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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비유( 마태복음 12 : 38 - 4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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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비유( 마태복음 12 : 38 - 42)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 비유의 말씀은 앞장에서 살펴본 좋은 나무 좋은 열매의 배경이 되는 그 사건에 뒤이어 주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귀신이 들려 눈도 멀고 벙어리가 되어버린 한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 주심으로 보고 들으며 말할 수 있는 놀라운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는 크게 왜곡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무서운 선언을 하시면서 동시에 나무와 실과는 언제나 하나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러자 또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특별한 요청을 하게 되는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요청이란 다름 아닌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 주소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저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 복음에 의하면 같은 내용의 표현을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 주소서! 이러한 요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요청입니다. 왜냐 하면 이미 표적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나가는 표적, 그리하여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참된 표적이 바로 눈앞에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적의 뜻은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다른 표적을 구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본문에 말씀하신 대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대단히 슬픈 탄식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다른 표적은 보일 것이 없다! 다르게는, 너희들 같은 사람들에게는 달리 더 할 이야기가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도 되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설명, 다른 사건, 다른 기적을 보여 줄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의 그 구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으며 그들에게 대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지금 저들은 "표적을 보여 주소서"라고 했으나 표적을 보면서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눈앞에 충분한 표적이 있음에도 그 표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억지로 이해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새로운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참으로 많은 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는 사건은 물론 매일같이 신문을 통하여 보게 되는 사건, 더욱이 요즈음에는 텔레비전이라고 하는 괴물이 있어서 가만히 앉아서도 많은 사건을 직접 대하듯이 계속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을 영적인 지혜가 있어서 잘 분석만 하게 되면 그 사건 하나하나에서 하나님의 사건을 접할 수가 있고 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아무리 엄청난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에는 더 더욱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얼마나 놀라운 표적들을 보았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문둥병이 깨끗해지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장님이 눈을 뜨며, 수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시는 등 그 많은 사건들이 때를 따라 계속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표적을 보여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 하면 가만히 기다리면 보게 될테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재촉하여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이 메시야라고 하는 표적이 무엇이냐는 뜻에서의 질문과도 같은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에서 나온 그 요청 자체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또한 저들 자신의 완악함을 노출시키는 그러한 요구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무리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가 부른 까닭이라!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표적을 못 본 것이 아닙니다. 보았기에 먹었지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놀라운 기적에 참여하여 그 떡을 손에 쥐고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왜 표적을 못 보았다는 것입니까? 분명 표적은 있었고 기적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떡을 먹었을 뿐이지 표적은 보지 못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말은 곧 기적은 보았으나 표적은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 표적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세메이온'이라 하는 것으로 영어로 말하자면 사인(sign)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과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제 같은 사건을 놓고도 "초자연적이다" "놀랍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하는 식의 나타난 현상 자체만을 두고 거론할 때 이것은 기적이요 이적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의미를 알면 그것은 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신령한 진리가 보이는 사건으로 나타나는 이것이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장소에서 그 떡을 친히 보며 먹었다 하더라도 "! 그것 참 희한하구나!"하는 거기까지만 아는 사람은 기적을 본 사람이지 그 사건에서 표적을 본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표적으로서의 사건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건이든 사인(sign), 징조로 볼 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당하는 사건들도 그 하나하나가 모두가 다 표적인 것입니다. 다가오는 심판의 표적이요,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표적이며 더 큰 사건의 표적입니다. 그럼에도 그 표적됨의 의미를 모르면 그는 표적을 못 본 사람이요, 따라서 표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를 말씀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난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알아야만이 그 표적을 본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말씀에는 사건으로 나타난 말씀, 귀에 들리는 말씀, 우리가 손에 들고 읽는 기록된 성경 말씀, 성령으로 내 마음을 감화시키시는 말씀, 성찬식이 보여 주는 상징적인 말씀 등, 그러고 보면 말씀은 참으로 여러 모양,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모든 표적들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이미 주신 말씀이 충분히 있음에도 그것은 모르고, 때로는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다른 것만 찾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요즈음에도 보면 여기 성경이 있고 매일 매일 전해지는 설교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꼭 이상한 환상을 보거나 꿈꾸기만을 좋아해서 그 희한한 것 한번 보았으면 하고 소원하는 분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별난 꿈이라도 한번 꾸게 되면 그것으로 무엇이 다 되는 줄 알고 야단인데 이런 것이 다 표적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앞에 놓고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요나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모세 오경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모세 오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지서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는데다가 특별히 이 요나서 같은 경우는 이방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사실은 소중하게 생각지를 않는 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요나서를 인용하심으로부터 이 요나서의 가치가 