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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안에 있는 비유(4장 21~31절)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역사 안에 있는 비유를 중심으로 본문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비교 논술하면서 교리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끝내 은혜가 승리할 것이며 은혜가 율법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며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본래적인 것이 은혜임을 말씀합니다. 율법은 은혜의 뒤에 있으며 단지 임시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역설합니다. 은혜의 영원성-은혜를 높이 찬양하는 말씀이 본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여지도 없습니다. 임시적인 것과는 이제 관계를 끊어야 한다, 율법의 원래 의미는 남았지만 형식은 끝을 보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7 : 4)"하고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와 은혜에 속한 자의 그 소속 관계를 말씀합니다. 율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공부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 은혜에 속한 자-이들의 운명과 자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본문은 이들의 관계성을 설명해나가기 위하여 유명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바울이 비유에 뛰어난만큼 본문에서의 비유 내용도 매우 특별하여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24절)"-굉장한 논리입니다. 여기서 '비유'라는 말은 '알레고루메나'입니다. '파라볼레'라고 하는 말과는 다릅니다. 보통 비유로는 일반적으로 '파라볼레'를 씁니다.
이 '파라볼레'에서 영어의 '패러블(parable)'이 나왔고, '알레고루메나'에서 영어의 '알레고리(allegory)'가 나왔습니다. 패러블과 알레고리가 의미가 아니듯이 '파라볼레'와 '알레고 루메나'도 서로 뜻이 같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이를 '비유'라고 번역해놓았습니다. 우리말로 옮기기가 어렵습니다마는 학문적으로 번역할 때는 보통 '은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표기상으로는 '알레고루메나' 여서 은유이지만, 내용을 해석해보면 '파라볼레' 즉 비유적인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비유라고 하여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한다든가, 씨뿌리는 이야기를 한다든가, 바닷가에 궁을 짓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비유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을 비유의 소재로 쓰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아브라함의 가정-그 천오백 년 전의 옛날 이야기를 지금에 회고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신학방법론이 되겠습니다. 옛날의 역사가 우연한 역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분히 계시적인 역사요, 그 사건 속에 바로 오늘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야 했는가? 오늘을 위해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기독교인의 신앙,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은혜에 대한 신학을 바탕으로 옛날 이야기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학술적인 용어로 'Christianized Old Testament'라 해서 구약성경을 신약적인 입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사건 하나하나가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소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하는 은혜 중심적인 신학적 차원에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교리를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여기서는 두 사람을 대조시키면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바로 이삭과 이스마엘입니다. 이삭은 은혜의 대표자요 이스마엘은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대체로 비유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 전부를 해석하려고 덤벼서는 안됩니다. 말하고자 하는 요점, 그 중심만을 취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봅시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비유의 중심 내용은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문제입니다. "불한당(不汗黨) 맞은 사람의 이웃은 과연 누구냐" 하고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합니다. 우리 민족이다, 이방 민족이다 가릴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이웃 관계를 깊이 이해해야 됩니다. 가령 "고지대인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여리고로 내려가니 강도 만날 수밖에"-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주막은 어떻고 돈은 어떻고 나귀는 어떻고 하면서 이것저것 자꾸 마음대로 해석하려 해서도 안됩니다. 잘못입니다. 비유를 해석할 때에 조심해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중심에서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이야기의 모든 면을 일일이 해석하려 드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자세입니다. 그 중심만을 생각해야 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미 '더하지도 감하지도 말라'하고 경고한 바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감하는 죄가 아니라 더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비유를 해석하는 일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일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사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갈대아 우르는 온통 우상을 섬기는 곳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아브라함의 집도 우상을 섬겼다고 합니다. 