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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리와 양의 옷(마태복음 7 : 15)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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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와 양의 옷(마태복음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이제 주신 본문 말씀은 앞장에 기록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고의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애를 쓰는 자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겠으나, 문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어렵고 외로운 길을 가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삼가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위험한 길을 가게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나아가 이는 적극적으로,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 그리고 좁은 길을 가면서 항상 조심하여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 기록된 "삼가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는 '프로서케테'라고 하는 것으로 "대단히 정신을 차리라" "조심하라"는 뜻의 말입니다. 그리고 또한 계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한번 조심했으면 끝나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밝은 정신으로 나의 길, 나의 생각, 나의 목표가 잘못 되고 있지나 않는가를 살피면서 삼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거짓"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 원어로는 '푸슈도'라고 하는데 이는 거짓이라는 뜻의 말도 되지만 가면을 썼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곧 거짓된 것이겠지요. 그래서 속과 겉이 다르며, 진실치 못한 그런 선지자를 삼가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지도자를 잘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크나큰 복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좋은 선생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이라면 나는 자연히 수학을 좋아하게 되어 전공을 하게도 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가 수학 선생님을 몹시 싫어하는 경우라면 나는 수학과는 원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선생님의 존재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계속 배워야 하고 따라서 여러 형태의 선생을 만나게 될 것이나 그때마다 매우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나를 가르치는 선생, 그 권위자를 조심스럽게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선생은 나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하고, 내 영혼, 내 생명까지도 좌우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입니까? 더욱이 선지자라고 하면 영적인 지도자인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라고 하면 그야말로 나의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것으로, 더 이상 중요할 것이 없을 만큼 중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하고 중요한 것이 또한 가짜가 많다는 것입니다. 귀한 것에는 언제든지 가짜가 있어요. 이제 보세요. 다이아몬드가 귀하고 비싸다 보니 가짜가 생기는 것이지 만약 그것이 돌멩이처럼 흔하고 값싼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가짜가 생기겠습니까? 쉽고 흔한 것에는 가짜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흔히 말썽이 되고 있는 가짜 박사, 가짜 졸업장, 가짜 면허증도 다 그런 연유에서요, 또한 사랑이 귀한 것이다 보니 사랑에도 가짜가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귀한 것에는 가짜가 있고 거짓이 동반되는데 이 거짓이라는 것은 언제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겉으로는 양의 모습이나 속은 이리라며 그 이중성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양면성을 가지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또 이 거짓인 가짜의 특징은 언제나 진짜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버섯을 두고 보더라도 독버섯은 더욱 예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써바이블(survival)이라고 하는 특수 훈련을 받는 군인들이 아무런 가진 것도 없이 무인지경에 던져져서는 1주일간을 견디며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경우, 이제 그 1주간을 견디어내기 위해서는 풀뿌리든 벌레든 닥치는 대로 먹고 배를 채우며 지내야 하는데 이 때에 주어지는 단 하나의 주의 사항은 "예쁘게 보이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같은 버섯인데도 예쁘게 보이는 버섯은 독버섯이라는 말이에요. 그런 면에서 가짜는 언제나 더욱 아름답고, 또한 그렇지 않고서는 속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자들이 화장을 하더라도 적당히 해야 품위 있게 아름다운 것이지 여기에서 지나치게 되면 이제는 속이 썩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아무래도 두드러지게 예쁘게 치장을 했으면 좀 수상한 거예요. 그리고 지나치게 친절한 것도 이상한 것이기에 우리는 흔히 "이상할 정도로 친절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일단 한번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요. 어쨌든, 이렇게 가짜가 진짜 보다 아름답게 보이고 거짓말은 더욱 친절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이 가짜의 특징은 뒤에 가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좋고, 처음 사귈 때에는 그렇게 친절하고 좋은데 이제 며칠 가지 않아서 그 본색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끝이 매우 나빠요.

이제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비록 이리라 하더라도 끝까지 양의 옷을 입고 있으면 차라리 괜찮다고도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홀랑 벗어버린 채 그 본색을 드러내고 나서니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본색을 드러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모시며 이 한 분만을 유일한 선생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생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 분만을 좇아 다소곳이 뒤를 따른다면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경고의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좁은 길이기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제자들에게 친절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시고자 하시는 당신을 만류하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가차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끝까지 좁은 길로 가겠다는 사람, 십자가의 길로만 가겠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 한눈을 팔게 되니 거기에 함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길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들을 하다 보면 어느새 거짓 선지자를 따라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이유, 다시 말하면 거기에 속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자기도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는 속이는 자가 속게 되는데 이는 자기는 남을 속이고도 자기는 속지 않을 줄 알지만 언제든지 속이는 자가 속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뒤에는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에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크게 사기를 당했다든가, 혹은 사업에 실패를 하고서 괴로워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가만히 보게 되면 그 실패의 원인 가운데 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욕심이 지나쳤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실패할 정도로 왜 거기에다가, 그 많은 투자를 해 왔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욕심이 지나쳤기 때문이에요.

