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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받으시는 예수님(요 18:12-14)(요 18:19-2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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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받으시는 예수님(18:12-14)(18:19-24)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 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이제 예수께서 심문 당하는 장면을 차례 차례로 공부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바로 가야바에게로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만은 안나스에게 먼저 갔다가 그리고 가야바에게 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목격자로서, 다른 복음서에서 취급되어 있지 않은 중요한 장면을 몇 가지 보충하여 추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언제나 사건에 나타난 형식적인 것보다는 사건 속에 흐르는 의미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오늘은 예수가 안나스 앞에 선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 사건의 원고는 가야바인데 안나스 앞으로 먼저 간 것은, 안나스가 뒤에서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유행어로 안나스는 원격조정자입니다. 안나스는 성경에서 본대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입니다. 그는 주후 5년부터 15년까지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지도자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은 종신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종신직이 아닙니다. 70세가 되면 아무리 건강하고 목회를 할 수 있어도 은퇴를 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종신직으로 대표적인 예는 가톨릭의 교황과 일본의 천황입니다. 숨이 넘어가지 않는한 아무리 일을 할 수 없어도 그 직책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신직인데 대제사장은 제사장의 우두머리로서 종교계에 있어서는 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다스릴 때였는데, 로마의 정치 능력으로서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종교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보다 종교를 더 중요시하는 민족으로, 전체주의였습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토달리즘으로 어떤 상황에 가서는 정치, 종교, 문화, 사회가 완전히 하나로 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진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는 로마가 유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신적으로는 대제사장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일 년에 세 차례나 예루살렘 성전에 온 백성들이 모여서 일주일씩 축제를 하며 퍼레이드를 벌이는데 이모임은 막강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가끔 반란이 일어나 로마를 당황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반란이 한번 일어나면, 이것은 종교성을 지녀서 목숨을 건 저항이었으므로, 로마로서는 도저히 그들을 다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묘안을 생각해 내어 안나스를 유도했습니다. 그것은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에 대한 권리를 마음껏 행사하도록 권력의 폭을 넓혀 주고, 또한 경제적인 부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니, 자연히 대제사장의 권력 남용으로 오는 부패까지도 묵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한 가지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종신직인 대제사장직을 1년마다 재임명하는 제도였습니다. 임명 제도를 하되, 임명자는 물러서는 대제사장이 맡게 하였으므로 안나스는 자기 가문이 오랫동안 이 권좌를 누리기 위해 수락을 합니다. 여기에 안나스의 큰 잘못이 있습니다. 순교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법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대제사장의 위치나 제도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안나스는 이 제도를 수락해서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고 종교적인 정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물러설 때는 법적으로는 아들에게 물려주고 뒤에서는 여전히 안나스가 조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아들들을 모두 앞세워서 조종을 했고, 이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사위까지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당시에는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가 현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부적으로는 가야바가 처리하는 것 같지만 뒤에서 안나스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므로 정신적인 종교지도자의 대표자는 여전히 안나스였던 것입니다. 안나스는 오랫동안 그 권좌를 누리면서 로마의 권력의 배경으로 부정축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특히 성전에 바치는 제물을 검사하는 권력을 남용하여 반드시 자기들이 파는 물건만 바쳐야 하게끔 해서 비싼 금액으로 독점을 하여 권력과 금력을 함께 쥔 막강한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체포되자마자 안나스에게 바로 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을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야바는 꼭두각시였고 형식적인 대제사장이며, 실질상의 대제사장은 안나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가야바를 소개하기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더라"(18 : 14)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11:47 이하에 기록된 말씀으로 이미 우리가 공부한 내용입니다. 다시 한 번 옮겨 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11:47-50), 여기서 50절의 말씀을 요한이 다시 인용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무사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정치적인 이유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시고 인기가 높아 가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고, 그러면 예수의 능력으로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로마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니 예수 한 사람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해결이요,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인 해답입니다.

