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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은혜를 입는 길 (야고보서 5장 13-20절)

by 【고동엽】 2023. 1. 5.

치유의 은혜를 입는 길 (야고보서 5장 13-20절) < 치유의 은혜를 입는 길 >  

 성도에게 병은 유익한 점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병이 계속 있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동시에 병 낫기를 소원해야 한다. 치유의 은혜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의학의 힘을 빌리라

 야고보는 병들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14절). 고대에는 종교인이 사람을 돌보면서 의학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으로 부분적인 의료 활동도 했기에 장로들에게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했다.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고대에 흔한 치료법으로서 ‘의식적 수단’이 아닌 ‘의술적 수단’이다. 즉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현대적 의미로는 병원도 가고 연고도 바르고 약도 먹으면서 기도하라는 뜻이다. 저는 “기름을 바르며”란 표현이 의학적인 의미임을 최근에 깊이 체험했다.

 저는 30세쯤에 발가락 피부가 벗겨졌다. 그것이 습진성 무좀인 줄 알았다. 40세쯤에는 발바닥과 발등 뒷부분에서 복숭아뼈까지 피부의 보풀이 오르고 벗겨지면서 늙은 코끼리 피부처럼 변했다. 그때 의아하게 생각했다. “어떻게 무좀이 발등까지 생기지?” 그 증상이 심해져서 50세쯤에는 발톱이 삭고 발톱 주변의 피부까지 썩은 것처럼 가무잡잡하게 변했고 새끼발가락 발톱은 거의 삭아서 심한 발톱 무좀까지 생긴 줄 알았다. 그렇게 25년을 발 증상으로 고생했다.

 아무리 강한 독성의 약물을 발라도 소용없어서 영원히 그 증상이 계속될 줄 알았다. 아토피 증상처럼 피부가 가려우니까 어떤 때는 심하게 긁었고 발가락을 비틀기도 했고 가끔은 신경 쓰여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갑자기 청소년 때 화장이 싫다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지 않아 얼굴 피부가 일어 까칠해지고 여드름까지 생겼다가 크림을 바르면서 얼굴 피부가 정상이 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발을 씻은 후 발가락 사이와 발등 뒷부분과 발톱까지 크림을 바르자 몇 주 만에 발이 깨끗해졌다.

 크림을 바르면서 지금은 발가락은 물론 발톱과 발톱 주변도 완전히 깨끗해졌고 어린이 피부처럼 불그스레한 핏기도 돌아왔고 새끼발가락 발톱도 거의 정상이 되었다. 그때 본문에 나오는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그 의미를 확실히 깨달았다. 의술이 덜 발달된 고대에 외적인 피부병은 대부분 기름을 발라 치료했고 내적인 병은 대부분 약을 먹여 치료했다. 그 다음에 온전한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의 손길에 맡겼다. 결국 기름을 바르고 기도하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의학의 힘을 빌리라.”는 실제적인 의미가 훨씬 크다.

 물론 기름을 바르는 것에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소원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런 의미를 살려서 병자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는 목회자도 간혹 있다. 기름을 바르는 의식이 무속적인 의식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를 예비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면 성찬식이 의미가 있듯이 그 의식도 의미가 있을 수는 있다. 다만 그 의식을 행하며 믿음으로 낫겠다고 병원도 안 가고 약도 안 먹는 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이다.

 한 이단 교주는 “기도하면 나으니까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의 원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영혼을 미혹해서 그가 죽든지 살든지 교주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드는 행위다. 그래서 죽으면 병자의 믿음이 없어서 죽은 것이라고 정죄하고 살아나면 자기가 기도해서 살아난 것이라고 과시한다. 그런 이단의 꽃놀이패 주장에 미혹되지 말고 병들면 의학의 힘을 빌리라. 일반은총도 하나님의 은총이다.

2. 믿음으로 기도하라

 의료 수단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굳게 믿고 믿음의 기도를 드리라(15절). 이 말은 믿음을 밑천으로 걸면 하나님이 꼭 낫게 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믿음은 흥정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는 병을 치유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말씀했다. 더 나아가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는다.”고 했다. ‘혹시’라는 표현은 죄가 원인이 된 병도 일부분은 있다는 암시다. 그때는 믿음의 기도가 죄 사하심을 받게 한다. 사실상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구원과 죄 사함이다.

