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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더하는 것(3장 19~22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기독교의 복음 중에서 가장 귀중한 복음은 바로 '구원의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이 구원의 복음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하는 귀중한 진리에 대한 변증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율법과 은혜, 계명과 약속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그 긴장 관계를 공부한 바 있습니다. 이 관계를 보다 쉽게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관계로 이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율법이 있으면 은혜가 필요 없고, 은혜가 있으면 율법이 효력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숙한 사람들의 이해 방법입니다. 이들은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이해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법도, 질서도, 체면도, 예의도 필요 없는 것이 사랑인 줄로 착각합니다. '이래야 사랑이 아니냐'고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생각함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는 사랑이 없다, 죄값은 곧 사망이다, 칼날과 같이 무서워 피도 눈물도 용서도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은혜는 정반대요, 대립적이요, 실제적으로는 양자택일적인 것이라고 보게 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이해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랑하면 할수록 법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진실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남편을 위하고 존경하며 남편의 생각과 뜻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인격을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무관하다-당치않은 일입니다. 남편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매맞을까, 이혼 당할까 두려워서 잘하는 게 아닙니다. 남편의 법을 소중하게 여기고, 지나치듯 무심히 한마디 한 것도 잘 받들어 섬깁니다. 그렇다고 노예된 것입니까? 사랑이 없는 것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수록 법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랑 안에 율법이 완성되고 율법 안에 무한의 자유함이 있습니다. 신비롭고 오묘한 이치입니다. 이 이치를 통달하면 기독교의 교리를 졸업하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토록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숙한 수준에서는 언제나 양자택일적으로, 대립적으로 생각하여 항상 마음속에서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는 함께 있어야 하고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아가 율법과 은혜는 직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귀중한 말씀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로부터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은혜보다는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난 시간에는 은혜와 약속에 대한 말씀을 매우 논리적으로 변증해나갔습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주제로 공부합니다마는 특별히 율법이 왜 존재하는가, 그 율법의 기능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의 논리에 따르면 율법과 은혜는 결코 상반된 위치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능이 서로 대립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이 은혜를 섬기고 있습니다. 은혜가 본래적인 것이기에 은혜를 돕고 은혜를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생활 속에서 은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율법이 있고, 앞으로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위하여 율법이 있다, 은혜를 목적으로 율법이 존재한다-이렇듯 율법이 은혜를 섬기고 있다고 하는 귀중한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본문에서 그 증거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먼저 율법의 존재와 그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19절)." 범법(犯法)이란 죄를 범한다는 뜻입니다. 죄지음으로 율법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흔히 회자(膾炙)되는 말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법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워낙 법을 잘 지키기 때문입니다. 법이 왜 있습니까? 형무소가 왜 있습니까? 바로 죄짓는 사람 때문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양심적으로, 신앙적으로 사는 날이 오면 형무소는 필요 없게 됩니다. 하긴 지금은 달라졌지만 몇년 전만 해도 그런 예외적인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한 형무소에 흰 깃발이 휘날렸답니다. 흰 깃발은 죄수가 하나도 없다는 표시입니다. 한편 덴마크 북쪽에 위치한 한 마을을 다녀온 분의 말에 따르면 그 마을의 단 한 명뿐인 순경이 앞치마를 두르고 수퍼마켓에서 콜라를 팔고 있더랍니다. 일년 내내 한 건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곳에 법이 없습니까? 법은 있지만 범법하는 사람이 없어서 마치 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입니다. 