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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마태복음 6장 27절~34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17세기 프랑스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요 종교사상가인 파스칼(Pascal', Blaise)은 저 유명한 인간학적 신학적 명상록「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했습니다. 흔히 약한 것, 변하기 잘하는 것을 빗대어 말할 때에 잘 인용되는 것이 '갈대'입니다. 바람에 잘 흔들리고 쉽사리 부러지는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약하기가 저러한 갈대와도 같다 해서 그렇게 빗대어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역시 생각할 줄 앎으로써 사람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정지된 인간을 의학적으로 '식물인간'이라고도 말합니다. 식물인간도 인간이랄 수 있느냐-이런 문제를 두고 요새는 심심찮게 논란도 일어납니다마는, 아무튼 인간이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생각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특권이요 자랑입니다. 생각이 있음으로 지식이 주어지고 지혜가 주어지고 확신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집니다. 힘이 주어집니다. 생각이 근거가 되어 새로운 능력을 생산하게 됩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마는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함으로써 행복할 수도 있고 기쁠 수도 있습니다. 행복도 기쁨도 그실 생각에 기초합니다. 생각에서 오는 것이 아닌 행복과 기쁨은 동물적인 것입니다. 본능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령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 음식이 입에 달다든가 배부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음식을 장만하느라고 수고한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고 고마워한다든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이웃을 생각하고 마음 아파한다든지, 그옛날 배고프게 살던 때를 상기한다든지 하게 되어 밥풀 하나라도 허투루 버려서는 안되겠다, 맛이 있다 없다 하고 투정을 부려서도 안되겠다-이런 각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깊이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면서 사람은 비로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음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새삼 깨달으면서 한 그릇의 식사를 하면서도 엄청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음식 한끼에 눈물로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은 행복도 감사도 기쁨도 감격도 생각을 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저렇듯 건전한 방향으로만 간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습니까마는 반드시 그렇지가 못한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나쁜 방향으로 가고 보면 슬픔이 되고 불평이 되고 원망이 되고 걱정이 되고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나보다 잘먹는 사람만 생각하여 입맛을 잃게 됩니다. 좋지 않은 일만 떠올라 원망과 불평의 노예가 됩니다. 생각 속에 불행이 있고 불평이 있고 탄식이 있고 슬픔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도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하되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어디서부터 보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어느 만큼 생각하느냐에 문제는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는 교양서적 가운데 적극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을 권장하는 책들이 있지 않습니까? 소극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라, 생각의 방향이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인 방향이어야 하며 밝아야 한다, 허무주의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라, 불가능한 면으로 생각하지 말고 가능한 면으로 생각하라-이런 것입니다. 생각의 방향이 잘못되면 함정에 빠집니다. 자꾸 그 쪽으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인간의 생각은 전체적인 것일 수 없고 부분적입니다. 전체를 한번에 완전하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아무리 크고 머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일지라도 전체를 다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불 먼저 이쪽을 생각한 뒤에 저쪽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차려진 음식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없습니다. 먼저 밥을 먹고, 그 다음에 반찬을 먹고, 그리고 나서 물을 먹고, 이렇게 차례차례 먹어야 합니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모두 섞이게 되지마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전체적이지 못합니다. 종합적이지 못합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생각은 분석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인적이니 인격적이니 하는 말은 해보는 소리일 뿐 그렇게 되기란 사실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누군가를 만난다고 합시다. 흔히 우리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한눈에 그를 살핀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다리부터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머리부터 봅니다. 어떤 사람은 옷부터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구두부터 봅니다. 한눈에 보는 것 같아도 실상은 분석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게 말입니다. 이와 같이 사물을 보는 방향도 사람에 따라 각양입니다. 그렇다고도 우리는 그 가운데서 어디부터 보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문제는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을 볼 때에 어디부터 보는 것이 바람직하겠습니까? 물론 얼굴입니다. 그런데 간혹 얼굴은 제쳐놓고 다리부터 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을 볼 때에 다리부터 보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자세입니다. 이렇듯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긍정적 창조적 적극적인 면에서 사물을 보고 해결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론이 달라집니다. 무엇을 생각하느냐-가장 중요한 것은 물질이 먼저냐 인격이 먼저냐입니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나 유물론자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물질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번 보십시오.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될 것인가 저렇게 될 것인가, 장마가 질 것인가 가뭄이 들것인가, 풍년이 들것인가 흉년이 들것인가를 두고 걱정합니다. 아무리 기상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예측해본들 내년에 풍년이 들지 흉년이 들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자연의 근본은 인격이요 하나님이시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우리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든 날이 개든, 풍년이 들건 흉년이 들건 언제든지 먹을 것을 주시리라고 인격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합니다. 물질과 자연과 우연을 먼저 생각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체가 인격이기 때문에 인격과 인격이 만남으로써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만 보고, 원리도 질서도 부정하며, 모든 것이 법칙 없이 되는대로 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일입니다. 걱정이 떠날 수 없습니다. 요컨대 무엇을 생각하느냐, 누구를 생각하느냐입니다.
