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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새(마태복음 8 : 18 - 22)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특별히 서기관과 랍비라고 하는 신분의 지도계층이 있었습니다. 랍비라고 하면 랍비학교를 졸업한 율법에 대한 전문가로서 회당에서 가르치는 선생을 말함인데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목사라고 부르는 그러한 신분의 직입니다. 그리고 또한 서기관이라는 것은 주로 성경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관과 랍비라고 하는 이 두 신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성경에 대한 전문가들입니다. 저들은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배우며 그 뜻을 보다 깊게 재해석하여 실천케 하는 그러한 특권과 의무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으로 그 본래적인 의도를 매우 충격적으로 말씀하시고는 하셨습니다. 그 한 예로써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라고 하신 말씀을 들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한 서기관은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해석과 그 말씀을 들으면서 굉장한 흥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지금 이 서기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상당한 결심을 하고서 이제 예수님 앞에 나와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라며 자기의 각오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아무래도 조금 거리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참 훌륭하고 놀라우신 분 같은데 함께 다니는 그 제자들이 너절한 게 못마땅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저 갈릴리 촌사람들, 게다가 무식한 어부 출신들, 뿐만 아니라 허락 받은 강도라고까지 하는 세리인 마태, 이런 사람들이 있다 보니 같은 부류의 친구들이 주렁주렁 따라다니는 등,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는 어느 모로 보아도 개운치 않은 잡스러운 친구들이란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위에 있다는 것이 저들에게는 못마땅하고, 그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기가 꺼려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니고데모 같은 유대인 관원은 밤에 조용히 혼자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을 확실히는 알 수는 없지만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왔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꼭 들을 의사가 있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밤에 혼자 찾아왔다는 것은 어쨌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낳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서기관쯤 되는 사람으로서 볼 때에는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어울린다고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내심 그러한 가운데 이제 예수님 앞에 나와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 따라가겠다는 자신의 각오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그런 제자를 삼아 달라는 것인데 이는 실로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야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갈릴리 어부 출신들에 비해 당대의 지도급 인사인 서기관 출신이 하나 따라 준다면 참으로 고마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의 좇음을 허락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하시는 그 의도가 오히려 그 길을 막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서기관의 마음을 읽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겠다"고 하는 말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배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는 자기 집을 떠나서 예수님과 함께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에 있어서는 랍비의 제자가 되면 그 랍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의 습득을 위한 호기심과 존경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더욱 높은 경지의 선생님이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그런 선생님은 아니시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면 나와 함께 아주 운명을 같이 할 생각을 하여야지 그렇게 지식만 배우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가지고서는 따를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그리하여 참으로 비상한 결단을 요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희생이 각오가 없이는 따를 수가 없으니 그 높은 값을 지불하고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20세기의 신학자 본 회퍼(Bon Hoeffer)는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너무 값싼 은혜를 구한다"고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은혜는 물론 쉽게 주어지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내 편에서 너무 쉽게 공짜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이 공로를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그렇게 값싼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것이 영생의 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할진대 그 이상의 값어치 있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마 13 : 44). 다시 말하면 여기에는 엄청난 값을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지불 또한 조금도 무리한 것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속에서 시험과 동시에 권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의도가 아니라 "끝까지 나를 따르겠느냐?"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두고 생각하는 것과도 같은 내용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의 뜻은 시간적으로 죽을 때까지 그리고 질적으로도 죽는 일에까지 충성하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따질 것 다 따지고, 말할 것 다하고서는 진정한 충성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서기관을 향하여 "네가 언제까지 나를 따를 것이냐? 이렇게 인기가 좋고 영광스러울 때에는 따라다니다가 인기가 사라지고 위기가 오는 날에는 그만두고 떠날 것이 아니냐?"는 뜻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은 죽는 날이 그 끝일 뿐 도중에 졸업식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번 시작된 신앙 생활은 그것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가야 하는 것이지 중간에 왔다 갔다 하며 달리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운명을 온전히 맡겨 버리는 결단과 함께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순교를 한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살아가다가 순교한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교하고 따른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혹이 말하여 "내일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어제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다 죽었어요. 그리고 따라가는 겁니다. 그 때문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이래도 끝까지 따르겠느냐? 그리고 정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따를 수가 있겠느냐? 하는 깊은 질문의 제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아무래도 네 마음속에 무언가 바램이 있고 조건이 있는 것 같으니 그것을 가지고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급한 마음을 금하시고 조건부가 아닌 무조건적인 것, 상대적인 것이 아닌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우와 새를 비교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우도 저들만의 거처가 있어서 잠잘 수 있는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들도 깃들일 곳이 있다. 