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생명수 비유(요한복음 4 : 1 - 14)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십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륵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성경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약 9개월 동안 예루살렘 근방에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신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러신 후에는 핍박이 있는 것을 아시고 전도 노정을 바꾸어 갈릴리 지방으로 가시게 됩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기 위해 일단 동쪽으로 나가서 올라가 다시 서쪽으로 건너가게 되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 길은 먼 길이 되고 돌아가는 길이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직행길이 됨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 굳이 먼길을 둘러서 오고 가는 터입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땅을 더럽게 여기기 때문인데 이는 앗수르나 바벨론등의 강대국들이 북쪽 이스라엘을 점령해 있는 동안잡혼을 하므로 혼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며 그런 연유로 사마리아라고 하면 아예 간음한 여자와 같은 것으로 취급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성을 복구하고 성전을 재건하려 할 때 사마리아에 있던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고자 하지만 더러운 손이라며 거절을 한 것입니다. 이 정도로 저들은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그토록 더럽게 생각하는 사마리아 땅을 거쳐서 갈릴리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을 그렇게 보면 이것 자체만도 크신 사랑이오 크신 긍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올라가는 길에는 수가라는 동네가 있으며 거기에는 지금도 볼 수 있는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우물가에 앉아서 여행길에 지친 몸을 쉬시면서먹을 것을 사러간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때에 사마리아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오게 되는데 이렇게 햇살이 뜨거운 낮 시간에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것은 저들의 문화로 보아 이것은 필유곡절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언덕이나 산기슭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이 저만큼 사막과도 같은 곳에 있는 물을 길어다 먹는 시간은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지 않는 아침과 저녁시간입니다. 그러니까 하루 중 가장 시원한 시간에 온 동네 여인들이 와아 하고 떼를 지어 물을 길으러 다니는 것이며 이때에 누구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등의 뉴스가 교환됩니다.
그런데 이 이름 없는 여자 하나는 그 대열에 섞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뜨겁기는 하여도 아무도 다니지 않는 낮 시간에 이렇게 혼자 물을 길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오늘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보시자마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닐 수 없는 필유곡절의 여인임을 단번에 아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 여인 내면의 모습까지를 읽으신 예수님께서 그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자체가 예수님께는 굉장한 희생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긍휼과 자비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러면 이 사마리아 여인과 앞장에서 이야기한 니고데모와를 비교해 보면 이 두사람 사이에는 매우 큰, 어쩌면 극과 극의 차이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라 하면 유대인의 고관이면서도 바리새인과 그야말로 상류층에 속한 귀족입니다. 따라서 율레와 규례를 알고 지키는 일에 있어서는 최고봉에 이르는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정결한 귀족입니다. 여기에 비해이 사마리아 여인은 정욕적이요 무식한 사람이며 하류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팔자가 기구한 사람입니다. 물론 남편이 다섯이었다는 말은 다섯을 동시에 함께 데리고 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쩌다 불행하게도 다섯 번 옮겨 다닌 것인데 지금은 그나마 남의 소실로 있는 처지입니다. 이 여인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쫓겨다녀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어쨌든 이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살아온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9말씀에 의하면 참 과부는 한 남편의 아내였던 과부가 참 과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두 번 했으면 이미 참 과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결혼을 했다가 남편이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내고 말아야 과부의 자격이 있는 것이지 재혼을 했다가 두 번째 과부가 되면 그것은 성격상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유대 사람들의 관습입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당했든 과부가 되었건 간에 한 남자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내야만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무려 다섯 번이나 옮겨 다닌데다가 지금에는 남의 소실로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비참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실 때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하는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사실이 그렇기도 하지만 지금 남편과의 관계가 부끄럽고 또한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무튼 이런 부끄러운 일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는 함께 물을 길으러 다닐 수 없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니고데모와 이 사마리아 여인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을 편집한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한 다음 이어 다음 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다 만나주시고 구원해주셨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편집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차이가 있는 반면 또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니고데모는 영생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가하면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문제로 고민을 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내 처신은 그래서 이렇게 천대받고 살고 있지만 내 영혼만은 똑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서 하나님의 참된 딸이 되어야겠는데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자 맨 먼저 예배할 곳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곳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은 하나님을 찾아 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서 마음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 즉 영생의 길에 대한 고민과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진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은 예수님의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에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되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라는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며 이 사마리아 여인 역시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여기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가 다 영적인 진리를 육적인 것으로 이해하는데서 나온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이와 같이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이 니고데모에게 적용된다는 것은 굉장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그마치 바리새인이요 고관인 유대의 귀족과 천대받는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똑같은 수준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입니다. 어쨌든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신령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어서는 무식하기가 매일반이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아 잠깐 쉬시는 동안에 한 여인을 만나 이 여인을 구원하십니다. 언제나 그러셨듯이 물을 길으러 온 이 여인에게는 물을 비유로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해 주십니다. 물과 하나님 나라의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이것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마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하더라도 물을 마시지 못하면 살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들은 물을 찾아 헤매며 다른 어떤 먹이보다도 반드시 물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물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물은 앉아서 손짓한다고 해서 내 곁으로 와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있는 곳으로, 사막이라면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내가 찾아가야 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물을 찾는 길이요 목마름을 해결하는 길입니다.
