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영화롭게 하소서(요 17:1-5)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영화롭게 하소서(17: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은 모두가 21장으로, 그 중 13장에서 17장까지 무려 5장이나 되는 긴 분량이 한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입니다. 이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져 있고, 여기서 유월절 잔치를 성찬 예식으로 의미를 바꾸어서 행해졌는데 이 복음서에서는 성찬식 장면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는대로 이 복음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서 보충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에서 기록된 것은 될 수 있는한 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찬예식 바로 직전에 행해졌던 제자들의 발 씻기시는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예수님의 긴 훈계의 말씀과 오늘 본문인 기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발 씻는 행사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로써 이 세상을 마무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우선 무엇을 하겠습니까? 좋은 옷을 사겠습니까? 좋은 음식을 먹겠습니까? 또는, 보고 싶은 사람을 부르겠습니까? 결정적인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나는 무엇을 서둘러야 하는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가끔 주위에서 병으로 인해 시한부 생명임을 선고받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사람이란 어차피 다 죽을 것인데 그렇게 야단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이왕 내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보다 의미있게 보내도록 생각을 돌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마지막 시간을 기도로써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연극이다. 가장 극치에 다달았을 때에 막을 내려라"고 멋있는 말을 했습니다. 클라이막스에서 막이 내려지지 않으면 생각이 흐려지고 노망이 들어 식구들이 지겨웠을 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3세로 다소 빠르기는 하지만 그 분의 생애에서 분명히 클라이막스에서 막이 내렸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모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을 때는 주기도문만 해도 최고의 기도가 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만, 17장의 기도 내용은 먼저 예수님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고, 다음은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 기도의 총론은 1절에서 5절로,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17: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기도할 때에 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데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 팔을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보면서 이야기하듯 기도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기도 모습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는 멋있는 내용입니다. 주기도문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주님은 가르치셨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너 때문에 예수 믿지 못하겠다" 하는 손가락질을 받는 일은 없습니까? 언제나 삼가 조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기도처럼, 어떤 형편에 처하든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를 통해서 영광받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는 내 앞에 전개되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비평하면 안 됩니다. 이제는 선택할 자유가 없으므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기도는 대단히 의미깊은 기도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눈 앞에 십자가를 두고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십자가를 지겠다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위대한 기도입니다. 죽음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지금 이시간이야말로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다른 시간은 몰라도 죽는 그 시간만은 가장 사람다와야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다섯 가지 복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임종의 복입니다. 오래 살았거나 건강하게 살았다고 복이라 하지 않고, 사람답게 죽어야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죄를 짓는 현장에서 죽거나, 객사하거나, 비참한 사건으로 생이 끝난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순간에 생을 끝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놓고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죽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겠습니까? 우선 자원적인 죽음이라야 합니다. 내 의사와는 전혀 달리, 할 수 없어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창조적인 죽음이라야 합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져서 몇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야말로 죽음과 함께 몇 백 배, 몇 만 배의 열매를 가져온 가장 높은 가치의 죽음입니다. 또한, 구원적인 죽음이라야 합니다. 나도 죽고 남도 죽으면 그 죽음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죽어 희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죽음은 영광스럽고 영화로운 죽음이 됩니다. 물론 이러한 죽음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답게 잘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역사가 돌아가는 예를 귀하지만 볼 수 있습니다. 경상북도 대구 근방에 현풍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12개의 삼강문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이 마을의 한 아버지가 왜적들과 싸우다가 순국을 하자,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역시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그것을 본 어머니까지도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순국을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나라에 충성했고 아들은 효도했으며 아내는 열녀가 되었으므로 이것을 기념해서 삼강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 용감한 사람이 나라를 위해 장엄하고도 장렬하게 죽었지만 그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같은 경우가 열 두 번이나 일어나서 삼강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바른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은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어 교회가 세워지고 2천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사랑과 믿음과 소망의 종합적인 성취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역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율법과 은혜가 함께 성취되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고,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말의 의미는 십자가에서 바른 죽음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이 동시에 귀한 뜻을 이루고, 율법과 은혜가 만나는 귀한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100%의 순종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반드시 순종을 통하여야만 됩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역시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효자가 부모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경한다는 것은 그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것이 곧 그를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시면서 순종한 자의 영광을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께서는 죽기까지 복종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8)

또한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는 훌륭한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더 중요한 깊은 뜻이 있는데,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부활의 약속이 없는 죽음은 결코 영화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와 같은 글을 여러번 읽을 수 있고, 그리고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할 것 없이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으로 꿇게 하시고"(2:9-10)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라는 진실한 순종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는 서로서로, 영화롭게 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영화로울 수 있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출세하고 내가 잘 살아야 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적인 진리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이 죽음 뒤에 오는 약속된 부활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은 없으며, 희생 없는 진리는 없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잘 소화해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영생에 대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 : 2-3)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구원의 적극적 의미이며, 소극적 의미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건짐을 받아, 다음 단계인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영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일단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한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가야 비로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말은 시간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수명이 있고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병들기도 하고 썩기도 하여 어떤 제한을 받지만, 영생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속박이나 제한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영생이란 세상의 시간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이므로 사람들에게는 이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말하는 시간은 양적이며, 육체에 속한 시간이며, 지구에 속한 시간입니다만, 영원은 질적이며 하나님께 속한 시간으로 구속이나 제한을 받지 않는 시간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곧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심을 알고, 공의의 하나님을 알며, 예수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믿으면 곧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므로, 앞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영생은 벌써 하나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 구원의 적극적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문제는 안다는 사실입니다. 안다는 것은 인격적 행복입니다. 사람은 먹어서 기쁠 수도 있고 손으로 만져서 기쁠 수도 있지만, 정말 기쁜 것은 아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신비하고 오묘한 진리인 하나님의 세계와 그 사랑을 알 때에 행복의 극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한 쪽에서는 생명을 다해 사랑하는데 상대방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믿는 바를 알아야 사랑 안에 살며 하나님 안에 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살면, 이 세상에 살면서도 질적으로 다른 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도 영생이지만, 오늘 현재에 하나님과 나와 바른 관계에서 살면 그 자체도 영생입니다.

이러한 삶은 점점 늙어가고 썩어 가는 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기 위해 환희와 기쁨 속에서 살며, 신비하고 오묘한 뜻을 깨달으며 사는 것이므로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안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야다'입니다. 구약에서 보면, 이 야다라는 말이 재미있게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에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와 동침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구절이 있는데, 동침을 우리말로는 "같이 잤다"라고 표현하지만 히브리 말로는 "야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대로 번역하면, "아담이 이브를 알아서 아들을 낳았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신약에서도 요셉이 마리아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니라"(1:25)는 구절이 있는데 영어 성경에서 동침을 "안다"(know)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안다"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알아, 아이를 낳는 그만큼 아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완전히 체험적인 것입니다. 둘이 한 몸이 되어서 한 생명을 이루는 신비로운 관계를, 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앎은 듣거나 보아서 아는 것이 아니며, 책으로 인해서 이성적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체험적으로 생명이 생산되는 의미에서의 앎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내 생명이 완전히 변하여 내 속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인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연합되는 생명으로, 곧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기쁨에 넘치며 감사하게 되고 감격하여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게 됩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도 문제가 아닙니다. 고생하고 병들며 실패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과서일진대, 내게 있어지는 구체적인 모든 사건이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나의 마지막 기도가 되어 영생에 이르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