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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속한 자(3장 10~14절)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앞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복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어 오늘의 말씀에서는 그 반대편에 있는 자, 율법에 속한 사람이 다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설명합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이다-이 문제를 두고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내 존재의 바른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이 있고야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때에야 나의 존재가 성립합니다. 오늘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좀은 불경스러운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마는 1970년대에 자유주의 신학 중의 하나인 사신론(死神論)이 세계의 신학 흐름을 휩쓴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심지어 '하나님을 죽여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용어 자체에서부터 거부감이 이는 이 사신론의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많은 변론이 오가는 중 재미있게 읽은 내용이 하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말을 하기 이전에 자기가 먼저 죽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이전에 벌써 자기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인간된 존재가 없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는 공산주의 세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에 사람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겁나는 사람입니다. 확실하지는 못할지언정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믿을 때에 비로소 인간이 인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양심이 없습니다. 도덕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성도 상실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의 동물적인 인간, 사악한 인간의 모습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나 자신의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까? 관계는 하나의 계약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입니다. 인격적 관계, 대화적 관계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약속을 중심으로 하여 관계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을 어떤 개념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니그렌(Nygren)은 그의 저서 「아가페와 에로스(Agape and Eros)」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세계의 10대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게 된 사람입니다. 그만큼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모 잡지에서는 서평을 통해 「아가페와 에로스」가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책이라는 극단적인 찬사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러 찬사들은 차치하고 책의 내용을 보기로 합시다. 아가페는 사랑입니다. 물론 에로스도 사랑입니다. 니그렌은 모든 사랑을 이 둘로 나누어서 생각합니다. 아가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랑이요, 에로스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는 사랑입니다. 또 아가페는 큰 사랑을 내가 받고 그 사랑에 답하는 응답적인 사랑이요, 에로스는 상대방을 사랑함으로해서 응답을 받아내는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연애하는 것이 에로스에 속합니다. 에로티시즘이이니 에로틱이니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에로스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그쪽으로부터 기어이 사랑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질투를 수반하게 됩니다. 불평도 많고 원망도 많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괴롭히려 드는 것이 바로 에로스입니다.
그러면 아가페는 무엇입니까? 내가 남의 사랑을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으로 만족합니다.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그 받은 사랑에 대하여 진실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 아가페요,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가는 사랑이 에로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전부 아가페요, 철학적이고 이방 종교적인 것은 전부 에로스에 속합니다. 같은 성경 안에서도 율법적 관계는 에로스요, 십자가의 은혜는 아가페입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려고 하는 말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아가페요, 율법을 지켜서 율법의 의로 구원받는다 함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에로스가 됩니다. 이처럼「아가페와 에로스」에서는 모든 철학, 신학 사상을 두 가지로 비판해 놓았습니다. 희한할 정도로 일목요연합니다. 저는 대학 시절,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장학금 받은 돈으로 한 권을 사서 내리 세 번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부분들은 되도록 암기할 만큼 탐독을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율법이냐 은혜냐, 율법적으로 사느냐 은혜적으로 사느냐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고 바른 길에 설 수 있다면 어떠한 시험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 윤택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간혹 이것이 조금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떤 때는 아가페, 어떤 때는 에로스가 되는 등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왔다갔다합니다. 본문대로 말하면 믿음으로 출발했다가 그 다음엔 율법주의자가 되고 또다시 은혜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의식중에 그만 거기에 길들여집니다. 그래서 인간적이요 인본주의적이요 자기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는 망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저주요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대로 봅시다. 율법의 길이 있습니다. 행하라, 그러면 산다-율법의 길은 행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또하나는 믿음의 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봅시다. 율법의 길이 어떤 것입니까?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10절)"-율법에 속한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에 속한 자-율법에 꼭 매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행위도 의식도 생각도 매여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언제나 발발 떨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어도 참 힘들게 믿습니다. 기쁨이 없어요. 은혜가 없습니다. 그만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 정결하게 산다고 할 수 있는데도 기쁨이 없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상만큼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한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감기라도 걸리면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갔더니 감기에 걸렸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사업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십일조를 안 바쳤더니 이렇게 됐구나' 합니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채이기라도 하면 남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비웃었더니 벌을 받았다 싶고 자녀들이 잘못되면 이게 모두 부전자전이다-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도 예외가 없이 율법에 완전히 속해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합니다. 자기하고 비교하고는 '저사람 저래서 되겠나' '참 한심하다'고 비판합니다.