적은 사람을 희생해서 많은 사람을 살린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지혜를 짜낸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옳은 말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에는 공리주의가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 사람의 죄인보다 한 사람의 의인이 더 중요합니다. 죄없는 한 사람이 희생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가장 불신앙적인 인간철학을 말해버린 것입니다. 한 사람이 희생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가 의인이냐 죄인이냐 하는 것이지, 결코 몇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이든 먼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나에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만일 그 문제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어떠한 희생을 지불해서라도 그 뜻을 이루어야 할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불의의 일이라면 설사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도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불의를 유익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하나님의 뜻이나 의나 진리는 전혀 무시하고,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편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어리석은 이야기를 진리처럼 말한 사람입니다. 백 사람이 주장해도 틀린 것은 틀린 것이요, 한 사람이 주장해도 옳은 것은 옳은 것입니다. 여기에 가야바의 큰 실수가 있습니다. 이 실수로 인해 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주동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안나스 앞에 예수님이 섰습니다. 첫째로, 안나스는 예수님의 제자와 그 교훈에 대해 묻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18:19-21) 안나스가 예수님의 제자와 교훈을 몰라서 묻는 것입니까? 지금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예수님 혼자 섰습니다. 가령, 안나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제대로 대답하셨다면 어떻게 전개될 것 같습니까? "당신의 제자는 누구요?" ", 어부들입니다." ", 형편없는 자들이구만, 그런데 지금은 다 어디 갔소?" "모두 도망갔습니다." "정말 형편없구만, 그래 당신은 그 동안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쳤길래 이 지경이오?" 이런 말이 오고 갈 수 있음을 상상해 봅니다. 아니 안나스는 예수님의 가장 아픈 점을 찌르기 위해 지금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 동안 제자들을 길렀고, 5천 명이 당신을 따른다고 떠들썩했는데, 다 어딜 가고 지금 혼자 여기에 서 있느냐고 빈정대고 싶은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예수님의 모습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교훈에 대한 안나스의 질문에 대답하시지 않습니다. 사실 대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묻는 질문이니까요.

그러면,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죄목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결론은 다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기로 하고 체포했지만, 죄목은 예수님의 대답에서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이 의도를 알고 계신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저들의 의도적인 질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은 일이 더러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청소하실 때 제사장들이 물었습니다. "뉘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 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곤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은 모르겠다고 대답을 회피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도 "나도 무슨 권세로 이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리라"며 대답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 문이 닫혀 있어 들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6에 보면 진주를 돼지에 던지지 말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완악한 사람들을 돼지에게 비유한 말씀입니다. 지금 안나스에게는 예수님의 어떤 대답에도 상관없이 죽이기로 이미 결정을 하고 묻는 것이므로 사실상 대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들은 자에게 물어 보라, 비밀로 말한 것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본문에서는 대제사장이 누구라고는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다음 예수님께서 대답을 회피하시자 옆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쳤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1822-23) 예수님은 이 형편없는 사람들의 불의를 참았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복음 2253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라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시면서 이미 결심하시고 앞으로 전개될 십자가에 대해 참아야 함을 각오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위선을 참아야 했고 그들의 간계를 참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난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난까지도 당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셨습니다. 위선을 참고, 불의를 참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이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의 성취를 생각하면서 견디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떤 사건을 만날 때, 그 사건 자체만을 들여다보면 신앙에서 떨어지게 되며 누군가를 원망하게 됩니다. , 악한 사람 대항하다 보면 내가 더 악해지고, 거짓된 사람 미워하다 보면 내가 더 거짓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끝으로, 안나스는 왜 예수를 죽여야 했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많은 부정한 일들에 대해, 이제 회개할 시간이 왔습니다. 그가 시장 마당으로 만든 성전을 예수께서 청소하셨고, 그 말씀에 권위가 있자,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려고 하니 불의한 일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불의한 권세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예수를 없애야 했던 것입니다. 언제나 나 자신이 왕이 되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해야 할 시간에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됩니다. 죄인이 의인처럼 살려면 의인을 죄인처럼 죽이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어느 때나 그랬습니다.

우리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늘 순종하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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