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을 주시는 성령(고린도전서 2:12).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소리를 듣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이 진리”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저것이 해답”이라 외칩니다. 선한 말처럼 들리나 속에 독이 섞인 말도 있고, 지혜처럼 보이나 실은 욕망의 분장에 불과한 말도 있습니다. 겉모양이 번듯하다고 해서 그 뿌리까지 건강한 것은 아니고, 달콤하다고 해서 반드시 생명의 열매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가장 절실한 은사는, 눈앞의 화려함을 넘어 본질을 꿰뚫어 보는 분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분별이 어디서 오는지를 정직하게 밝힙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목적은, 단지 감정의 고양이나 종교적 체험을 부추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현실”을 알아보게 하시고, 그 은혜를 가리거나 훼손하는 모든 것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세상의 영은 언제나 인간을 중심에 세웁니다. 사람의 자아를 왕좌에 앉히고, 성취를 복음으로 바꾸며, 성공을 구원처럼 포장합니다. 세상의 영은 “네가 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네가 주인이다”를 속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곧 성령께서는 “네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이시다”를 심장에 새기십니다. 세상의 영이 인간의 손을 높이며 인간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면, 성령은 십자가의 낮아짐을 높이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세상의 영이 성도에게 ‘자기 확신’의 갑옷을 입히려 한다면, 성령은 성도에게 ‘그리스도 의존’의 옷을 입히십니다. 참된 분별은 이 대조에서 시작됩니다. 무엇이 나를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무엇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돌려세우는가, 무엇이 나를 자랑으로 부풀게 하고 무엇이 나를 회개로 낮추는가, 무엇이 나를 ‘내 공로’에 기대게 하고 무엇이 나를 ‘그의 은혜’에 기대게 하는가, 이것이 분별의 첫 문턱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 전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죄 사함, 의롭다 하심, 양자 됨, 성령의 내주, 하나님의 약속, 장차 올 영광의 소망, 그리고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위로와 인내의 능력까지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 은혜의 선물들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시적 증거를 요구하고, 눈에 보이는 성과로 진리를 측정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장식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믿음의 연합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보이지 않는 선물을 실제로 깨닫게 하십니다. 은혜가 단지 교리의 문장으로 머무르지 않고, 영혼의 호흡이 되게 하십니다. “아, 내가 죄인인데도 사랑받는구나. 내가 무너졌는데도 버림받지 않았구나. 내가 흔들리는데도 하나님은 신실하시구나.” 이 고백이 마음에서 솟아오를 때, 그 사람은 세상의 영이 제공하는 허상들을 이전처럼 신뢰하지 못하게 됩니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무엇이 거짓인지 목록을 늘어놓는 기술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빛 가운데 드러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참을 알면 거짓은 스스로 그림자가 됩니다.
여기에서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복음의 중심이 분명해집니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성령은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수록, 성도는 더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더 자신의 죄를 미워하며, 더 은혜를 사랑하게 됩니다. 반대로 누군가 성령을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흐리게 하고, 회개 대신 자기 도취를 키우고, 은혜 대신 거래의 논리를 심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향기와 결이 다릅니다. 성령은 결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나의 생명”으로 새기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의 유익” 정도로 축소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 고백이 분별의 핵심입니다.
성도는 흔히 분별을 ‘비판력’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남의 허물을 잘 찾아내고, 교회의 약점을 잘 들춰내고, 세상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면 자신이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은 “너는 남을 정죄하기 전에 네 마음의 우상을 보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 사람의 말이 틀렸느냐”만 묻지 않게 하시고 “그 말이 너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느냐, 아니면 너 자신에게 더 가까이 붙들어매느냐”를 묻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혀를 먼저 회개시키고, 우리의 눈을 먼저 정결하게 하며, 우리의 동기를 먼저 드러내십니다. 분별은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내 영혼을 살리는 은혜의 감각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교만의 칼날이 아니라, 겸손의 빛입니다.