심지어 동물의 세계에서는 목이 마르면 물의 냄새를 맡고 물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 어떤 생명체도 물이 없이는 살아 남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한번 미국에 있는 어느 한 개인 박물관에서 수천년 전 한 곳에 묻혔던 사람들의 뼈와 동물들의 뼈를 진열해 놓은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한 곳에 모여 있었는가를 설명해 놓은 내용이 바로 이 물을 찾아서였다는 것입니다. 설명에 의하면 다른 곳은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다 없어지고 거기만 물이 있는 웅덩이가 남아있게 되어 사람이나 동물들이 이리로 모여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이 조금 남게 되면 다시 파고 들어가고는 하다가 종내는 그 물마저 없어지게 되자 사람과 동물들이 다 죽게 되어 그대로 거기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다음 세 번째는 물을 길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깊은 샘이 있다하더라도 두레박으로 그 물을 길어 올리지 않으면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 앉아 계시면서도 목마름을 축일 수가 없으신 채 우물만 바라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물가에 살고 물 냄새를 맡는다고 물을 마신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문이 닫힌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하고 말하겠지만 내가 밝히 말하는 것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마 7:22-23) 이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았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내가 직접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하여 그것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 옆에 살았다고 될 것도 아니요 교회에 좀 다녔다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물을 직접 마셔야 합니다. 우물가에 왔다는 것으로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을 마셔서 내 것으로 삼지 않는 한 물에 대한 그 많은 이야기와 연구는 물론 우물가에 온 것까지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생명의 물! 이 진리의 말씀을 마심으로 시원함을 얻고 생명의 활기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그림에 떡이라는 말이 있듯이 물을 보기만 해서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물을 마셔야만 육체의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믿음으로 말씀의 생수를 받아 마심으로 비로소 영생하는 능력을 힘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실 이 여인을 통해 마실 물을 얻으시는 것을 계기로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시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이 "달라"고 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가장 좋은 부름이 되는 말입니다. 사람이란 이상하게도 내가 주는 것보다는 오히려 달라며 도움을 청하므로 저쪽 마음이 열리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전도방법을 사용하시면서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아마도 대단히 심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느냐며 의아해 하는 질문을 해 옵니다. 이제 목마른 사람이 물을 달라고 했으면 물부터 주고 봐야될 일인데 여기에 무슨 이론을 붙이고 주석을 달아야 하는지 생각해보면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영원한 생수를 주시기 위해서 이 물을 구하신 것인데 이 여인은 그 말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물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7:37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 귀중한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 되시고 생수가 되심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과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의 90%가 물이며 뇌의 80%가 물이고 살의 75%가 물이며 뼈에 있어서도 25%가 물이라고 합니다. 이 물로 체온조절을 합니다. 그 때문에 더우면 물인 땀이 밖으로 나옴으로 체온이 조절되고 추우면 물을 보호하도록 닫아버려서 땀이 나지 않도록 하여 체온을 조절합니다. 물론기관의 활동을 부드럽게 하고 영양을 공급하고 운반하는 것도 물의 역활인 것이며 그것에 의해 생명이 보존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구표면의 ¾이 물이라는 사실이고 보면 정말 생명의 기원이 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주후 200년대에 있었던 유명한 신학자인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물고기에 비유한바가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만 살수가 있고 모든 행동도 물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물이요, 그 안에 생명이 있으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하고 물을 마셔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고래라도 물을 떠나면 개미도 괴롭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 병원에서 링게르 주사같은 것을 맞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한번은 거기에 쓰여 있는 것을 보았더니 5%의 포도당이라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95%의 맹물에 포도당을 약간 섞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핏속에 물만 집어넣으면 산다는 것인데 아무튼 다른 것은 다 먹지 않아도 되지만 물은 마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링게르 주사법을 통해서라도 물을 섭취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물이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저것 다른 여러 가지를 먹는다 하더라도 물을 먹지 않으면 그 먹은 음식마저도 무효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배고픈 것도 두렵고 갈한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한 채 준비했던 물이 다 떨어져 목이 갈하게 되면 타고 가던 낙타를 죽여서 그 뱃속에 들어있는 물을 마신다고 합니다. 낙타로 말하자면 바다의 배와 같아서 낙타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갈 수가 없는 것이며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를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갈한 목을 축이기 위해 낙타를 죽이고 그 뱃속의 찝찔한 물을 마시고는 얼마간을 더 걷다가는 다시 목이타서 쓸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예수는 물입니다. 생명의 물입니다. 