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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믿음의 사람(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이제 예수님의 장례하는 모습을 공부하겠습니다. 지금 눈앞에 안식일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 전에 시체를 장례해야만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안식일을 얼마나 엄하게 지키는가는 구약성경에서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안식일날은 거의 일하지 않으므로 잘못하면 점심을 굶기가 쉽습니다. 정말, 수천년 동안 내려온 전통입니다. 그러니, 2천년 전인 그 당시에 예수님의 시체를 밖에다 두고 안식일을 지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서둘러 장례를 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유감스러운 것은 이 때쯤 도망갔던 베드로가 나타나서 장례를 좀 도왔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만, 그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은 무서워서 도망을 갔더라도 이제 다 물러가고 시체만 남았으니, 베드로 이하 다른 제자들이 다 모여서 장례를 치루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 나사로 등 다 어디에 갔는지 조용합니다. 단지, 여자 네 명과 요한이 예수님의 시체를 맞게 됩니다. 또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상당한 돈이 있어야 장례할 수 있듯이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덤은 주로 동굴이어서 동굴 하나를 만든 다음, 그 후손들을 계속 거기에다 넣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자연적인 동굴이 많아 그것을 무덤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동굴이 없으면 벽돌이나 대리석으로 많은 돈을 들여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 잘 만들어 놓으면 몇 대 위의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계속 한 곳에 시체를 보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으로 사용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은, 어째서 새로 장만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추측하기로는, 첫째,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무덤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넣을 수가 없었던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이 부득이 새 무덤을 만들어 죽음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셉은 돈이 많고 존경을 받는 지위에 있었으므로,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낡은 무덤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부터 새 무덤을 만들어 자기가 들어가고, 그리고 아들, 딸, 손자 등 앞으로 몇 대를 내려가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웬만한 부자가 아니면 새 무덤을 장만한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와 후손들을 위하여 소중하게 무덤을 만들었고, 그 무덤에 예수님을 먼저 모셨습니다. 자기가 먼저 죽었으면 그 무덤에 들어가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께서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예수님을 자기보다 높여서 먼저 모시고, 그리고 자기가 들어갈 참입니다. 그런 뜻으로 이 무덤에 예수님을 장례했습니다. 가문을 위해서 사용할 소중한 무덤을 예수님께 드리는 귀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가운데서 흐뭇한 장면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마터면 예수님의 장례식이 사도 요한과 네 여인만으로 대단히 초라하고도 쓸쓸하게 지낼 뻔 했는데, 의외로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아리마대 요셉으로, 그는 용감하게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내용으로 마가복음 15:43에서는 요셉이 "당돌하게 시체를 요구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돌하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설명할 때, 누가복음 23:51이나 마가복음 15:43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고관이요, 부자임을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로 할 때에 가편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가능한한 못박지 말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경건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돌하게 감히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고, 그리고 자기 무덤을 제공했습니다. 굉장한 용기요 헌신이었습니다.
다음은 니고데모가 나타난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요한복음 3장에서 자세히 공부한 바 있습니다. 그는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물었던 사람으로 예수님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중생의 도리를 잘 몰라, 그것도 모르냐고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 역시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며 상당히 지체 높은 사람이기에 인간적으로 볼 때는 갈릴리에서 온 청년에게 면박을 받아야 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므로 중생의 도리를 알고 돌아갑니다. 만일에, 혈기를 부리며 "젊은 사람이 심하구만" 하며 예수님의 말씀 도중에 나가버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침착하게 끝까지 듣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니고데모의 훌륭한 점은 당장 성급하게 판단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두고두고 생각을 하는 점입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향품과 세마포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세마포와 향품은 옛날에 귀족과 왕족 정도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장례할 때 필요한 물품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지만, 돌아가신 후 장례 치를 때에는 최고로 왕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의 몸을 쌌던 수의에 대해 얽힌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튜링이라는 곳에 있는 예수님의 수의 이야기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이 수의는 길이가 4m 36cm, 폭이 1m 10cm인 세마포인데, 문제는 이 천에 예수님의 시체를 감쌌던 흔적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여러 방법으로 연구한 결과, 예수님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분명한 것은 머리에 상처가 있고 손발에 못자국이 난 사람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란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굉장한 온도가 아니고서는 몸의 흔적이 그 세마포에 눌러서 그대로 자국이 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뜨겁게 역사해서 그것이 세마포에 반사되어 자국이 난 것입니다. 천을 그대로 사진 찍어 네가티브로 된 것을 현상해 보니 사람의 모습이 좀더 잘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흡사 예수님 같았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수의를 예수님의 수의로 잘 모시고 있습니다. 이 수의가 발견되고 과학자들이 분석하여 발표함으로써 온 세계가 한 번 놀랐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입으셨던 수의인지는 하나님밖에 모르는 일입니다만, 어쨌든 방사선과 같은 굉장한 열기가 아니고서는 세마포에 그와 같은 상처의 흔적이 나타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에 놀라운 열기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부활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튜링의 세마포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와 있으므로 궁금하신 분은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예수님은 물론 부활하신 증거까지 말할 수 있으므로 계속해서 연구 중에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아주 귀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체를 쌌다고 하는 그 자체가 오묘한 섭리입니다. 그냥 알몸으로 내버려두었다면 이러한 증거는 없지 않겠습니까?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과학자들에 의해 세 마포를 증거할 수 있음은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에 충성을 바친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언제 어디서 말씀을 들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니고데모도 한번 밤중에 찾아온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두 사람 다 고관이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요, 존경받는 지성인이며, 특히 하늘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철저한 성서적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는 숨은 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감정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 의지적인 사람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조금만 자극을 주면 당장 예수 믿겠다고 쉽게 결단을 합니다만, 신빙성은 없습니다. 