또한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단지 ‘지식의 양’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도 성령께 순복하지 않으면, 지식은 자랑으로 변합니다. 바울이 말한 “알게 하려 하심”은 단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은혜의 실재를 깨닫는 영적 인식입니다. 성령께서 조명하실 때, 성경의 문장이 뜨거운 생명의 말씀으로 내 심장에 닿습니다. 그 순간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기준이 바뀝니다. 이전에는 “나에게 유익한가”가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가 기준이 됩니다. 이전에는 “사람이 어떻게 볼까”가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실까”가 기준이 됩니다. 이전에는 “편한 길”이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참된 길”이 기준이 됩니다. 이 기준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므로 분별은 단지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두려운 사실을 함께 마주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은 교회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으로도 스며듭니다. 예배의 언어로 포장되어 들어오기도 하고, 사역의 명분으로 가려져 들어오기도 하며, 영적 열심의 형태로 가장하여 들어오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성공”의 언어로 환산될 때, 복음은 쉽게 변질됩니다. 숫자가 많아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단정하고, 결과가 크면 진리라고 착각하고, 화려한 말과 강한 감정이 있으면 성령이라고 오인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결코 우리를 “성과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은혜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은혜의 사람은 결과로 하나님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결과를 맡깁니다. 은혜의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찬양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은, 겉모양의 성장과 참된 성숙을 구분하게 하십니다. 참된 성숙은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성숙은 자랑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성숙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자기 부인의 향기로 나타납니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말씀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쓰신 분이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이 성경과 충돌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성령은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경을 더 사랑하게 하시고, 성경 앞에서 더 떨게 하시며, 성경의 빛 아래서 더 정확히 회개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어진 계시의 깊이를 열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과 갈라지지 않습니다.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말씀 앞에서 내 뜻이 꺾이는 자리, 진리 앞에서 내 자존심이 내려앉는 자리, 순종 앞에서 내 계산이 멈추는 자리, 그 자리에서 성령은 가장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성도에게 실제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이 주시는 분별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가장 먼저, 은혜를 은혜로 알아보는 눈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결국 “은혜의 가치”를 아는 눈입니다. 값없이 주어진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과 화목된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 이 은혜가 커질수록 세상의 유혹은 작아집니다. 둘째로, 성령의 분별은 회개의 삶과 함께 자랍니다. 회개는 단지 죄를 나열하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사건입니다. 회개가 깊어질수록 분별이 맑아집니다. 셋째로, 성령의 분별은 공동체 안에서 안전하게 자랍니다.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홀로 모든 계시를 독점하려는 마음은 위험합니다. 성령은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며, 말씀의 질서와 장로들의 돌봄과 성도의 권면 속에서도 인도하십니다. 넷째로, 성령의 분별은 고난 가운데서도 빛납니다. 고난은 우리의 헛된 의지와 허영을 벗겨냅니다. 그때 성령은 은혜의 핵심을 더욱 선명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만 붙드는 신앙이 무엇인지, 겉사람이 무너져도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길이 무엇인지, 성령은 고난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한 가지 예화를 드리겠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오래된 등대가 있었습니다. 밤마다 바다를 지나는 배들은 그 빛을 따라 암초를 피하고 항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에 새로 부임한 관리가 등대지기에게 말했습니다. “등대 불빛이 너무 강해서 마을이 어둡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밤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불빛을 조금 줄이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아주 조금 줄였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다시 말했습니다. “이제 마을이 더 아름답습니다. 조금만 더 줄여봅시다.” 등대지기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들의 환호와 칭찬이 커지자 결국 불빛을 더 낮추었습니다. 몇 주 뒤, 폭풍우가 치던 밤, 한 척의 배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했습니다. 