우리는 이 물에서 태어나고 이 물에서 소생함을 얻으며 이 물에서 씻김을 받아 생명의 힘을 얻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말한 우물(4:11,12)은 헬라원어로 '후레알'이라는 말로서 이것은 구멍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웅덩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동그랗게 구멍으로 깊이 뚫려 있는 웅덩이와 같은 물이기 때문에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야 되는 물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야곱의 우물과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실 때에는 '페게' 라는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말을 비교하면 후레알이라는 말은 물이 고여있는 우물을 말하는 것이며 페게라는 말은 솟아나는 샘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물을 보고도 이 여자는 고인 물이라고 하는 반면 예수님께서는 솟아나는 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밝은 눈으로 볼 때에는 샘물이지만 어두운 눈, 물길으러 오기 싫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것은 고여 있는 웅덩이 물이란 말입니다. 또한 억지로 먹고살기 위해서 마지못해서 여기까지 오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샘물이 아니라 고여 있는 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물을 우리에게 주셔서 매일매일 먹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물을 길으러 온 사람에게는 솟아나는 샘물이 되는것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물을 두고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고여 있는 웅덩이의물이 되기도 하고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샘물이라고 하면 이것은 신선한 물이요 깨끗한 물이며 활동성이 있는 양질의 물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갈해 집니다. 그러므로 목이 갈하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생명은 말씀의 생수를 마시므로 삽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렇게 교회를 찾아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은 바로 우물가를 찾아 나온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한 사진을 보면 교회의 강단을 꾸미면서 한 가운데 동그랗게 우물을 만들어 예배당이 생명의 샘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수를 찾아 나왔다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그 물을 마셔서 시원함을 얻고 소생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물물은 그릇이 있어야만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솟아나는 샘물은 그릇이 없이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 솟아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 머물 수가 없으므로 언제나 새롭고 깨끗합니다. 이와 같이 언제나 깨끗하고 누구나 아무 준비 없이도 가서 마실 수 있는 것이 이 샘물입니다.
샘물이라고 할 때 특별히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독일의 담슈타트에 있는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라는 유명한 개신교 여자 수도원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수도원인지라 출판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중에 특별히 박토와 싸우면서 농사를 짓느라 살충제를 쓰고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꿈에 하나님께서 슈링크 원장에게 나타나시어 "슈링크야 왜 너는 너만 먹을려고 하느냐? 버러지들도 먹어야 되지 않겠니?"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슈링크 원장은 "잘못하였습니다"하고는 그 뒤부터는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고 버러지가 끼는 대로 내버려 두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버러지가 많아지고, 버러지가 많아지자 새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람, 버러지, 새가함께 먹으며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계속 하고 있는데 사막처럼 박토인 그 땅 한가운데서 기적의 샘물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샘을 생명의 샘이라고 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종을 잘하는 그 수도원을 위해 보너스로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역사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수도원을 찾는 목적중의 하나가 된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영적인 샘물을 마신 자는 어떤 것인 가를 성경을 통해서 한번 살펴보십시다. 앞에서도 거듭 말했듯이 예수님께서는 내게로 와서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 하셨는데 이 사마리아 여인이 지금 그러합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는 동안 그 마음에 샘물이 터져 이제는 물길으러 온 물동이를 버려 둔 채 동네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며 전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생의 물을 마신 사람은 자기가 시원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샘이 터져 넘쳐남으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동네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마음에 진정 영생의 샘이 터진 사람은 벙어리처럼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는 전도하지 않을 수가 없고 봉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내가 주는 물은 목마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생하도록 솟아나서 자기가 시원함을 얻음은 물론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원함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우선 내 목에 갈 함은 없는 것이 며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시원함을 얻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답답해하는 것입니까? 이것이야말로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할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샘물이 나를 소생케 할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물이 많은 다른 사람을 소생케 한다는 진리를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샘물이요 생명의 물입니다. 우리는 이 물로 인해 목마름이 없는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전 비유(요한복음 2: 13 - 22) (0) | 2024.03.19 |
---|---|
선한 목자 비유(요한복음 10 : 1 - 18) (0) | 2024.03.19 |
십자가의 예수(요 19:17-24) (0) | 2024.03.19 |
십자가에 대한 요한의 증거(요 19:28-37) (0) | 2024.03.19 |
십자가를 지운 사람(요 19:10-16)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