그러나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저 정처 없이 다니는 몸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처절한 이야기입니까? 다라서 주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거처를 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뒤를 따르노라면 경제 문제가 해결이 되고 출세도 할 수가 있겠지 하는 그러한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참으로 대단한 각오를 필요로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거기까지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쉽고 편하게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신뢰해 주어서 오히려 인정받는 사람으로 지내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선교사의 피를 요구하는 곳들이 무수히 있으며 예수를 믿음으로 가정과 소속 공동체로부터 추방이 되어야 하는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정 성균 선교사도 방글라데시에서 선교를 하던 중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세례를 어떤 분이 자꾸만 받겠다고 하므로 몰래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이 그만 발각이 되어 정 선교사는 그곳으로부터 추방을 당하게 되었고 세례 받은 그 사람은 가문과 직장으로부터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머리 둘 곳 없는 방랑객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까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추방되어 또 다른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실로 얼마나 괴롭고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도 선교 초기에는 다 그렇게 어렵게 믿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는 한 가정으로부터 쫓겨나는가 하면 아예 한 가문의 족보에서 지워 버리는 일까지도 각오를 해야 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같으신 분도 3대 독자의 귀한 아들이셨지만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한 달 동안을 집에 들어가실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한 달 후에라도 들어가셨으니 다행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추방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곧 너도 추방당할 각오를 하라! 집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씀의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나를 따르려거든 안주할 생각일랑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환영받을 생각도, 인기를 얻을 생각도 하지 말라! 나는 다만 고독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 서기관은 지금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에게 에워싸여 추앙을 받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근사해 보여 나도 따라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기를 향한 묘한 심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길은 결코 인기의 길이 아니다. 이제 며칠 후로 다가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길인데 거기에 합당한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우와 새로 비유하신 데에는 또 다른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과거나 자라온 환경을 조금 아셨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왜냐 하면 이 사람은 사랑해 주는 부모 밑에서 배울 것을 배우며 평안하게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일하게만 살아 온 사람이 주를 따르겠다고 하는데 이제부터 당할 고난을 생각하면 그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앞으로 당할 고난이 그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끔 선교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찾아와서는 조언을 구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제가 "가정이 어떠했고, 어떻게 자라 왔는가"를 물어 봅니다. 그리고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편안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때엔 "그만 두라"는 말을 합니다. 선교사란 마음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이 마음만 가지고 갔다가 1년도 못 되어 돌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내내 감기가 걸려서는 죽을 지경인데 무엇이 되겠느냔 말입니다. 흔히들 하는 말대로 고생도 해본 사람이 하는 것이지 마음만 먹었다고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경험도 하나의 은사입니다. 만약 나에게 고생을 많이 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큰 선물이에요. 그저 아무데나 누워서 잠잘 수가 있고, 아무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되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말입니다. 그런데 자리만 바뀌면 잠이 안 오고 물만 갈아도 탈이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잣집 아들로 생각되는 이 사람을 향해 "자네는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13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 동행하던 마가 요한이 저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떠난 이유를 추론한 것에 의하면 산악지대를 여행하는 고통스러움과 바울이 말라리아를 앓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마가 요한이 이때에 떠난 것은 바울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 만 가지고는 될 수가 없는 것이겠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고생해 보지 못한 사람이 단순한 기분으로 따르겠다고 하는 것에 대해 말리시는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와의 싸움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는 아직도 허영심이 있어요. 따라서 완전한 희생을 각오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으로 봅니다. 운동 선수들이 시합에서 승리를 하려면 적어도 다음 몇 가지의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는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 둘째는 집중하는 것이며, 셋째는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요, 넷째는 인내하는 것, 그리고 다섯째는 절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 다섯 가지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승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목표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집중하여 총력을 기울이며 인내하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절제가 없고서는 신앙 생활은 흐지부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는 결코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로마서 8장 17절 말씀에 보면 이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 단단한 각오를 하고 출발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권위 있는 해석은 아닙니다마는 어떤 주석가들에 의하면 여우와 새를 두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서기관의 마음속이 여우같이 간사한 마음과 새 같은 허영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인자는 네 마음속에 들어갈 곳이 없다는 뜻에서 비유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해석이기도 합니다만 반드시 그런 것이라고 하는 타당성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은 아닙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서기관 외에 또 다른 한 사람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먼저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먼저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먼저"라는 이 말이 중요합니다. 