다음날 울부짖는 유가족들과 부서진 잔해를 바라보며 등대지기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빛을 줄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사람의 눈을 만족시키려다가 생명을 잃게 했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빛은 등대의 빛과 같습니다. 세상은 그 빛을 줄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조금 덜 말하라고 합니다. 죄와 회개를 조금 덜 말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더 화려한 이야기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이 줄어들면, 사람은 잠시 편안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영혼은 암초에 부딪힙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은 우리로 하여금 “빛을 줄이지 말라”고 붙들게 하십니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어둠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빛을 택하게 하십니다. 순간의 환호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바울의 말대로, 우리가 받은 것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기준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거처가 되었고, 은혜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을 따라 살다가 종교를 한 겹 덧입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에 사로잡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보고도 “이것이 내 영혼을 살리는가”를 묻는 사람, 무엇을 선택할 때도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길인가”를 묻는 사람, 무엇을 꿈꿀 때도 “이 꿈이 나를 높이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높이는가”를 묻는 사람, 성령은 그런 성도를 길러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중심을 다시 붙듭니다. 분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은혜의 정점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속함이 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믿음으로 붙드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우리를 더 “그리스도께” 데려갑니다. 죄책감에 무너질 때에도 그리스도께 데려가고, 성공으로 자만할 때에도 그리스도께 데려가고, 고난으로 낙심할 때에도 그리스도께 데려갑니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강력한 분별의 사역은 이것입니다. “다른 곳에 답이 없다. 그리스도께로 오라.” 이 한마디를 심장에 새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대는 분별이 희귀한 시대가 아니라, 분별이 상품처럼 남용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분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편을 가르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분별을 칼로 주시지 않고, 등불로 주십니다. 남을 베어 쓰러뜨리기 위한 날이 아니라, 내 발을 비추어 길을 찾게 하는 빛입니다. 그 빛 아래에서 우리는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조심스러워지고,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제가 속지 않게 하소서. 제가 제 자신에게 속지 않게 하소서. 제가 세상의 영의 달콤한 언어에 취하지 않게 하소서. 저를 은혜의 진리 안에 붙들어 주소서.” 성령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며,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혹시 오늘 마음이 흐릿하십니까. 무엇이 옳은지 알기 어렵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막막하십니까. 성령을 구하십시오. 그러나 성령을 “내 계획을 이루는 힘”으로 구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보는 눈”으로 구하십시오. 성령을 “내 감정을 달래는 위안”으로만 구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하는 거룩한 조명”으로 구하십시오. 성령을 “세상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도구”로 구하지 마시고, “십자가 아래에서 나를 새 사람 되게 하는 주권적 은혜”로 구하십시오. 그때 성령은 말씀을 열어 주시고, 마음의 우상을 드러내시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더 크게 보게 하시며, 조용하지만 단단한 분별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도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제게 남은 자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소망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성령께서 알게 하셨고, 그 은혜가 저를 끝까지 붙들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주시는 분별의 열매입니다.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유행의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거짓의 화려함에 눈이 멀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성도, 성령은 그런 사람을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만들어 가십니다.
요약
성령은 세상의 영과 달리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 2:12). 분별은 비판의 기술이 아니라 은혜의 실재를 깨닫는 영적 인식이며, 그 결과로 성도는 자기중심성에서 그리스도중심성으로 방향 전환을 경험합니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를 희미하게 하지 않고 더 선명하게 하며, 회개와 겸손, 말씀 순복을 낳습니다.
묵상 포인트
성령을 구할 때 저는 무엇을 가장 원하고 계십니까.
최근 제가 붙든 확신은 그리스도의 은혜입니까, 아니면 제 계획과 성취입니까.
어떤 말과 선택이 제 마음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어떤 말과 선택이 제 자아를 왕좌에 앉힙니까.
말씀 앞에서 제 뜻이 꺾인 경험이 최근에 있었습니까.
