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믿음을 가지라 (신명기 22장 13-21절) < 무고죄를 엄중히 다스리라 >
본문은 순결과 관련된 계명이다. 당시에 어떤 남편은 아내를 맞이하고 잠자리를 같이 한 후에 아내를 미워해서 비방거리를 만들고 아내가 처녀임을 보지 못했다고 누명을 씌웠다(13-14절). 고대 유대 사회에서 첫 잠자리에서 관계할 때 생기는 혈흔은 신부가 자기 처녀성을 증명할 증거로서 신부 가족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간직해두었다. 그 후 누명을 쓸 때 처녀의 부모는 그 처녀인 표를 가지고 재판을 담당한 성문 장로에게 가서 변호했다(15-17절). 그렇게 아내의 순결이 밝혀지면 성읍 장로들은 그 남편을 잡아 때렸다(18절).
유대 사회에서 아내의 부정을 알면 이혼 증서를 주어 내보낼 수 있었지만 아내의 부정에 대해 무고하면 태형이 가해졌는데 죄질이 나쁠 때는 최고 40대까지 때렸다(신 25:3). 또한 처녀에게 누명을 씌운 남자에게서 은 일백 세겔의 벌금을 받아 여자 아버지에게 주었고 그 여자는 그 남자가 평생에 버릴 수 없게 했다(19절). 그만큼 무고죄를 엄중히 다스렸다. 남성 중심적인 고대 사회에서 무고죄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해준 최소한의 장치였다.
하나님은 거짓 증거로 남을 파멸시키는 무고를 무섭게 다스렸다. 거짓 무고의 횡횡은 패망과 말세의 징조다. 억울한 피해자의 한은 하늘을 진동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쁘고 치졸한 죄 중의 하나가 무고다. 있는 사실을 고해도 고자질이라고 해서 안 좋게 보는데 꾸민 얘기를 고하는 무고질이 얼마나 안 좋은 것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관계를 본능적으로 하면 안 된다. 욕정적으로 하면 더 안 된다. 계산적으로 하면 더욱 더 안 된다. 배신적으로 하면 더더욱 더 안 된다. 특히 무고하며 배신하면 가장 안 된다.
유명인이 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유명해질 때 생기는 가장 흔한 고충은 누군가가 자기를 인맥 대상이나 사칭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는 무고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유력한 사람과 어쩌다 알면 그 관계를 통해 어떤 것을 얻겠다는 계산적인 마음을 버리고 순수하게 유지하려고 하라. 그때 속으로 “큰 물건 하나 잡았네.”라고 하면서 계산적인 인맥으로 활용하려다가 그 관계가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인맥으로 진전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거나 질투심을 가지거나 심지어는 무고까지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무고죄를 최악의 죄 중의 하나로 보신다. 예수님도 거짓 무고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서로 어울리다가 서로 울리는 상황은 인간관계에서 흔히 생긴다. 그러므로 인맥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집착은 더욱 하지 말라. 그럴수록 자기만 더 초라해지고 비참해진다. 그때 자기관리를 못하면 시각과 생각이 협소해지다가 심해지면 거짓 무고까지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연약한 존재이기에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질투로 분노할 수도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할 수 있다. 그래도 거짓 무고만은 하면 안 된다.
한 기독 청년이 회사에 들어가 열정적으로 일했다. 비록 술자리에 끼지는 않았어도 인간관계가 힘들지 않았고 업무 자체도 힘들지 않았다. 정작 힘든 일은 연구비를 부풀려 비자금을 만드는 일과 연구 결과를 부풀리는 일이었다. 결국 그는 회사를 떠나 인생의 진로를 바꿨다. 그때 회사를 떠난 후 사회 정의를 세우겠다고 다니던 회사를 고발해야 하는가? 쉽지 않은 일이고 대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의와 진리의 절대 기준으로 보면 드러난 범죄는 사실상 빙산의 일각이다. 많은 불의가 덮여진 채 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은 고자질과 고발에 대한 신중함을 요구한다. 가족의 불의를 보고 하나라도 참지 못해 다 고자질하거나 고발하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가족도, 어떤 공동체도, 어떤 사회도 남아날 수 없다. 고발을 잘하도록 훈련시킨 공산주의 사회가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회가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고자질과 고발은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하물며 거짓 무고는 결코 해서는 안 된다. 중세시대에 거짓 무고에 의한 마녀 사냥을 통해 많은 인명이 억울하게 화형 당했다. 그런 역사가 다시 있어서는 안 된다.
