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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주의자의 3대 특징 (요한복음 3장 22-27절)

by 【고동엽】 2023. 1. 5.

율법주의자의 3대 특징 (요한복음 3장 22-27절) 1. 위선

 세례 요한 당시 유대인은 “어떻게 해야 몸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며 정결예식의 형식에 대해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25절). 그처럼 종교의 외형적인 형식에만 몰두하다가 점점 위선에 빠졌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위선이다. 속은 썩었는데 겉만 화려한 것은 사람의 눈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한다. 종교적 형식은 조금 미숙해도 좋고 기도는 조금 못해도 좋다. 하나님은 외형보다 마음의 진실함을 보신다.

 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기를 힘쓰라. 진실할 때 남의 말에 잘 흔들리지 않고 기분이 업다운 되지 않는 축복을 얻는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의 시선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세례 요한이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는가? 진실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존재였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위선의 외투를 벗어던지게 했다. 사람들이 광야로 나간 것은 그의 진실한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성공 신학이나 번성 신학은 세례 요한을 대할 때마다 그 논리적인 힘이 빠질 것이다. 넓은 문으로 가는 사람은 세례 요한과의 대면을 피하고 싶을 것이고 결국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다. 세례 요한 당시에 그를 찾아 넓은 광야로 나온 사람들은 좁은 길로 가기를 작정했던 사람들이다. 진리는 달콤하지 않다. 달콤한 말은 잠깐 힘과 위로를 주지만 참된 능력과 평안을 주지 못한다. 오직 진리와 진실만이 참된 능력과 평안을 준다.

2. 질투

 당시 사람들은 광야에서 지낸 나실인이자 금욕주의자인 세례 요한과 같은 깨끗한 사람에게서 세례 받으면 더욱 깨끗해질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이 세례를 주면 별로 능력이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세례 요한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더 몰렸다.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 그것이 외형과 진실의 차이다. 외형보다 진실이 더욱 큰 능력의 원천이다.

 세례 요한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세례 요한의 방식대로 사람을 정결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진실이 능력이다. 그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찾아 물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이 어투를 보면 사람들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다. 그런 질투심이 그들을 오히려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오늘날은 치열한 경쟁시대다. 많은 사람들이 시기와 질투를 앞세워 남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남을 곧 무너뜨릴 것 같지만 오히려 자기를 무너뜨리는 결과만 낳는다. 남도 무너뜨리고 나도 무너지면 그나마 덜 억울한 텐데 나만 무너지니 얼마나 손해 보는 일인가? 하나님은 시기하고 질투할 때 참된 의미의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프게 생각하지 말고 그때 의지적인 믿음을 가지고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다.

3. 교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거부하고 진리를 찾는 것보다 정결예식 문제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변론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왜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는가? 결국 자신이 최고인 줄로 아는 교만 때문이다. 교만은 불행의 원천이다. 행복을 원하면 겸손하게 되라. 소극적인 사람이나 “나는 못해.”라고 하면서 몸을 사리는 사람이나 지나치게 사양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무능력하게 되라는 말도 아니다. 예수님 앞에서 겸손했던 세례 요한이 소극적이고 무능력했는가? 아니다.

 참된 겸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헌신할 줄 아는 것이다. 어떤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하려고 나서는 것이 진짜 겸손이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최대 요소 중의 하나가 겸손이었다. 그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고 자기보다 더 큰 분이 오실 것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증언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았고 자기 위치와 한계와 사명을 알았다.

 성도들은 지혜와 명철을 달라고 기도한다. 지혜가 남을 아는 것이라면 명철은 나를 아는 것이다. 지혜는 관찰을 통해 얻지만 명철은 성찰을 통해 얻는다. 가장 지혜롭고 명철한 삶은 언제 주어지는가?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내가 예수님의 오심을 증언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다. 또한 높은 마음으로 내 뜻을 실행하려고 하기보다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고 할 때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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