무엇부터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priority가 문제입니다. 크고 작고, 중요하고 시시한 갖가지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시한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소한 일만을 생각하느라고 정작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흔히 위대한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큰 문제만을 생각하느라고 사소하고 시시한 문제들은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뉴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난로가에 앉아서 책을 읽던 뉴턴이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부르더니 "난로불이 너무 뜨거우니 불 좀 낮추라"고 말합니다. 그 난로는 장작을 사용해서 불을 지피는 것이므로 당장 줄이기는 힘듭니다. 요즘의 전깃불이나 가스불처럼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어떻게 낮춥니까? 하녀는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시면 되지 않겠어요?" 불을 낮추는 것과 의자를 뒤로 물리는 것, 어느 편이 더 쉽겠습니까? 지금 뉴턴은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느라고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까? 무엇을 집중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대개 근심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시시한 것부터 생각하는 반면 걱정근심 없이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중요한 것부터 생각합니다. 무엇부터 생각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정도의 문제입니다. 어느 만큼 생각하느냐 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생각이나 걱정도 정도껏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걱정을 하느라고 잠을 못 이룬다던가 일에 지장을 가져온다던가 입맛을 잃는다던가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걱정 때문에 모든 일에 지장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입니다. 걱정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할 것은 아닙니다. 걱정도 하루 이틀이지 사나흘, 심지어는 한달 내내 잠을 못 이루고 고심한다면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미 근심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입니다. 내가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근심이 나를 붙잡고 것입니다. 함정에 빠져버린 사람입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걱정을 초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을 하되 한계를 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가끔 무슨 일인가게 매여 걱정을 하는 신도들을 봅니다. 몇 날 며칠을 이렇게 저렇게 고민하고 지냅니다. "그렇게 무한정 걱정만 하지 마시고, 시간을 정해보십시오. 어느 달 어느 날까지만 고민하기로 하고 그 다음부터는 생각하지 말아보시지요." 이렇게 충고하면 으레 하는 대답이 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걸요." 한계를 넘은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내가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안될 일입니다.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로만 걱정할 것입니다. 결국 '염려'의 문제는 사랑과 믿음의 문제가 됩니다.
'염려'라는 것은 생각의 일종입니다. 생각이되 잘못된 생각입니다.
염려란 어떤 생각에 잘못 집착해서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게 된 병리적 심리상태라고 철학적으로 정의한 사람이 있습니다.
잘못된 한 가지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물고 그 방향으로만 발전하고, 거기서 출애굽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Get out을 하지 못합니다. 일단 중단하고 거기서 빠져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마냥 끌려들어 가기만 합니다. 나와야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염려'는 헬라어로 '메림나'입니다. 이 말은 본래 '갈라진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일본어로는 '심빠이(心配)'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마음이 갈라진다는 뜻입니다. '갈라진 마음', 이것이 '염려'입니다.
