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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전적으로 인정하라 (신명기 34장 1-6절)

by 【고동엽】 2023. 1. 5.

말씀을 전적으로 인정하라 (신명기 34장 1-6절) < 교만을 버리라 >

 A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37살에 장로가 되었다. 그가 맡은 교회학교 부서마다 크게 부흥해서 그는 자신이 설교를 아주 잘한다고 여겼다. 여전도회에서 가끔 헌신예배 때 설교를 부탁해서 1년에 두세 번 설교하면 회원들이 말했다. “장로님 설교가 정말 최고네요.” 그 말이 수고했다는 인사인 줄 모르고 진짜 자기 설교가 최고인 줄 알았다. 결국 자기의 최고 설교로 한국 교회를 뒤집겠다고 신학교에 갔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구약성경을 처음 배울 때 교수가 말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직접 다 쓴 것이 아닙니다.” A가 깜짝 놀라 따지듯 물었다. “교수님! 그러면 왜 모세오경이라고 합니까?” “학생! 언제 신학교에 들어왔어요?” “금년에 들어왔는데요.” “졸업할 때에도 이해가 안 되면 그때 질문하세요.” 더 이상 설명이 없었다. 그가 나중에 본문 5절에 나오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읽고 적어도 그 부분은 모세의 기록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자신이 얼마나 성경을 수박 겉핥기로 알았는지를 깨닫고 회개했다.

 교만한 태도를 가지면 미혹되기도 쉽고 편견에 사로잡히기도 쉽다. 어떤 교인은 담임목사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도 다 아는 내용이라고 지루하게 여기다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설교를 들으면 솔깃해져서 말한다. “그 강사 목사님은 성경을 기가 막히게 잘 쪼갠다.” 성경은 쪼개지 말고 통전적이고 유기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성경을 이상하게 잘 쪼개면 진짜 성경을 쪼개는(파괴하는) 행위가 된다.

 성경을 잘 쪼개는 이단을 따르면 정상적인 삶이 쪼개지고 가정과 상식이 쪼개지고 교회도 쪼개진다. 성경을 잘 쪼개는 이단은 신학을 인간적인 학문이라고 싫어하고 무시한다. 신학이 자기 멋대로 성경을 쪼개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생각대로 쪼개고 갖다 붙이면 안 된다. 결국 A는 교회에서 맡은 부서를 부흥시키고 책을 조금 봐서 어떤 사실을 알고 일 년에 몇 번 한 설교로 칭찬 받았다고 담임목사를 우습게 알았던 교만한 태도를 신학교 졸업 후 목회하면서 가장 큰 수치로 여겼다.

 설교 말씀이 자기가 아는 말씀이라도 이렇게 기도하며 들으라. “하나님! 이 말씀이 주는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 오늘도 은혜를 주소서.” 어떤 교인은 “목사님 설교는 시시해. 차라리 내가 QT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QT를 통해 성경의 의미를 알려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목사님 설교는 들을게 없어! 내가 QT하는 게 나!”라고 하면 마음이 부패해지고 진리를 잃고 교회도 힘들어진다. 그런 식으로 마음을 높이지 말라.

< 말씀을 전적으로 인정하라 >

 본문 1절을 보라.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이 구절은 모세가 느보산에 오른 후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른 것처럼 묘사되어 ‘느보산 비스가봉’이란 표현이 맞는 것 같지만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비스가산 느보봉’이란 표현이 맞다. 비스가산 정상에서 가나안 땅을 멀리까지 조망해도 가나안 최북단인 약 160킬로미터 떨어진 단까지 볼 수는 없다. 단까지 보였다는 표현은 가나안 땅 전체를 조망했다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그때 서쪽으로는 전체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지중해까지의 유다 온 땅을 조망했다(2절). 남쪽으로는 네겝 사막을 조망했고 종려나무의 성읍인 여리고 골짜기 평지에서 소알까지 조망했다(3절). 소알은 사해 인근 요단 평지에 위치한 곳으로서 사해 서쪽 연안지대까지 조망했다는 뜻이다. 조망 후 모세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을 눈으로는 보게 해도 그곳을 밟지는 못한다고 하셨다(4절).

 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눈으로는 보게 해도 들어가게 허락되지는 않았는가? 직접적인 이유는 므리바 반석 사건(민 20:12) 때 하나님의 거룩함을 온전히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간접적인 이유는 율법의 상징인 모세를 가나안에 들이지 않음으로 사람이 율법으로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었다(5절). 모세는 말씀에 죽도록 순종하고 죽기까지 순종했다.

 하나님을 상징이나 관념이나 생각으로만 만나지 말고 뜨겁게 만나 하나님께 압도된 삶을 살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전적으로 역사하게 하라. 말씀에 대해 토를 달지 말고 말씀대로 될 줄 믿고 나아가라. 말씀을 얼마나 인정하느냐가 어떤 인물이 되느냐를 결정한다. 말씀의 인정 유무가 인물 유무를 가르고 더 나아가 생사 유무를 가른다. 말씀에 “아멘!”을 잘하고 심지어 목숨을 바치라는 말씀에도 “아멘!”을 잘할 때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남다른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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