법조문이 많다고 하여 좋은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본디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형법, 민법, 상법 등의 육법전서를 모르면 어떻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깨끗한 양심, 그것으로 족합니다. 충분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범법합니다. 보이지 않는 양심의 법, 신령한 법, 본래적인 사랑의 법을 자꾸 거역합니다. 그래서 부득불 법이 생겨났다는 말입니다. 흐려진 법을 밝게 하기 위해서, 잊어버린 법을 살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본래의 법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법이 생겼습니다. 먼저 전승적인 법이 생겼고 다음에 기록된 법이 생겼습니다. 법조문화한 법 즉 십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이 최초의 법이 아닙니다. 그전부터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기록된 이유가 '범법함을 인함'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앞에만 나가더라도 교통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적색등, 황색등, 청색등이 번갈아가면서 켜지는 것이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신호등을 잘 지킨다면 교통순경이 없어도 됩니다. 그런데 왜 교통순경이 거리를 왔다 갔다 해야 합니까? 얼마나 많은 비용이 지출됩니까? 세금 거둬서 교통순경에게 월급을 줄 필요가 있습니까? 문제는 뺑소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통순경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존재 이유 또한 범법함을 인하여, 다시 말해서 법을 어기는 사람이 있음으로 생긴 것입니다. 실제로 법을 어기는 일 만큼 율법이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는 마치 먼데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마는 외국 사람들이 꽤나 신경을 곤두세우며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형법'입니다. 사형법을 없애자고 주장합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해도 사형은 하지 말자고 합니다. 전기의자에 앉혀 죽이고, 교수형에 처하고, 총살형에 처하는 등의 사형법은 너무 비인도적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느냐, 이런 사형법은 없애자-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형법을 없앴습니다. 없앴더니 범죄가 더 늘어나더랍니다. 사형법을 없앴던 미국의 어느 주(州)에서는 사형법을 부활시키자는 의견들이 다시금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좀 달라졌다고 합니다마는 무슬림 사회에서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둑이 없었습니다.
도둑질한 사람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손을 가차없이 잘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일년에 몇 사람만 손을 자르면 도둑이 없습니다. 왜 그런 무서운 법이 있습니까?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그 법도 필요 없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다양한 법들이 생기고 존재하는 이유는 범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살펴봅시다. '범법함'은 헬라어로 '파라바세온'입니다. 이는 '여러 죄'를 뜻하는 헬라어 '하말티아'와 같은 말의 하나입니다. 여기에는 '줄을 넘는 것' '한계를 넘는 것'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줄을 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율법이 있어야 했고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는 그리 큰 목장이 없어서인지 자연방목 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듭니다. 소를 기르는 것을 보면 주로 외양간에 매어놓고서 사료를 먹입니다. 또는 우리네 옛날 고향에서처럼 소를 들로 데리고 나가 자연에서 자라난 풀을 먹입니다. 그러나 외국은 다릅니다. 우선 넓은 들판에 풀을 심어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소를 놓아 먹입니다. 수백 마리의 소가 줄을 지어 아침저녁으로 죽 나갔다가 다시 우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관리하는 목동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찌나 질서 정연하던지 참으로 신기하기조차합디다. 그러나 멀리서는 잘 안 보입니다마는 가까이 다가가보면 전기줄이 둘러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로 하여금 전기줄에 닿아 짜릿함을 느끼게 하여 다시 돌아오게 하는 장치입니다. 자동적으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사람 하나 없어도 제 길을 잘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줄입니다. 율법도 이 줄과 같습니다. 그쪽으로 가면 징역 3년이니 안 된다, 저쪽은 징역 5년이니 안 된다, 이쪽은 벌금이다-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둡니다. 줄 안에서 살도록, 벗어나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합니다. 이 한계를 넘어가려는 습성이 바로 율법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됩니다. 우리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규범, 그 줄과 한계로 율법을 정해놓았다는 말입니다. 넘어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좀더 높은 의미로는 이 한계가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기까지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지만 한계만은 넘어가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율법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이것들이 율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율법이란 우리 인간의 윤리적 행위 또는 도덕적 생활의 한계와 규범을 정해놓은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서면 넘어설수록 담은 점점 높아집니다. 