이천 년 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 파피루스에도 '염려'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파피루스는 한 여인이 전쟁에 나간 남편에게 쓴 편지로, 그 내용 가운데 "나는 당신의 신상을 염려한 나머지 밤이나 낮이나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멀리 가 있는 남편을 염려하는 여인의 마음이 사뭇 애절합니다마는 생각해보십시오.
남편을 염려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한다면 그것이 남편이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걱정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건강도 지킬 수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병리적인 심리상태일 뿐입니다. 진정 남편을 사랑한다면 집안 일에나 충실할 것입니다.
대체로 보면 '염려'는 두 가지 현상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염려의 무게에서입니다. 큰 염려를 하지 않음으로 작은 염려에 붙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네 부모님들이 평소 자녀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많이 하는 소리가 '공부해라'입니다. 물론 공부가 큰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만일 아이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시다. 그 때는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건강만 해다오."라고 말합니다. 공부가 중요하다고는 하나 건강에야 비기겠습니까? 건강이 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 아이들의 인간성입니다. 모름지기 인간성을 염려해야 합니다. 우리의 아이가 어떤 인간으로 자랄 것인가, 도덕성과 인간성과 종교성을 염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큰 염려는 없고 작은 염려, 공부 하나만을 놓고 염려해왔습니다. 건강이나 인간성에 비하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공부만을 염려했습니다. 작은 일 때문에 중요한 것을 걱정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하는데 밖에서 "불이야"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도 부부싸움을 계속하겠습니까? 일단 싸움을 그치고 합심하여 불을 끄게 됩니다. 큰 걱정, 정말로 해야 할 걱정을 하게 되면 작은 걱정은 하지 않게 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 걱정을 한번 글로 옮겨보십시오. 가령 '나는 지금 그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 때문에 잠을 못 잔다'라고 썼다 합시다. 그것을 보면서 그보다 더 큰 걱정을 한번 해보십시오. 걱정했던 일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질 것입니다. 물질이, 사업이 중요하다지만 건강보다 중요하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을지, 그것을 걱정할 것입니다.
임종을 앞둔 한 장로님이 숨이 차서 앉지도 못하고 주위의 부축을 받으면서 엉거주춤 몸을 움직여 제 손을 붙잡더니 말씀하더군요. "처음 병석에 누울 때는 숨이 어떻게나 차던지 제 고통에만 마음이 쓰였습니다. 그러면서 누워 있자니 점차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이들은 어찌될까, 그것이 염려더군요. 하던 사업도… 하긴 사업은 별것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들이나 아내도 산 사람들이니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리 걱정되지 않아집디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주님의 얼굴을 어떻게 뵈올지가 걱정이 됩니다. 천국에는 갈 수 있을지, 그것이 염려가 됩니다." 평소 예수 잘 믿는다고 믿었는데 어딘지 미진한 구석이 남아 있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분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당을 다시 지으려고 할 때, 헌금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자신이 나서서 자꾸 연기하던 일이 맘에 걸린다고 말씀하더군요. 사실, 그 장로님은 돈이 많은 분으로, 교인들은 은근히 그분이 예배당 짓는 데에 돈 많이 내기를 바랐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그 시각에 그 때의 일이 새삼스레 떠올라 하나님께 죄송스럽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조금만 더 허락해주신다면 지금이라도 전심전력해서 예배당을 지을 것이고, 그런 다음에 하나님을 뵈었으면 좋겠다고 합디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일은 어떤 것입니까? 내 영혼, 내 구원의 문제입니다. 장치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얼굴로 그분을 대할 수 있을지를 걱정할 것입니다. 돈 몇푼 잃어버렸다고 잠을 못 이룰 것은 없습니다.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들었다고 애를 끓일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하십시다. 사소한 것이 아니라 큰 것을 걱정해보십시다. 큰 걱정이 작은 걱정을 해결하는 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Action이 없는 사람은 염려가 많습니다. 행동이 없는 사람은 말과 생각만 합니다. 생각은 생각을 낳습니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에 심신은 지치게 됩니다. 그리고 지친 까닭에 생각은 더욱 많아만 집니다. 여러분, 잠시만 생각을 멈추어보십시다. 벌떡 일어나서 행동을 해보십시오. 떨치고 일어나 움직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줄매를 맞아본 적이 있습니까? 군대와 같이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 연대기합의 방법으로 이 줄매를 많이 사용합니다. 사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앞사람부터 차례로 매를 때립니다. 아마도 이 매를 맞아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매를 맞는 사람보다 기다리는 뒷사람이 더 아프고 조마조마합니다. 매맞을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제일 아픈 법입니다. 정작 맞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그 순간은 못 견디게 긴장됩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라는 말도 있듯이 매를 맞는 사람보다는 맞는 것을 보는 사람이 더 아픈 법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행동으로 옮기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그냥 앉아 벌벌 떨면서 된다 안 된다, 생각만 하고 시간을 보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쁜 생각만 자꾸 듭니다.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염려의 노예가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실천하십시오. 생각을 행동으로 옮겨보십시오.
