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예배할 때(요한복음 4장 20절~44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예배할 때(요한복음 42044)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 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 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 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더이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 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 이 귀한 말씀을 통하여 예배의 참뜻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우리는 주일날뿐만 아니라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 있는 생활, 예배 있는 인격이 귀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배에 대하여 깊은 진리를 간단하게 한 말씀으로 정의해주십니다. 예배란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라고. 이것은 종합적인 인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고, 어떤 사람은 가슴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그대로 순종하겠다고만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억지로라도 좋고 기뻐서라도 좋고 몰라서라도 좋고…… 그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과 계율을 곧이곧대로 따라서 행하겠다는 의지적 신앙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이렇게들 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만남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느낌만 가지고도, 가슴만 가지고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행동으로 만나야 하지만 행동만 가지고도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지()()()3요소가 다 종합된,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영계의 것과 속계의 것이 두루 종합된 만남을 의미합니다. 인격의 만남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대화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불평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마는, 대화가 꼭 필요한 것입니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 좋고, 서로 마주보는 것만으로 좋습니다. 이렇듯 대화는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기에 지극히 신비롭고, 지극히 오묘합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는 아기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눈이 마주칩니다. 아기는 좋아라 하고 방실거립니다. 만남이라는 것이 이렇게 신비로운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어머니와 아기의 눈이 마주칠 패의 행복감---이것이면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머니가 들여다보면 방실거리던 아기가 다른 사람이 들여다보기라도 하면 금세 웃기를 멈춥니다. 심지어는 울기까지 합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좋아서 "얘가 엄마를 알아보네"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지식이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아는 것입니까? 어머니의 나이라도 아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오직 한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린아이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내가 저분과 만난다, 저분이 나를 사랑한다, 저분을 만나면 내가 편안하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 걱정이 없다 --- 이것이 아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옆에 있으면, 눈에 보이면 웃다가도 안보이면 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만남의 관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엄마'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닐 때가 행복한 때입니다. 그 아이들이 다 커서 밖으로 돌기 시작해보십시오. 만나기가 힘듭니다. 얼굴 보기가 힘듭니다. 어머니들, 자녀들이 '엄마' '엄마' 하고 자꾸 따라다니니까 귀찮다고도 합니다마는, 그 아이들이 좀 커보십시오.

하루종일 가야 엄마 소리 한번 듣기 힘듭니다. 그러다가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몇 년에 한번 '어머니'하는 소리를 들을까말까 합니다. 매우 섭섭하고 서글퍼집니다. 만남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듯 중요합니다. 지속적인 만남으로 정신이 통하고 사랑이 통하고 혼이 통하고 신뢰가 통하고 행복이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모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찾아오시고 만나주시는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응답하는 이 행위가 예배인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에 대하여 오해가 많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예배라고 착각을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것을, 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예배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그 역사를 우리가 깨닫고 응답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정초가 되면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고향을 찾습니다. 그런 때에 아이들보고 무슨 말을 합니까? "할아버지가 편안히 계신지 뵈러 가자" 합니까, 아니면 "세뱃돈 얻으러 가자" 합니까?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세배하러 가는 사람의 마음이 이래서는 안됩니다.

세배는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것이 아니요, 할아버지께 무엇을 얻으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분에게 우리를 보여드리려고 가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늘 사랑하셨기에 저는 이렇게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손자가 열심히 공부했지만 불행하게도 시험에 낙방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를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께 어린 손자손녀를 보여드리는 것이 예절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예절입니다. 예배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 -- 이것은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가페적인 크신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영접하고, 그 말씀에 응답합니다. 이것이 경배요 예배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고자 하는 인간적인 행위를 예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바르지 못한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무엇을 달라고 조를까' 궁리하며 찾아올 때마다 청구서를 가지고 오는데,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을 때마다 아쉬운 사정을 한아름 가지고 와서 몸부림치고 기도하지만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찬송가를 신학적으로 따져보면 예배드릴 때에 부르는 찬송과 보통 기도회에서 부르는 찬송이 다르다는 짓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찬송가와 복음성가는 같지 않습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성가는 전부가 달라는 내용입니다. 복을 주시옵소서, 지혜를 주시옵소서, 넘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전부가 달라는 것뿐입니다. 예배적이지 못합니다. 간구는 예배가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림으로 무엇인가 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보상을 받으려는, 복을 받으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축복을 받고자 공로를 세우려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이런 것이 예배일 수는 없습니다. 이방사람들은 기도를 길게 해야 복을 받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기도를 오래 했다고 하는 공로를 인정받음으로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리가 커야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댑니다. 목이 다 쉬도록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지 합니다만, 그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목쉰 소리를 좋아하신 답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함으로 하나님께 보상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배고픈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저런 일로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좀더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뵈어야겠어서 금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조금 삐끗함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이렇게 한끼를 굶는데 하나님께서 내 소원을 안 들어주실 수 있겠어, 한끼를 굶고 나면 하나님께서도 별 수 없이 들어주실 게야, 내가 많은 날 동안 기도하고 고행을 쌓고 희생을 하고 수고를 했으니 이 정도야 들어주시겠지 --- 이처럼 어긋난 오만을 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착각인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이렇듯 거짓된 공로는 예배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공로는 예배가 아닙니다. 공로를 세우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는 헌금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 앞에 뇌물을 바침으로 복 받을 수 있다고, 혹은 공로를 통해서, 고행을 통해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음으로 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이방종교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자기 본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정성껏 음식을 만든다고 합시다. 나름대로 요리강습에도 다녀보고 갖가지 요리 책도 참조하여 지지고 볶고 음식을 만들어서 보기 좋게 담아냅니다. 그런데 남편은 시답잖아합니다. 자기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습니다. 못마땅해진 아내는 일껏 정성 들여 만들었는데 왜 맛있게 먹어주지를 못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만, 실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자기 본위적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잘먹게 하려고 했다면 남편이 어려서부터 무엇을 즐겨 먹었는지, 남편의 입맛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졌는지를 파악하고 있었어야 합니다. 자기본위가 아니라 상대방본위로, 그의 입맛에 따라서 음식을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처(良妻)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본위적으로 내 입맛에 좋은 것만을 찾아서 드리는 것은 안될 일입니다.

