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양과 이리(마태복음 10 : 16 - 23)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양과 이리(마태복음 10 : 16 - 23)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나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본 비유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앞서 101절부터의 말씀을 계속 읽어 내려올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특별 훈화를 하시게 되는데 이때에 표현하신 비유 중에 하나가 이제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양과 이리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과연 제자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이렇게 파송되어서는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 가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01절로부터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제자됨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을 말씀하고 있는 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부르셨다"고 하는 말이요, 둘째는 "주셨다"는 것이며, 셋째는 "보내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의 요소는 사도의 기본적 자격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사도됨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부르는 자가 주도권을 가지고 부름 받는 자를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 무슨 다른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자격을 보신 바가 있다고는 믿어집니다마는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불렀다"고 하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아 의식은 나의 자격, 나의 의, 나의 공로에 의해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단 하나의 중요한 사실, 그것은 주님이 나를 부르셨기에 오늘의 내가 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여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부르신 열 두 제자는 거의가 갈릴리 어부 출신들로 그렇게 특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또한 가정 환경이나 배경을 보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주님께서 저들을 부르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셨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제자로서 필요한 권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주님께서 주신 바의 권능 없이 나아가 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권능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과 그 표현이야말로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구약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권능을 주시면서 나아가 이스라엘을 건져내라고 하시지만 이때의 모세는 굉장한 고민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주셨다는데 내가 지금 그 권능을 받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알 수가 있느냔 말입니다. 흔히 말하는 대로 무슨 마패가 있는 것도 아니요, 증명서를 지닌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뿐입니다.

이와 같이 권능을 주셨고, 권능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요, 또한 믿음으로만 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질병과 약한 자를 고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이 권능을 받아야 하고, 받은 바 그 사실을 믿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를 향해 "귀신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자신 있게 외칠 수 있어야 하겠는데 이게 정말 나갈 것인지 아닌지 하고서는 주위를 살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권능을 받았다고 하는 확실한 믿음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다음 또 하나의 요점은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 : 6)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부르시고, 주시고,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냄을 받는 제자들을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생각하면 매우 절망적이고도 서글픈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보내시고 또한 가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앞장에서 밝힌 바대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보실 때에 목자 없는 양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양을 이리 가운데 파송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에 맞추어 취하여야 할 제자들의 태도와 행동을 세 가지 동물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비유는 곧 너희는 양과 같다는 것과 지혜에는 뱀같이, 그리고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는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들 세 동물로부터 주님의 제자들이 무엇인가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양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특별히 이리 가운데로 보냄을 받는 양으로 표현하고 계시는데 그 의미는 약하다는 말씀입니다. 양은 이리에 비하면 전혀 상대가 될 수 없는 약한 동물입니다. 최소한 염소라도 되어야 한번쯤은 대항을 해보겠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이리 앞에서는 끽 소리도 못할 만큼의 무방비 상태의 약자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을 보면 나름대로 적을 방어할 수 있는 방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는 뿔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말은 뒷발질을 잘하고 어떤 동물은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토끼같이 약한 동물은 귀라고 커서 먼 곳의 소리를 듣고 일찍 도망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찮은 풀벌레도 보호색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몸을 숨깁니다마는 이 양은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동물입니다. 이것은 곧 전혀 자신을 보호하거나 적을 대항할 만한 아무런 대책도 무기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초라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너희는 세상에서 양이라! 고 하실 때에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은 하여야겠지만 너희는 무방비 상태에 있는 양이다. 그러니 그것을 알고 대항하거나 싸워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무기들을 가지고 있지만 양에게는 이렇다 할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너희는 세상에서 양이라고 하신 이 말씀을 두고 나는 정말 이리 가운데에 들어가서도 양으로 살아 왔는가? 아니면 염소가 되었는가? 혹은 오히려 저들보다 더 사나운 호랑이나 사자가 된 것은 아닌지 하는 그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저쪽이 양이라면 나는 최소한 염소가 되어야겠다거나 저쪽이 이리처럼 나오니 나는 아예 호랑이로 나와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끝까지 양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양의 상대로도 양이요, 이리 앞에서도 양입니다. 이리라는 것은 잔인하게 물어 찢고 죽이는 파괴적인 동물입니다. 