 믿음의 기도를 드릴 때 꼭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회개 고백이다(16절). 만약 A에게 명백한 죄를 지었으면 회개 고백을 A에게 직접 하는 것이 좋다. 내게 명백한 잘못도 없는데 남이 괜히 나를 원망하고 아파하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 해결할 문제다. 다만 내가 명백한 잘못을 해서 남이 그것 때문에 원망하며 아파하면 혼자 회개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에게 가서 잘못을 고백하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더불어 피해자 앞에서의 고백이 수반되어야 회복 가능성도 커진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써 보낸 편지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물건을 훔쳐 로마로 도망쳤다. 거기서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 바울의 사역을 신실하게 도왔다. 그래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끼고 돌지 않고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 잘못을 빌고 빌레몬의 처분을 받게 했다. 그처럼 피해자에게 찾아가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라고 고백하라. 물론 그런 고백을 강제하지는 말라. 기독교 진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에 있다. 죄의 고백도 자발적이어야 참된 변화를 일으킨다.

 “죄를 서로 고하며”라는 말은 자기 죄를 고백하되 남의 죄를 지적하지 말라는 뜻이고 남에게 죄의 고백을 강요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잘못된 죄의 고백은 부작용이 크다. 아무 죄나 고백하지 말고 가정의 개인사도 시시콜콜 털어놓지 말라. 죄를 고백한다면서 은근히 자기 의를 과시하고 교만한 어투로 남을 정죄하지도 말라. 본문에 언급된 고백은 내가 개인적으로 남에게 명백한 잘못을 했을 때 그에게 은밀하게 죄를 고백하라는 뜻이다. 명백히 잘못했다면 죽기 전에라도 “마음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라고 고백하라.

 병자를 보면서 자기 죄와 허물을 살피는 계기로도 삼으라. 병자도 회개해야 하지만 병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도 회개해야 하기에 야고보는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했다. 누구는 죄를 고백하고 누구는 죄를 지적하지 말고 모두 서로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라는 뜻이다. 그 ‘서로’라는 개념이 기독교 윤리의 핵심 개념이다. 자기를 살피고 서로 고백해서 땅에서 얽힌 것을 먼저 풀라. 땅에서도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회개가 상달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16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니까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않고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내려 땅이 열매를 맺었다(17-18절). 믿음으로 기도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기도하면 엘리야처럼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긴급한 기도제목이 생기면 능력 있다는 사람을 찾아가 기도를 받기보다 하나님을 찾아가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라.

3. 즐거워하며 찬송하라

 본문 13절 후반부을 보면 야고보는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고 했다. 기쁨과 감사와 찬송은 병의 치유는 물론 예방 가능성도 높인다. 고난을 지혜롭게 잘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축복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쁠 때 마음이 높아지면 이상하게도 기쁨이 슬픔으로 돌변한다. 고난당할 때 기도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다.

 문제와 기도제목이 있을 때 간절히 기도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문제도 없고 평안할 때 간절히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형통할 때의 간절한 기도는 더 능력 있는 기도가 된다. 형통할 때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성령충만’을 오해하지 말라. 성령충만을 신비하고 신령한 것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성령충만은 사람 보기에도 모범적인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를 앞세우고 범사에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이 진짜 성령충만한 삶이다.