언제 또다른 자극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성적인 사람은 결단을 쉽게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 깊이깊이 생각하고, 일단 결정을 내렸어도 자기 체면, 위신, 지위 등을 생각해서 말을 잘하지 않습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합리적 이론에서 확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확신에서 합리적 이론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결론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의심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일단 믿음 위에 선 뒤에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심이 많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일 때가 문제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경우에는 가장 확실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없는 믿음은 비판 없이 무너집니다. 그러나, 비판 있는 믿음은 비판 앞에서 튼튼하게 서서 신앙을 변증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신앙은 화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중에 깊이 들어가고, 특히 환난 때에 견고하게 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성도들도 두 가지 현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극적인 변화로 분명하게 중생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태부터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 특별한 감동 없이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는 희미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대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은 전자에 비해 자기의 신앙이 든든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자의 신앙은 어떤 계기, 즉 사건을 만나면 저 깊숙이 자리잡고 있던 저력이 나타납니다. 반드시 야단스럽게 화끈하게 믿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용한 중에 깊이 든든하게 자라나는 것이 지성적 신앙입니다. 분명하고 저력이 있으므로 시간이 갈수록 확실해집니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인정은 하면서도 충성이 없고, 자기를 부정함으로 소극적이 되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 사건 앞에서는 신앙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을 고치거나 오천 명을 먹였을 때에,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적을 보고도 그것을 메시야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보고서는 그 분이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받아들입니다. 십자가 중심 신앙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병 고침을 받았으니 감사하고, 그러므로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다가 다시 병들면 어찌합니까? 돈좀 벌었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고 감사합니까? 그러다가 손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병 고침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람은 약간 걱정입니다. 죽을 때에는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가장 귀한 증거요, 예수가 그리스도 되는 증거의 초점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안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였습니다. 물론, 생각은 다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당신이 행하는 이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미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용기가 없고 위탁이 없었습니다. 지적으로 인정은 하나 전적인 위탁이 없었단 말입니다.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 모습을 보고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확증하게 됩니다.
사람의 참 모습은 죽음에서 드러납니다. 진실은 죽음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끝까지 보아야 하고 마지막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끝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주위에서 보면, 살아 생전에 멋있는 사람 같았는데, 마지막에 가서 실망을 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끝을 잘 맺도록 소원하는 적은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지휘관인 백부장과 함께 지키던 사람들이 예수가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눅 23:47)라고 죽여 놓고서야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정녕 의인이었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중생의 도리를 말씀하시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느니라"고 니고데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이하면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보아야 네가 정신을 차리겠구나. 그날이 되어야만 네가 알겠구나"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씀이 사실화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고서야 모든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이제서야 예수가 누구며, 이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합니다. 깨달은 이상 더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성적 신앙, 숨은 신앙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 빛을 나타나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체면, 명예, 지위를 다 포기하고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를 동정했다가는 예수님과 공동 운명에 들어갈찌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두 도망간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이 위험한 시간에 모든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 합니다. 얼마나 중요한 신앙입니까?
베드로와 앞의 두 사람과의 신앙을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 전에, "죽을찌언정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큰소리를 치고서는 막상 십자가 앞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은 주를 따르겠다든지 부인하지 않겠다는 장담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조용히 숨어서 비밀로 주를 믿다가 십자가 사건 앞에서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고, 귀한 일을 하게 됩니다.
순교사에 보면, 어느 훌륭한 순교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에 타 죽게 되는데, 죽는 순간 그는 스데반처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며 천사처럼 죽어갔습니다. 군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서워 예수 믿지 않는다고 부인하던 사람들이 그 순교자의 장렬한 모습을 보고 "나도 기독교인이요" 하며 수백 명이 뛰어나와 크리스천임을 밝혀서 그대로 불 속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떳떳하게 순교하는 모습을 보자, 숨어 있던 신앙이 불쑥 튀어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모습을 보고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처럼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각오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말없이 죽으신 예수님이지만 이미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을 사로잡아 참 제자 되게 하신 것입니다. 환난이 있을 때에 거짓 신앙은 무너져버리지만 숨어 있는 깊은 신앙은 용기 있게 나타납니다. 참된 신앙이란, 환난과 핍박 속에서 자기 모습이 나타나고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겨자씨 만해도 살아 있는 믿음은 결정적인 시간에 드러나게 되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도 이 두 사람과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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