점점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법조문이 점점 많아졌고, 형이 점점 높아졌고, 심판에 대한 말씀이 점점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음으로 하나 더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아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내 얼굴을 내가 볼 수 있습니까? 요즘 보면 남에게 아름답게들 보이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이는 전부 거울이 있어서입니다. 가령 거울이 없다고 생각해봅시다. 거울이 없다면 내 얼굴을 내가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거울은 안 보는 것이 오히려 좋습니다. 아마 20년은 더 살 것입니다. 쭈글쭈글한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더 일찍 죽습니다. '쭈글쭈글한 이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한심한데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얼마나 더 한심하랴'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얼굴은 안 보면 그만입니다. 나이 사십이 넘었거든 너무 자주 거울을 보지 마십시오. 아침에나 한번 보고 저녁에 그냥 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자꾸 들여다보다가는 주름살이나 세면서 한숨 쉬고 앉아 있게 됩니다. 괜히 속상해져서 애매한 아이들보고 "야, 너희들 때문에 주름살이 생겼다!"하고 푸념만 하게 됩니다. '나이 먹어서 생겼지, 나 때문에 생겼나!' 아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대꾸나 할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고칠 수 있는 것이나 거울로 볼 것입니다. 더러운 것이 묻었으면 씻어야 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고칠 수 있을 때에 거울을 봐야지 못 고치는 것을 본들 어찌하겠습니까? 보기 흉한 얼굴이라면 안 보는 것이 낫습니다. 볼 필요가 없습니다. 거울은 볼 수 있어도 흉한 얼굴은 고칠 수 없습니다. 씻을 수가 없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거울은 나에 관한 한 유익하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을 죽이고, 내 명예를 죽이고, 내 기를 죽이고, 내 의욕을 죽여버린다는 말입니다. 이 거울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아서 내 죄를 환히 드러냅니다. 내 나약함, 내 허물, 내 거짓됨, 내 위선이 다 드러나는데, 고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본디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마는 인간이 한계를 넘어가면서부터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에 비춰보면 나의 죄과는 알 수 있으나 고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소용이 없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율법 때문에 점점 더 타락하게 됩니다. 기왕에 버린 몸, 기왕에 소망이 없으니……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알고 자포자기하여 점점 더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두고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이다, 사람을 죽이고 양심을 죽이고 영혼을 죽이는 법이다." 죄는 있는대로 지적해 놓았지만 속수무책인 까닭입니다. 요즘도 주위에서 이런 경우를 흔히 봅니다. 사회 부정을 고발하는 데는 명수이나 아무 대책이 없습니다. 그저 요란하게 떠들기만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죄를 알게는 하지만 율법으로 죄를 씻지는 못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공로가 없지는 않습니다. 율법이 좋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가 겸손해지고 철이 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구제불능이다 깨달으면서 겸손해지고 온유해질 수가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마음이 사라져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나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율법의 궁극적 역할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전승과 관계 있는 말씀입니다.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절)." 유대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어떤 이해를 하고 있는지 봅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고 저들은 믿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면 살아 있을 수 없습니다. 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천사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말씀하셨고 천사가 모세에게 말씀했다, 그것을 모세가 받아서 백성에게 전했다-이렇게 이해합니다. 율법은 간접적으로 전해졌다 하는 전승적인 이해가 본문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천사로 말미암아 율법이 간접적으로 주어졌다고 하는 그 과정을 하나의 상징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로부터 중요한 신학적 이치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도 first source 와 second source 를 구분하지 않습니까? 원 저자가 써놓은 책이 first source 요,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이 설명해놓은 책이 second source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은 처음부터 second source 라는 이D똕TXT놽해입니다. 처음 것이 아닙니다. 직접 소재가 아니라 간접 소재입니다.