왜 하나님은 무고죄를 엄중히 다스리셨는가? 거짓 언행을 없애거나 줄여서 진실한 삶을 통해 진실한 사회를 만들려는 이유도 있지만 실제적인 이유로는 거짓 무고가 남의 인격과 명예는 물론 목숨까지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억울한 희생자와 가족의 한이 얼마나 하늘에 사무치겠는가? 안보를 명목으로 한 국가 기관의 무고도 없어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애국’보다 ‘진실’을 앞세워 지키게 해야 한다. 진실을 앞세운 승리의 길이 분명히 있다. 그 길을 힘써 찾아 얻어낸 승리가 참된 승리다.
< 순결한 사랑을 하라 >
무고가 아니고 실제로 남편 말이 사실이어서 그 처녀에게 처녀의 표적이 없으면 그 처녀를 그의 아버지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서 악한 창기의 행동을 했기에 그런 엄중한 조치로 공동체의 악을 제거하라고 한 것이다(20-21절). 당시에 성적인 범죄를 그처럼 엄중히 다스린 이유는 성도덕이 문란했던 가나안 족속의 풍습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요새 교회를 크게 깨뜨리는 3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이단 사상이다. 예언해주고 치유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보장한다는 말에 미혹되면 교회가 깨진다. 둘째는 돈 거래다. 다단계, 계, 투자, 사업, 장사로 교인이 얽히면 교회가 깨진다. 셋째는 불법 청탁이다. 교인은 가족만큼 가까운 존재지만 청탁 대상이나 청탁 도구로 삼지 말라. 청탁할 때 안 들어주면 시험에 빠지고 들어주면 시련에 빠지면서 교회도 어려워진다.
교회를 깨뜨리는 4대 요소로서 하나를 더 추가하면 그것은 이성교제다. 목회자는 대개 교회 내의 이성교제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교제 후 결혼하면 좋지만 대개 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깨지면 둘 다 교회에서 멀어지고 그 둘 때문에 교회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교회 내의 이성교제는 최대한 절제하고 오래 기도한 후 양쪽에게 다 확신이 생기면 교회 리더십에 알리고 축복 가운데 결혼하는 것이 좋다. 그런 절차가 없는 교회 내의 이성교제는 하나님과 교회를 향한 마음을 약화시킬 수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
왜 모세 율법은 무서운 징계를 내세워 순결한 사랑을 강조했는가? 불결한 사랑이 가정과 사회를 깨뜨리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처녀 표적이 없다는 남편이 고발이 사실이라고 해서 아버지의 집에서 그 아내를 끌어내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게 한 것은 너무 가혹하다. 왜 하나님은 그런 가혹한 율법을 주셨고 성경에까지 기록되게 하셨는가? 성적인 타락을 지극히 주의하고 원칙적으로 ‘정’보다 ‘정의’를 앞세운 삶을 추구하라는 교훈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교회에서 부목사가 수시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을 담임목사가 그냥 방치하면 은혜로운 조치인가? 그런 조치가 정은 되어도 정의는 될 수 없다. 결국 담임목사가 부목사의 개인적인 허물을 감춰주고 조용히 사임시키면 어떤 사람은 영문도 모른 채 일자리를 잃은 부목사가 불쌍하다고 그 편에 선다. 힘없는 사람 편에 서주는 것은 따뜻하고 정감이 넘치는 일이지만 무조건 힘없는 사람 편에 서주는 것은 정의가 아닐 때도 있다.
힘의 유무를 보고 어떤 사람 편에 서기보다 바른 편에 서는 지혜를 구하라. 정보다 정의를 우선적인 가치로 삼으라. 사용자가 갑질하면 그 편에 서지 말아야 하고 반대로 노동자가 게으르고 무책임하면 그 편에도 무조건 서지 말아야 한다. 늘 바른 편에 서려고 하라. 그것이 쉽지 않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구해서 사랑이 남용되거나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하라. 사랑 방법을 옳게 하고 사랑 대상을 옳게 잡는 것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개를 너무 사랑했다. 나중에는 개가 늙어서 거동도 힘들고 관리가 힘드니까 돈 주고 남에게 맡겼다. 아내가 말했다. “여보, 요새 재정 형편도 넉넉지 않고 개도 거동을 못해 괴로워하니까 안락사 시킵시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인성이 그래요. 그게 사람이 할 짓이오?” 가끔 그 남편은 “개는 사람처럼 배반하지 않아서 좋다.”고 하지만 아내보다 개를 더 아끼는 것 같은 자기 행동이 아내에게는 배신감을 줄 수도 있다. 개가 배반하지 않는 것은 개의 본능이다. 배반이란 면만 놓고 사람보다 개가 낫다고 하면 안 된다.