이제 가서 부친을 먼저 장사하겠다는 것은 부모에 대한 효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 우선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우선으로 하느냐 할 때에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나서 따르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이 이렇게 처리될 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에 적합한 매우 좋은 예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영국의 옥스포오드 대학에서 아프리카의 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면서 와서 공부를 하라고 했더니 이 아프리카 학생이 편지로 회답하기를 부모님이 계시는데 이 부모님의 장례를 지낸 다음에 가겠다고 했더랍니다. 그래서 학교측에서는 다시 "그러면 지금 부모님의 나이가 얼마냐?"하고 물었더니 "지금 40세입니다"하고 회답이 왔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이 사람이 언제인들 유학을 갈 수가 있겠습니까? 다행이 일찍 죽는다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 이후에도 문제는 이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이야기도 매우 재미있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부모가 죽었으면 제사를 지내야 하고, 제사를 지내면 그 후에는 자식을 공부시켜야 하고, 그리고 자식을 키워 놓았으면 이번엔 장가를 보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끝이 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우 단호하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복음 14장 26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사랑의 예수님께서 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시점에 가면 해석이 필요 없어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감옥에 갇히거나 순교하는 분들이 가족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정적인 시간에는 가족을 미워해야 함은 물론 이제는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여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렇게 하고야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다 버리며, 다 미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를 못하여 이것도 좋게 저것도 좋게 하다 보면 어느 세월에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님을 향한 최우선이 되어지지 않고서는 주님을 사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을 사랑할 수도 없으며 결국에 가서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도 되지를 못합니다.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옛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하고, 거기에 대해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혈연이나 정에 연연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일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때문에 옛날 우리 나라 이야기에도 보면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떠나려고 할 즈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자니 과거 시험장에 나가지 못함은 물론 3년 상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도리가 도리이니 만큼 3년 상을 치룬 후에는 가리라 했는데 이번에는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또 3년을 지내고 나니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서 이상 더 과거를 볼 수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자인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순간에는 인정을 끊어야 하고 가정에 대한 의무도 초월하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목숨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있어서 보다 실제적인 것으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하여 너무 그렇게 마음 상해하지 말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은 자에 관하여 참으로 단호했던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다윗 왕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그는 자기의 어린 아들이 심하게 앓으며 죽을 지경에 이르자 금식을 하고 밤을 새워 가면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만 그럼에도 그 아이는 앓은 지 7일만에 죽고 맙니다. 그러자 진작 그 신하들은 차마 이 사실을 다윗 왕에게 알리지를 못해 수군거리고만 있을 때에 다윗왕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아이가 죽었느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자 당장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며 의복을 갈아입고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경배를 한 후에 음식을 먹고 직무에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신하들이 하도 어리둥절하여 감히 왕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때에 다윗 왕이 대답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으니,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상 더 내가 슬퍼할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우리들도 좀 이랬으면 좋겠어요. 죽은 사람 때문에 자꾸만 울고 있는 것은 죽은 사람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말이 "죽은 사람이 만일 지금 내려다보고 있다면 이렇게 우는 것을 좋아하겠느냐고, 그리고 빨리 정신을 차려서 자식들을 돌보고 하는 것을 보아야 저도 마음이 편할 것이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 아무튼 죽은 자를 위해서 너무 많이 울지를 마십시다. 더구나 죽은 자를 위해서는 투자하지 말 것입니다. 요즈음 와서 가만히 보면 죽은 사람을 위한 투자가 산 사람에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돈도 많이 쓰고, 무덤까지도 매우 사치하게 꾸민단 말입니다. 이 모두가 다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매우 미래 지향적이고, 생명 지향적인, 참으로 엄청난 진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이미 데려가셨다면 이제는 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깨끗이 잊고 일어나야 하며, 그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다른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죽은 자를 위해 계속 울며 거기에다 온 정력과 마음을 다 쏟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겠느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시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먼저 부모를 장사해야 한다면 이후에는 허락치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다시 말하면 환경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당장에 나를 따르라는 그러한 결단을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최우선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생명의 끝까지 희생하고도 따를 만한 값어치가 있음을 확신한 자리에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는 순간도 지체할 수가 없고 더는 아쉬워해야 할 아무 것도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신의 일보다는 남의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면서 저가 핍박과 순교를 당하게 되리라는 뜻의 말씀을 하시자 옆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지나치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냉정하게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그를 살려둘지언정 너와는 무슨 상관이냐며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와 저자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좇으라! 가만히 보면 하나님만 믿으며 산다고 하다가도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이 지나쳐서, 저의 진실이 어떻고, 신앙이 어떻고 하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상처를 입고 다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의 이야기할 것이 아닙니다. 앞, 뒤, 옆을 볼 필요가 없어요. 오직 내가 그리스도를 쫓을 뿐인 것입니다.
진정 머리 둘 곳도 없었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지금 나를 좇으라고 다시 한번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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