높이 올라가게 되었고 더욱이 선교학적 의미로서의 요나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방 사람들에게 전해진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이방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그것도 변변치 않은 선지자에 의해 전해진 것입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예레미야나 이사야, 에스겔같은 선지자들에 비하면 이 요나 선지는 저만큼 아래에서 아예 등급에 들지도 못할 정도로 밖에 보이지를 않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이 요나를 크게 높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점 또한 깊이 생각해야 할 요점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는 우선 요나의 표적 그것으로부터 이해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곧 지난날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과 이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 속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실 그 사건을 연결지어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을 알고 보면 이 비유는 비유 자체가 예수님께는 굉장한 희생이 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 하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어떻게 이 요나 같은 사람에게 비유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동기도, 과정도, 결과도 아예 감히 비교될 만한 내용의 것이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어 역사적 한 작은 사건인 요나의 사건과 자기를 동일시해서 비유하고 계십니다. 원래 비유는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비하시킴으로 비로소 그 의미가 통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에 대한 이해를 위해 요나의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요나가 탔던 배는 니느웨로 가는 배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배입니다. 그런데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이 될 지경에 이르자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고자하여 제비를 뽑게 되고, 이 때에 그 제비가 배 밑층에서 잠자고 있던 요나에게서 뽑히게 됩니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며 지은 죄를 묻게 됩니다. 당시에는 너무 답답하다보니 제비는 뽑아 보았지만 사실 그 사람을 물 속에 던져 넣을 결심까지는 없었던 터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요나 자신이 먼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말을 하자면 이 배에 타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죄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엄격히 따지면 저들도 다 죄인이요, 어쩌면 그 속에는 도둑이나 강도도 있을 수도 있고 요즈음 말로는 밀수범이나 간첩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배에는 의인들만 탄 것이 아니라 죄인들도 있습니다마는 오늘 이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 원인은 그 속에 요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요나에게 있어서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기억할 것은 그 배에 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의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어느 배가 무사히 건너갔다고 한들 다 의인이 탄 것이겠습니까?

오늘 이 풍랑이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있어야 했던 풍랑입니다. 그러기에 요나 자신이 말하기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며 바다에 던질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선원들은 차마 던지기를 주저할 때에 바다는 더욱 흉용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더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마침내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자 그 즉시로 바다가 고요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나에게 이어서는 그 순간 잠깐이지만, 사실은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을 한손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는 하나의 대속물인 것이며, 그러기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그 배는 무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무사해지고 평강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사흘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사흘 후에 그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버림으로 본래 가야 했던 니느웨를 향해 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부활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대신 죽었고, 그리고 그 후에는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니느웨성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지금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 나온 사건과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실 사건이 유사한 점이 있다 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는 말씀에 오늘의 맥락을 이어보면 이는 곧 예수님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이 표적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오늘 나타나신 사건의 표적됨이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째 되는 진리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분명히 귀신 들렸던 사람이 깨끗해졌음에도 저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중생한 후에야 비로소 오늘 이 귀신 들린 사람이 깨끗해졌던 사건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는 요한 복음 219절에서도 매우 강한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이 한 다음에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고 묻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이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여러분! 참으로 오묘한 말씀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신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그 모든 말씀, 그 모든 이적의 표적된 의미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표적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 알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다음으로 생각할 좀 더 깊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 나 자신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신령한 체험이 있고야 표적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육적이고 옛사람적인 요소가 예수를 함께 십자가상에서 완전히 죽어 버려야만이 비로소 신령한 눈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표적을 못 알아보는 것은 바로 이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기이한 사건을 보고도 모르며 매일같이 만나도 몰라요.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엄청난 기적을 보고도 몰라요. 그러면서 또 다른 표적, 또 다른 표적하며 계속 표적만 찾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어디메에 있느냐고요? 이것은 영적으로 장님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신령한 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식한, 그러면서도 완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에게는 말씀의 고통이 있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알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도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되듯이 영적인 안목이 있고 영의 눈이 뜨인 사람은 모든 사건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보아도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신문을 펴고 끔찍한 사건을 대할 때에도 거기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생하지 못한 자, 예수와 함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어버리지 못한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로 보아도 모르고 들어도 모릅니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리 교회를 들락날락하여도 그것으로 알게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저는 간간이 교인들로부터 "목사님 사실 저는 예수를 10년이나 믿었습니다마는 그 동안은 그저 이러저러한 이유로 들락날락했는데 요즈음에 와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에 재미가 나기 시작했습니다."