어떤 장로님께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장사란 그저 최소한 5%, 그리고 15%의 이익이 나오면 좋은 것인데 언젠가 한번은 60% 남는 장사가 있다고 하기에 거기에 몽땅 투자를 했다가 그대로 다 날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10%이상 남기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를 했다며 "60%이상 남는 장사라면 도둑놈이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 마음 자체가 속게 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뒤에 부도가 났다고 하여 울 것도 없어요. 그저 자기 욕심이 지나친 것이나 회개할 것입니다. 속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따라서 속인 자만 나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속은 자에게도 상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속에 나에게도 무엇인가 비슷한 것이 있으니까 주거니 받거니 한 통속이 되었다가 사고가 난 것이지 처음부터 워낙 맞지가 않았다면 벌써 틀렸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지가 않겠습니까? 사실은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한번만 같이 한탕하자는 심사였다는 말입니다. 결국 속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속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여기에 선호도가 있고 허영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후서 43-4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귀가 가려워서! 이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입니까? 그러니까 귀가 가려운 허황한 그런 것만 꼭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실한 이야기, 이로운 말은 쓴 약과 같아서 다 싫고 이제는 달콤하고 화려한 것에만 마음에 끌려가게 되니 결국은 속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화려한 허영심이 속는 이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세번째는 투기성에 편승하여 쉽게 얻으려는 마음입니다. 좁은 길로 갈 마음이 없어요. 아예 넓은 길에서 쉽게 얻고 싶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공부를 하는 일에 있어서도 내가 열심히 하여 내 실력으로 내 길을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고 싶은 심사에서 수고는 적게 하고 그러나 성적은 좋게 얻고 싶어서 컨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옳은 길에는 지름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지름길을 찾으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특별히 신앙적인 투기성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는 수고는 하지 않고 "주여"하여 해결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풀어 나가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다 미신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릇을 하나 사더라도 가짜를 사고 싶지 않거든 값싼 것을 찾아다니지 마세요. 그저 잘 모르겠거든 값비싼 것을 사면 그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값싼 것만을 찾아다니니 속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상에 어디까지나 쉬운 것은 가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설령 그리하여 얻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바라지도 말고 소유하지도 마십시오. 그리하여 얻어진 것도 결코 나에게 유익하지를 못합니다. 땀흘려 번 돈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짓겠다며 미국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에 가서 돈을 넣고는 "주여"하고 잡아당겼다고 합니다. 세상에 도박판에 가서 "주여"를 찾아 가지고 무엇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행심(射倖心)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쓸모 없는, 그러면서도 무서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신앙에서라는 사행심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실은 그 마음속에 그러한 사행심이 있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들을 따라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며 고달프고 외로운 길입니다. 더는 값싼 것을 찾거나 쉽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이제 또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다가올 결과에 대하여 너무 연연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동기가 좋고 방법이 좋았으면 그것으로 되었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않고 그저 결과만 좋게 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다 잘못 된 것입니다. 결과에 연연하여 마구 탈취하려고 드니 그러는 중 에 정당한 방법에서 빗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결과는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고, 주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을 할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고는 그 전폭을 하나님께 맡기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야만이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속았다면 이는 너무 빨리 목적에 도달하려고 하는 조급한 마음이 원인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양과 이리를 한번 비교해 보십시다. 양이라는 것은 매우 온순하고 순결한 동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비유하여 양이라 하셨고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별명이기도 합니다. 이 양은 순하기도 하지만 둔하기도 하여서 제 집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그 때문에 그저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가는 매우 착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착하고 온순한 것을 상징해서 불러 주는 이름이 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라고 하는 것은 이 양과는 정반대의 동물입니다. 이 이리는 물어 찢고, 싸우고, 피 흘리며, 양을 잡아먹는 악한 짐승입니다. 이렇게 정반대 되는 두 동물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들어 말씀하시면서 양의 옷을 입은 이리! 라는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양의 옷"이라는 표현을 공동 번역에서는 "양의 탈"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이리!를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행전 202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향한 유언장과도 같은 마지막 부탁의 말씀 중에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이리가 들어와서는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고 물어 찢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는 이와 같이 물어 찢고 피를 흘리게 하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이 두 동물을 놓고 따르라고 한다면 세상에 아무도 이리를 따라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과 이리는 아예 그 생김새나 성격에 있어서 너무도 분명하게 다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참으로 버젓히 양의 탈을 쓰고 양의 무리 속에 함께 있으므로 이제 사람들이 속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0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을 이리로, 그리고 제자를 양으로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성도가 양과 같은 것이라면 이 포악한 이리가 가장 거룩한 성도의 탈을 쓰고 그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이요, 그것도 선지자의 모습으로 있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양의 탈, 양의 옷을 입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이 아닌 외모를 말하는 것으로 속은 철저히 이리이지만 겉모양은 착하고 순한 양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명심할 것은 이 이리가 양과 같다고 할 때에는 그가 쓰는 양과 같은 말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에는 잡아먹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마는 겉으로는 양과 같이 순하고 친절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선한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매우 좋은 약속! 성공적인 약속!을 하고서는 잘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기대를 걸게 합니다. 그러나 그 속은 이리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속아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양의 모습으로 양의 언어로 흉내를 내어 보이도 이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이리일 뿐이요, 결국 어느 시간에 가서는 본색이 나타나게 되고 결정적인 시간에 가서는 이리가 되는 파괴적인 선지자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그러면 왜 양의 옷을 입었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접근과 소통을 가능케 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적과 수단이 다른 것이지요. 