좋은 것도 지나치면 안 된다. 물론 사람이 늘 이성적일 수는 없기에 키우던 개를 안락사 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배신하지 않겠다면서 개의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개를 남에게 돈 주고 넘겨 관리시키는 것도 엄밀히 따지면 이미 버린 것과 같은 배신인 셈이다. 배신하는 사람보다 배신하지 않는 개가 좋다는 표현 자체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배신하지 않는 개보다 배신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는 더 소중한 존재다.
살면서 배신자도 가끔 필요하다. 왜 하나님은 가끔 배신자도 내 곁에 보내시는가? 그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배반하지 말라는 뜻도 있고 배반을 겪으면서 성숙한 인격을 배양해 인물의 길을 준비하라는 뜻도 있다. 사람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도 같다. 사람을 폭넓게 사랑하되 폭을 좁힌 언약적인 사랑에도 탁월해야 한다. 그처럼 바른 대상을 향해 바른 사랑을 펼쳐가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순결한 사랑을 명령하셨다.
< 순결한 믿음을 가지라 >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순결한 사랑을 강력히 명령하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믿음도 순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다. 욕심을 버리고 기복주의와 이단에 미혹되지 말라. 순결한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마음을 하나님께만 붙들어 매라. 이단 교주는 기도를 영혼 미혹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가 많기에 이단이 기도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엎드려 기도한다. 기도처럼 신령한 수단조차 마귀와 이단의 도구가 될 수 있기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성경중심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 진돗개의 충성심이 신적인 것이라고 해서 진돗개를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가 살인 등의 큰 물의를 일으켰다. 사실상 개에게 사람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그렇게 가치 있고 위대한 존재로 창조된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못한 피조물인 진돗개나 고목나무를 숭배한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싫으시겠는가? 심지어는 어떤 위대한 사람도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안 된다. 또한 어떤 유익을 얻으려고 계산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봐도 안 된다.
한 목회자가 결혼 적령기의 딸에게 말했다. “얘야, 빨리 결혼해야지. 아빠 교회에 나오지 말고 청년들이 많은 큰 교회로 가라.” 그것은 좋은 교육이 아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또래 청년에게서 배울 것이 많겠는가? 신실한 어른 성도에게서 배울 것이 많겠는가? 또래 청년들과 으쌰으쌰 하며 나아가는 열정적인 신앙은 빨리 식을 가능성도 크다. 사람을 목적으로 교회를 선택하면 안 된다.
부모는 이렇게 교육해야 한다. “얘야, 작은 교회를 섬기다가 결혼을 혹시 못하더라도 쉽게 교회를 옮기지 마라.” 신기하게도 그런 교육을 잘 수용해서 작은 곳에서도 신실함을 보이는 자녀가 더 복되고 좋은 결혼을 이룬다. 어떤 자녀는 교회에 자기 또래가 없어서 재미없다고 옮긴다. 그때 부모는 재미를 위해 교회를 옮기지 말라고 교육해야 한다. 그 말에 순종하면 부모는 자기 자녀가 얼마나 대견해 보이겠는가? 그때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사랑하는 제 자녀에게 좋은 배우자를 보내주세요.” 그 기도는 가장 아름답게 응답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려는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다. 배우자를 만날 기회, 돈을 벌 기회, 인맥을 쌓을 기회를 많이 얻겠다는 목적으로 교회를 선택하면 그것도 일종의 기복주의나 우상숭배가 된다. 믿음생활과 교회생활의 초점이 하나님 외의 것이 되지 않게 하라. 그래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뜻과 원리를 따라 하나님 품으로 나를 잘 인도해줄 교회다.”라는 확신만이 교회를 선택하는 요건이 되게 하라.
하나님만 순결하게 바라보면 하나님도 그를 특별히 보살펴주실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하나님을 쓸쓸하게 만들지 말라. 수많은 사람이 바라봐도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하나님은 쓸쓸해하신다. 다른 것도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얻기보다 차라리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많은 것을 잃는 길을 선택하라. 그때 오히려 더 많이 얻는다. 늘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온전히 녹아져서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자기를 이기라.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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