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 들리는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 의미를 알게 되며, 기도를 하여도 내 마음에 응답이 오는, 그리하여 예수 믿는 것이 정말 재미가 있는 그때부터가 비로소 예수를 믿는 것 됩니다. 그 이전의 것은 교회에 다닌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하고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마음에 이해되는 바가 하나도 없어요. 그러고서도 어떻게 예수를 믿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옛사람인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이 사는 이 역사,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야 예수님의 표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좀더 나아가 오늘 본문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는 사실을 안 다음에야 표적을 이해한다는 말씀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셨던 것은 나의 죄를 위한 것이요, 그리고 그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나의 의를 위한 부활이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게 된 후에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적의 의미를 알게 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된 후에야 성경을 이해할 수가 있고, 이제는 어디를 읽어보아도 내게 주시는 말씀이요, 시간 시간 들려주시는 말씀의 전부가 내게 주시는 고마운 말씀들로 들려진단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다음으로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문제는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나의 사건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는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하는 사건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 있고, 그리고 두번째는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날에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제 왜 니느웨 사람이 정죄할 것이냐 하면 저들은 요나의 말을 듣는 즉시 곧 회개하였으므로 회개치 않은 사람들을 정죄할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그럴만한 것은 요나의 전도가 별 시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전도를 듣고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이라면 니느웨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아 싸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왜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훌륭하냐 할 때 가만히 보면 요나의 심보가 좋지를 못합니다. 역사적으로 본래 이 앗수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원수의 관계에 있어 왔습니다. 따라서 원수의 나라 수도 니느웨성에 사는 사람들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요나의 생각에도 잘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명하여 거기에 가서 전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때에 요나는 전도하여 회개하게 되면 40일 후에 망한다고 하신 그 말씀이 취소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가만히 두면 그대로 망할 것을 왜 전도할 것인가! 하고서는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약한 심사입니까? 그런데 이제는 그러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에 다시 도망했다가는 아주 죽을 판이라 할 수 없이 전도를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심정의 요나가 무슨 말로 어떻게 전도를 하였을 것 같습니까? 진정 애절한 음성으로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성읍을 심판하시려고 합니다. 빨리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세요"하고 다닌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 마디 40일 후에 망한다고 그것도 상상해 보면 크게 외치지도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듣고 회개할까봐 조용조용히 돌아다니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 가면서 그저 "40일 후에 망한다" "40일 후에 망한다"하고 다니다가 이제 그 날짜가 다가오자 성에서 나가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는 그 아래 앉아서 저 성읍이 어떻게 되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할 때에 그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십니다. 이때에도 요나는 내가 이래서 안 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예 이러실 줄 알았다는 식으로 항의를 하면서 이제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나의 심사는 분명 아주 고약한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를 하였으며 그로 인해 구원을 받아 온 성읍이 무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선배 목사이신 황 은준 목사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을 늘 생각하고는 합니다. 목사로서 말씀을 전하게 될 때 성령에 사로잡혀서 할 때도 있지만 일을 하다 보면 1년 열 두 달을 항상 좋은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도 있는 것이어서 그런 때에는 사실 설교할 마음이 없으면서도 억지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 은준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렇게 마음이 원하지 않는 상태를 극복하려면 그 때엔 요나를 생각하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할 용기도 없고, 전할 마음도 없어요. 그럴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 저 요나를 생각하라! 요나는 처음부터 전할 마음이 없었어요. 그래도 그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는 구원을 받았더란 말입니다. 만약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를 두고 생각했다면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못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 누가 회개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전함에도 말씀 자체는 중요한 것이었기에 듣는 순간 가책을 느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곧 회개를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많은 표적을 보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너희들! 심판날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너희를 정죄하리라!

그리고 이어 또 하나의 예로써 남방 여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남방 여왕은 곧 시바여왕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멀리 에디오피아로부터 여기 이스라엘까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배워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오늘 이렇게 찾아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믿지 않는 사람을 놓고 보면 심판 때에 시바의 여왕이 저들을 심판하리라는 말씀은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요나에 비유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찮은 선지 요나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요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회개를 하였으니 니느웨 성읍의 사람들이 참으로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시바 여왕의 겸손과 그 인격이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합니까?

여러분! 오늘 이 세대에도 표적은 충만합니다. 이를 보기 위해서는 영의 눈을 떠야 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사건, 부활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며 그리고 은혜 속에 살게 될 때 이제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이나,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건 속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주님의 표적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나아가 바른 응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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