원하는 바 목적은 죽이는 것이지만 그 수단은 친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단 사상과 거짓 선지자들은 대체로 친절하면서도 화려하고 거창한 약속을 주지마는 그 속에는 전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계속 예언해 주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에 예레미야 614절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하였으니 이것이 거짓 선지자의 말이며, 또한 에스겔 2227절에 보면 "그 가운데 그 방백들은 식물을 삼키는 이리 같아서 불의의 이를 취하려고 피를 흘려 영혼을 멸하거늘"이라고 하면서 그 잔악상을 이리와 같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의 공통점은 예레미야 811절에도 꼭 같은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는바 이는 평안이 없는 데에도 "평안하다","평안하다"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듣기 좋은 말만 들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시대에 있어서도 예레미야는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제 유다 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결코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할 것이라며 안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저들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정 자기 민족을 사랑하며 부르짖는 예레미야의 회개를 재촉하는 말에는 끝까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한 피난길에서 저들은 에레미야를 돌로 쳐죽이고 만다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의 말은 아픔이 있어요.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언제나 평안만을 약속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선지자라고 하게 되면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바 그대로 가감이 없이 직설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예 듣는 사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미사여구(美辭麗句), 듣기 좋은 말만 하려고 듭니다. 또한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말씀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짓 선지자는 친절한 말과 듣기 좋은 이야기로 저들 백성을 자기에게도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가만히 보면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좋은 말, 화려한 약속으로 이리 저리 몰아서는 모두를 자기에게도 인도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나를 따르라! 나를 위하라!는 것이니 바로 거기에 거짓 선지자의 본색이 있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결코 양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양을 위해 존재하는 목자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양을 해칠 뿐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참 선지자는 타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들은 바의 멸망을 그대로 외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를 지적하며 그 회개를 외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도 보면 소위 신학자라는 사람들 중에서도 안일하고 듣기 좋은 말로써 심지어 이런 말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과거의 죄, 현재의 죄, 앞으로 지을 미래의 죄까지 새삼스레 빚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은혜만을 강조하며 그 문란함이 율법도 도덕도 없는 상태란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지옥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그 끔찍한 영원한 지옥을 만드실 수 있겠는가며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만약 굳이 지옥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대합실이나 유치장 정도이지 영원한 형벌의 상태는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은 사랑이신데"하는 이 표현도 거짓 선지자의 말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그러한 말에 속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면서 율법을 부인합니다. 그리하여 회개는 외치지 아니하고 그저 "죄 사함 다 받았다"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여 전부 듣기 좋은 말만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먼저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합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그대로 가면 망할 것이라고 계속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듣기 좋은 말만 들려주고 있으니 거기에 속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넓은 길의 함정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가끔 우리는 실제로 그런 경우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매우 중한 환자가 있는데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제는 더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우리가 보기에도 죽겠어요. 그렇게 되면 몹시 괴롭지만 목사로서 그에게 믿음으로 죽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신앙 고백을 시키며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기도만 하면 그저 나을 줄 알고 "주여! 살려 달라"며 목소리를 돋구어 기도를 하고 야단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 거짓 선지자는 이제 믿기만 하면 나을 것이라며 당장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을 놓고 안수 기도를 합니다. 문제는 그러는 동안에 그 환자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믿음이 없어서 죽었다고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 죽기 직전의 그 일각들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데 그렇게 보내야 했더란 말입니까? 이제는 자신의 죽음을 깨끗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진실한 말을 전해 주어야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산할 것을 청산하고, 회개해야 할 것을 회개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죽겠다고 하는 통에 주여! 주여! 하다가 그냥 죽어버리고 말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를 놓친 것이냔 말입니다. 이처럼 진실한 말을 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듣기 좋은 말이란 하려고만 한다면야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히스기야 왕처럼 간절히 기도하면 적어도 15년은 더 살 것이요"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이란 얼마든지 있고, 또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쑤시고 뼈가 깎아지는 한이 있어도 그 메시지가 진실한 것입니다. 이제 내 귀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후서 21-3절 말씀을 보면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진리를 훼방하며, 만들어 낸 말을 가지고 사람을 미혹하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리가 아닌 조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된 진리는 언제 어디서나 변하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타협이 없는 직설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아픔과 괴로움이 있으며 회개의 촉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율법과 심판을 알게 되며 나아가서는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심령으로 주님의 뒤를 따라 좁은 길을 가겠노라는 바른 각오가 서 있는 사람은 아예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빠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삼가라"는 것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하면 거짓 선지자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할 때에, 어디까지나 내가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갈 마음만 가지로 나간다면 거짓 선지자들은 자연히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에 내가 허황한 생각을 가지고 안일하고 넓은 길로 가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이제는 어느 사이에 아는 듯 모르는 듯 거짓 선지자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희 거짓 선지자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니라!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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