우상 섬기는 마을, 우상 섬기는 집에 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1~2)."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떠납니다. 떠날 때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의 축복을 주십니다. 첫째, 지시할 땅으로 가라-땅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일단 고향을 떠나라, 그러면 내가 어딘가에 너와 네 후손들이 영원히 거처할 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땅에 대한 약속이 첫째요, 둘째는 자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도 이와 같으리라(창15: 5)"-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받았을 때에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요, 아들이고 딸이고 간에 하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아들을 줄 테니 고향을 떠나라-이 말씀을 믿고 부모와 친척을 떠납니다.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부터 낯선 곳으로 갑니다.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고 일단 떠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주십니다. 드디어 가나안땅에 이릅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5)" 말씀하십니다. '여기가 약속의 땅이구나' 하면서 이제야 흐뭇해합니다. 여기에 장막을 짓고서 나와 우리 자녀들이 대대로 살 것이며, 장차 이곳에서 큰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꿈을 가지고 그 땅에서 살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둘뿐이지만 앞으로 자식을 주시어 자자손손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바는 바로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라, 그곳에 머물러라, 자식을 줄 터이니 네 아내와 더불어 다복하게 살아라-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과 동시에 그 믿음을 따라 구체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순종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그곳에 거해야 하고 아내와 더불어 가정생활 자체가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웬일입니까?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듭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큰일났구나! 약속의 땅인가 굶어죽을 땅인가'-한순간 의심한 아브라함은 그만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거기에서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아내를 빼앗길 뻔하였고 자신도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돌아오게 됩니다. 왜 이 땅을 떠났느냐-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흉년이 들건 홍수가 나건 우박이 떨어지건 무슨 재난이 닥쳐온다 해도 끝까지 이 약속의 땅에 머무를 것이지 어딜 가느냐? 네가 이 땅을 버렸으므로 앞으로 네 후손들이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다-하나님께서 약속을 버린 자에게 주시는 마음 아픈 징계입니다. 그러나 종당은 돌아오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는 그 말씀을 믿고 꼬박 24년을 기다립니다. 아내 사라는 이미 단산을 하고 쭈글쭈글 늙어갑니다. 상식대로 하여 단산하면 이제 아이 낳기는 틀린 일이 아닙니까? 90세나 된 할머니가 딸이건 아들이건 자식을 낳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참 답답하시구나'-이래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24년을 기다려서 드디어 25년째 되는 해에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마는 그 24년을 참지 못하고 10년쯤 기다리다가 생각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내가 해석을 잘못했나보다. 꼭 사라여야 하는가 뭐. 아무 여자라도 취하여 낳으면 내 자식이지.' 아브라함은 합의하에 사라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편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애굽으로 가게 된 사건이나 이스마엘을 얻게 된 사건이 모두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는 믿었는데 가끔씩 휘청휘청 흔들렸습니다. 이 사건들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생긴 부산물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고 따라야 하는데 언제는 잘 믿는 것 같지만 가끔씩 그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때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라옵니다. 안 생겨날 일이 생겨납니다. 없어야 될 일이 있게 됩니다. 다 불신앙의 소치로 생긴 부산물입니다. 그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고두고 괴롭힙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을 보십시오. 낳아놓은 자식이 없어집니까? 이스마엘, 그 서자가 끝까지 말썽이 됩니다. 아랍사람들이 바로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수천 년을 내려오면서 계속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머슬람(moslem)'이 거의 아랍사람들에 의해서 주동되고 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단산한 아내 사라를 보고 믿음이 약해져서 이같은 실수를 한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1절)"하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하여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단산한 자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 할 수도 있다, 나를 믿고 사는 네가 왜 이렇게 휘청거리느냐, 정신차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 말씀이 너무 송구스러워 엎드려 무릎을 꿇습니다. 아브라함도 참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한번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사라가 네 아들을 낳으리라-낳을 줄로 믿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롬 4 : 19)" 행동을 합니다.