율법주의자의 소행입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 율법의 노예가 된 사람, 율법에 붙들린 불쌍한 심령들이 우리 가운데에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열심은 있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극성을 부리지만 감격이 없습니다. 항상 삐쩍 말라 있습니다. 겁이 나서 벌벌 떠니 살이 찔 리가 없습니다. 기도를 드려도 은혜가 없습니다. 기도하면서도 괴롭기만 합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본문대로 하면 율법은 다 지켜야 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를 지키면 그 다음에는 두 가지로 한도 끝도 없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만 갑니다. 결국엔 내가 내 율법이 됩니다. 그래서 어느만큼 봉사하다가 그보다 좀 적게 하면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낮에도 나오고 저녁에도 나오고 새벽에도 교회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도 합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금식기도를 하다가 얼마동안 못하게 되면 그 때문에 큰 사고라도 날 것처럼 걱정을 합니다. 자꾸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은 율법을 모두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11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을 다 지킨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실제로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외식에 빠집니다. 내용으로는 못 지켰어도 형식으로나마 지킨 것을 내놓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첫째 시험입니다. 겉으로는 지켜졌지만 가만히 보면 내용면에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의 가게에 가보니까 문이 닫힌 채 '주일 휴업'이라는 글씨가 크게 써붙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안 나오고 놀러갔습니다. 이 사람이 주일을 지킨 것입니까? 또 좀 심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사람은 예배를 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빚을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야 만날 수 있으니까 나왔을 뿐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하여 다 나온 게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별의별 동기가 다 있습니다. 가지가지입니다. 아무튼 형식적으로는 다 지킨 게 됩니다. 그러나 내용의 중심에서 보면 지켜진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따지면 괜찮은 편입니다. 남을 비평도 하고 내가 남보다 낫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면적으로 볼 때, 누구도 비판할 수 없고 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꾸 여기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십일조를 바친다 하면서 싸구려 박하와 채소는 바치고 귀한 것은 살짝 떼 놓고' 라며 책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숫자로는 맞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아닙니다. 몹쓸 것을 갖다바쳤습니다. 십일조로 양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하나님 앞에 잡아서 드리는데 병들어서 내버릴 것을 한 마리 바치자-분명히 숫자로는 바쳤는데 내용으로는 바친 것이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외식주의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주의에 빠지면 점점 외식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공로주의적인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다섯 가지하고 악한 일을 다섯 가지 했으므로 반반이다, 선한 일을 일곱 가지하고 악한 일을 세 가지 했으니 그 세 가지는 봐주실 것이다-공로주의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지만 잘한 것이 더 많으므로 하나님께서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큰 착각입니다. 여러분은 지난번 국회 청문회 때에 많은 것을 배웠을 줄로 압니다. 나라를 위하여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잘못한 일이 한 가지만 있으면 그 사람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참작이 됩니다마는 그 죄를 용서받지는 못합니다.
아홉 가지 선한 일을 했어도 한 가지 죄를 지었으면 죄인입니다. 율법은 다 지켜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식주의에 빠지고 자기 나름의 오산에 빠지게 됩니다. 율법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면 결국에는 절망하게 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저주 아래 놓여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여 살아가야 합니다.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율법주의자들은 하나같이 저주를 받을세라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마귀, 시험, 저주 등의 말을 많이 쓰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인 줄로 알면 거의 맞습니다. 그들에게는 은혜가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늘 억지로 끌려 다니고 공포에 떱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는 무엇입니까? 믿음에 속한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이 견해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유명한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2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바울이 성경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말씀이 이 하박국의 말씀과 로마서 4장 3절에도 인용한 바 창세기 15장 6절의 말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입니다. 바울의 신학체계는 이 두 말씀을 기점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메시지입니다. 현실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보이는대로 생각하지 않고 믿음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세계에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본다는 것이 이 말씀의 가르침입니다. 현실에는 크고 작은 환란이 많습니다마는 그것 때문에 울고불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며, 저 앞에 있는 메시야의 나라를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고, 사람으로부터 듣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듣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하나님을 보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의 반대가 '인간적으로'입니다. 인간적인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믿음,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서 해석학적으로 볼 때에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헬라어로 '호 디카이오스 에크 피스테오스 제세타이'라고 하는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의인은 믿음에서 나는 힘과 지혜와 그 마음으로 산다는 뜻이 됩니다. 주어가 '의인'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라는 말을 어디에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매우 달라집니다. 그 또 하나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산다-이렇게 둘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윤리적인 문제가 되며 후자는 존재의 문제가 됩니다. 이 문제는 신학대학교에서도 몇 시간씩 강의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에 대한 신학자들의 이론도 무수히 발표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아무튼 이 시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에 나타난 문맥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이 문맥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저주 아래 있다-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인이 될 수 있고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올시다. 그런데 의인이 문제입니다. 어떤 의인이냐-나 자신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냐,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으로'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해석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의미가 심각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두 가지 견해를 가지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믿음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 될 것입니다. 그 둘은, 율법을 인간의 자기 의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쓰고 있는 율법이라는 말은 인간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즉 율법주의적인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 해석되는 도덕적인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의 개념을 분명히 정리해봅시다. '율법'이라고 말할 때에는 어디까지나 율법적인 이야기, 율법주의자의 이야기요 '믿음'이라고 말할 때에는 오직 은혜를 중심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0장 1절로 16절에 걸쳐 나오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좀더 의미가 확실해집니다. 어느날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보니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왜 놀고 있느냐?" 하고 주인이 물었습니다.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은 자기의 포도원에서 일하게 합니다.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놀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 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각각 포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저녁에 품삯을 치를 때에 주인은 맨나중에 온 사람부터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것이 불만입니다. 마지막 1시간밖에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하루종일 일한 자기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니 말입니다. "이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애초에 약속한 게 한 데나리온이 아니냐? 너희는 너희 것이나 받아라" 하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질서를 생각하게 됩니다.
