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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운 사람(요 19:10-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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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운 사람(19:10-16)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앞에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에 대해 전반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재판의 후반을 공부하겠습니다. 서로의 연결을 위해서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더러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빌라도는 아무리 찾아봐도 예수가 죽어야 할 죄를 발견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해서든지 놓아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실제적으로 그에게는 예수를 놓아 줄 권세도 있었습니다.(19:10) 그러나, 결국 실패합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의 자태나 특히 침묵에서 마음이 위축되며 오히려 굴복 당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정말 원치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고 맙니다.(19:17) 막상 내어 주고 나니, 마음이 꺼림칙해서 명패에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습니다.(19:19) 이것은 유대인들이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 해서 잡아왔으므로 빌라도 자신은 할 수 없이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고, 여기에는 몇 가지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공부했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서 오늘 본문과 연결해 가겠습니다.

먼저 빌라도는 소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됩니다. 가령 학생들이 공부할 나이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배워서는 안 될 일을 배우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소극적인 생각으로 가능한 한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기피하려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가장 비참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됩니다.

또한 그는 공의와 진리를 생각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입장을 생각했습니다. 의인이 죽든 말든 자기 자신의 총독의 위치를 지키기에 급급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내 목숨보다 의와 진리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부자냐 가난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의냐 불의냐가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셨을 때도 배고프냐 배부르냐가 우선이 아니라, 그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지금 공의를 망각하고 자기 생각만 하여 인간적인 수단으로 해결을 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사람에게 죄인의 누명을 씌워 그를 바라바와 비교해서 석방하려는 재주를 부렸고, 결국 자기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인간적인 수단이나 음모는 자기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줄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도는 '나는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19:10)고 자기의 권세를 과시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의 이면에는,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잘하면 너를 놓아 줄 권세가 나에게 있는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즉 나의 권세를 왜 인정하지 않느냐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어떻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재판관인 빌라도에게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뺏은 일도 없고, 사람을 죽인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굶주린 자에게 먹였고 병든 자를 고쳤으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했는데 내가 어찌 죄인입니까?" 하며 자기 변명에 열을 올릴 것입니다. 예수도 보통 사람처럼 이와 같은 간청을 해 오기를 빌라도는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권세를 과시하고 싶었는데, 예수님은 조용했습니다. 살려 달라는 변명이나 애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빌라도가 자기에게 그런 권세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형편이니 얼마나 우스운 꼴입니까? 사실, 지금 예수님은 하루 저녁 구류를 당한다든가 아니면 몇 년 감옥살이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죽고 사는 엄청난 문제 앞에 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안해하거나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으니, 그것이 오히려 빌라도의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지금은 피고인 예수가 원고 가야바를 비판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령 "나는 죄가 없는데 가야바가 시기 질투해서 잡혀온 것"이라고 자기의 결백과 가야바가 죄인임을 말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이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가 빌라도를 업신여긴다는 무언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침묵은 "네 앞에서 궁색하게 변명하지 않겠다.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라고 빌라도에게 무언의 항변으로 들려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빌라도는 대단히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것처럼 "이 사람을 보라"고 알 수 없는 사람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정죄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판단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대체로 고민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기 변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대단히 모순된 재판을 하는 이 현장에서까지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에 답답한 빌라도가 자기의 권세를 강조하며 대답하라고 재촉하자 예수님은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19:11) 예수님은 이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빌라도나 밖에서 떠드는 군중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26:54)는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으며,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18:11)는 아버지의 뜻을 생각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실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십자가를 통하여 단번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의 역사를 생각하고 계셨으므로 빌라도가 무엇이라고 말해도 구구하게 변명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생각하셨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보잘것없게 여기신 것입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엄청난 역사만을 마음에 두고 그 일을 이루시는 데만 골몰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실수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에 이르자 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 이 순간을 참지 못하고 그는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이 패역한 놈들아" 하고 저주를 하며 반석을 두 번 내려치지 않았습니까?(20)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책망하시며 "너는 나를 믿지 아니했고, 나를 거역하고,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했느니라"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심판을 내리고 맙니다. 모세는 왜 이런 실수를 했습니까? 그는 원망하는 백성들을 보느라고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억울하고 모순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 사건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위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이루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자는 것입니다. 가령, 빌라도가 놓아준다거나 사람들이 훌륭한 예수라고 칭찬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있고, 그 속에 내가 있고, 그리고 나서 사건을 보면 그 사건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여 분노하며 돌을 던져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 때에 스데반은 하늘 보좌에 계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어서 오라고 두 팔을 벌리시며 내려다보시는 주님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비록 돌에 맞아 죽지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기도할 수 있었고 얼굴이 천사처럼 빛날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오늘 예수님도 빌라도가 가증스럽게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다고 위세를 부리며 말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아 위를 보게. 하나님이 잠깐 네게 권리를 주어서 지금 네가 떠드는 것뿐이다'라고 오히려 빌라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 즉 가야바가 원흉으로서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더 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19 : 12) 언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이사에게 충성을 했습니까? 실제적으로 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기 때문에 로마 사람들을 대단히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원하고 있습니다. 원래 악은 그 악을 이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천사의 음성으로, 때로는 진실인양 가장하여 상황에 맞게 적당히 변신하는 것입니다.

이단 교리를 보면 해마다 새로운 교리로써 새로운 것을 가지고 나옵니다. 진리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으므로 어차피 시작한 거짓말이니 계속 거짓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서는 별 흉칙한 소리를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면 가이사의 사람이 아니라고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그는 가이사의 명령을 받고 총독으로 와 있으니 총독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못박는 이유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것으로 문제를 삼았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를 정치적인 이유로 바꾸어서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인데, 이상하게도 한 데 섞여 많은 문제가 일어남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에 우리가 일본 치하에 있을 때 그들은 한국 교인들에게 신사 앞에서 절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했습니다. 이 때 일본 사람들은 우리 성도들이 일본 천황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죽였습니다. 종교적인 것을 정치적인 이유로 죄를 씌워서 정치범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종교적 의미에서 순교한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메시야냐 아니냐는 종교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정치적인 문제로 돌려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을 씌워서 정치적인 이유로 죽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군중들입니다. 대제사장과 많은 유대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이 왜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대제사장과 군중들이 합세해서 예수를 죽이기를 원한 것은, 자기들의 죄가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어두움이 통하는데 빛이 나타났으니 어두움 속의 온갖 것이 모두 노출이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가 살아 있으면 가야바가 살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가야바가 무너지는 자기를 회개 없이 세우려니 불가불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와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내가 나를 죽이지 못하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죽어야 할 나의 부분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신 일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성전 안에서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 남용으로 제물을 팔고 환전을 해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목적 하에 성도들을 위해서 시작한 일입니다만, 하다가 보니 점점 제사에는 마음이 없고 장사에만 열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오고가는 것이 제사보다는, 물건 사러 가고 물건 팔러 가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복음성가 테이프나, 무슨 무슨 기념품, 종교서적 등, 좋은 목적으로 파는 경우가 있습니다. 필자에게도 이런 부탁이 많이 옵니다만 성경책도 안 된다고 거절하고 맙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루살렘 성전과 같이 시장바닥이 안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다소 섭섭하게 생각하더라도 처음에 거절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전을 시장같이 만들어 '어찌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을 다시 들어서는 안 되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들을 모두 둘러엎고 몰아내셨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어 쫓겨나긴 했지만 그들의 체면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와서 회개하든지, 아니면 예수를 죽이든지 두 가지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자기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 앞에서 내가 죽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6:6에 보면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를 다시 못박는 아니,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무리 속에 있지나 않은지 한 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큰 뜻과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고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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