단산한 아내, 아흔 나이의 늙은 아내를 그가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사건에서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혜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한 자는 온전한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은혜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부자유한 사람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도 걸림돌이 생깁니다. 항상 가시가 되고 어려움이 되어 사건들이 겹치기로 일어나곤 합니다. 다시말해 온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은혜자가 고통을 당하게 되고, 자유를 상실하게 되며, 은혜생활을 하는 데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동기, 그 본래성까지 깊이 분석하면서 내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사라와 하갈입니다. 사라는 조강지처요 자유인이며 약속의 자녀입니다. 약속을 함께 받은 자유인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반면 하갈은 몸종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았지만 그래도 종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노예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이스마엘은 육체의 산물입니다. 사라를 만나는 것과 하갈을 만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하갈에 대해서는 자식을 얻기 위하여 잠시 몸을 빌린 것뿐입니다. 정신도 사랑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제 경험을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언젠가 한 자매님이 제게 와서 괴로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결혼을 한 후 남편을 잃은 채 혼자서 외롭게 지내는 분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고생스럽게 살아가는데, 어느날 점잖고 착한 신사가 나타나 프로포즈를 합니다. 그도 아내가 세상을 떠나서 혼자라고 했습니다. 근 1년 동안 시쳇말로 연애를 합니다마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자매님은 그 신사를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둘다 한번 결혼했던 사람들이니 식도 올릴 것이 없다 하여 마침내 함께 살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딸아이가 났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낳은 지 채 일주일도 안되어 본처라는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제가 그 본처까지도 만나보았습니다. 본처는 의사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결혼생활 15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어디 가서 하나 낳아가지고 오라" 한 것입니다. 남편은 본처와 합의하에 연애를 하고 그 자매님과 함께 살았던 것입니다. 본처는 이렇게 된 바에야 사례를 후하게 할 터이니 아이를 달라고 합니다. 내 남편의 아이이기 때문에 데려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못주겠다고 버팁니다. "왜 못주느냐?" "당신의 남편이 나를 사랑하여 낳았기에 줄 수 없다." "사랑한 게 아니라 잠시 당신의 배를 빌린 것이다." 참으로 야단입니다. 재판할 데가 없어서 저에게 왔습니다마는 전들 어디 재판하기 쉽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이 낳은 자매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아이를 못주느냐?"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당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이를 얻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면?" 인물을 본 것도 아니고, 지식을 본 것도 아니고, 더구나 사랑도 없이 단순히 아이를 잘 낳겠구나 싶어 당신과 함께 살았던 것이라면 어떡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계획적으로 당신한테 접근한 것 같다"고 말했더니 결국 아이를 주고 맙디다. 다시는 그 남자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다고, 일년 동안 실수한 것으로 치겠다고 합디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취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이나 신령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신혼부부들을 위하여 축복기도할 때에 말하는 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육체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인간적 행위일 뿐입니다. 본문에서도 '육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라와 하갈 두 여인으로부터 분명히 아들 둘이 태어납니다. 이삭은 사라로부터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믿음을 좇아 은혜를 좇아 얻은 자식입니다. 그러나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인간적이요 믿음을 떠나서 얻은, 즉 인간의 행위를 좇아 얻은 자식입니다. 그 동기가 전혀 다릅니다. 자식이라고 다 자식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이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같은 아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식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정말 귀한 자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자식을 두고 싶지도 않은데 어쩌다 잘못 생겨나서 '떼라, 마라' 말이 많은 경우를 흔히 봅니다. 떼려다 불쌍한 것 같아 우물쭈물 낳아버렸습니다. 그렇게 낳아놓고는 좀 귀찮을 때마다 '태어나서 말썽'이라고 투덜거립니다. 저주하면서 키웁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목사님은 초등학교 5학년인 막내가 있는데, 그 밑으로 다시 또 막내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집에 막내가 둘이 됐구만" 하고 웃곤 했습니다. 언젠가 부부동반해서 함께 가볼 데가 생겼는데 그 사모님이 아이 때문에 못가게 되었습니다. "괜히 늦게 태어나서 말썽"이라고 합디다. 몇 번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나서 제가 안되겠다 싶어 정식으로 사모님께 충고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이가 그 소리를 알아들으면 얼마나 기막히겠느냐, 이심전심으로 알아듣는다고 생각하고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사모님, 다시는 그런 소리 안하겠다고 다짐합디다. 그후에 그 집에 놀러갔더니 이제는 웬걸 그 아이가 없으면 사는 재미가 없을 뻔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약속의 자녀가 무엇입니까? 사라라는 여자와 하갈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한 가정 한 부부에도 약속의 자녀가 있고 육체의 자녀가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본문에 보면, 특별히 '두 언약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와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요, 메시야의 약속이요, 영원히 이어지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하갈 이스마엘에게 주신 약속은 아주 비참합니다. 광야에서 살 것이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주실 때에도 두려운 약속을 하십니다.