그 때문에 양과 이리를 비교한다는 것은 상대도 아예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무엇 때문에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전혀 승산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바와 같이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즉 내가 보낸다. 내가 너희를 양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상은 이리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보내었으니 어떠한 경우에도 탈바꿈하지 말고 끝까지 양이어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내가 너희를 보내게 되지만 너희는 그로 인해 미움을 받고 채찍을 맞으며, 여러 가지 능욕을 당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리들 속에 양이 들어가는 것이고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찌 그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어이 양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의 본론은 "염려하지 말라! 즉 두려워하지 말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너희를 볼 때에는 양과 같고 세상은 이리와 같겠지만 그러나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또한 본문을 자세히 보면, 관원들에게 끌려갔을 때에도 그때 그때에 필요한 말들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직접 가르쳐 주실 것이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내 앞에 이리가 나타났다고 다른 길로 도망가지 말고 이리 앞에 그대로 서라! 그렇게 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내가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이 함께 할 것이라는 말씀이요, 내가 너희와 같이 있으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끝까지 너희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양은 양이로되 목자 없는 양은 아니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양! 성령이 함께 하시는 양! 세상 끝날까지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양! 바로 그러한 양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이제 너희가 공회에 넘겨지고 회당에 끌려가 채찍질을 당하게 될 것이며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을 것과 종교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고소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제자들의 앞날에 대한 자세한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한 가지 알아야 할 진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그냥 보기에는 약한 자가 먹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윈(Darwin)이나 마르크스(Marx)가 여기에서 실패했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핏 동물의 세계를 볼 때에는 약육강식의 이론이 꼭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 사회에다 적용을 할 때에는 문제가 되는 것이거늘 바로 그 약육강식의 원리를 인간 사회에다 적용을 하여 추진해 나가는 것이 저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볼셰비키(Bolsheviks)당사(黨史), 사회 발전사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원리를 전제로 혁명론을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 원리가 되는 진화론에서부터 이미 세계관이 빗나간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치상으로도 그렇고 그냥 생각하기에는 약한 동물은 다 잡아먹히고 강한 동물만 남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쉬운 예로 호랑이와 토끼를 두고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토끼는 완전히 호랑이의 밥인데도 이상한 것은 호랑이는 점점 더 멸종되어 가고 토끼는 점점 무서운 숫자로 번식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 와서는 맹수들이 거의 멸종되어 가는 위기에서 오히려 사람들의 보호를 요청하고 있는 실정인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특별히 보호를 하지 않으면 맹수라는 자체가 아주 없어지고 말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약한 자가 이기는 신비!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끝까지 양이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지도 말고 대항하지도 말며 제물인 양의 모습 그대로 말없이 끝까지 온유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이지만 용감하라! 그리하여 이리 속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너희가 취하여야 할 생활 방법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하라는 이 두 생활 지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먼저 뱀의 특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다만 성경에 의하면 뱀을 가리켜 간사하고 간교하며, 속이는 것을 그 특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뱀의 특성은 그러한 간교의 의미가 아닌 지혜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뱀같이 지혜로워라! 이 말씀은 너희가 양과 같이 약하고 순한 것이지만 이리 속에 들어가서 지내게 될 그때엔 뱀같이 지혜로와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뱀이라고 하는 동물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불행한 동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저를 생각해 보면 발이 있습니까? 손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날개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디를 보나 그렇게 악조건일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입만이 뚫려 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긴 막대기 같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쌍하고 불행한 동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가죽이 예뻐서 뱀은 싫어하면서도 그 가죽은 이상하게 좋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지금 뱀의 지혜를 전제로 그에게서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철학을 보면 철저히 지혜에 대한 철학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전승인 탈무드(Talmud)나 미슈나(Mishuah)에는 모두가 다 지혜에 대한 이야기들로 꽉 차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들어온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하는 이러한 이야기들입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그대로 주면 한끼 잘 먹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고 말겠지만 직접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 이제는 일생 동안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산을 주는 대신 지혜를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철저히 지혜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의 철학에 의하면 지식이란 "무엇이냐?"하는 것이요, 지혜는 "어떻게"라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복음을 전해야 하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입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는 뱀에게서 그 필요한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뱀이라고 할 때에 갖는 독특한 견해, 즉 악의 상징이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로부터 나오는 지혜는 악한 지혜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이 뱀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뱀은 앞서 말한 바대로 아무 것도 밖으로 가진 것이 없는 참으로 불행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이는 배로 기어다니면서 못 가는 데 없이 다 가는 동물입니다. 