심방 갈 때면 종종 겪는 일입니다. 가정을 방문해보면 대접한답시고 음식을 만들어 내오는데 정작 제가 먹을만한 음식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대접입니까? 모여서 자기네끼리 잔치하고는 저는 구경하는 것이지요. 자기본위라고 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한다면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입맛'을 생각해야지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코 자기본위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한번 보십시오. 특별히 이방종교의 제사를 한번 보십시다. 자기네가 좋아하는 음식을 잔뜩 차려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귀신이 와서 그것을 먹고 가기나 하나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랍시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잔뜩 차려놓습니다. 간혹 술 좋아하던 분에게는 술을, 담배 좋아하던 분에게는 담배를 올리기도 합니다마는, 대체로 보면 자기본위입니다. 사실 이방종교란 특별히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자기 본위적으로 자기 욕망대로 하나의 대상을 의인화합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분도 좋아할 것이라고, 내 입맛에 맞은 것은 그분 입맛에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음식 그득하게 차려놓고는 자기본위로 섬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된 일이지요.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물이나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憊)하였느니라(1:1114)." 그렇습니다. 제사 많이 드리고 아무리 왔다 갔다 하며 떠들고 해봐야, 그것은 하나님께 무거운 짐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빠진 형식적 예배를 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 하실까. 내 허물을 인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 :6-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당신과 함께 행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하는 자로서 마땅히 성경을 거듭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아바드''히스타하바'가 그것입니다. '아바드''섬긴다'라는 의미요, '히스타하바''꿇어 엎드린다'라는 의미입니다. '히스타하바''발에 입을 맞춘다, 하나님께 엎드려 절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히스타하바'를 헬라어로는 '프로바스퀴네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worship'가 됩니다. 이것은 '엎드려 섬긴다, 경배하며 섬긴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배'라고 옮겨놓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로서 무엇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행위가 예배인 것입니다. 물론 답답한 사정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 구하고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순종의 약속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하고 순종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자세로 귀하게 여기는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기도, 헌금, 찬송이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내용으로 드려질 때에 이것을 예배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예배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을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가인의 동기가 좋지 않았는지, 가인이 땅의 소산으로 바친 제물을 하나님께서 열납 하지 않으십니다. 반면에 아벨이 정성을 들여 바친 양의 첫 새끼는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벨이 무슨 복을 바라서 제물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사해 주십사 해서 제사를 올린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1년 동안 많은 곡식과 가축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제사라고 하는 의식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가느라면 번번이 재단을 쌓고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돌로 제단을 쌓아놓고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복을 바라서 제사를 올렸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진실하게 응답을 할뿐만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삼을 땅을 주리라, 아들을 주리라' 약속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은 감사의 마음으로 제단을 쌓고 예를 올렸습니다(창세기 12, 1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멀리 나갔다가 무사히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보상심리에서 나온 예배가 아닙니다. 무엇을 받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복을 주실 때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제사가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받아냅니다. 이 사실을 안 형의 분노를 피하여 집을 떠나 하란으로 향합니다. 그 여정을 통하여 야곱은 숱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야곱이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잠을 잘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28 : 15)" ---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겠다는 귀한 계시의 말씀입니다. 혼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늘 그와 함께 하셨다고 하십니다. 앞으로도 함께 하시며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계시를 받은 야곱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노숙했던 바로 그 자리에 베개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다.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약속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응답이었던 것입니다. 예배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모세에 이르러서도 보십시오. 너무도 많은 제사와 그 규제가 있습니다(레위기 1-7). 번제, 소제(素祭),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 --- 이것이 모두 예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예배는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진실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보호에 대하여 믿음과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하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너무 많은 간구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기도는 예배답지 않습니다. 예배의 성격에 맞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라면 기도회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의 시간에서만큼은 안될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옛날 유대의 제사를 보십시오. 양이나 소, 비둘기 같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물질을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물질에 담긴 뜻입니다. 진실과 공의로운 마음을 물질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사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음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비단 물질이 아닙니다. 진실과 정직함입니다. 우리의 진실 된 마음을 드리는 것보다 더 그 인격을 기쁘시게 할 것은 없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래 서 시편 5012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드린다고 한들 그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로서 받은 바를 다시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굉장한 것을 드렸노라 생각하지만, 천하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과자를 하나 줍니다. 손에 들고 먹다가 어머니가 '엄마 좀 줘봐' 하고 입을 벌리면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는 침 묻은 과자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줍니다. 그 보잘것없는 것을 받아먹고 좋아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 과자는 내가 준 것입니다. 게다가 그 과자에는 침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맞으니까요. 비록 이것이 내가 준 것이지만, 이제 처음으로 저도 내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나마 주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드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것임이로다." 그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50:1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제물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강하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제물을 바치는 우리의 마음에만 있습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4, 15)"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마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진실된 마음이 입술로 나와서 찬양이 되고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고, 나아가 헌금이 되고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또 다른 선한 약속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하면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여인은 도덕적으로 그다지 깨끗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마는, 생각만은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제게 복을 주세요, 남편을 주세요, 물질을 주세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알아본 순간, 그녀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고,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주제가 그렇게 고상했습니다. '바른 예배를 드리고 살아야 하겠는데 어디서 드려야 옳은 것입니까, 어디서 드려야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디서 드려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까?' 당시 유대사람들은 예배를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사마리아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복잡한 이야기가 있습니다마는, 어쨌든 이렇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대답을 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 장소를 묻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시간으로 대답하십니다. 얼핏보기에 동문서답 같습니다.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배할 곳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바로 그 순간이 예배할 때요, 바로 그 자리가 예배할 장소인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잠언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그 동안의 예배는 의식으로 한 것이요, 상징적으로 한 것이요, 예표로 한 것이요, 그림자로 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예배하는 이 시간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요 본질적인 예배요 온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Here and now,' 바로 여기서 지금 예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심입니다. 그리심산이면 어떻고 예루살렘이면 어떠냐, 이스라엘이면 어떻고 한국이면 어떠냐 하심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면 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그 자세가 문제요 그 내용이 문제입니다. 형식이 문제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신령(神靈)이라고 하는 말은 물질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기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할 때이니 지금으로부터 한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도할 때에 의자에 앉아서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당동교회에서 목회 할 때에 예배당에 의자를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도들이 성경에 분명히 무릎을 꿇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의자에 버티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느냐고 반대를 하더군요. 열심히 설득하다가 결국은 예배실의 반만 의자를 놓고, 앞에는 자리를 깔아서 신도들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도들이 점차 의자로 옮겨 앉아서 앞자리만 휑하니 비더군요. 결국 나중에는 의자를 다 놓게 되었지만, 어쨌든 의자를 놓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릎을 꿇고 하든지, 의자에 앉아서 하든지, 서서 하든지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문제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에 따라서 형식도 이루어지니까요.