결국 아라비아사람이 되어 광야에서 거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율법을 대표합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좀더 깊이 설명합니다. '이삭은 신령한 예루살렘이다'-위로부터 온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합니다. 26절에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요 신령한 예루살렘, 곧 신령한 교회를 말합니다. 지정학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어느 성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령한 예루살렘-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교회, 바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교회로부터 우리가 태어나지 않습니까? 교회는 참 중요합니다.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태어나 그 말씀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또 말씀 안에서 훈련을 받고 봉사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 신령한 어머니는 바로 이삭과 사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를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이요, 신령한 것이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업이 있고 자유함이 있고 자녀로서의 특권이 있습니다. 사실 이삭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비록 늦게 태어났지만 아브라함의 가정의 당당한 장자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그는 이 가문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만이 참자녀라는 말입니다. 이스마엘은 세상적이요 육체적입니다.
더구나 노예성을 가졌습니다. 노예이기에 자유가 없습니다. 유업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점을 오묘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24년을 기다리지 못하고 10년만에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이 14살이 되었을 때에 드디어 이삭이 태어납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는 이스마엘 하나뿐이어서 그런대로 애지중지합니다마는 사라가 자기 아들을 낳고나니 이제 태도가 바뀝니다.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자기임에도 불구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이삭은 어리고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열네 살이나 위입니다. 같이 놀면서 이삭을 쥐어박기도 하고 야단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종의 아들이 주인의 아들을 감히'-이렇게 생각하여 문제가 됩니다. 사라 역시 이삭이 이스마엘로부터 희롱당하는 것을 보는 고통을 겪으며 하갈과 아스마엘을 미워합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거 골치거리구나' 싶습니다. 두 여자를 데리고 살자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하나라도 힘든데 보통일이 아닙니다. 틈에 끼여 고생합니다. 게다가 아들도 각각 하나씩 둘입니다. 퍽 난감합니다. 아브라함, 중간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이 있을 때면 으레 하나님께서 해결사가 되어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아, 내가 책임질 테니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주어 광야로 내보냅니다. 이스마엘 모자는 그로부터 광야에서 살게 됩니다.
여기에 문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본디 불신앙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은혜의 자녀를 핍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핍박을 합니다. 믿기는 믿지만 아직 어리기에 먼저 관성화된 율법적 의식들이 은혜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이러한 사건들을 알레고리로 들어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설명합니다. 오늘도 율법적으로 세상적으로 살다가 예수를 믿게 된 경우, 온전히 은혜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 사는 것은 잠깐입니다. 잠시 후에 다시 율법이 닥쳐옵니다.
예전의 그 율법적인 생활, 세속적인 생활이 유혹하여 은혜자를 그만 쓰러뜨리고 핍박을 합니다.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을 내쫓으라'-이스마엘을 내쫓아 관련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깨끗이 잊어버려라-지난날의 잘못은 잘못대로, 불신앙에서 생긴 것은 그것대로 잊어버려 끊으라고 강조합니다.
여러분, 신앙적으로 한 일이면 오래 기억할 것이요 불신앙적으로 한 일이면 한시바삐 끊어버릴 것입니다. 관련이 길면 언젠가는 가시가 됩니다. 내쫓아 관계를 끊으라-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령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에 하던 버릇대로 술을 마시면 그것이 언젠가는 시험이 됩니다.
옛날의 좋지 못한 친구들과 여전히 어울려 관계를 맺고 있으면 어느 때든지 핍박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쫓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하여 자유인은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살아야 한다-여기에 무한한 자유가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서 네 마음대로 하라'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제 매일 것이 없습니다. 거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는 불신앙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앙에 놓였던 사건에 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율법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 온전한 자유를 누려라-이래야만 신앙생활이 바람직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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