물에도 가고, 숲에도 가며, 나무 위의 가장 높은 곳과 땅 속 깊고 어두운 작은 틈바구니에 이르기까지, 어디든지 갈 곳이라면 거침없이 다 갑니다. 여기에서 예를 들어 한번 생각해 본다면 이제 손도 잘리고 발도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 몸뚱이로도 할 일을 다하며 갈 곳은 다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뱀이기에,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뱀이 그러하듯이 어디든지 가라는 것이예요. 어떤 핍박과 악조건 하에서 포로가 되든, 매를 맞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여야 할 이 일만은 끝까지 해야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에 청교도의 역사에도 보면 바이킹들에게 붙들려 간 여성들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원치 않는 저들의 애를 낳게 되는데 이제 일단 낳은 다음에는 이 아이들을 기독교인으로 키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퓨리탄(Puritan) 곧 청교도의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로마 제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붙들려 갈 때에는 차마 죽지 못해 억지로 끌려갔지만 기왕에 그 집에 들어간 바에는 아이를 낳아서 기독교인으로 키웠고 이들에게서 로마를 소위 신성로마제국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상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는 뱀같이 하여 그 어떠한 악조건에서도 복음을 끝까지, 충돌 없이 잘 전하라고 하시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부탁하시는 말씀의 내용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도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결은 곧 교회의 생명입니다. 이는 깨끗함과 비 타협성을 말하며 특별히 혼합주의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전도하고 선교하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바로 적당히 타협하려고 드는 혼합주의입니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순교의 피와 함께 흐르고 있습니다. 그 순교는 모두가 다 비타협적인 사람들이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앙의 옹고집인데 이는 우리 나라의 예로 보아도 그러합니다. 특별히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참배 제가 일본의 탄압 속에 더욱 심각해지자 이제 여기에 대한 순결하지 못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신사참배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것은 국가적인 조상 숭배다, 혹은 국민 의례일 뿐 종교는 아니니 신사 참배를 하여도 신앙에는 상관이 없다고들 해가면서 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여기에 넘어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후 그들이 써 놓은 글들을 보면 신사 참배했다는 그 일이 그렇게도 부끄러운가 봅니다.

당시 신사 참배에 동참했던 모 목사님께 "일생 살아오시면서 마음속으로 가장 잘못했다고 생각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여쭈어 보았더니 대뜸 하시는 그 분의 대답이 "내가 신사참배 그걸 했거든! 두고 두고 그때 죽지 못한 것이 후회라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라고 했더니 국민 의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뭐 종교 문제인가 국민 의례이지"하면서 했는데 그것이 아니더라는 거예요. 처음 한번 했더니 그 다음, 그 다음, 하면서 계속 하게 되는데 마지막에는 신앙을 저버리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돌이키려니 돌이킬 수가 없어서 이렇게 부끄러운 생을 살았다며 깊은 후회의 말씀을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섞이거나 타협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러한 혼합주의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사(殉敎史)를 보면 신앙 양심을 저울질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로 우리가 많이 들어 잘 아는 예수님의 초상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그림은 이것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것뿐이지 예수님의 모습과는 상관이 없는 하나의 상상된 인물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그림을 땅에다 놓고 이제 여기에다 침을 뱉고 발로 밟으면 살려 주겠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고 했을 때 이 일로 인해 순교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쉽게 타협하는 자들의 해석은 "이것이 뭐 어디 예수님인가"하고 침을 뱉으며 발로 밟고 지나가지만 실은 양심을 속인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결치 못한 것입니다.

너희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여러분 순결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십니까? 특별히 비둘기의 순결! 대부분의 동물이 다 그렇습니다마는 비둘기는 반드시 깨끗한 것만 먹고삽니다. 그래서 창세기 8장을 보면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문 후에 지면에 있는 물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방주의 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보내었더니 그 까마귀는 종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내어보내었더니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옵니다. 이는 까마귀는 썩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마도 물위에 떠다니는 시체들로 인해 접촉할 곳도 많고 먹을 것도 많아서 함께 떠다녔나 봅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썩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아예 발붙일 곳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어서 깨끗한 것만 먹고, 비록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먹어야 할 것을 먹지, 먹어서는 안될 것이나, 썩은 것은 결코 먹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둘기이기에, 그러므로 너희도 복음을 전할 때에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곧 혼합에 빠지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생각해 보십시다. 너희는 양이다! 그러나 이리 속으로 가라!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라! 여기 내가 너희의 목자요 성령이 너희를 친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믿고 이리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가라! 사랑과 희생을 가지고 가며, 말없이 가고, 그리고 끝까지 앞으로 가라! 어느 순간에라도 이리가 될 생각이나, 염소가 되지도 말라! 최후의 순간까지 양의 모습 그대로 순결하고 순결하라!

여러분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이요, 가야바나 빌라도, 바리새인들은 그야말로 정말 이리와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이리와 같고 너희는 그 속에서 이리를 만나게 되겠지만 그러나 너희는 양으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최종 승리는 양에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산상 보훈인 마태복음 55절에도 보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잠깐 보기에는 이리가 힘이 있고 이기는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끝까지 온유한 자가 이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양이 이리를 이긴다고 하는 이 신비로운 사실! 여기에 최종 승리가 있고 하나님의 양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끝까지 양으로서 이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그러한 확고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양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