혹시 미워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를 위하여 봉사를 한번 해보십시오.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는 옛말도 있지 않습니까?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위하여 봉사를 하다보면 미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래 전, 친구 하나가 제게 돈을 꿔간 적이 있습니다. 사흘만 쓰고 갚겠다고 약속하더니 일년이 넘도록 갚지를 못합니다. 차츰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저는 결국 돈도 잃고 친구도 잃은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풍문에 그 친구의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소문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그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쌀 말을 준비하고 얼마간의 돈도 가지고 가서 오늘로 우리가 돈 관계했던 그 일은 잊어버리자고 말했습니다. 받는 대신에 주어버린 것이지요. 그러고 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습디다. 그 동안 꿔준 돈을 놓고 '받을 수 있을까 없을까, 그 친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하고 서운하게 생각했던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행동이 중요합니다.
행동은 걱정을 해결하는 또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염려는 쓸데없고 소용없습니다. 염려한다고 안될 일이 되는 법 없습니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27절)"-여기서 '키'란 육신의 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도 의미합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멀리 떠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함으로 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좀처럼 여기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염려는 불확실성에 의지하려는 마음입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확실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결혼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혼할 때, 조건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건강을 듭니다. 그래서 결혼 전에 건강진단서도 교환하고, 만나서 약한지 건강한지도 살펴봅니다 마는 아주 튼튼한 운동선수라고 해도 반드시 오래 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누가 장담할 것입니까? 건강한 사람도 여차하면 죽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요즘과 같이 차사고가 많은 때에는 더더욱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간혹 다른 교회로부터 부흥회에 와서 설교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물론 시간이 허락하면 갑니다만 사정이 있어 못 갈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요청이 들어왔는데 제 계획이 빡빡해서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못 가겠다고 거절했더니 일년 뒤에라도 와서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에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일년 뒤의 일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더니 그 대답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만일 일년 후에도 살아 계시다면 그 때는 강연을 꼭 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 때가서 보자고 대답은 했으나 역시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일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에도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5)"한 사도 야고보의 말씀처럼 주님의 뜻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당초부터 모든 것이 원천적으로 불확실했습니다. 따라서 확실하지 못한 것을 놓고 불평하는 것은 쓸데없습니다. 우리는 확실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걱정을 하지만 처음부터 확실한 것은 전혀 없었으므로 그런 염려는 불필요합니다.
그리고 염려에는 손해가 많습니다. 염려만으로 그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염려함으로 파생되는 결과가 있어서 탈입니다. 파생결과로 오는 불이익이 있습니다. 염려가 돈 안 드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그실 엄청나게 돈이 듭니다. 손해가 많습니다. 염려하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생각만을 하다보면 자연히 병이 들게 됩니다. 염려를 함으로 의심도 품게 됩니다. 자꾸 의심을 함으로 시험에 빠집니다. 이상한 꿈까지 꾸게 됩니다. 예삿일이 아니지요.