공동체의 권면과 말씀의 질서 안에서 저는 안전하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강해
본문에서 바울은 “받았다”라는 수동태적 은혜의 언어로 시작합니다. 성령은 성도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세상의 영”은 인간 중심의 가치 체계를 내면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은혜로 주신 구원의 실재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를 중심에 세웁니다. “알게 하려 하심”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조명(illumination)이며, 이것은 성경의 객관적 진리가 성도의 내면에 주관적 확신으로 자리 잡게 되는 성령의 적용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은 결국 복음의 중심성 유지, 십자가의 우선성 유지, 은혜의 무상성 유지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분별은 교만을 키우지 않고 회개를 낳으며, 자랑을 부추기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주석
“세상의 영”은 단지 귀신론적 개념으로 제한되기보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의 욕망과 지혜를 궁극 기준으로 삼게 하는 세계관적 힘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은 성령을 가리키며, 성령의 목적은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의 선물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지 흐름에서 성령은 계시의 새 내용을 더하는 분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의 깊이를 깨닫게 하는 분으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말씀과 분리될 수 없고, 교회의 신앙고백적 경계(정통 신앙) 안에서 가장 건강하게 판별됩니다.
원어 주석(헬라어-신약)
“ἐλάβομεν”(받았으니)은 완료된 수여의 사실을 전제하는 동사로, 성령의 내주가 성도의 실재적 소유임을 강조합니다. “τὸ πνεῦμα τοῦ κόσμου”(세상의 영)와 “τὸ πνεῦμα τὸ ἐκ τοῦ θεοῦ”(하나님에게서 온 영)의 대조는 소속의 대조이며, 분별의 기준이 ‘출처’와 ‘열매’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ἵνα εἰδῶμεν”(알게 하려 함)은 목적절로서 성령의 내주 목적을 밝힙니다. “τὰ ὑπὸ τοῦ θεοῦ χαρισθέντα ἡμῖν”(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에서 “χαρίζομαι” 계열은 무상으로 베푸시는 은혜의 성격을 강하게 함축합니다. 성령의 조명은 인간의 공로를 세우지 않고, 은혜의 무상성과 확실성을 드러냅니다.
금언
분별은 거짓을 많이 아는 데서 자라지 않고, 은혜를 깊이 아는 데서 자랍니다.
성령의 빛은 남을 정죄하는 칼이 아니라, 내 길을 살리는 등불입니다.
십자가가 희미해지는 곳에서 분별은 사라지고, 십자가가 선명해지는 곳에서 분별은 태어납니다.
신학적 정리
성령의 조명 사역은 구원의 적용(ordo salutis) 안에서 결정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객관적 사실로만 두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 누리게 하며 확신과 거룩을 낳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리스도 중심성은 참된 성령 역사의 표지입니다. 따라서 “성령 체험”은 말씀·십자가·회개·거룩·사랑의 열매로 검증되어야 합니다.
주제별 정리
분별: 기준의 변화(자기→그리스도), 소속의 변화(세상→하나님), 열매의 변화(교만→겸손).
은혜: 무상성, 확실성, 현재성(지금 누리는 화목과 양자 됨), 미래성(영광의 소망).
말씀: 성령의 도구이자 경계선. 말씀과 분리된 ‘영’은 위험 신호.
목회적 정리
성도에게 분별은 불안을 달래는 장치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분별이 없는 열심은 쉽게 상처를 남기고, 분별 없는 열정은 쉽게 극단으로 흐릅니다. 목회는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은혜의 중심을 붙들도록 돕고, 결과 중심의 신앙을 내려놓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의탁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적 검증과 권면의 구조를 회복하여 개인주의적 “나 홀로 계시”의 위험을 줄여야 합니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말씀 앞에서 제 생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성경의 빛 아래 제 동기를 점검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성공”보다 “은혜를 아는 눈”을 구하겠습니다.
결정의 순간마다 “이 선택이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게 하는가”를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감정의 크기보다 순종의 깊이를 추구하겠습니다.
공동체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겸손히 듣고 검증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줄이라는 세상의 요구 앞에서, 등대의 빛을 낮추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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