 어디에 가든지 무리 속에서 성도를 가려내기는 어렵지 않다. 기쁨이 넘치는 표정과 선한 인상과 은혜로운 얼굴 때문이다. 은혜롭고 선한 얼굴은 최고의 셀프 추천장이다. 사람을 구할 때 아무리 많이 배워도 얼굴에 은혜가 없어 보이면 잘 쓰고 싶지 않다. 반면에 얼굴과 언행에 은혜가 넘치면 어디에 가도 사랑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조용히 드러난다. 은혜로운 얼굴과 마음과 삶으로 늘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며 살까?”를 생각하며 살라. 늘 우는 눈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내가 즐겁고 형통할 때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도 영육을 강건하게 만들지만 남이 즐거워하며 행복해할 때 같이 기뻐해주고 축복해주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면서 “나도 저런 축복을 받고 행복하게 살리라.”고 다짐하는 삶은 최고로 성령충만한 삶이고 최고로 영육을 강건하게 만든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내게는 틀린 속담이 되게 하라. 바르지 않게 살면서 잘사는 사람을 비판할 때는 질투가 섞인 비판은 삼가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비판하되 바르게 살면서 잘사는 사람은 힘껏 축복해주라.

 어떤 목회자는 정확한 사실과 말씀에 근거해 한국 대형교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인 설교를 할 때도 “하나님! 이 비판이 질투가 섞인 비판이 아니게 하소서.”라고 일주일 내내 기도하고 그 후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설교한다. 나보다 앞선 사람을 비판할 때는 그런 사전 기도가 꼭 필요하다. 그래야 그 비판이 자기 영혼을 병들게 하지 않는다. 비판할 때는 자기 절제와 자기 성찰을 앞세우고 축복할 때는 기쁘고 넉넉한 마음으로 축복할 때 영육의 건강 가능성도 커지고 회복의 은혜도 빨라진다.

4. 진리 안에 있으라

 병의 치유나 예방뿐만 아니라 병 이상의 고통과 고난도 극복하거나 예방하는 핵심 요소가 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 안에 있는 삶이다. 그 삶을 무엇보다 중시했기에 야고보는 그에 관한 도전의 말씀으로 서신을 끝냈다(19-20절). 초대 교회 때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도 유대교나 신비주의나 이교철학으로 돌아가는 자가 많았다. 그처럼 요즘도 교회는 다니지만 예언으로 포장한 예수 점을 치러 다니거나 신비주의나 무속적인 신앙색채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런 모습이 없도록 말씀의 진리 안에 굳게 서라.

 무속주의에도 미혹되지 말아야 하지만 물질주의에도 미혹되지 말라. 영육이 강건하려면 물질주의에 빠진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늘 진리 안에 있기를 힘쓰라. 무엇이 진리 안에 있는 삶인가? 진리 안에 있을 때 나타나는 삶의 열매가 있다. 그것은 남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삶이다. 그런 삶이 없다면 내가 잘되고 건강한 것이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나만 잘 되면 좋다는 태도는 진리 밖에 있는 태도이고 나 중심적인 삶으로 축복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다.

 왜 사람이 진리 밖의 이단에게 미혹되는가? 화려한 것을 보여주고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단을 좇아가다가 시간과 열정과 물질을 잃고 가정과 건강과 영혼을 잃는다. 참된 축복과 행복은 말씀의 진리 안에 있고 교회와 이웃을 돌아보려고 자신을 낮출 때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이다. 나 없는 너도 없지만 너 없는 나도 없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 안에서 누군가의 영혼을 살리려고 할 때 내 영혼도 살아나고 생명력도 넘치게 된다. 또한 고난의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를 극적으로 얻는 역사도 있게 될 것이다.

 요새 <월새기(월간새벽기도)> 재정상황이 매우 어렵다. 최근 몇 달 간은 매월 하늘의 만나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어렵게 사역하고 있다. 몇몇 지인은 1권의 후원금을 2천원으로 올리든지 사랑나눔 기증을 줄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요즘은 매일 그 문제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문서선교의 순수한 원래 취지가 퇴색되지 않도록 길을 열어주소서.”

 하나님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복된 내일을 준비하도록 가끔 병과 고난도 주신다. 위기와 고통이 좋은 경우도 많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기도하게 되는 것은 그것의 좋은 역할이다. 믿음으로 잘 극복하면 위기는 기회로 변하고 고통은 형통으로 변한다. 왜 인생과 가정과 교회에 병과 고난과 아픔이 생기는가? 믿음의 기도를 드리고 남을 축복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며 진리 안에서 조금 더 순종을 배우고 실천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어려울 때마다 기도와 감사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아 천국 확장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인물 성도가 되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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