이는 그 진리의 농도나 질적 가치가 그만큼 적다는 뜻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천재적인 이론 전개입니다. 율법이 전해지는 과정도 간접적이고 그 내용도 간접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천사를 통하고 모세를 통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으로 형성된 것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감동으로 직접 전해진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원천적이며 본래적이며 가장 귀한 진리는 말씀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마디로 은혜입니다. 본래적인 것은 사랑이요 은혜의 약속일진대 간접적으로 전해져 효과를 발휘한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이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은혜의 약속은 직접적인 것이요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간접적인 것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음의 두 말씀을 대조하여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 : 39)"하신 말씀과 구약에 씌어 있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출 21 : 24)"라는 말씀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눈을 상하게 했으면 그 사람의 눈을 그 대신 상하게 하고, 이를 부러뜨렸으면 그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라는 말입니다. 무서운 논리입니다. 세상이 온통 싸움판이 되고말 일입니다. 한대 맞으면 한대 치고--보통 일이 아닙니다. 언뜻 보아 두 말씀은 극과 극이요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립니다마는 깊이 생각해보면 같은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논리는 이렇습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의 이를 부러뜨리려고 망치를 들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이 죄에 대한 심판으로 내 이가 부러집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남남이 아니라 곧 나입니다. 저 사람의 이빨과 내 이빨이 하나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어떻습니까? 표현은 각기 다르지만 결국 같은 말이 아닙니까? 저 사람의 눈이 내 눈이요 저 사람의 물건이 내 물건입니다. 저의 아픔이 곧 내 아픔입니다.
그런고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는 이로 갚으라-결국 같은 말입니다. 단지 다른 측면에서 다른 표현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직접적이요 다른 하나는 간접적입니다. 하나는 직선적이요 다른 하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이것이 은혜와 율법의 관계입니다. 율법의 근본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범법함으로, 그들의 형편과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간접적으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 유효 기간을 설정합니다.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19절)"-즉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이 지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율법의 3용법이라 해서 신학생들의 시험에 잘 나오는 문제가 있습니다. 저도 종종 출제합니다마는 소위 율법의 3용법이란 율법을 요령 있게 이해하기 위한 3가지의 방법을 일컫는 것입니다. 첫째 용법은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것이다, 둘째 용법은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간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율법의 3용법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중 제2용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어쩌면 새로운 의미라기보다는 본래적인 의미라고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뜻에 더 합당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불가능한 것이 은혜로는 가능합니다. 은혜가 있어야만 율법이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법을 지키기가 쉽고 그 법을 완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같은 법이라도 소망이 없고 형벌과 저주가 무서워서 지키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더 어기게 됩니다. 잘못됩니다. 더 무서운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고로 율법은 은혜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실제로 경험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다음 21절에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였다면 다시는 은혜의 약속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약속 안에서, 은혜 안에서만 살게 됩니다. 또한 그 안에서 살게 되는 영이 역사할 때에 율법도 제 역할을 바로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당시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영원한 것으로, 절대 규범으로 만들어 보고자 애썼습니다. 이 점을 익히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약속과 은혜가 오기까지, 또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율법이 유효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묻는 장면이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청년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이다." "그러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렇게 말씀하시자 청년은 그대로 실천할 용기가 없어서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한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 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청년이 이같이 대답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율법은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길이 없습니다.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라"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년은 다 지켰다고 합니다. 다 지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로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가도록 우리의 길을 인도합니다.
율법만으로는 길이 없고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의 길을 찾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22절의 말씀을 잘 새겨봅시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성경이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율법이라는 감옥 안에 가두어놓았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율법 아래 갖혀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벌벌 떱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내가 주일을 범했더니 감기에 걸렸구나,' 사업이 망하면 '십일조 안 바쳤더니 벌받았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얼굴에 희색이 없습니다. 이처럼 율법의 감옥에 갖혀서 벌벌 떠는 불쌍한 심령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에 매여 있을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인해 은혜를 알고 약속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법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키고, 감사한 마음으로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죽이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율법도 우리를 위해 있습니다. 궁극 목적이 은혜와 약속과 그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을 대할 때에도 무서운 마음으로 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범법치 않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신 좋은 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고 율법의 완성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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