얼마전, 의부증 걸린 부인이 이상한 꿈을 꾸고는 무슨 계시라도 담긴 듯이 이리저리 꿰어 맞추면서 생떼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수록, 이상한 눈으로 볼수록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듯 염려가 깊어지면 결국은 큰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의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염려가 의심으로 발전하고, 의심함으로 시험에 빠집니다. 이것이 확산되어 끝내 불신과 절망에 빠집니다.
위장병의 80퍼센트가 신경성이라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흔히 위를 가리켜서 제2의 두뇌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염려가 많은 사람은 아무리 맛나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시키지 못합니다. 염려가 신경을 죄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려함으로 병 얻어 죽는 것은 자살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염려함으로 병이 악화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치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살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염려를 다스리지 못해서,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하나님 앞에 선다면 얼마나 죄송스럽겠습니까? 우리는 늘 병균과 싸우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병균에 저항하면서 몸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염려함으로 내 몸이 약해졌습니다. 그래서 병균이 나를 덮쳐버립니다. 갖가지 병에 걸립니다. 결국 소심해지고 무능해지고 어리석어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늘 마음의 즐거움을 잃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잠 17:22)"-마음의 즐거움이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근본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웃어야 한다는 과제만이 남았습니다. 우리는 늘 웃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에 걸릴까봐 걱정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될까봐 걱정하고, 죽을까봐 걱정하다보면 그나마의 남은 생도 제대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각자에게 맡겨진 과제대로 늘 감사하고 찬송해야 합니다. 의학이 발달하고, 건강에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는 새로운 의학용어를 접하게 됩니다. 요사이 부쩍 자주 듣게 되는 용어로는 '엔도르핀'이라는 것과 'T-임파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물질로서 웃는 것에 정비례하여 몸 안에서 자생된다고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우리의 몸을 지켜주는 양약인 것입니다.
성경은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라고 말씀합니다. 심령의 근심이 병의 원인이 된다고 함입니다. 인간의 모든 건강은 척추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척추가 피를 생산하고, 우리 신체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만약 이 뼈가 말라버린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우리의 몸은 결딴나고 맙니다. '심령의 근심'이 뼈를 마르게 합니다. 건강을 빼앗아갑니다. 정신적인 건강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까지도 빼앗아갑니다. 근심함으로 모든 것이 다 잘못됩니다.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은 "염려하지 말라(34절)"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무엇인가에 대하여 염려하고 있습니까? 당장 접어둘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염려함으로써 불 신앙에 빠지게 된다고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함으로써 하나님도 안보이게 되고, 그 동안 받은 크신 사랑도 망각하게 됩니다. 부인하게 됩니다. 염려에 싸여 있으면 나는 전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끼고, 내 주위에 진정으로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이렇듯 염려함으로 불 신앙에 빠지게 되고, 생명도 잃게 됩니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피는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거두시는데 하물며 너희 인간을 소홀히 하시겠냐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잘못된 생각은 근심을 가져다주고, 바른 생각은 믿음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에 근심걱정이 있거든 하늘의 새를 보십시오. 들의 백합을 보십시오. 온 우주의 이치를 보십시오.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우리에게 내릴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의 근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생각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바른 생각이 들 때에 감사와 찬송이 우러나게 됩니다.
"염려하지 말라"-생각을 바른 방향으로 재조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않겠다고 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염려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바른 생각만을 해야 합니다. 좋은 방향으로 자꾸 생각을 하다보면 저절로 나쁜 생각, 염려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무한대의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철저하고 정확한 경륜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는 우연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나의 고귀한 생명을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30절)"-한 마리의 새, 한 포기의 들꽃까지도 돌아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너희 인간들의 소중한 생명을 돌아보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우리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우리의 고귀한 생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 믿음만이 근심과 염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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