좀더 일했으므로 더 받는다- 율법주의입니다. 알고 보면 포도원에서 일을 했다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아홉 시에 들어간 것도 은혜요, 열두 시에 들어간 것도 은혜입니다. 전부 은혜의 질서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은혜로, 품삯을 주기 위하여 포도원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일했으니 더 받아야 하고 덜 일했으니 덜 받아야 한다-이렇게 따지면 다섯 시에 들어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자격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두 질서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율법이 이치에 맞는 것 같지만 그것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한편 은혜의 질서에는 늦게 온 사람 일찍 온 사람이 다 그 속에 있습니다. 더 일해도 은혜요 덜 일해도 은혜입니다.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품삯이 그대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율법은 아주 엄한 것이므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은혜를 말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13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게노메노스 휘페루 헤몬 카타라'입니다. '카타라'는 '저주'입니다. '게노메노스 카타라'-'저주 아래 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처럼 헬라어를 인용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저주를 받은 바 되사'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마는 헬라 원문에 따르면 '저주 자체가 되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 자체가 되어버렸다-십자가 사건을 율법 아래서 행해진 저주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어떻게 쳐다봅니까?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내려진 저주입니다. 단순한 고통이며 한 사람의 아픈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내려진 저주를 의미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죄값은 곧 사망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저주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 아닌 사람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또한 죄인이 의인처럼 저주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으면 이제 그 은혜로 해서 죄인이 의인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위하여 죽으신-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어 '속량'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합니다. '속량하셨으니'-'엑세고라센'-'아고라조'라고 하는 '산다'는 말에 'out of'의 의미인 '엑스'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무엇으로부터 사낸다는 의미입니다. 구출하기 위하여 값을 치르고 사냈다는 것입니다. 공짜는 믿기 어렵기에 확실하게 값을 치렀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께서 대신 치르셨습니다. 주지해야 할 것은 대신 치르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만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 의인-예수께서 대신 값을 치름으로 말미암아 본래 죄인이면서 이제 의인이 된, 바로 그 의인은 살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다 못해도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벌도 있고 저주도 있지만 용서했다는 말만을 믿고 감사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탕감(蕩減)받았습니까? 탕감 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습니까? 사랑 받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내가 갚아야 하겠다-율법주의자의 소견(所見)입니다. 자격이야 어찌되었건 용서했다면 용서한 것이고 갚아주었다면 갚아준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내가 기어이 내 의와 내 공로로 나가고자 한다면 은혜를 힘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탕자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탕자는 은혜에 속한 사람이요 탕자의 형은 율법주의자입니다.
그 둘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형은 탕자가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나는 일생동안 수고했는데 나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고 창기와 더불어 아버지 재산을 다 말아먹은 동생에게는 이렇게 잔치를 베푸는 겁니까?"-불평 불만이 큽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형에 비해서 탕자는 할말이 없습니다. 워낙 죄인입니다. 돈을 다 없애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는데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그 탕자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용서하고 잔치를 베풀 때에 떡 하니 앉아서 얻어먹습니다. 보통이 아닙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체면 생각하면 율법주의자입니다. 이런 것을 내가 어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시면 내가 오히려 더 괴롭습니다-이러면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격이야 어차피 없는 것을, 생각해서 무엇합니까? 그저 아버지의 마음이나 기쁘게 해드리면 됩니다. 아버지 마음이 곧 내 마음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쁜 마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은혜주의자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입니다. 체면 없는 사람이 아니요 의인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자신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지만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하고 받아들입니다. 아버지의 기쁜 마음에 찬물을 끼얹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그 잔치를 다 받아먹으면서 의젓하게 아들로 앉아 있습니다. 체면도 없고 뻔뻔스러운 것도 같습니다. 원래 은혜주의자들은 좀 뻔뻔스러운 데가 있긴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천당을 약속 받았다-뻔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 행위를 보아서야 어디 가당키나 합니까? 여러분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내 대신 그가 값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당당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입니다. 바로 은혜에 속한 사람입니다.
끝으로 14절의 말씀을 봅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은혜가 미치고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약속하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은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속했다고 할 때에는 오직 긍휼, 오직 은혜, 오직 사랑, 오직 축복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그 복음에 우리의 운명을 걸고 그 은혜 안에서 주님의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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