저는 예배드리는 시간에 팔짱끼고 앉아 있는 신도들이 가장 보기 안 좋습니다. 팔짱끼는 것은 body language의 하나로, 좋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가령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쪽이 팔짱을 끼었다고 해봅시다. 그것은 듣고 싶지 않으니 가라는 소리가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팔짱을 끼고 앉았대서야 말이 됩니까? 저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희 신도들에게 아주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로 찬송가 1장을 다같이 일어나서 부르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권한 일도 광고한 일도 없는데, 그 찬송가를 부를 때면 여러분 거의가 두 손을 마주잡고 경건한 자세로 임합니다. 손을 모으고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부르시는 것을 보느라면 '진실된 마음이 저렇듯 나타나는 것이지' 싶습니다. 가령 '만복의 근원 하나님'을 뒷짐지고 부른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안될 일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따라서 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경건하기에 손이 절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스처라는 것이 이렇듯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별스럽게 이래야 한다느니 저래야 한다느니 물을 것 없습니다.

다시 한번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23)" - 예배는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이 비물질적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입니다. 그리고 '진정'이라는 말은 거짓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거짓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거짓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인격대 인격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감사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예배는 우리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바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에 우리의 기쁨이 있고, 우리를 향한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배가 있는 생활, 예배가 있는 장소, 예배가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주님을 만나는 그 현장에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