서 말만 많아 졌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생각으로 긴 설명을 하시는 대신 매우 간단한 말씀으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하시고는 그 이상의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자 저들 유대인들이 이 성전은 46년 동안이나 걸려 지은 것인데 네가 어찌 3일 동안에 일으킬 수가 있겠느냐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성전은 성전된 예수님 자신의 육체를 가리킨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전을 헐라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뜻하는 것이며,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것은 부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것은 다시 신령한 성전을 깨끗하게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성전(temple)에 해당되는 용어로 '이에론' 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성전 건물, 곧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뜰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는 그와는 달리 이에론이라는 말 대신 '나오스'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은 성전 전체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지성소, 하늘의 성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상징인 장소, 하나님의 법궤가 놓여있는 바로 그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건물이 서 있는 것 같았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허물어지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곧 낡은 성전을 헐어버리는 사건입니다. 그러고도 성전 건물 자체를 놓고는 실질적으로 헐지를 못하고 지내는가 하였는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어서 주후 70년 로마 사람들의 재 침공에 의해 이 예루살렘 성전은 송두리째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날 이후 2천년이 다된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다시 세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성전의 재건을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계속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일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이라고 말씀 하실 때의 그 의미는 근본적으로그 본래적인 목적에서 떠난 성전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경건이 없고 예배가 없으며, 하나님과의 만남과 믿음이 없는 성전! 그런가하면 장사치들의 생각으로 모든 것이 수단화 되어버렸으며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져 강도의 굴혈이 된 이 성전은 한 마디로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부분 수리함으로 목적대로 쓰여질 수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느 한 부분의 개혁이나 혁명으로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부분적인 수리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깨끗이 허물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인격을 좋게 생각하면서 나는 이점만 고치면 되겠다는 생각들을 하고는 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사치하는 버릇만 고쳐지면 되겠는데 하거나 혹은 나는 게을러서 조금만 부지런해지면 좋겠다는 등의 생각들을 합니다마는 문제는 정말 그럴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아는 그 문제를 오늘 이 시간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수십년 동안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헐어버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부분적으로 세울려는 생각은 하지 말며 부분적으로 수리하려고도 말 것입니다.

어느 하나 이것만 고치면 되겠지 하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다. 모든 인간적인 생각이나 노력 자체를 깨끗이 헐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죽었다가 또한 함께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흘만에 세우시는 영적인 부활이 있고서야 성전이 바로 설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성전된 의미란 무엇을 뜻함인가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된 성전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일은 속죄를 위한 제사입니다. 그 일을 두고 논하자면 예수님외에 달리 누구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성전에서 이루어지던 그림자적인 그 모든 상징과 예표가 본체이신 예수님에게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성전이다라는 말이 참으로 옳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제사장이 되시고 동시에 십자가의 보혈을 흘리시는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가정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집에 함께 살게 하십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까지 더러워진 인간적이고 수리 불가능한 성전은 이제 깨끗이 헐어버리고 깨끗하고 영원한 새로운 성전을 부활의 능력으로 세워야 한다는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3:16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권 3:17)고 말한 바와 같이 성전인 우리 모두는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이요 성령인 만큼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생각과 생활도 거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거룩한 분이신데 어떻게 그 집을 더럽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주인에게 합당한 거룩한 집이 될 수 있도록 구별되이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성전으로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더러워진 옛 성전, 내 마음의 옛 성전을 헐어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일으키신 영원한 새로운 성전을 항상 깨끗하게 지키면서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운 성전의 사람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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